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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문덕수 시인 영면에 들다
심산 문덕수 시인 대한민국 문인장 거행
ㅇ 일시 : 2020. 3. 15 (일요일) 오후 5시
ㅇ 장소 ; 신촌 세브란스 장례식장 13호
ㅇ 주관 :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ㅇ 후원 : 한국현대시인협회. 심산문학진흥회. 한국시문학문인회.
한국시문학아카데미. 청마문학회
심산心汕 문덕수 시인 대한민국 문인장
문덕수 시인
심산 문덕수 시인(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이 2020년 3월 13일 오후 12시 40분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1928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53년 6.25 전쟁 때 육군장교로 참전하여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하였다
홍익대를 졸업한 뒤 1947년 문예신문에 시「 성묘 」를 발표하였고 1955년 '침묵' '화석' '바람속에서' 등의 작품으로 청마 유치환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마산상고 교사. 제주대 교수를 거쳐 1961년부터 1994년까지 홍익대 국문학과 교수를 역임 1981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 현대시인협회장. 1992년국제PEN한국본부 회장. 1995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1993년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해 왔다
심산 문덕수 시인의 시집 출간을 보면
1956년 첫 시집 「황홀 」
1966년 선. 공간
1975년 새벽 바다
1976년 영원한 꽃밭
1980년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
1982년 다리 놓기 1983년 문덕수 시선
1985년 조금씩 줄이면서
1986년 그대 말씀의 안개.
1994년 사라지는 것들과의 만남
1996년 금붕어와 문화.
1997년 빌딩에 관한 소문
2002년 꽃잎 세기
2006년 문덕수 시전집
2009년 우체부 등의 시집을 펴냈다
심산 문덕수 시인의 작품 성향은 순수 심리주의 경향이 짙어 현실 상황을 반영한 상징적 내면 세계의 미학을 추구한다
이외 논저로 1969년 현대문학의 모색
1971년 현대한국시론
1981년 한국모더니즘시 연구
1985년 현실과 휴머니즘 문학
1993년 시론
2010년 한국 시의 동서남북 등이 있다
1973년 「현대문학사 」로부터 「시문학 」지를 인수하여 부인 김규화 시인(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과 함께 현재까지 결호 없이 발행해 오고 있는 한국 현대 문학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수상경력으로
1964년 현대문학 신인상
1978년 현대시인상
1981년 아카데미학술상
1985년 국제PEN문학상
1995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96년 춘강상
1997년 서울시문화상
2000년 금관문화훈장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장례는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심산문학진흥회. 한국시문학문인회. 한국시문학아카데미 주관으로 대한민국문인장으로 2020.년 3월 15일 오후 5시에 신촌 세브란스 장례식장에서 거행한다
빈소는 서울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3호실
발인은 2020년 3월 16일(월)새벽 5시
장지는 국립대전 현충원 국가유공자 7묘역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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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수 시인께서 김동환의 『국경의 밤』 이후 최초로 서사시집을 발표하셨다. 이는 우리 문단이 자꾸만 소품화 되어가고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경향에 경종을 울리는 쾌거다. 영국의 계관시인 T.S 엘리어트가 1922년 서사시집 『황무지』를 발표한 지 87년 만에 우리 문단에 서사시의 한 획을 긋는 작품이 탄생된 것이다. 문덕수 시인의 우체부는 단순히 우체부가 아닌 우리나라 근대화를 이뤄가는 과정을 모두 보여주는 시다. 자신이 전장에 나가서 총상을 당하는 과정에서부터 어머니의 안타까움, 그 산하를 넘나드는 바람과 꽃에 이르기까지 문덕수 시인은 일제강점기로부터 6.25동란, 보릿고개로부터 민주화과정에 이르는 근대화과정을 한 편의 시집에 담아내고 있다. 이는 문덕수 개인의 작품이라기보다, 우리 한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작품이라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김순진(문학평론가 ‧ 고려대 평생교육원 시창작 강사)
시문학사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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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문덕수 선생님과 필자와의 인연을 끼적여 본다.
문덕수 선생님 영전에
김순진
어제 우리 문학계의 대부이신 심산 문덕수 선생님께서 타개하셨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문덕수 선생님은 우리 문단에 있어 최고의 학자이자 시인이셨다. 심산 선생님은 병환에 드시기 전까지 늘 글을 쓰셨고, 우리 문학의 자존심을 높이고져 문학이론을 찾아 밤을 새우는 일을 밥 먹듯 하셨던 분이다.
시인들이 이론이 있어야지 시만 쓰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한국시문학아카데미(금요포럼)을 창립하여 주도하시다가 후학들에게 넘겨주셨고 지금도 한국시문학아카데미에서의 이론공부는 매달 이어지고 있다. 저는 심산 선생님의 유지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한국시문학아카데미의 초창기 멤버로서, 그곳에서의 지난 15년 동안의 공부는 지금의 평론을 쓰는데 큰 밑바탕이 되었다.
