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주동안 주말을 휴가와 상가 문상 등으로 정신없이 보낸 탓인지 후유증은 잠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은 아닌것 같았는데, 천안역이라는 안내방송과 대전역이라는 방송이 들린 후 김첨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귓전에 들려온다.
들판위를 달리는 기차안. 창가 너머로 널리 펼쳐긴 들녁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평온했다.
지루할 수도 있었던 시간인데 잠 덕분에 개운하게 내려올 수 있었구나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켜니 구미 시가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91년 겨울. 처음으로 구미라는 곳에 발을 디디며 도시가 참 작다는 생각을 했었다.
서울의 구 정도밖에 안되는 도시여서 왠만함 걸어다녔고, 나름대로 번화가라는 역전 앞을 거닐며 참 답답해 하던 기억이 떠 올랐다.
창식이와 홍덕이 영락이 등등 가깝게 지내던 구미의 후배들도 하나둘 생각나고...
조금씩 바뀌어가는 구미역을 빠져나오니 흐릿한 하늘이 시야에 들어온다.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은 날씨다'.
여름캠프에 못간 아쉬움이 남아 있었던 듯 주말에 서울에 남아 있기가 그냥 싫었던 것 같다. 문득 지난주 상가에서 잠깐 봤던 친구들 선후배들 등등 가까운 지인들이 보고 싶어졌다.
대구 후배녀석도 어찌 사는지 궁금하고...
어디로 갈까 망설이며 이리 저리 전화를 돌려 봤다, 하지만 모두들 바쁜 듯 했다.
대전의 유이는 비로봉이 뺏지도 주고 집에까지 차도 태워다 줬다면서 은근히 비로봉 들먹이며 선약이 있어 시간이 없다고 했다.
여수의 사막여인은 "깔따구에게 모든 뺏지를 다 전해줬다"고 말한뒤 주말에 다른데 갈 곳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몰래 서울에 다녀갔다. 데저트는 나를 배신(!)했던 것이다. 아! 사막이여~~
여름캠프 때 비목의 차를 타고온 뒤로 포항의 401은 나와의 만남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또한 친구 핑계를 댓고, 주말에 지리산에 갈 거라고 했다. 하지만 원인은 비목 같았다.
진주의 퇴폐바람은 마님의 휴가를 맞아 지리산으로 여행을 떠난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반야봉에서 큰아님과 단 둘이 꼭 끌어안고 비박을 할 거라'면서 들떠있던 퇴폐바람. 그러나 퇴바는 집에서 비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퇴바가 음주운전 사고를 냈고 마님은 간병을 하러 진주로 내려왔기 때문에...
구미역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주위를 둘러보다 의자에 잠시 앉아 정신을 추스리고 있을 무렵, 선이 들어왔다.
테러님이었다. "역전 우측편에 차 대기중 접선 요망"
차도 한쪽으로 흰색 갤로퍼가 비스듬히 정차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구미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단순히 구미에서 번개가 있다는 첩보 때문은 아니었다.
굳이 목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월류봉님 이었다.
대화방에서만 몇차례 만난 월류봉님. 대화방에서 글을 통해 봤을 때 잔잔한 이미지의 여인처럼 보였다. 쓰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유추되는 이미지는 다소 활발함 하지만 대체로 차분함이었다. 며차례 사이버의 만남을 통해 관심이 가게 됐고 만나고 싶은 마음이 많이 차 올랐다. '월류봉님을 만나러 구미에 한번 가야지' 했던 생각은 이내 마음을 구미로 향하게 했고 결국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구미에 갈거라고 테러리스트에게 연락하며, 월류봉님을 언급했던 것은 이번 구미방문의 주목이 월류봉님을 만나는데 있음을 테러님께 주지시키려했던 것이고, 똑똑하면서도 무척이나 영리한 테러리스트님은 이런 나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ㅎㅎㅎ^^* 역시나 멋진 테러리스트님이었다.
푸짐한 버섯전골을 대접받으며 테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자잘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이야기 속에 테러님의 매력이 은근히 전해졌다.
자신의 방향성이 확고한 것 같았고, 꽤나 능력있는 커리어우먼임이 분명했다.
연봉 1억을 향한 그녀의 꿈★은 단순히 꿈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테러님은 먹자산행 때 자리님 차에 타고 온 이야기를 잠시 꺼냈다. 별것 아닌 듯한 이야기였지만 굳이 비로봉 차를 거부하고 자리님과 단 둘이 차에 올랐던 테러리스트님의 본 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자리님의 이야기를 하기전 그녀는 잠시 집안 이야기를 하며 복선을 깔았다.
집에서 시집가라며 다그치는 어머님의 성화.
테러님은 걱정없다는 듯 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주변에 남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키크고 듬직하게 생긴 남자가 안보이는 듯 어머님의 한숨이 새어나오고 "엄마 애가 박사과정인데..."라는 대꾸에 어머님의 눈이 다시 사진을 향할 무렵, 테러님은 사진을 치웠다고 했다.
그리고 자리님의 이야기를 화제로 올렸다.
그저 일반적인 이야기였지만, 테러가 복선속에 깔고 있는 인물은 자리님이 유력했다. 어머님이 원하신다는 키크고 듬직하게 생긴 잘 생긴 남자. 그는 자리님이 분명한 듯 했다.(몰론 믿거나 말거나지만...ㅋㅋㅋ) 역시 테러리스트는 보는 눈이 있었다...ㅎㅎㅎ
객관적 판세는 뒤집을 수 없을만큼 자운영님에게 현저히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테러님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과연 테러리스트가 자리님의 마음에 테러를 가할수 있을 것인지... 난 계속 묵묵히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나 이겨라!!! ㅎㅎㅎ
금오산 자락에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중 드디어 월류봉님이 금오산에 도착했다는 선이 날아들었다.
