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6일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오 8,1-4)
“Lord,
if you wish,
you can make
me clean.”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 번 후손을 약속하시며, 아브라함의 후손과 맺는 계약의 표지로 할례를 제정하신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약속을 믿기 어려워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이사악을 통하여 그 약속을 이루신다(제1독서). 산상 설교 후에 예수님께서는 말씀뿐만
아니라 당신의 행적으로도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다.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신 기적은, 하늘 나라가 인간성이 온전히 회복되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산상 설교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죽은 다음에 갈 수 있는 천국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는 곳입니다. 여러 이유로 훼손된 인간성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곳이며 상태이기도 합니다. 장례 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열흘 전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기억하는 저에게, 깨끗한 영정 사진은 오히려 위로였습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는 사도신경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일그러진 얼굴 표정과 주사로 멍들고 혈관이 튀어나온 팔이 아닌, 움직일 수 없는 지체가 아닌 온전한
모습이겠지요. 그것이 하늘 나라의 상황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첫
번째 기적으로 소개되는 오늘 나병 환자의 치유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보여 주십니다. 마태오 복음 5장에서 참된 행복을
선포하시며 하늘 나라에 관한 소식을 알려 주시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행적을 통하여, 당신께서 오심으로써 그 하늘 나라가 우리에게 이미 와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인간성을 본디 상태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고 그에게 온전함을 되찾게 할 능력을 지니신 분께서 여기 와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병 환자 같은 믿음입니다.
신앙인은 애기가
되어가는 사람
-이기정신부-
애기가 보채거나
찡얼거리거나 울거나 때론 발악도 앙탈부리기도 합니다. 이런 애기의 모습만 봐도 엄마는 젖을 주거나 기저귀 갈아 주거나합니다. 아직 말을 못 해도
엄마는 애기의 모든 걸 잘 아는 게 신기하기도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며 애기가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줄 몰라도 우리의 사정을 잘 아시는 하느님 아버지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배려를 받으면서도 모르는 건 우리 부족함 때문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마태오
8,3)”
-조재형신부-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알려진 작가가 표절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마음이
찡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글을 전문으로 쓰는
입장이 아니기에,
글 쓰는 것이
직업이 아니기에 제가 쓴 글이 표절의 논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처럼 새로운 것을 창작한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어쩌면 지나간 인류의 스승들에게 많은 유산을 받으면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또한
언젠가 우리들의 후손들에게는 인류가 쌓아놓은 문명의 한 모퉁이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교회와
인류에게 새로운 편지를 한통 보내셨습니다.
제목은
‘찬미
받으소서!’입니다.
우리가 사는 터전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우리보다 먼저 둥지를 틀고 살아온 많은 생명들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욕망 때문에
우리들의 후손이 사용해야할 것들마저 가불해서 쓰지 말자고 이야기 하십니다.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는 많은 것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의 생명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들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을 더 이상 오염시키지 말자고 이야기 하십니다.
교황님의 편지는
‘생태신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파괴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은 환경오염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있습니다.
뿌리가 마르면
나무는 곧 시들듯이,
환경오염이 심해지면
우리들이 쌓아온 자본주의의 바벨탑도 곧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교황님의 편지는
어쩌면 ‘나병환자’와 같은 외침인 것
같습니다.
‘주님!
인간의 욕심 때문에
병들어가는 지구를 치유해 주십시오.’
그리고 함께 사는
우리들에게 호소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지구별에 잠시 신세를 지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지내고 가야합니다.
나그네가 주인처럼
행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아브라함의
웃음-
-이수철신부-
제가
집무실을 찾는 이마다 즐겨 나누는 자작 애송시입니다.
