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켈(INKEL)




대한민국의 전자제품 제조 회사. 1996년 해태전자에 흡수 합병되었다.
2. 상세
1973년 조동식 창업주가 일동제약과 일렉트로보이스가 1970년 3월 설립한 한미합작법인 한국일렉트로보이스를 인수하여 인터내쇼날코리아전자를 설립한 것이 시작이다.
이 부분은 해태전자를 중심으로 한 기업의 역사인데, 현재 인켈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연혁이다. 신방전자는 턴테이블 제조전문업체로 인켈의 하청기업이었다. 모기업인 해태의 지원을 받아 원청인 동원전자를 삼킨 셈. 동원전자는 부영, 일진 등과 함께 민영방송(현재 SBS)설립 경쟁에 참여하였다 태영건설에 밀린 후 사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여 해태전자에 인수되었다.
스코트(Scott), 듀얼(Dual), 텔레풍켄(Telefunken), 세(SAE) 등 해외 유명 기업들의 하청을 받아 OEM생산을 하면서 기술력과 품질 관리 기술을 획득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하청 생산으로 갈고 닦은 기술을 바탕으로 양질의 국산 오디오 생산을 시작했다.
인터내쇼날코리아전자는 필소닉이라는 브랜드명을 사용하다가 이후 1976년 사명을 동원전자로 바꾸고 인터내쇼날코리아전자의 약자인 인켈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미국의 오디오 브랜드 셔우드를 자체 브랜드로 인수하고, 독일의 오디오 잡지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자회사와 계열사를 모두 포함한 종업원 수가 4000명도 안 되는 중소기업이었지만, 오디오 분야에선 광고도 많이 하고 품질을 인정받아 7~80년대에는 대기업 급으로 인지도를 쌓아가기도 했다. 소니코리아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전에는 소니 워크맨과 트리니트론 TV를 수입, 판매했던 적도 있었다. 또한 야마하 디지털 피아노의 공식 수입처이기도 하였다.
하청 생산 제품 중 세(SAE) 제품은 원청 본사의 허락을 받아 INKEL/SAE 브랜드로 국내에도 판매하였는데, 국내에서 볼수 없었던 직선의 묵직한 디자인과 뛰어난 앰프의 성능은 당시 국산품에 비해 한수 위라 한동안 오디오 팬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해외 유명 제품을 국산 가격으로 살수 있었으니. 자체 개발작으로는 시카고전자박람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명작 CS9000세트를 꼽을 수 있다. 당시 럭스만이나 아큐패이즈와 같은 일본의 최고급앰프들이나 사용하던 MOS FET 출력단을 채용한 제품으로 진공관의 음색을 재현하기 위해 프리앰프부터 공들인 설계로 유명하다. 80년대 인켈의 기술력을 대표하는 최고의 제품이다.
동원전자 시절이던 1979년 당시의 광고
1988년 브랜드명 인켈을 사명으로 바꾸었다. 1980년대 후반 오디오 시장이 정점을 찍고 내려오게 되는데, 인켈도 민영방송경쟁참여, 칼라TV시장진출, 중국으로의 생산시설 이전 등을 비롯해 새로운 활력을 도모했지만, 시대의 흐름에 사운이 기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92년 창업주인 조동식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는 등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1994년에 해태그룹 계열인 해태전자가 조동식 회장으로부터 인켈을 인수하였다. 해태전자가 해태 그룹의 해체로 함께 사라질 위기가 되자, (무선 전화기 등을 생산하던)나우정밀 등을 합병하면서 한동안 인켈이라는 회사 이름이 사라지기도 했다. (그래도 인켈 브랜드명은 유지하고 있었다.)
1980~90년대에 TV광고로도 자주 나와서 성우 한상덕의 인~켈~이란 목소리로 접할 수 있었고 태광전자와 더불어 중소 오디오 업체에서 인지도가 높았던 시절이 있었기에 1990년대에 설치된 학교 스피커 등이 인켈제인 경우가 많다.