한번은 한국시문학아카데미에서 심산 선생님과 나란히 같은 책상에 앉은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은 잡수시던 과자를 나누어주셨다. 저는 그 과자가 너무 아까워서 먹는 척하고 보관을 하다가 사진을 찍어둔 적이 있다.
2009년 여름에 심산 선생님께서 『우체부』라는 서사시집을 내셨다. 저는 그때도 한국시문학아카데미의 공부에 참여하였다. 그때 심산 선생님께 『우체부』 시집을 들고 가 사인을 받으려고 했다. “선생님 사인을 좀 해주세요.” 선생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김순진 시인, 열심히 하는 거 잘 보고 있어요. 내가 나에게 가장 큰 스승입니다. 열심히 하세요.” 그런 말씀과 함께 선생님은 『우체부』 장시집에 사인을 해주셨다. 심산 선생님은 제게 “김순진 형”이라는 호칭과 함께 사인을 해주셨다. 제가 황망히 놀라 “어이쿠 선생님 왜 그러세요. 젊은 사람한테요.”라고 말씀드리니, 심산 선생님께서는 “지금 저와 김순진 씨는 나이차이가 있지만 훗날 사람들은 우리를 동시대를 산 사람으로 기억해요. 그리고 이것은 심씨 가문과 김씨 가문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하대를 해선 안 됩니다.”라고 말씀해주셨다. 저는 그때 아무리 자식뻘이 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덕수 선생님은 2009년 계간 <스토리문학> 여름호인 창간 10주년 때 메인스토리에 특집으로 모셨다. 아끼고 아껴두었다가 특별한 때 모시고 싶어서였다.
소년시절부터 문덕수 선생님을 존경해왔다. 그래서 늘 선생님을 마음속의 스승으로 모시며 살아왔다. 시골에서 공무원을 다닐 무렵인 1987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인만세’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출현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선생님이 뵙고 싶어 일부러 서울에 올라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심산 선생님께서는 김남조, 김규동, 선찬경, 박희진, 이생진, 이근배 같은 분들과 함께 단상에 나오셔서 시인이 되고 싶은 나의 꿈을 부풀려주셨던 분이다. 그때 시낭송가를 전국 공모로 뽑아 상을 주고 고은정, 양지운, 배한성 같은 성우들이 나와 시낭송을 했는데 먼발치에서나마 선생님을 뵙던 생각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설렌다.
그런 심산 선생님을 평소 한국현대시인협회와 한국시문학아카데미 등의 문학활동을 통해 자주 뵈어 왔지만 나는 내심 속으로 스토리문학 창간 10주년 때는 문덕수 선생님을 취재해서 많은 후학들에게 좋은 공부꺼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많은 문인들을 취재해왔으면서도 문덕수 선생님의 취재만은 미루어두고 있었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2004년 6월에 창간된 <스토리문학>을 어떻게든 버티고 견뎌서 10주년이 되는 해에 문덕수 선생님을 취재하고 싶었던 것이다.
1950년 당시 심산 선생님께서는 중등학교 교원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경남 통영시에 있는 통영고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휴식일인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피로 물들인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중국과 러시아를 등에 업은 남침이었다. 부산이 민주주의와 자유진영의 교두보로 남아 있고, 마산과 통영시가 적의 점령 직전에 처해있었다. 모두들 군에 입대하기를 싫어하던 이때 심산 선생님께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터를 지원했다. 그는 학교로 돌아가면 후방요원증(後方要員證)을 발급받아 신변이 안정되었지만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그 길로 군에 입대하여 약간의 훈련을 받고 전투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마침 늦가을이라 벼가 익은 논바닥 길을 따라 산허리로 향하여 진격한 것이 인상에 선하다고 되짚는다. 어떤 상사가 그에게 “너 육군종합학교 가지!”하는 말을 듣고 그는 전선의 소대장 양성소인 육군종합학교 37기로 들어간다. 그리고 육군 소위가 되어 강원도 산악지대이면서 격전지인 사창리와 현리를 거처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인 금화 철원에 도착한다. 현리에서 참호 속 적의 시체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야영의 혹한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총격을 받아 죽을 뻔하기도 한다. 특명 연락으로 정찰을 끝내고 귀대 중 동두천과 연천 사이의 길에서 갑자기 ‘따따따, 따콩따콩’ 하는 따발총의 사격을 받고 풀숲으로 피신했지만 이미 적탄은 대퇴부를 관통했고 파편이 좌측의 눈두덩을 스치듯 지났으며, 왼쪽 두상에 파열상을 심하게 입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이미 의식을 잃었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적의 기습이었다. 누군가에 업혀 야전병원으로 옮겨졌으며 그 길로 수도육군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고 들것에 누운 채 트럭으로 운반되어 열차편으로 밤 내내 신음하면서 대구에 있는 제1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장소가 바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이었다고 한다. 제1육군병원은 넓은 마당에 들것에 누운 부상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쪽 다리를 잘린 병사, 외팔이 병사, 머리가 반쯤 깨어진 사람,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 이러한 중상자들의 집합소였다. 그들의 울음과 아우성과 신음소리는 온 도시의 구석구석을 덮었습니다.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멀리서 들으면 그 신음과 울음소리는 가을 들판의 풀벌레소리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부상병들의 신음과 어울려 울부짖는 병원에서 1년 반을 치료받은 그는 1953년 6월 1계급 특진으로 육군 중위가 되어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면서 제대를 했고, 이번에 대전국립묘지의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하게 된 것이다.