세
번째 다시 인용합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마음을 들어 올린다
온갖
생각들/하늘 구름에 띄워 보낸다
마음은
다시/푸른 하늘이 된다.‘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림이 기도이며,
온갖
분심 잡념들 하늘 은총의 구름에 띄워 보냄이 기도이며,
다시
푸른 하늘 같은 순수한 마음의 회복이 기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나병환자나 독서의 주인공인 아브라함 역시 기도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으로 정의되는 분도회 수도자들 역시 기도의 사람입니다.
기도의
맛, 기도의 기쁨, 기도의 재미로 살아가는 기도의 사람인 수도자입니다.
수도자의
삶에서 기도를 빼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비단
수도자만 아니라 진정 믿는 모든이가 기도의 사람입니다.
아,
정말 아브라함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어제는
오늘 1독서 창세기를 읽고 묵상하며 하느님이 재미있어 웃었습니다.
지난
월요일 창세기에서 고향집을 떠날 때 아브람은 나이 75세의 노령이었는데
오늘
독서에서는 99세의 노인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아브람입니다.
나이를
초월하여 영원한 젊음을 사는 아브람이구나,
아
이것이 기도의 효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서에
나오는 내용은 빙산의 일각일뿐
하느님과
아브라함은 늘 끊임없는 소통의 대화 중에, 기도 중에 살았음을 감지합니다.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
아브람에게는
모든 속내를 털어 놓으시는 하느님이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앞에서 흠 없는 삶을 살았던 아브람이었습니다.
오늘
아브람은 하느님을 만나 이름도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사라이의
사라로의 개명과 더불어 출산 예고를 들은 아브라함의 반응도 재미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이
백살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마치
하느님의 유머처럼 유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하느님이신지요.
그대로
하느님의 전능을, 자유를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의
웃음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두분
간의 대화인 기도가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며 때로 웃으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아브라함입니다.
주님과의
끊임없는 대화인 기도가 나이를 초월하여 영원한 젊음을 살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다.‘
독서의
마지막 구절 역시 은혜롭습니다.
기도가
바로 축복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관계와 더불어
끊임없이
확장되는 마음의 깊이와 넓이요, 마음의 순수와 겸손, 온유입니다.
어제
수도원 식당 창밖 무수히 피어나는 태산목泰山木 희고
큰 꽃들을 보며 쓴 글을 나눕니다.
그대로
기도의 사람, 아브라함을 상징합니다.
참,
크다
고요하다/우아하다
기품있다/향기롭다
아,
깊다
태산목泰山木꽃들
아브라함과
더불어 복음의 나병환자 역시 기도의 사람입니다.
천형天刑과
같은 나병은 주님을 만날 때 천복天福으로 바뀌어 치유됨을 봅니다.
나병이
상징하는바 우리의 영육의 병입니다.
나름대로
천형과도 같이 안고 사는 영육의 질병을 지닌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치유의
지름길은 기도뿐입니다.
복음의
나병환자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최고의 의사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간절한 기도에 즉각적인 주님의 치유의 응답입니다.
친히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낫습니다.
나병환자의
간절한 믿음과 주님의 사랑의 스킨십, 은총의 말씀이
삼위일체
하나되어 발생한 치유의 기적입니다.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일이 없으신,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과 우리의 우정이 깊어가면서 저절로 치유되는 영육의 질병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의 영육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며 당신과의 우정을 깊게 해 주십니다.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시편128,4참조).
아멘.
깨끗하게
되어라
-반영억신부-
어떤 나병환자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며 깨끗이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병의 원인이 무조건 환자 자신의 죄나 부모, 또는 조상의
죄로 말미암은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불구자는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지내야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도 소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록도, 안양 나자로 마을, 대구 칠곡 등에 따로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보통사람이면 감염의 위험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결핵이 한참 유행할
때 ‘폐병’이라고 해서 그의 곁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요즘 ‘메르스’라는 바이러스 때문에 고통이 심한데 감염되어
치료받는 사람뿐 아니라 의료인들도 사람들의 시선과 싸워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환자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 고쳐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거두어 준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종교적 단죄에서 그리고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방법은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할
일도 생각합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 바탕에는 나병환자의 믿음이 한몫 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하고자 하시면’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께서“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응답하시며 고쳐주셨으니 나병환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린 것입니다. 믿고 구할 때 주님께서는 그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내가 바라는 시기와 그분께서
은총의 열매를 허락하시는 시기가 다를 뿐입니다.