테러의 유도에 따라 저편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월류봉님은 이내 목표를 발견한듯 서서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점차 또렷한 모습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월류봉님.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백조처럼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는 그녀는 눈속에 뒤덮인 흰꽃을 연상시켰고 다소곳하면서도 정적인 모습은 그 자체로도 화사한 가운데 선선한 날씨와 조화를 이루며 어둠이 짙게 깔린 금오산 주위를 환하게 만들고 있었다. 견우를 만나기 위해 오작교를 건너는 직녀의 모습처럼 그윽한 눈빛을 담은 시선은 한없이 맑기만 했다. 양귀비가 울고갈 경국지색의 자태는 산색에 스며들며 청량한 모습으로 퍼져가는듯 했고, 볼가에 맺히는 은은한 미소는 길게 여울지며 맘속 깊이 잔잔히 메아리지고 있었다.
천상의 규율을 어겨 지상에 내려와 살고 있는 선녀.
천의무봉을 입는다는 천상의 공주!
공주병환자가 많은 지리산에서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찌 이런 좁기만 한 구미땅에 저런 절세가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소리없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한편으로 지리산의 앞날이 험난해 질 것 같은 예감이 먹구름처럼 밀려왔다.
지리산의 칠공자라 불리는 인물들에게 월류봉님의 모습이 눈에 띄인다면 아마도 치열한 접전이 벌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모든 여인들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카사노바 운암골의 날카로운 눈빛이 섬찟함으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했고, 계룡대의 황태자 비로봉은 테러리스트님의 친구를 빙자해 접근할 게 분명했으며, 어떤 여자든 내가 싫어서 헤어지는 일은 없을거라고 장담하던 어린왕자 장이와, 착함과 순수함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어릿왕자 선비샘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리왕자라 자칭하는 방장산이 월류봉님께 공주의 예를 갖출 것 또한 자명했고, 큰아님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고는 하나 4살차이를 극복한 진주의 군주 퇴폐바람은 분명 곁눈질을 할 것이며, 전북의 옥기린 연하천원추리또한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자운영에게 작업이 들어왔었다는 소문이 있었음을 볼 때 안심할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또다른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월류봉님은 어찌 이런 난세에 지리산에 나타났단 말인가!!! ㅎㅎㅎㅎ^^*
월류봉님이 금오산 자락에 나타나자 바람은 더욱 선선해기 시작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은 초가을의 정취를 풍기며 흐릿한 모습으로 낮게 깔리고 있엇다.
그리고, 나긋이 들여오는 목소리의 청아함은 고운 음색으로 바람에 실리며 정신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역시 믿거나 말거나...ㅋㅋㅋ^^)
잠시 인사를 나눈후 월류봉님은 말했다. "저어~기~~ 바이킹이 타고 싶어요"
이도령이 춘향이 타는 그네를 가르키듯 그녀의 부드러운 손끝은 치솟다 내려왔다를 반복하는 바이킹을 향하고 있었다.
수차례 같이 타자고 했지만 멋진 테러는 끈질기게 거부했고, 그런 테러님의 모습이 너무 이쁘게 보였다...ㅎㅎㅎ^^ (난 속으로 말했다. 역시 영특한 여인네야...^^* 고마우이 테러님..ㅋㅋㅋ)
월류봉님과 함께 단둘이 올라탄 바이킹.
조금씩 조금씩 거칠게 요동하며 바이킹이 하늘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자 월류봉은 마치 자신의 삶을 운명에 맡긴 듯 담담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이킹은 점차 더욱 높이 치켜 올랐고 무서움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약한 공주는 고개를 숙이며 지그시 눈을 감은채 살포시 미소짓고 있었다.
바이킹을 타면 앞만을 봐야 재밌다는데... 겁먹은 듯 고개숙인 옆자리을 바라보는 시선은 좀체 움직이려하지 않았다. ㅎㅎㅎ^^
금오산을 주위를 오가며 이어지던 2시간여의 짧은 만남은 월류봉님과 함께 금오산 전망좋은 스카이 라운지에서 구미의 야경을 구경하는 것으로 막을 내려야 했다.
처음 만남이었지만 이미 글을 통해, 대화방에서의 만남을 통해 안면을 튼 월류봉님과의 만남은 전혀 낯설지 않은 익숙한 모습속에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고, "어어 작업들어가네...(ㅋㅋㅋ^^)" 하는 테러님의 추임새가 곁들여지며 초가을같은 주말 저녁은 느긋함과 여유로움속에 풍성함을 안겨다주고 있었다.
언젠가 또 만나게 될 것을 기약하며 짙은 어둠속으로 사라져가는 월류봉님 모습뒤로, 사위어가는 불빛을 쳐다보는 것 같은 촛점 잃은 시선에는 아쉬운 마음이 긴여운으로 내리 깔리고 있었다.
-방장산과 비목이 도착하고, 다롱이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후 테러리스트님과 함께 영주로 향했다.
피곤해서 눈이 감겼지만 구미에서의 즐거움이 여운으로 남으며 밀려오는 잠은 꿀맛 같았고, 간만에 가는 영주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차창 옆으로 스며드는 바람은 시원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