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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도에 면죄부를 준 기독교와 성서 | ||||||||||||||||||||||||||||||||||||||||||||||||||||||||||||||||||||||||||||||||||||||||||||||||||||||||||||||||||||||||||||||||||||||||||||||||||||||||||||||||||||||||||||||
기사입력: 2015/11/16 [07:0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노예무역 폐지 200주년
21세기 새 천년이 들어서자 인류가 저지른 죄악에 여기저기서 사죄하는 모습이 제법 보인다. 물꼬를 턴 것은 요한 바오로 2세였다. 그는 2000년 3월, ‘참회의 날’이라는 제목으로 미사를 집전하며 과거 가톨릭이 행한 숱한 범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2009년 9월, 원주민 학살에 대하여 사죄를 표명했다.
한편 영국이 노예무역법을 폐지한 지 정확히 200년이 되는 2007년 3월 25일을 하루 앞둔 날, 런던에서 3천 명이 넘는 시민들이 노예무역 폐지 200주년을 맞아 '사죄의 행렬'에 참석했다.
이 날의 행사는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와 존 센타무 요크 대주교가 이끌었다. 센타무 대주교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토니 블레어 총리는 노예무역 활동에서 영국의 역할에 대해 충분히 사죄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노예무역에 가담한 영국의 역할에 대해 공식 사죄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노예무역 폐지 200주년을 맞아 아프리카 가나 아크라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블레어 총리는 사전 녹화된 비디오 연설에서 노예무역으로 야기된 고통에 "깊은 슬픔과 유감"을 표명했을 뿐 공식 사죄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영국 정부는 왜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았을까? 몇 몇 언론은 배상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전면적 사죄를 거부하고 있다고 하나, 만족스런 분석은 아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미국과의 관계 때문으로 보인다. 노예무역 당시 공급은 영국과 포르투갈 등이 주도했으나 수요처는 미 대륙이었다. 노예선의 후손들 대부분은 지금도 미 대륙에 살고 있다. 현재 그들의 인구 수, 즉 People Power는 절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공식적인 사과로 그들의 한이 정치적 힘으로 분출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우려가 영국 정부의 발목을 잡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아래에 구미 열강들의 사과 이력을 표로 정리해 보았다. 백인들의 이러한 사과행렬이 정말 진실한 참회인지 그 여부는 차차 알아보기로 하자. 노예무역 사과 일지
제국주의와 노예무역
고대부터 존재했던 노예제도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경제체제 하에서 카리브 해 플랜테이션을 비롯하여 아메리카 대륙에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노예제도는 모든 면에서 그때까지의 제도와 확연히 달랐다. 근대의 노예소유주들은 플랜테이션 경영주요 자본가였던데 비해, 고대의 노예주들은 자유인이요 특권적인 시민 신분이었다.
전자는 노예노동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는 데 기본 목적이 있었지만, 후자는 노예들을 이용함으로서 지배자의 특권적 신분체제를 유지하는 한편 정치·군사·문화적으로 독점적인 활동을 위한 자원과 여가를 얻는 데 목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근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식민지 노예무역을 통한 노예의 상품화가 자본 형성의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영국의 경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의 한 축으로 흑인노예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삼각무역의 내용을 살펴보면, 본국에서 노예를 사는 데 필요한 물건인 럼주(酒)·총포·화약 등을 싣고, 아프리카 서해안에 이르러 흑인노예와 교환한 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노예를 팔고, 그 대금으로 식민지 물산을 구입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는 구조였다.
이러한 노예무역을 통하여 영국에서는 특히 브리스틀·리버풀의 상인들이 정부의 보호를 배경으로 사탕수수와 노예무역을 독점하여 항시(港市)의 번영과 더불어 막대한 이익을 올림으로써, 서인도는 영국의 중상주의적 식민제국(植民帝國)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더욱이 17세기 후반 이래 북아메리카 남부의 담배·쌀·면화·인디고(Indigo,어두운 푸른색의 고운 염료) 등을 생산하는 대농장에서도 흑인노예를 사용하여, 아메리카 독립 당시 그 수효는 50만 명에 이르렀다. 미국 연도별 흑인 노예 비율표
아메리카 대륙으로 아프리카 노예들을 가장 많이 수출한 나라는 영국, 그 다음이 프랑스였다. 하지만 이러한 순서는 18세기 이후였고, 유럽에서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탐험하고 교역한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1444년 아프리카 노예시장을 라고스(현 나이지리아)에 열었고 1552년에는 리스본 인구의 10%가 노예일 정도로 숫자가 증가하였다. 수입은 주로 스페인의 몫이었다. 1551년, 스페인은 아메리카 신대륙의 쿠바, 도미니카 섬 등에 첫 흑인노예들을 내려놓았다.