외적인 나병을 치유
받아야 하지만 우리 영혼의 치유가 선행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꼬이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드러난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무서운 것이고
그래서 그 병을 깨끗이 치유 받아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쌓여만 가는 교만함과 나태함, 이기적인 습성들을 인정함으로써 새로 나야하겠습니다.
‘하고자 하시면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큰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보통의사는 병의
증세를 보고 그것을 다스리지만 명의는 병의 뿌리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뿌리를 다스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으니 죄의 용서를 통해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죄의식으로 말미암은 병은 죄의식을 없애서 고쳐야 하고, 잘못된 생활습성 때문에 생긴 병은 그것을
바로잡아서 고칠 일’(이현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사랑합니다.
빨간
딱지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나병환자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는지 모릅니다. 특효약이 없었던 나병과의 싸움으로 인한 괴로움도 큰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괴로움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병환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낙인이었습니다.
지금에야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 안에서 나병은 천형(天刑)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병을 인간 측의 과실로 인한
하느님의 벌로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 저기 곪아터지고 문드러지는 자신의 끔찍한 모습을 보는 것만 해도 힘겨운 일인데 세상 사람들로부터 죽을
죄인이란 시선을 받으며 살아가니 그 보다 더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나병환자들이 겪던
고초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병이란 판정을 듣는 즉시 환자들은 세상으로부터 격리조치를 당했습니다. 나병 판명은 곧 인간 세상으로부터의
추방이었습니다. 나병 통보와 함께 사랑하는 가족들이나 친구들과의 유대도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깊은 고독과 따돌림 속에 짐승처럼
성 밖 토굴에서 그렇게 죽을 날만 기다렸습니다. 억울하기가 하늘을 찔렀지만 운명이려니 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이렇게 죽음과도
같은 삶, 형벌 혹은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던 나병 환자였는데 기적 같은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긍정, 희망, 기쁨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던 울적했던 그의 삶이었는데 그 어두운 동굴 안으로 환한 빛이 다가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치유시키신 후에 사제에게 가서
치유 사실을 확인받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나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나병보다도 더 무서웠던 격리와 고독, 소외로부터 나병환자를 해방시켜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우리 역시 나병환자처럼 세상으로부터의 소외와 격리, 그로 인한 괴로움을 체험합니다. 우리들의 나약함으로 인해,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한계로 인해, 독특한 성격으로 인해, 가난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인해, 언젠가 맞이하게 될 노화와 죽음으로 인해 외로움과
서러움을 체험합니다.
그때 우리는
나병환자의 병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소외와 격리로부터의 해방까지 선물로 주시는 치유자 예수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찌 보면 환자인 우리들을 위한 종합병원 의사이십니다. 내과만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과, 외과, 피부과, 정신과...우리의 모든 부분을
통합적으로, 전인적으로 치유하시는 만능 의사이십니다.
단순히 나병환자의
병만 치유하지 않으시고 그를 다시금 공동체의 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예수님의 자상함이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된
나병환자를 향해 사제에게 가라고 권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 나병에 대한 선고, 그리고 치유 확인은 사제에게 맡겨진 권한이었습니다.
사제로부터 완전한 치유에 대한 확증을 받은 그는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그리고 떳떳한 모습으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의 온 몸에
붙어 있던 ‘전염병 환자’ 그리고 ‘접근 금지’라는 빨간 딱지를 사랑의 손길로 몸소 떼어주신 예수님, 그리고 그를 원래 몸담고 있던 공동체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노력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모습을 마음에 담고 하루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김웅열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만나십니다.
