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녕(昌寧) 물계서원(勿溪書院) 탐방 안내
1. 서원 개요(書院槪要)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504번지에 물계서원(勿溪書院)이라는 유명 서원이 있다. 이 서원(書院)은 창녕성씨(昌寧成氏) 시조(始祖) 휘(諱) 인보(仁輔)의 아들 휘 송국(松國)을 비롯하여 충절(忠節)을 지킨 성씨문중(成氏門中) 21 선생을 봉안(奉安) 제향(祭享)하는 곳이다.
1710년(肅宗 26) 유촌공(柳村公) 휘(諱) 환(瑍)의 발의(發議)로 1712년(肅宗38)에 맥산(麥山) 북쪽 물계(勿溪) 위쪽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고려문하시중(高麗門下侍中) 諱 송국(松國)을 봉향(奉享)하는 창효사(彰孝祠)로 현판(懸板)하였다가 1719년(肅宗45) 세덕사(世德祠)로 개칭(改稱)하고 매죽당(梅竹堂) 휘 삼문(三問), 문두(文斗) 휘 담수(聃壽), 청송(聽松) 휘 수침(守琛), 대곡(大谷) 휘 운(運), 동주(東洲) 휘 제원(悌元), 판곡(板谷) 휘 윤해(允諧), 우계(牛溪) 휘 혼(渾)을 배향(配享)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송국(松國)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향사(享祀)하였다. 1729년(英祖5) 10월 16일에 8位의 위패(位牌-神主)를 봉향(奉享)하고 유림(儒林)의 건의로 물계서원(勿溪書院)으로 편액(扁額)하였다. 경종(景宗) 때 우상(右相)을 지낸 학암(鶴岩) 조문명(趙文命)이 초대원장(初代院長)으로 추대(推戴)되어 院長 손수 물계서원 현판(勿溪書院 縣板)을 써서 걸고 서원입규(書院立規)를 제정 게판(揭板)하고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제도를 따라 서원의 모든 규정을 법도(法度)에 맞게 제정하였다. 1787년(正祖11) 10월에 절효(節孝) 휘 수종(守琮)을 追享하였다. 1790년(正祖14) 10월에 원정비(院庭碑)를 세웠다. 이 碑는 대광보국숭록대부 행 판중추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 行 判中樞府事) 이복원(李福源)이 찬(撰)하고 통훈대부 행 가평군수(通訓大夫 行 加平郡守) 조윤형(曺允亨)이 썼다. 1797년(正祖21)에 정절(貞節) 諱 사제(思齊), 충숙(忠肅) 諱 승(勝)을 追享하였다. 1808년(純祖8)에 이헌(怡軒) 휘 여완(汝完), 인재(仁齋) 휘 희(熺), 판서(判書) 휘 수경(守慶), 청죽(聽竹) 휘 람(灠), 부사(浮査) 휘 여신(汝信)이 追享되었다. 1814년(純祖14)에 부용당(芙蓉堂) 휘 안의(安義)를 추향(追享)하고 1857年(哲宗8)에 동고(東皐) 諱 준득(準得)이 추향되었다. 1997年에 독곡(獨谷) 휘 석린(石璘)과 가정(稼亭) 휘 언충(彦忠)을 추배(追配)하여 현재 21위(位)를 봉안(奉安)하고 매년 2월 중정일(中丁日)에 유림(儒林) 봉사(奉祀)로 춘향대제(春享大祭)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이 서원은 1866年(高宗3) 조령(朝令)에 인하여 훼철(毁撤)된 것을 1995년 복원하여 제향(祭享)과 강학(講學) 및 교육(敎育)의 장(場)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지(垈地) 4,776坪(境內面積 3025坪 境外面積 1751坪), 건물(建物) 14개棟, 延建坪 206坪, 숭덕사(崇德祠)(舊 世德祠), 현도문(顯道門) 또는 신삼문(神三門), 강당(講堂), 물계서원(勿溪書院), 중부당(中浮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전곡청(典穀廳), 영보각(永寶閣), 무변루(無邊樓), 원정비각(院庭碑閣), 및 고직사(庫直舍)등 부속건물(附屬建物)이 있다.