대부분의 노예는 아프리카 서부와 중부지역에서 잡혀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갔다. 특히 아프리카 서부의 8개 지역에서 1650년부터 1900년까지 250년 동안 약 1천만 명 이상의 노예가 팔려갔다. 서아프리카 인구 밀집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아프리카 노예들을 잡아갔기 때문에 노예해안(Slave Coast)이라는 지명까지 생겨났다.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잡혀간 아프리카 흑인들은 열대작물(면화, 담배,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는 대단위 농장(플랜테이션)에 일꾼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작물들은 당시 유럽에서 소비 수요가 많았다. 아메리카 신대륙에서는 넓은 토지를 값싸게 얻을 수 있었고 값싼 노동력으로 아프리카 노예들을 활용하여 농장 주인들은 고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노예무역을 지탱하는 결정적 축인 흑인들을 지속적인 상품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폭력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에서의 흑인사냥부터 시작하여 아메리카로 선적·운송하는 과정 그리고 아메리카 도착 후 농장에서의 생활, 전 과정을 통하여 폭력은 언제나 지속되었다.
1771년에는 영국의 노예무역선의 총수가 190척이나 되었고, 연간 4만 7000명을 운반하여 이윤은 30∼100%에 이르렀다. 그 반면 100t 정도의 노예선에 400명 이상을 적재하여 항해 중에 1/6이, 길들이는 동안에 1/3이 죽었다고 하며, 중간 항로에서의 잔혹하고 비참한 실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일명 흑색 다이아몬드라고 불린 흑인노예를 아프리카에서 매입할 초기에는 럼주·화약·직물(織物) 등을 현지 추장에게 지불하였으나, 1750년 이후에는 노예사냥을 통한 약탈로 대부분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유럽의 상인에 의해서 신세계에 운송된 흑인노예는 300년 동안에 150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노예에 대한 폭력문제와 아울러 또 문제가 된 것은 도덕성 논란의 대두였다. 아래에 간략한 노예제도 폐지 이력을 소개한다. 노예제도 폐지 이력
식민지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은 유럽 상업자본의 식민지 착취를 목적으로 한 것이어서 그 결과는 유럽 제국의 번영에 기여하였다. 교회도 이교도(異敎徒)에 자행한 일이므로 이것을 인정하는 편이었고, 정부나 일반여론도 이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인도주의·복음주의·민주주의 등 인권운동이 일어나면서 ‘인간수렵’의 비인간성과 노예선의 비참한 실정이 전해지자 점차 지식층의 비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퀘이커교 측에서는 1727년에 노예무역을 ‘허용할 수 없는 관행(慣行)’이라고 선언, 1783년에는 서인도의 노예해방과 노예무역의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협회를 설립해 일반 민중에게 호소하였다. 영국의 정계에서도 1772년에 국회의원인 D.하틀리(1732-1813)가 처음으로 하원에서 비난동의(非難動議)를 제출하였으나 부결되었다.
하지만 1786년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인 T.클라크슨(1760-1846)의《노예제도·인간매매론》발간을 계기로 G.샤프(1735-1813), J.람제이(1733-1789) 등이 노예폐지위원회를 창립함과 아울러 하원의원 W.윌버포스(1759-1833)와 협력하고, 1788년 전원위원회의 설립에 성공함으로써 노예무역은 겨우 정치 문제화되었다.
그러나 리버풀·브리스틀 등의 상인층과 서인도 세력으로 불리는 서인도 농장주 출신의 의원들이 직·간접으로 노예무역에 중대한 이해관계를 갖는 광범한 세력으로서, 의회에 제출된 결의안은 계속 부결되었다. 결국 1792년경이 되어서야 윌버포스가 제출한 노예무역의 점차적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결의안이 비로소 하원을 통과하였다.
그 발효기일이 1796년 1월 1일로 되었으나, 때마침 프랑스 혁명으로 빚어진 보수 세력의 대두로 실현되지 못한 끝에 1807년 W.그렌빌, C.J.폭스의 연립내각 때 “노예무역폐지법안”이 양원을 통과하였다.