좀 이상한 것은
‘나병환자가 어떻게 마을까지 내려왔을까?’
그 시절 문둥병에
걸리면 자기 아버지라도 산 속에 버렸습니다.
사람취급조차 하지
않고 나병환자라고 측은히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저 인간이 얼마나
모질게 살았으면…… 아마 조상 가운데 모질게 산 놈이 있으니까
그 자손도 문둥병
환자겠지~’
나병환자는 동네
한가운데 나타났다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죽더라도 항의조차 못 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나병환자가 먼저 소리칩니다.
“나, 나병환자요,
피해가시오.”
오늘 마을까지
나병환자가 나온 것은 짐작하건대 나병환자들이 동굴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누군가 “우리
마을에 죽은 사람도 살리는 예수님이 오신답니다.” 하는 소리를 엿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어도, 손도 없고 발가락도 없는 몸으로 어찌 갈까?
설령 간다고 해도
맞아 죽을 텐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얼굴을 헝겊으로 감싸고,
모습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면서 마을로 내려갔을 겁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과
대화하는 중에 나병환자임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나병환자의 모습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나병환자는 확신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굴속에서 죽으나,
사람들에게 맞아죽으나 마찬가지…….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자신의 병을 낫게 해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돌을
던져도 예수님만은 받아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신앙과 확신은
라틴어로 같은 뜻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천주교신자들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는 형식으로 흐를 것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내 영과 육이 치유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내 영과 육이 치유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내 영과 육이 치유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고해성사를 할
때마다, 내 죄가 아무리 진홍색처럼 붉어도
주님이 나를
치유시켜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100% 믿었습니다.
두 번째, 나병
환자에게는 겸손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겸손함만이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기도 역시 겸손의
기도가 될 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계획합니다.
하느님께 맡겨놓은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급할 때는 달라고 합니다.
협박성 기도할 때
많습니다.
지가 다 만들어
놓고 기도 들어갑니다.
겸손한 기도를 할
때, 성부와 얼마나 가까워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청원의
기도 하셨지만, 언제나 마지막에는
‘제 뜻대로 마시고
하느님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하셨습니다.
협박하는 기도는
응답을 못 받습니다.
오늘 이 나병환자는
절박한 상황이지만 겸손하게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나병환자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존경의 표시로 먼저
무릎을 꿇습니다.
피조물이 하느님께
경배하는 첫 번째 행위는 먼저 무릎을 꿇는 겁니다.
육의 무릎이
꿇어졌다고 영의 무릎이 꿇어진 건 아닐 겁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꿇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첫 번째, 확신 두
번째, 겸손 세 번째, 존경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응답하십니다.
첫 번째, 불쌍한
마음으로 손을 대시며 터치 테라피를 하십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낫게 해 주셨을까?
나병환자들은 가족과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배반당한 배신감, 분노, 미움이 쌓여 있습니다.
육신의 병이
치유된다고 영의 병도 함께 치유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들에게 받았던
모멸감을 먼저 치유시켜 주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만져주지 않았던 몸에 먼저 손을 대십니다.
여러분 주변에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영혼이 혹시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섬세하게 치유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스케일은 바다처럼 크지만 사람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섬세하게 사람을 못 대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치유시킨 다음에 두 가지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첫 번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는 함구령!
두 번째
‘봉헌하라’ 는 봉헌령!
‘네 병이 나았다고
하는 것을 사제에게 보이고 모세가 정해준 대로 봉헌해라!’
왜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로마에서 자신들을 구해줄 힘 있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아로 선동이 되기 쉬웠지요.
은총 받은 자의 첫
번째는 침묵입니다.
많은 경우는 은총을
시궁창에 떨어뜨립니다.
성지순례 때 받은
은총을 입을 통해 잃어버립니다.
눈물 펑펑 흘리고
피정 받은 후에 입을 통해 받은 은혜 다 날려버립니다.