2. 봉향(奉享) 21선생(先生) 행장(行狀) 개략(槪略)
(1) 시중선생(侍中先生, 成松國)-2世
창녕성씨(昌寧成氏) 시조(始祖) 고려중윤(高麗中尹) 휘(諱) 인보(仁輔)의 아들이다. 선생(先生)은 효행(孝行)이 지극(至極)하였다. 시조공(始祖公)이 송경(松京)에 조회(朝會)차 나갔다가 병(病)으로 별세(別世) 하자 천리부시(千里負屍)하여 오다가 창녕(昌寧)의 청산원(靑山院)에 이르러 날이 저물고 눈이 많이 와서 원(院)에서 가숙(假宿)을 하였는데 아침에 보니 호랑이 발자국이 시신(屍身) 주위를 맴 돌은 흔적(痕迹)이 있어서 이상하게 여기고 발자국을 따라 올라가보니 맥산(麥山)에 이르러 범의 발자국은 사라지고 자리 하나 넓이 정도만 눈이 녹아 있었다. 거기다 표시를 해 놓고 돌아와 이곳에 안장(安葬)하니 이곳이 명당(明堂)이었다. 그 후 선생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자손(子孫)이 대창(大昌)하였으며 사람들은 효성(孝誠)에 감응(感應)되어 그렇게 된 것이라 하였다. 후손(後孫) 참의(參議) 환(瑍)이 효행록(孝行錄)을 편집(編輯)하고 효행(孝行)에 관한 십도시찬(十圖詩讚)을 지었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서 주벽(主壁)으로 봉향(奉享)한다
(2) 이헌선생(怡軒先生, 成汝完)-5世
先生의 휘는 여완(汝完)이고 호(號)는 이헌(怡軒)인데 총랑공(摠郞公) 휘 군미(君美)의 아들이고 시중선생(侍中先生)의 증손(曾孫)이다. 고려말(高麗末) 1309年(己酉)에 출생하였으며 병자년(丙子年)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첨서밀직(簽書密直)과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를 지내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이태조(李太祖)가 등극(登極)하고 기로(耆老)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제수(除授)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封)해졌으나 공(公)은 모두 취임(就任)하지 않고 왕방산(王方山)에 은거(隱居)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1397年(丁丑)에 향년(享年) 89歲로 별세(別世)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고 1808年(純祖8, 戊辰))에 추향(追享)되었다.
(3) 동고선생(東皐先生, 成準得)-5世
선생의 휘는 준득(準得)이고 號는 동고(東皐)인데 시랑공(侍郞公) 휘 군부(君阜)의 아들이고 시중선생(侍中先生)의 증손이다. 벼슬은 총부상서(摠部尙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고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명태조(明太祖)와의 문답(問答)에 경륜(經綸)을 밝히니 매우 기뻐하고 관복(官服)과 악기(樂器) 및 홍무대통력(洪武大統曆)과 육경(六經) 사서(四書) 통감한서(通鑑漢書)를 하사(下賜)받았다. 1857年(哲宗8,丁巳)에 추향되었다.
(4) 정절선생(貞節先生, 成思齊)-6世
선생의 휘는 사제(思齊)이고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 휘 유득(有得)의 아들이고 시중선생(侍中先生)의 현손(玄孫)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고 이태조(李太祖)가 등극(登極)함에 차라리 왕씨(王氏)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李家)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동지(同志)와 더불어 만수산두문동(萬壽山杜門洞)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節槪)를 지킨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七十二賢)의 한 분이다. 시호(諡號) 정절(貞節)이며 1797年(正祖21, 丁巳)에 추향되었다.
(5) 독곡선생(獨谷先生, 成石璘)-6世
선생의 휘는 석린(石璘)이고 字는 자수(自修)이며 호(號)는 독곡(獨谷)인데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이헌공(怡軒公) 휘 여완(汝完)의 아들이 시중선생의 현손이다. 고려말 1338年(戊寅) 12月 3日 송경(松京) 독곡방에서 태어나 호를 독곡(獨谷)이라 하였다. 1355年(乙未) 18세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357年(丁酉)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감(國子監)에 제수(除授) 1387年(丁卯) 50세에 정2품(正二品)에 오르고 1401年(太宗1)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진봉되고 1402년(太宗2)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423年(世宗5, 癸卯) 정월(正月) 12일 86세에 별세하니 시호 문경(文景)이다. 1997年(丁丑)에 추향되었다.