한편 1802년에 덴마크가, 1807년에 미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하였고, 1814년에 프랑스도 1819년부터 금지한다는 요지의 협정을 영국과 체결하였으며, 기타 유럽 여러 나라와 새로 독립한 라틴아메리카 제국(諸國)도 노예무역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서인도제도와 미국 남부의 노예제가 존속하는 한 노예무역의 근절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윌버포스와 T.F.벅스턴(1786-1845) 등은 노예제도 그 자체의 폐지운동을 전개하여, 1838년 8월 1일을 기하여 유상방식(有償方式)으로 서인도제도의 노예를 풀어주는 노예해방령을 통과시켰다. 이어서 프랑스에서도 1848년의 2월 혁명에 즈음하여 노예제 폐지를 실현하였고, 마지막으로 미국이 남북전쟁의 와중인 1863년, 대통령 A.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을 함으로써 사실상 폐지되었다.
종교와 권력의 야합
지금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한 노예무역의 실태와 노예제도의 폐지에 이르는 과정을 대략 간추려 보았다. 하지만 노예무역을 불법화했어도 밀무역은 여전히 성행했으며,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한 이후에도 인종차별은 21세기를 맞은 현재까지 엄연히 존재함이 현실이다. 그러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중요한 사실은 로마 교황청에서 노예무역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는 점이다. 즉 노예문제 특히 아프리카 흑인들을 상품화하는 반인륜적이고 비도덕인 행위에 대하여 가톨릭 최고기관에서 면죄부를 발부해 주었다는 뜻이다.
1452년 교황 니콜라오 5세(Nicolaus V, 1447-1455)는 이교도들에 대하여 노예화하는 권리를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에게 부여했다. 그 뿐 아니라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 1492-1503)와 줄리우스 2세(Julius II, 1503-1513)는 1493년부터 1510년까지 일련의 칙령들로 스페인 왕에게 막대한 권한을 주었다. 즉 새로이 정복한 영토내의 교회를 통괄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왕실에게 위임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 국왕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활동하는 주교 및 기타 고위 성직자들을 지명하고 임명하는 권한까지 갖게 되었다. 뒤늦게 1537년, 교황 폴 3세가 이교도인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 대한 노예를 금지하는 교서를 발표하였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스페인, 포르투갈 등 가톨릭 국가들이 식민지 개척과 노예무역 등의 약탈행위를 자행할 때 로마 교황의 칙령을 이용하여 도덕적 합리화를 꾀했다면, 종교개혁 시기를 거쳐 로마와 단절한 개신교 국가들은 자국 왕의 권위로 모든 죄악을 덮어버렸다.
물론 그들도 최종적으로는 가톨릭 국가와 마찬가지로 신의 권위를 빌렸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영국 성공회의 수장이자 국왕인 엘리자베스여왕(Elizabeth I, 1533-1603)이다.
영국과 스페인은 16세기 내내 앙숙이었다. 스페인이 가톨릭 최후의 수호자를 자처한 반면 영국은 독자적인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를 국교로 삼은 다음 양국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직접 전쟁을 벌이지 않을 때라도 양국 선박들은 공해상에서 서로 상대방 배를 공격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주목할 점은 영국 왕실의 정책이다.
영국국왕은 해적들을 단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해적들에게 약탈허가증(Letter of Marque)을 발행해 해적 행위를 공식화했다. 이 무렵 활약한 해적들이 존 호킨스, 호킨스의 조카 프랜시스 드레이크, 월터 롤리 등이다. 오늘날 영국에서 이들은 해적이 아닌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는 해적들에게 약탈허가증이란 면죄부를 주었을 뿐 아니라 이 해적 사업에 자신이 직접 투자하기도 했다.
1564년, 존 호킨스가 4척의 배를 이끌고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를 공격했다. 이 사업에는 수많은 귀족들이 출자했을 뿐 아니라 엘리자베스 여왕도 자신 소유의 700t급 선박 '지저스(Jesus)'호를 선단에 참여시켰다. 호킨스는 베네수엘라에서 엄청난 금은보화를 약탈해 돌아왔다.예수의 이름을 판 해적선이 국왕의 약탈 허가 하에 온갖 노략질을 하던 시기, 바로 이때가 결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출발점이었다.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
1863년 링컨의 노예제도 폐지 선언 이후 대부분의 제국주의 나라들은 공식으론 노예제도의 불법화를 선언했다. 하지만 인종차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배경은 성서이다. 자신들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믿음이 있는 이상, 백인들에게 인종차별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관습이었다. 성서가 제공하는 잘못된 지식을 무기로 선민의식과 인종차별을 합리화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이다.