1990년대 중후반, 한국 오디오 업체들은 그간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급 하이파이 제품을 선보였다. 인켈은 테마 시리즈를 발표했고 제법 인기를 끌었다.
수출만 했기 때문에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전화기, 키보드와 컴퓨터용 모니터를 흑백 모니터 시절부터 생산해 왔다. A/V 붐이 일었을 때에는 자체 기술로 브라운관 TV를 생산하기도 했다. 다만 LED, LCD 시대가 오고 본사가 망하며 A/V 컬러 TV 사업은 바로 폭망.
소비 시장 변화와 IMF 사태가 터지며 한동안 암울한 시기를 보냈다. 무리한 확장을 지속했던 해태전자가 모기업이라서 충격이 더 컸다. 회사명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며 어찌어찌 IMF를 극복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소량이나마 오디오 기기를 생산하고 있고, 얼마 후 전자교탁, 내비게이션 사업에도 진출하였다. 2000년대 말, 합병 전 인켈 시절 연구개발 본부장 등 옛 인원들이 모여 경영권을 획득하고 인켈 브랜드를 부활시켰다. 2016년 현재에도 자체 설계, 디자인의 블루투스 스피커나 하이엔드 MP3 플레이어, 내비게이션 시스템 등 몇 가지 제품을 꾸준히 내고 있지만 국내 생산 공장은 전부 없앴고, 중국과 베트남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오디오 전문이었다는 기질은 못 버려서 요즘 흔한 블루투스 스피커를 만들더라도 타사에 비해 음질에 매우 신경을 쓰기 때문에 들어 보면 다르다.
다만 소형 디지컬 음향 기기 분야에서는 코원 등의 쟁쟁한 기업들이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 데다가 주력인 오디오 분야의 경우도 세대가 교체되며 MP3 플레이어를 들고 다니기에 오디오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예전만큼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 사실 인켈의 주력 상품이던 앰프, 튜너, 타이머, CD플레이어, 턴테이블이 층층으로 쌓이고 큰 스피커가 좌우에 달려 있던 가정용 컴포넌트 오디오 시장은 2010년대에 들어오면서 온쿄나 야마하등 일부 일본제룰 통해 국내 수요가 충족되는 물건이 되었다. 전성기에는 카 오디오도 자체 셔우드 브랜드로 파는 동시에 미국과 유럽 고급 차량에 납품하던 유럽 유명 브랜드 제품을 OEM 공급하였고, 국내에서는 기아자동차 차량에 기본으로 들어갈 정도로 꽤 많이 팔리고 있었는데, IMF 이후 빠져나간 국내 연구 인력을 채용하여 급격히 발전한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 디지털화와 내비게이션 시스템 보급으로 인한 카 오디오 자체의 사양 산업화로 해태 그룹 해체 시에 사업을 접었다.
중고 오디오 시장 게시판에 가 보면 인켈 물건이 그나마 대접을 받고 있고, 과거 명기로 꼽히던 일부 물건은 수명이 다 된 부품(볼륨, 콘덴서, 트랜지스터...)을 바꾸는 등의 개조를 통해 여전히 유통되고 있다. 다만 개조기는 구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 대부분 회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개조하여 설계 의도에서 벗어나가나 파형이 찌그러지는 등 문제가 속출하기 때문. 콘덴서도 인켈은 과거 삼화컨덴서와 협업하여 특주한 최고급 콘덴서를 많이 사용하였으나 개조자들은 거의 멋대로 콘덴서의 용량이나 종류를 바꿔 엉망이다. 트랜지스터도 과거 오디오 시장이 활발할 때 생산되었고 지금은 단종된 소자들이 많아 오리지날보다 못한 트랜지스터를 쓰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가끔 회로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작업자들이 손을 댄 경우나 오리지날에 맞추어 오디오 그레이드 콘덴서를 사용해 설계 용량에 맞춰 노후된 콘덴서들을 교체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드물다. 인켈과 태광, 아남등 국내 오디오 브랜드들은 국내 평가는 낮았지만 당시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 제품들이 설계 의도에 벗어나게 망가지고 있으니 당시 설계자들로서는 굉장히 억울할 일. (1990년대까지 OEM이든 ODM이든 한국이 오디오 최대 생산기지였다. MADE IN JAPAN도 반조립상태로 수출되어 일본에서 마무리 조립되는 경우도 많았고, Dual은 90년대 이르면 인켈에서 로고만 두알로 바꿔파는 수준이었다.)
