형제간의 불화와 화목
잠언 18:19,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지혜자는 혈육간의 불화는 쉽게 풀리지 아니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친구나 직장 동료의 경우에는 쉽게 다투기도 하지만 풀리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혈육간의 불화와 다툼은 해소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솔로몬 자신이 벌써 배다른 형제들과의 갈등에서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왕좌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던 넷째 형 아도니야와의 관계가 끝내 해소되지 못하고 아도니야의 어리석은 요청으로 인하여 분노가 폭발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아도니야를 죽이라고 시위대장에게 명령을 내려 형 아도니야를 칼로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아무리 형제라도 다시 용서하기가 힘이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왕조를 열었던 이성계의 아들들 간에 이러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배다른 아들들 둘을 죽이고 후에는 자기와 경쟁하는 태조의 넷째 아들 형과 다시 왕권을 놓고 싸워 그를 죽입니다. 그런 후 이방인은 자기 형 정종이 왕위를 내려놓자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태종 이방원은 수많은 고려의 신하들을 죽일 뿐 아니라 자기 형제 세 명이나 죽이면서까지 왕위를 차지하는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한 아버지의 핏줄을 타고 태어난 형제라도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도 무섭게 경쟁하며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 인간의 기질입니다.
그래서 형제간에 갈등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 사이에도 이러한 다툼과 갈등이 있었지 않습니까? 열한째 형제 요셉이 열일곱살 때에 꿈을 꾸고 꿈자랑을 하니까 형들이 그 꿈 때문에 질투가 나서 결국 그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까지 했다가 그나마 마음을 돌려 먼 이국에 종으로 팔아넘기는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열일곱살짜리 동생이 꿈을 꾼 것을 가지고 자랑했다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죽일 일이겠습니까? 형들이 목축하면서 실수한 것 아버지께 고자질한 것이 무엇이 그렇게 죽일 죄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형제들은 그런 철모르는 동생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죽이려고도 하고 먼 나라로 노예로 팔아버리는 악행까지 저지릅니다.
이삭의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 간의 갈등과 원한도 성경에 나타난 형제간의 불화의 대표적인 예이기도 합니다. 그 두 사람은 뱃속에서부터 서로 경쟁하였고 장자권을 얻으려는 야곱의 욕심 때문에 늘 긴장 가운데 있었습니다. 결국 시력을 잃어버린 아버지에게 형이라고 속이고 축복 기도의 은혜를 가로챈 일로 말미암아 돌이킬 수 없는 형의 분노와 미움을 사버린 동생 야곱은 아버지와 어머니 곁을 떠나 외갓집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십년이 지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야곱은 분노하여 칼을 차고 그를 죽이려고 달려온 형 에서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얻어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형제간의 갈등과 원한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일이며 그렇게 어긋나버린 관계는 회복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음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그들이 형제간이 아니었다면, 친척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갈등이 계속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형제간이기 때문에 그 갈등이 그만큼 컸고 그리고 화목하기가 그처럼 어려웠던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밤새 기도하며 씨름한 결과 죽이러 달려온 에서가 성령의 강권적인 감화 감동으로 감정이 변하여 칼을 버리고 동생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화해한 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장 전형적이고 모델이 될 만한 화해의 본보기는 요셉과 그 형제들의 회복 과정입니다.
요셉을 팔아넘기고 난 후에 형들은 아버지의 쓰라린 슬픔과 고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이 짐승들에게 잡아 먹히고 그가 입은 채색 옷이 피가 묻었다고 하면서 그 아들들이 가져온 요셉의 옷을 보고서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 먹힌 줄 알고 고통 중에 오랫동안 울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반쯤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23년 정도가 지난 후에 기근으로 인하여 양식이 없어져서 애굽으로 양식을 얻으려 갔다가 거기서 이미 국무총리가 된 지 10년이 된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애굽 복장을 하고 말도 애굽 말을 하고 있으니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가운데 서로들 말을 하면서 과거 요셉을 팔아넘긴 죄를 언급하며 그 죄값을 치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그들을 바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바로 화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들이 과연 과거의 그 악한 모습을 계속 갖고 있는가, 아니면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하나씩 확인하고자 합니다. 요셉은 자기와 같은 배로 태어난 베냐민에 대한 형들의 태도를 점검하고, 아버지 야곱에 대한 그 아들들의 효심을 달아봅니다. 그렇게 하여 형들의 마음이 과연 진실한가, 지난날과 같은 그러한 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가, 동생 베냐민을 위하여 희생할 만큼 이제 진실한 형제애를 갖고 있는가를 시험해봅니다. 이를 위하여 베냐민만 애굽에 남기고 식량을 가지고 다 고향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동생을 버리는가, 아니면 끝까지 챙기는가를 시험하였을 때에 넷째 형 유다가 나서서 자기를 대신 종으로 삼아달라고 간청합니다. 만약 베냐민 동생을 데려가지 아니하면 아버지 야곱이 죽을 것이라면서 진심으로 간청하는 형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요셉이 비로소 완전히 마음을 열고서 자기의 정체를 밝힙니다. 그리고 형들을 끌어안고 함께 울면서 그들을 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제들과 그 가족들을 전부 애굽으로 모시고 와서 그들을 봉양하며 섬깁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 형들을 만났을 때에 곧장 그들에게 자기 정체를 밝히지 않고 계속하여 이렇게 저렇게 시험하면서 그들의 형제애, 아버지에 대한 애정 그리고 막내 동생 베냐민에 대한 형제의 책임감 등을 달아본 것은 형제와의 진실한 화해를 위하여 꼭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형들의 심보가 예전과 똑 같았다면 절대로 요셉은 형들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며 형들을 품고 봉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형제간의 화목하는 것은 견고한 성읍을 정복하는 것보다 어렵고, 무거운 산성 문빗장을 여는 것처럼 마음을 열고 화목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형제는 친밀한 관계지만 그 만큼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위해주어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친밀함을 기화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상처주고 압박감을 주고 해를 끼친다면 결국 사랑하는 대신에 원한과 앙금이 더 켜켜이 쌓이게 되고 화목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유익을 끼치는 관계가 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고 손해를 끼치지 않고 무시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번 크게 어긋난 관계는 다시 회복되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다시 화목하게 되려면, 잘못한 사람은 분명 자기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여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야곱의 여러 아들들이 진심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켰을 때에야 요셉이 용서하며 품고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였지 않습니까? 이처럼 진심어린 잘못의 인정과 용서를 구하는 겸손한 마음과 서로에 대한 존중감이 있어야 참된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냥 상처와 아픔이 있는 채 섣부르게 화해하라고 종용하거나 압박을 주는 것은 잘못된 결과를 낳습니다. 속에는 고름이 꽉 차 있는데 상처의 겉만 아문다고 다 나은 것이 아닙니다. 결국 속에 있는 고름이 터지게 되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진심어린 참회와 용서가 없는 가운데 화해하라고 종용하는 것은 오히려 마음의 문을 더 닫게 만드는 일이 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으나 인간의 마음은 단순하지 아니하여서 겹겹이 아로새겨진 상처와 아픔들이 쉽게 아물지 아니하기에, 화해하기가 심히 어려운 것이 현실인 줄 압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진심어린 참회와 성령의 도우심의 은혜가 임하여 갈등과 다툼이 끝이 나고 불화 대신에 화목의 은혜가 임하도록 우리의 삶에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