더욱이 미국은 일반 관습뿐 아니라 제도적 법률로 인종차별을 합법화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각종 인종차별 법안과 이 법을 둘러싼 연방대법원의 판례를 들 수 있다. 아래는 미국의 인종차별 중 몇 가지 주요한 사례를 정리한 것이다.
미국의 인종차별 사례
위의 예를 보듯 미국의 인종차별은 1863년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과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인다. 남북전쟁 이후에도 “짐 크로우 법”으로 통칭되는 흑백분리정책으로 일상 속에서 차별이 있어왔고 미국의 대법원은 1857년 드레드 스콧사건과 1896년의 퍼거슨 사건의 재판에서 흑인은 미국시민이 아니고 흑백분리는 당연하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전쟁이 아니라 남부와 북부간의 대결 같은 것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 제도 및 인종 간 갈등이 소멸되지 않는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은 성서가 제공하는 잘못된 지식을 무기로 한 선민의식이다.
미국에서 흑인들은 공화국이 수립될 당시 대부분 노예 신분이었으나, 1865년에서 1870년까지의 헌법 개정으로 기본적인 시민권을 처음 약속받았다. 남북전쟁의 결과로 채택된 연방헌법 수정 제13조, 제14조, 제15조는 노예제도의 폐지, 인종간의 평등 보장과 흑인의 참정권 부여 등을 규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헌법상으로는 흑인들도 백인과 동일한 자유와 권리 그리고 평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875년의 시민권 조례는 공공시설을 백인만이 아니라 흑인에게도 동등하게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남부 여러 주에서는 입법을 통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와 같은 기본적 권리를 유린하였다. 1900년에 이르자 북부와 서부에서는 이미 18개 주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공공정책을 법률로 제정했지만, 남부에서는 시민권을 침해하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였다. 예를 들어 가장 유명한 인종차별 조항 중 하나로 조부(祖父) 조항이 있다.
이 조항은 1867년 이전에 선거권을 가졌던 부친이나 조부의 자손 이외에 교육받지 않은 흑인에게는 선거권을 주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1883년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하고 1885년 수정헌법 13조에 의해 노예제도가 불법화되었다. 하지만 미국 주류 사회는 짐 크로우 법을 제정하여 연방헌법을 무력화시켰다.
'짐 크로'(본명은 점프 짐 크로)는 1828년 토머스 다트머스(대디) 라이스가 쓴 민스트럴극(흑인생활을 주제로 한 연극)의 주인공 이름으로, 이후 이와 유사한 극본을 쓴 조지프 제퍼슨 같은 사람들도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 용어는 점차 흑인에 대한 모멸적인 어구나 그들의 격리된 생활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1870년대 후반부터 카펫배거(전후 남부에 이주한 북부인)나 해방 노예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남부의 여러 주 의회는 공공 운송 수단에서 '유색인'(有色人)으로부터 백인을 분리시키는 법률들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법에서는 일반적으로 조상이 흑인으로 확인되거나 흑인 가계로 강력한 의심이 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유색인'으로 간주했다. 남북전쟁 이전 남부에서 유색인을 구별할 때 사용되었던 규정, 특히 조상이 프랑스계 '자유 유색인'일 경우 유색인으로 간주한다는 루이지애나의 규정 등은 폐지되었다. 백인과 흑인이 동등한 존재로서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러한 인종차별 원칙은 학교·공원·공동묘지·극장·식당으로 확산되었다.
1954년 연방 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을 위헌이라고 선언했으며, 짐크로 법의 다른 부분도 연이어 위헌판결을 받았다.
맬컴X와 마틴 루터 킹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유색인들에게 교육, 취직, 거주지, 각종 시설물 등 여러 일상적인 범위에서 금지, 제한하는 식으로 가해져 왔었다. 이렇게 인종차별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상황에서 많은 백인들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 들여왔고 그들의 생각과 양심도 변질되었다. 최근, 인종차별을 금지한다며 여러 제도가 바뀌었지만 개인의 정신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인종차별이 잔존하는 것이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선 투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1670년대,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이후 지속된 차별과 불평등에 대하여 흑인들은 자유와 인권을 위하여 끊임없이 저항해왔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점차 흑인들의 사회참여가 증가하고 사회 내에서 그 존재를 인식시켜 나갔고 이 시기는 50년대와 60년대의 활발한 민권운동의 파종기로 인식된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인종주의와의 전투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인종주의의 위험성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대부분 흑인들의 기본 생활조건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흑인들의 민권이 전국적인 관심을 지닌 문제로 출현하기 시작하였지만, 흑인들은 여전히 참정권의 박탈, 흑백분리법의 적용, 저소득의 생활조건 하에 있었고, 대부분의 가난하고 무기력한 흑인들은 완전한 시민법 획득을 위한 투쟁이나 기타 여러 가지 불평등을 철폐할 만한 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흑인들은 1940년대부터 활발히 짐 크로우 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하지만 그 무렵부터 백인들과의 직접적인 충돌도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흑인 민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사회의 주목을 끌고 실질적인 법안 제정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은 1950년대와 1960년대다. 그리고 운동의 중심에는 맬컴 X(Malcolm X, 1925-1965)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이라는 두 명의 거인이 있었다.
