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생명의 젖줄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물이 있는 곳에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문명도 물길을 따라 흘렀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한강과 낙동강, 섬진강을 따라 도시가 발달했고, 사람들은 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왔다. 생각해 보면 물은 단순히 마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물은 생명을 품고, 삶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젖줄이다.
전쟁터에서도 물은 생명줄이었다. 얼마 전 화성 인근에 있는 ‘세마대(洗馬臺)’를 찾은 적이 있다. 말 그대로 ‘말을 씻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왜군과 맞섰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권율 장군은 산성에 물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적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묘책을 냈다고 한다. 높은 곳에 흰 말을 데리고 올라가 쌀로 말을 씻는 시늉을 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왜군들은 산성 안에 아직도 물이 넉넉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방울의 물이 때로는 전쟁의 승패를 가를 만큼 귀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평화로운 일상에서는 물의 고마움을 쉽게 잊고 산다. 공기와 햇빛처럼 늘 곁에 있기 때문이다. 물이 너무 흔해서 그 소중함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때 텃밭을 가꾼 적이 있다. 매일 물을 주면 축 늘어졌던 잎이 어느새 생기를 되찾았다. 며칠 사이 새잎이 돋고 꽃이 피더니 마침내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물 한 모금이 식물에게는 얼마나 큰 생명력이 되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사람도 다르지 않았다. 언젠가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조금이라도 기록을 단축해 보겠다는 욕심에 급수대에서 건네주는 물도 마시지 않고 계속 달렸다. 처음에는 별문제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리였다. 30km 지점에 이르자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나면서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가슴에 달고 있던 번호판을 고정하는 핀으로 종아리를 찔러가며 간신히 결승선을 통과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탈수 증상이었다. 몸속의 물이 부족해지면서 근육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일을 겪고 나서야 나는 물의 고마움을 몸으로 배웠다. 그다음부터는 마라톤에 참가할 때마다 급수대에 들러 물을 충분히 마셨다. 산행을 할 때도 반드시 물부터 챙겼다. 산에서는 물을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이 마른 뒤에야 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갈증이 나기 전에 조금씩 자주 마시는 습관도 생겼다.
물은 부족해도 문제지만, 너무 많아도 재앙이 된다. 요즘처럼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지면 물은 순식간에 얼굴을 바꾼다. 평소에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던 물이 마을을 집어삼키고, 산사태를 일으키며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예부터 ‘치산치수(治山治水)’라는 말을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산과 물을 잘 다스려야 백성이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자연은 인간의 뜻대로만 움직여 주지 않는다. 우리가 산을 함부로 훼손하고 물길을 막아버리면 언젠가는 그 대가가 우리에게 돌아온다.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라는 옛이야기도 이제는 그저 웃고 넘길 수만은 없게 되었다. 맑은 물이 점점 귀해지고, 오염된 물을 돈을 주고 사서 마시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고, 마시고 싶을 때 언제든 생수를 살 수 있으니 물의 소중함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깨끗한 물 한 모금을 얻기 위해 먼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해 보면 물은 참 겸손하다. 낮은 곳으로 흐르고, 생명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스며든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나무를 키우고 곡식을 익게 하며 사람의 목을 축여준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함부로 대하면 홍수가 되어 거센 힘을 드러낸다.
물은 생명의 시작이면서 자연의 경고이기도 하다. 이제는 자연을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마음대로 이용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로 바라보아야 한다. 강과 산과 숲이 건강해야 우리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자연과 우주가 병들면 그 피해는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마시는 물 한 잔을 바라본다. 맑은 물 한 모금 속에는 수많은 생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하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도, 앞으로 살아갈 시간도 결국 물과 함께 흘러갈 것이다. 물은 생명을 살리는 젖줄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끼고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생명의 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