(6) 충숙선생(忠肅先生, 成勝)-8世
선생의 휘는 승(勝)인데 양혜공(襄惠公) 숭록대부 판중추원사(崇祿大夫 判中樞院事) 휘 달생(達生)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6대손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歷任)하였고, 1456年 3月에 도총부도총관(都摠府都摠管)이 되었는데 아들 삼문(三問)과 함께 1456年(丙子)에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다가 김질(金礩)의 밀고(密告)로 부자(父子)가 함께 화(禍)를 당하여 1456年 6月 8日 순절(殉節)하였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고 1791年(正祖15) 辛亥 충숙(忠肅)이라 시호하였다. 1797年(正祖21, 丁巳)에 추향되었다.
(7) 인재선생(仁齋先生, 成熺)-8世
선생의 휘는 희(熺)이고 자(字)는 용회(用晦), 호는 인재(仁齋)인데 수헌공(睡軒公) 참판(叅判) 휘 개(槪)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6대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정원교리(承政院校理)였는데 명망(名望)이 조정(朝廷)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1456年(丙子)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連累)되어 김해(金海)에 유배(流配)되었고 1459년(己卯) 6월 본인의 자원에 따라 외방에 옮겨 안치되었다가 1461年(世祖7) 신사(辛巳) 6월에 안치(安置)에서 완전히 풀려나 공주(公州) 달전(達田)에서 두문은거(杜門隱居) 하였다. 1464年(世祖10) 甲申 3月 22日에 별세하였고 예조참판(禮曹叅判)에 추증되었다. 1808년(純祖8, 戊辰)에 추향되었다.
(8) 매죽당선생(梅竹堂先生, 成三問)-9世
선생의 휘는 삼문(三問)이고 자는 근보(謹甫)이며 호는 매죽당(梅竹堂)인데 도총관(都摠管) 휘 승(勝)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7대손이다. 1428年에 출생하였고 1438年(世宗20)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관(修撰官)에 있으면서 1447年(世宗2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 하였다.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서 훈민정음창제(訓民正音創製)의 주역(主役)이었다. 벼슬은 좌부승지(左副承旨)였는데 1456年(丙子) 端宗復位를 꾀하다가 김질(金礩)의 밀고(密告)로 실패)하여 순절(殉節)하였다. 숙쫑(肅宗)때 관작(官爵)이 회복되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이다. 1729年(英祖5, 己酉)에 봉향하였다.
(9) 문두선생(文斗先生, 成聃壽)-9世
선생의 휘는 담수(聃壽)이고 자(字)는 미수(眉叟)이며 호는 문두(文斗)인데 인재공(仁齋公) 교리(校理) 휘 희(熺)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7대손이다. 1450年(世宗32年) 진사(進士)가 되고 1456年(丙子)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 때 부친(父親) 희(熺)도 관련되어 김해(金海)로 귀양 갔다가 1461年(世祖 7年,辛巳) 6월 안치(安置)에서 완전히 풀려났으나 1464年(世祖10,甲申) 3월 22일에 별세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선생은 그 뒤 벼슬을 단념(斷念)하고, 파주문두리(坡州文斗里)에 있는 부친묘소(父親墓所) 아래에 둔거(遯居)하면서 독서(讀書)와 낚시로 소일(消日)하다가 별세하였다.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정숙(靖肅)이라 시호(諡號)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이다. 1729年(英祖5, 己酉)에 봉향하였다.