맬컴과 마틴은 외모부터 사뭇 다르다, 맬컴이 날카로운 눈과 긴 이목구비의 카리스마 넘친 모습이라면, 마틴은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모습으로 친근하고 푸근한 인상을 풍긴다. 외모처럼 두 사람이 태어나고 걸어간 길과 그들이 선택한 사상과 투쟁 방법도 너무 달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흑인 해방과 인간 해방을 위해 일평생 투신하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게 겸허하게 배우고 서로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우연하게도 만 40세를 채우지 못한 나이에 저격을 당해 죽었다는 점에서도 서로 뗄 수 없는 운명적인 동지와 같았다. 하지만 맬컴이 흑인의 손에, 마틴은 백인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 두 사람의 대조된 삶은 출생과 함께 시작된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반면 맬컴은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틴이 대학을 다니며 순조로운 삶을 즐기는 동안, 그 나이의 맬컴은 형무소 생활을 경험해야만 했다.
특히 맬컴의 유년 시절은 너무나 불우했다. 맬컴의 아버지는 광신적 백인우월주의 폭력단체인 KKK 단원들에게 참혹하게도 산채로 열차 선로에 놓여 져서 두 동강으로 살해되었고, 백인에게 겁탈당해 출생했던 어머니 루이즈는 이 일로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그 후 어느 날 주 복지국 직원들이 그녀를 정신병원으로 데려갔으며, 맬컴과 남은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의 집에 맡겨졌다.
마틴의 멘토는 당시 저명 인사였던 모어하우스 대학의 총장이자 목사인 메이스(Benjamin Elijah Mays)였고 맬컴의 조력자는 이슬람 민족주의자 단체의 설립자이자 리더였던 모하메드(Elijah Mohammed)였다.
1957년 마틴이 남부 기독교 리더십 컨퍼런스를 설립할 때 맬컴은 1953년부터 1964년 사이에 이슬람 사원에서 봉사하였다. 1952년 가석방으로 출옥한 맬컴은 성을 X로 바꾸고 이슬람 전도사로 변신해서 할렘의 옛 이웃을 찾아다니며 백인의 인종정책을 비판하고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엑스`라는 성은 그가 회교(Black Muslims)에 입교하면서 원래의 성을 버리고 대신 쓰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흑인들의 성은 원래 그들 조상의 것이 아니고 이들을 노예로 부리던 옛날의 백인 주인들이 멋대로 붙여주었던 것이니만큼, X자를 써서 흑인의 빼앗긴 이름을 상징한다는 것이 성을 바꾼 이유라고 한다.
흑인 해방을 위한 행동과 방향 역시 두 사람은 너무나 달랐다. 마틴의 부모는 "기독교인은 인간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백인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기독교신앙은 흑인의 존엄성과 인간의 평등함을 가르쳤다. 이런 과정에서 마틴은 고귀한 윤리적 기준, 혼신을 다해 일하기, 지적이고 강한 리더십의 필요성, 비폭력의 원칙을 강조한다. 마틴과는 달리 맬컴은 신의 정의, 흑인 간의 화합, 정신적인 자각, 자기방어, 흑백분리를 강조한다. 그가 진심으로 바란 것은 미국의 파멸이었다.