2010년대 현재는 중국 공장에서 일본, 유럽 유수 하이파이 업체의 하청생산에 주력하고 있고, 해외에서는 셔우드 브랜드로 하이파이, AV기기를 생산 판매하고 있다.
3. 이모저모
8, 90년대 당시에 드물게 토요일 격주 휴무를 실시하던 회사다. 우리 나라 주 5일 근무 확대 이전에는 모든 회사가 토요일은 12시에 퇴근이었는데 그것을 2주치씩 몰아서 쉬고 일하고를 반복 했던 것. 오디오 생산 라인은 일부 자동화된 라인도 있지만 자동차 생산라인과 비슷하게 대부분 손으로 작업하며, 부품을 사들여서 조립만 하는 방식이다. 여러 부품을 납땜과 나사, 접착제로 조립하는 수작업 노동 집약적 다품종 소량 생산인데, 공정에 필수적인 자동 납땜기의 납이 녹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8시부터 12시까지 근무하고 식혔다 녹였다를 반복하느니 2주치를 몰아 5시까지 한 번에 일하고 다음 주에 쉬는 쪽을 택한 것. 그래서 라인을 끊는 5시에는 무조건 퇴근. 징검다리 연휴에는 휴일을 옮겨 쉬기도 했다.
중소 기업이다 보니 급여 수준은 보잘것 없었으나, 회사에 대한 만족도는 상당히 높은 편으로, 임금투쟁이나 노사 분규가 일어난 적이 없다. 연구직의 경우에도 17시 이후에 일을 하거나 휴일 근무시에 칼같이 연장/휴일 근무 수당을 챙겨 주었었다. 연구 개발 인력과 창고 물류 인원을 제외한 직원 대부분이 생산 라인의 조립직 여성이었는데, 남자 연구개발/본사 직원 급여는 짰지만 생산직 여직원 급여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차별도 없었기 때문에 목소리 크게 내는 사람이 적었기도 하고. 격주 휴무와 정시 퇴근 덕에 직원들 취미 활동도 다양하게 이루어졌고 직장인의 주적인 야근이 없는 평등한 분위기였다. 그런 2000년대식 사내 문화가 일찍 발전했던 회사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망했으니...
도봉동에 본 공장과 연구소, 방학동에 PA / 모니터 공장, 의정부에 카오디오 3공장, 명륜동 대학로 주변에 본사가 있었다. 명륜동 본사 아래층엔 인켈 아트홀이 있었는데, 당시 양희경 윤석화 등이 출연한 뮤지컬 넌센스 초연으로 크게 성공했었다. 사실 이 인켈 아트홀이 인켈이 망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설립자인 회장의 아들이 당시 인켈 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사업엔 별 관심 없고 아트홀 등 문화 사업에만 치중하자 회장이 빡쳐서 자기 지분을 해태전자에 넘겨서 회사 경영권이 덜렁 해태 그룹으로 넘어가게 된 것. 덕분에 IMF 겹치며 해태그룹이 망하자 함께 망하고 말았다. 그냥 있었으면 기술력이나 당시 준비하던 디지털 기기 사업으로 건실한 중소 기업으로 존속할수 있는 역량은 되었는데... (인켈 PA와 인켈 두 개 회사가 되었지만) 결국 각자 예전 인원들이 주축으로 부활하여 존속하고 있으니, 알고 보면 참 끈질긴 회사, 질긴 사람들이다.
일부 대리점에선 오디오 마니아들을 위해 앰프 단품을 판매할 때 내부 부품을 해외 오디오 부품으로 개조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당사에서 판매했던 모 탁상용 카세트는 중파방송 주파수가 1㎑(!!!)간격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