(10) 청송선생(聽松先生, 成守琛)-11世
선생의 휘는 수침(守琛)이고 자는 중옥(仲玉)이며 호는 청송(聽松)인데 사숙공(思肅公) 대사헌(大司憲) 휘 세순(世純)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9대손이다. 우계선생(牛溪先生)의 아버지이고 조정암(趙靜菴)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수학(修學)하였고 누차(累次) 제관(除官)하였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숙종 때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되었고 시호號는 문정(文貞)이다. 1729年(英祖5, 己酉)에 봉향하였다.
(11) 절효선생(節孝先生, 成守琮)-11世
선생의 휘는 수종(守琮)이고 자는 숙옥(叔玉)인데 대사헌(大司憲) 휘 세순(世純)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9대손이다. 조정암(趙靜菴)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과에 급제였으나 정사(政事)에 뜻을 두지 않았다. 가정(嘉靖) 계사년(癸巳年)에 별세하니 향년(享年) 39세였다. 1787年(正祖11, 丁未)에 추향되었다.
(12) 대곡선생(大谷先生, 成運)-11世
선생의 휘는 운(運)이고 자는 건숙(健叔)이며 호는 대곡(大谷)인데 송암공(松庵公) 부정(副正) 휘 세준(世俊)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9대손이다. 소과(小科에) 합격(合格)하여 두 번이나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오직 두문구도(杜門求道)하여 대학자(大學者)가 되었다. 1729年(英祖5,己酉)에 봉향하였다.
(13) 동주선생(東洲先生, 成悌元)-11世
선생의 휘는 제원(悌元)이고 자는 자경(子敬)이며 호는 동주(東洲)인데 부사(府使) 휘 몽선(夢宣)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9대손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수학(修學)하였다. 효행(孝行)이 지극하여 군수(郡守)가 천(薦)하여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어 6년간 관무(官務)에 종사(從事)하였다. 1506년에 출생하여 1559년에 별세하였다. 1729년(英祖5, 己酉)에 봉향하였다.
(14) 판곡선생(板谷先生, 成允諧)-12世
선생의 휘는 윤해(允諧)이고 자는 화중(和仲)이며 호는 판곡(板谷)인데 참봉(參奉) 휘 근(近)의 아들이고 시중선생(侍中先生)의 10대손이다. 상주원통산(尙州圓通山) 아래에 은거(隱居)하여 두문구도(杜門求道)하였다. 이름이 조정에 알려져 참봉, 왕자사전(王子師傳)과 태인현감(泰仁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였다. 1526년에 별세하니 향년 67세였다. 1729年(英祖5, 己酉)에 봉향하였다.
(15) 우계선생(牛溪先生, 成渾)-12世
선생의 휘는 혼(渾)이고 자는 호원(浩源)이며 호는 우계(牛溪)인데 문정공(文貞公) 청송(聽松) 휘 수침(守琛)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10대손이다. 가정의 학통(學統)을 계승(繼承)하여 도(道)의 깨달음이 매우 빨랐으나 과거(科擧) 공부를 폐하고 오로지 위기(爲己)의 학문에 마음을 두어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다. 후학을 가르치느라 서실의(書室儀)를 지어 학문하는 방법과 도학(道學)을 연구하여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세웠다. 1598년(戊戌)에 별세하니 향년 64세였다. 일부 사람들의 중상(中傷)으로 화(禍)를 입어 벼슬이 추탈(追奪)됨에 이르렀으나 인조조(仁祖朝) 때 복관(復官)되어 좌의정(左政丞)에 추증되고 문간(文簡)의 시호가 내렸다. 1682년(肅宗, 壬戌)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청송(聽松) 선생과 같이 배향享되었으며 1729년(英祖5, 己酉)에 봉향하였다.
(16) 판서선생(判書先生, 成守慶)-12世
선생의 휘는 수경(守慶)이고 자는 승약(勝若)인데 처사(處士) 휘 흔(忻)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10대손이다. 1592년(壬辰)에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어 왜침(倭侵)을 받자 조총(鳥銃)을 주조(鑄造)하고 화전(火箭)을 만들어 병기(兵器)를 마련하였고 군량조달(軍糧調達)을 완비(完備)하여 분전(奮戰)하여 적(敵)을 격퇴(擊退)시키고 노획물이 많아 대승(大勝)하기도 하였으나 계속되는 강한 왜침(倭侵)에 순절(殉節)하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1808년(純祖8, 戊辰)에 추향되었다.