종교적인 관점도 달랐다. 흑인 기독교는 통합주의와 관련이 있는 반면, 이슬람 민족은 반(反)백인, 친(親)흑인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자였다. 정의와 사랑, 희망은 흑인 기독교 전통과 마틴 신앙의 핵심이었다. 흑인 침례교 전통 속에서 자란 마틴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확신, 노예와 주인의 화해의 꿈을 갖게 되었다. 십자가는 분리에 대한 반대, 통일과 화해, 비폭력의 원천과 표현이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백인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 마틴과 달리 맬컴에게 백인의 천국은 곧 흑인의 지옥이었다. 그의 신념은 이슬람 민족주의와 어릴 적의 소외감으로부터 자라났다. 그는 스스로 사회의 밑바닥으로 내려갔으며, 흑인 하층민의 욕구를 반영했다. 그는 사랑보다 정의를 강조했고, 알라 신의 정의로운 심판과 백인의 임박한 몰락을 선포하였다. 그는 백인 지배의 종교인 기독교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였고, "천성적으로 흑인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흑인(민족)성의 회복을 주창하였다. 맬컴은 기독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도 있다.
"기독교가 미국에서 이룩한 가장 큰 기적은 백인 기독교도의 수중에 있는 흑인들이 비폭력적이라는 사실이다. 2천2백만이나 되는 흑인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맞서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기적이다!”
1963년 8월 28일, 마틴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널리 알려진 ‘워싱턴 평화행진 연설’을 한다. 목적은 포괄적인 민권 법안의 제정이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지금 고난을 마주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건국 신조의 참뜻을 되새기며 살아가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 내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입니다.”
이 연설은 미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4대 명연설’에 포함됐다. 킹 목사는 이듬해인 35세 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다.
그러나 맬컴은 이 행진을 비판했다. “살아 있을 때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던, 백 년 전에 죽은 대통령의(링컨) 상(像) 앞에서 백인들이 주도하는 시위에 왜 흑인들이 열광해야 하는가?” 맬컴은 백인들을 ‘악마’라 칭했고, 이에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공적(公敵) 1호가 되었다. 늘 살해 위협에 시달렸기에 소총을 들고 스스로를 방어해야 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던 두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교감을 나누는 사이로 변하게 된다. 맬컴은 무하마드의 정치적 무관심, 그의 타락과 위선을 목도한 후로 그와 서서히 결별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통합주의, 흑인 민족주의와 시민운동의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생애 마지막 한 해 동안 그는 인종과 종교에 관한 흑인 무슬림의 믿음을 서서히 버리면서, 미국에서의 흑인 자유 투쟁에 대한 자신의 헌신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류애를 위한 보편적인 시각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 목표에 이르기 전에 그는 암살자의 총탄에 쓰러졌다.
맬컴 엑스의 치열했던 삶은 늘 백척간두에 선 위태로운 삶, 어떤 의미에서는 비틀거리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는 흉탄에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억압받는 자들의 저항을 생각하고 이야기할 때 우리가 그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한다면, 그는 영원히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맬컴의 죽음 이후 마틴도 비로소 '아메리칸 드림'에서 급진적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고, 맬컴이 꾼 악몽의 공포를 서서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백인의 무자비한 폭력과 흑인의 비참한 현실을 점점 더 심각하게 깨닫게 된 후로 미국에 대한 마틴의 낙관적인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법적, 형식적 평등보다 실질적, 경제적 평등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블랙 파워'를 목도한 후부터 그는 흑인의 자부심과 자기 결정권을 위해 흑인 분리주의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을 통한 미국의 폭력성과 경제적 모순에 대한 실망감은 미국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그도 미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고, 그 결과로 맬컴이 사망한 지 3년 후에 마틴도 백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맬컴 액스와 마틴 루터 킹, 너무나 다르면서 너무나 닮은 이 두 거인의 삶과 꿈은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왜 지금도 없어지지 않는가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주고 있다. 아래에 아메리카 이주 이후 미국 흑인들의 삶의 궤적을 정리해본다. 아메리카 이주 흑인인권 이력서
맬컴 엑스와 마틴 루터 킹으로 상징되는 20세기의 치열한 인권 투쟁을 통하여, 이제 법적으로 백인과 흑인을 차별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민권운동이 흑인들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의 절대 다수가 흑인 빈민층으로 드러난 점에서 보듯 흑백의 빈부격차와 흑백차별, 인종차별은 여전히 큰 문제로 남아있다.
가장 큰 문제는 백인들의 선민의식이다. 함, 야벳, 셈 이 세 형제에 관한 신화를 깨뜨리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4239§ion=sc7§ion2= |
첫댓글 개고생한 깜둥이들이 지금은 차별없는 지구를 위해 노력하고 있나요
그러게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무리)가 가진 이념이
어떠한가에 따라 좌우되는 거같아요.
가깝게는 단군조선의 홍익인간의 이념이,
멀게는 부도성의 '자재율'이 가동되는
그런 세상이 오기전에는 흰둥이나 깜둥이나
거기서 거기인존재들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