은총을 받은 직후는
침묵입니다.
"그래도 주님께
받은 영광 간증해야 되지 않을까요??"
다 때가
있습니다.
축복받은 자의 두
번째는 봉헌입니다.
내가 축복 받을
때마다 얼마나 봉헌하셨습니까?
지난 일 년 동안
감사예물 얼마나 드렸습니까?
은혜 받은 사람은
예수님 말씀대로 봉헌해야 합니다.
봉헌가지 이르러야
그 은총은 완성됩니다.
봉헌은 감사의
예물일수도, 육체의 봉사일수도, 재능의 봉사일수도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
신자들은 예수님 가르치신 두 가지, 침묵도 안 지키고,
봉헌도 안
지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과
등을 돌리고 간 뒤에는 이 은총을 다 잊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서 엄청난 것도 아니고... 다만
‘함구하고,
봉헌하라’
그 두 단어뿐인데도
우리들은 못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짧은
다섯줄이지만 우리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되는지 알려줍니다.
확신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라!
세 번째는 전교하는
마음으로 영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썩어문드러진 영혼에 측은한 마음으로
‘마리아야,
루시아야, 베드로야, 나오너라.... 너에게 평화를 주겠다!’
손을 대실
겁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지켜야 합니다.
마귀가 시샘하지
않게 침묵하면서 성서를 읽고, 봉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백번
말해야 소용없습니다.
표현을 해야
합니다.
과일도 익으면
빨갛게 표현합니다.
이 세상
피조물가운데 가장 하느님께 인색한 것이 사람입니다.
다 자기가 잘
나서, 자기기도 덕에 자식이 잘 된지 알고 있습니다.
나의 심장이라고 내
능력으로 뛰는 것 아닙니다.
내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침묵하면서 하느님께 어떤 봉헌을 해야 할지 늘 묵상해야
합니다.
열병에서 나은
베드로의 장모가 일어나자마자 후들거리는 다리로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듯이~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주신 주님의
말씀, 마음에 새깁시다. 아멘
-심흥보신부-
어젯밤 창밖의
나뭇가지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도했습니다.
이 비로 메르스를
다 걷어 주시기를...
예수님께는 오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라고 비는
나병환자에게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3절) 라고 하시며 고쳐주십니다.
...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나 다 베풀어주실 수 있는 주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세적인 어려움을 다 걷어 주시고, 저희 시대에 평화와 안녕을 허락하소서...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 8,2)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기도를 많이 하시나요? 무엇을
청하시나요? 누구를
위해 청하시나요?
그런데도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가요? 어떤
때는 들어주시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안들어 주시는 것 같지요.
주님께서
내 기도에 기꺼이
응답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주님이
내 청에 움직이시게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필요하답니다. 그분이
하고자 하시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때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그러니
기도가 안 이루어질 때도 섭섭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가 아닌가보다
생각하면 되겠지요.
오늘
겸손하게 우리의
필요를 아룁시다. 그리고
나병환자처럼 하고자
하시면 이루어주시리라고
믿고 그분께
내맡기고 기다려봅시다.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
되길 빕니다. 아멘.
-한상우신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우리의
사랑을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을
오늘복음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치유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치유를
불러일으키는 사랑은 자신을
결코 속이지
않습니다.
가장 정직한
언어가 가장 생생한
기도가 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정직한
사랑으로 우리 영혼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진실한
치유는 진실된 사랑이
되기때문입니다.
주님의
정직한
사랑은 우리의
자존감을 다시 찾게
합니다.
자존감은 상처와
아픔까지 봉헌하게
합니다.
사랑의
정화와 우리의
자존감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치유의
기쁨은 사랑의
기쁨입니다.
우리의
오늘또한 우리의
사랑을 깨끗이
치유하는 은총의 날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치유는 주님의 가장
확실한 사랑의
뜻입니다.
치유와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손길임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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