(17) 가정선생(稼亭先生, 成彦忠)-13世
선생의 휘는 언충(彦忠)이고 자는 근숙(謹叔)이며 호는 가정(稼亭)인데 부정공(副正公) 휘 세온(世溫)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11대손이다. 1533년 1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나고 1567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가 되었다. 관직은 유일천(遺逸薦)으로 동부참봉(東部參奉)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 제자(弟子) 교학(敎學)에 정진(精進)하매 학문과 덕이 높아 세칭(世稱) 군자(君)子라 일컬었으며 선조(宣祖) 때 동국(東國)의 성리학(性理學)을 통달(通達)하고 가규(家規)를 만들어 형제우애(兄弟友愛) 종친화목(宗親和睦) 세교유신(世交有信)의 범절(凡節)을 세웠다. 또한 선생은 합천(陜川) 구산서원(龜山書院)과 영동양산(永同陽山)의 호계서원(虎溪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임정재(林亭齋)에 봉향하고 있다. 1997년(丁丑)에 추향되었다.
(18) 청죽선생(聽竹先生, 成灠)-13世
선생의 휘는 람(灠)이고 자는 사열(士悅)이며 호는 청죽(聽竹)인데 감사(監司) 증좌찬성(贈左贊成) 휘 세평(世平)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11대손이다. 학문이 정대(正大)하고 정밀심오(精密深奧)하여 주자학(朱子學)을 탐독(耽讀)하여 경륜(經綸)과 계획(計劃)이 명백하였다. 벼슬이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이르고 무주현감(茂朱縣監)에 제수되었다. 만력(萬曆) 경신년(庚申年)에 별세하니 향년 65세였다. 1808年(純祖8, 戊辰)에 추향享되었다.
(19) 창랑선생(滄浪先生, 成文濬)-13世
선생의 휘는 문준(文濬)이고 자는 중심(仲深)이며 호는 창랑(滄浪)인데 문간공(文簡公) 우계(牛溪) 휘 혼(渾)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11대손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해관(解官)하고 돌아왔다. 계해년(癸亥)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학행으로 천(薦)되어 영동현감(永同縣監)에 임명되어 문행(文行)과 충신(忠信)이 세상의 모범이 되었다. 1626년(丙寅)에 별세하니 향년 68세였다. 효종(孝宗)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1808년(純祖8, 戊辰)에 추향되었다.
(20) 부사선생(浮査先生, 成汝信)-15世
선생의 휘는 여신(汝信)인데 증한성우윤(贈漢城右尹) 휘 두년(斗年)의 아들이고 시중선생의 13대손이다. 기유년(己酉年)에 생진(生進) 양과(兩科)에 합격하고 계축년(癸丑年)에 동당시(東堂試)에 장원(壯元)하였으나 세도(世道)가 혼란(混亂)함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진주 금산리(晉州琴山里)에서 은거(隱居)하며 계칠약(雞桼約)을 맺어 여씨향약(呂氏鄕約)과 퇴계(退溪)선생의 동약(洞約)을 모방(模倣)하였고 많은 후생(後生)을 양성(養成)하였다. 1632年(壬申)에 別世하니 享年 87세였다. 1808年(純祖8,戊辰)에 추향되었다.
(21) 부용당선생(芙蓉堂先生, 成安義)-15世
선생의 휘는 안의(安義)이고 字는 정보(精甫)이며 號는 부용당(芙蓉堂)인데 참봉(參奉) 諱 적(績)의 아들이고 侍中先生의 十三代孫이다. 한강 정구(寒岡鄭逑)先生의 門下에서 修學하여 성리학(性理學)을 탐구(探究)하였다. 선조(宣祖) 신묘년(辛卯年)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자 창의(倡義)하여 창녕의병장(昌寧義兵將)과 초토사(招討使) 김성일(金誠一)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시에 곽재우장군(郭再祐將軍)과 함께 창녕화왕산성(昌寧火旺山城)을 지켰으며 戊戌年에는 영남조도사(嶺南調度使)가 되었다. 그 후 영해목사(寧海牧使) 남원부사(南原府使) 제주목사(濟州牧使)를 거쳐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하였다. 1629年(仁祖 己巳)에 별세하니 향년 69세였다. 선무공신(宣撫功臣)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814年(純祖14,甲戌)에 추향되었다.
3. 21선생(二十一先生) 배향(配享) 위차(位次)
4. 참고1:물계서원(勿溪書院) 간략 소개-창녕성씨 종중 관리의 물계서원은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504번지에 소재하며, 역사에 빛나는 창녕성씨 훌륭한 여러 조상을 서원에 모셔서 제사하는 곳이다. 처음에는 창녕군 대지면 왕산에 창효사(彰孝祠)로 건립되어 효행으로 드러난 시중공(侍中公) 성송국(成松國)선생을 향사(享祠)하여 온 것이 물계서원(勿溪書院)의 효시(嚆矢)이다. 이후 숙종 38년(1712)에 사당을 맥산의 북쪽 물계 위에 건축하였으며 영조 5년(1729)에 많은 선비들이 건의하여 사당(祠堂)을 서원(書院)으로 만든 다음 물계서원(勿溪書院)이라 호칭하였다. 시중선생(侍中先生)을 최상석으로 모시고 있는 이곳은 1989년 11월 기공하여 1995년 5월 복원되었다. 복원된 부지는 4,776평이고 경내 면적은 1,751평이다. 처음에는 시중공을 주향(主享)으로 7선생을 배향(配享) 하였으나 추배(追配)하여 19선생을 모시게 되었으며 근자 1997년에 독곡공과 가정공을 모시게 되어 21선생이 되었다.
이 서원은 시중공을 주향으로 모시고 매죽당(梅竹堂:성삼문) 선생을 비롯한 7선생이 배향되었으나 그 후 여러 번의 추향(追享)으로 모두 21선생이 배향되었는데 이 서원도 다른 서원과 같이 대원군(大院君)에 의해 1866년(고종 3)에 철훼되었다.
이 서원 자리에는 원정비(院庭碑)가 비각 속에 지금도 남아있는데 비의 비문은 판부사 이복원이 지었고 동지중추 조윤형이 썼으며 1790년(정조 14)에 세웠다. 공은 또 경북 영천군 화북면 대천동에 있는 대천사(大川祠)에도 제향되었다.
5. 참고2:성시중 효행록(成侍中 孝行錄)-공의 천리부시(千里負屍)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공의 14대손 유촌공(柳村公) 환(瑍)이 1732년(영조 8)에 발간하였으며, 그 후 공의 후손 인호(麟鎬)가 1900년(고종 37)에 중보 재간 하였고 이 재간본은 4권 1책 142면이며 내용을 보면 천리부시한 사실과 10효도(孝圖)가 있고 각 효도마다 찬(讚)과 시(詩)가 있으며 물계서원에 제향된 선생들의 행장(行狀)과 축문 기타 서원 관계 여러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6. 참고3:문화재자료 제366호(2005. 01.13) 勿溪書院院庭碑
소재지-경남 창녕군 대지면 왕산리 368. 물계서원 원정비는 건립 연대가 정조 14년(1790)으로 확인되는 바 시기상으로 보아 200년 이상이 되었고, 형태면에서도 18세기 후기에 많이 보이는 비석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옥개석 양 측면에 조각되어 있는 쌍조(雙鳥)의 모습과 옥개석 앞뒤 밑 부분에 2단씩 조각되어 있는 연목(椽木, 서까래) 형식은 목조가옥이 지붕을 연상케 해 주어 독특한 감이 있다. 이 비석의 비문 내용으로 보아서 물계서원(勿溪書院)의 유래와 배향 인물 19명의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경우 찬자(撰者)인 이복원(李福源)은 후일 정조 때 우상(右相)과 좌상(左相)을 역임한 인물로 학행이 있었고, 글쓴이 조윤형(曺允亨)은 당시 필법(筆法)으로 명성을 떨친 분으로 이 원정비의 격을 한층 높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