문덕수 선생님께서는 우리 <스토리문학>에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느냐는 질문에 “문학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수준 있는 작품이 실려야 합니다. 그간 보내준 스토리문학을 잘 보고 있습니다. 수준 있는 좋은 작가들의 작품이 실릴 때 문학지의 수준도 올라갈 것입니다. 이제 창간 10년이라는 업적을 이루었으니, 20년, 30년을 향해서 더욱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응원하겠습니다.”라고 격려해주시기도 했다.
나와 문덕수 선생님과의 인연은 33년 전인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문학도로서 포천에서 공무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문광고가 났다. 제1회 시인의 날을 최남선이 1908년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날인 11월 1일로 정하고, <제1회 시인만세>라는 제목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인대회를 한다고 했다. 그날은 우리 집에서 벼를 베는 날이었는데, 나는 출장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문덕수 선생님을 직접 뵈었고 퇴장하는 문덕수 선생님과 악수를 했다. 그때 그 자리에는 문덕수 선생님을 비롯하여 김남조, 김후란, 허영자, 신달자, 함동선, 성찬경, 박희진, 이생진, 이근배, 김규동, 황금찬, 최동호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모두 올라와 있었고, 제1회 전국시낭송대회를 개최하여 지금 유행하는 시낭송의 견인차역할을 하였다. 나는 그때 내가 훗날 저 자리에 올라가 행사를 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꿈은 지금 실현되고 있다.
수많은 문인들에게 어버이 같았던 심산 문덕수 선생님, 작은 출판사의 하잘 것 없는 잡지 <스토리문학>의 메인스토리 취재에 응해주시면서 격려와 용기를 북돋워주셨던 분이다. 나는 오늘 저녁 문상을 갈 것이다.
심산 문덕수 선생님! 훌륭하셨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문덕수(文德守) 시인 연보
아호는 심산(心汕), 혹은 청태(靑苔)
1928년 12월 8일(음 10월 17일) 함안(법수면 우거리)에서 출생
1942년 서당에서 한문 수학(소학, 논어 등을 수학)
1944년 3월. 우거초등학교 졸업, 그 해에 유학차 도일
1946년 5월. 제2차 대전 종전으로 일시 귀국
1946년 9월. 중등학교 졸업자격 시험을 거쳐 초등교원양성소 입학 수료 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1950년 2월. 중등학교 교원자격 시험에 합격, 통영고등학교(6년제 중학교) 교살로 부임
1950년 8월. 한국전쟁(6.25) 발발로 군에 입대, 명에 의하여 1951년 4월 육군종합학교 수료(제27기), 육군소위로 입관, 전선 (2사단)에 배속됨
1953년 6월. 격전지 철의 삼각지대에서 중상으로 후송년 야전병원-수도육군병원서울)-제1육군병원(대구, 경북대 의과대)으로 후송 가료 중, 불편한 몸으로 제대(육군중위)
1953년 7월. 마산공림상업고등학교 교사(발령은 1955년 6월)
1955년 3월. 홍익대학교 졸업(철학, 예술학 및 미학 등을 집중 수학)
1955년 10월.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은 뒤 문학에의 뜻을 굳혀, 시 『침묵』(1955년 10월.), 『화석』(56년 3월), 『바람 속에서』(56년 6월) 등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유치환의 추천으로 등단
1957년 11월. 제주대학교 국문과 전임강사에 이어 조교수(1960)
1961년 4월. 홍익대학교 국문과 조교수, 부교수, 교수(1994년 2월에 정념퇴임)
1963년 5월. 동인지 『시단』(8집까지)을 주재. 동인은 이형기, 신동엽, 함동선, 성춘복, 유경환, 정공채, 허유
1964년 1월. 국문학과 부교수자격인정서(1964), 교수자격인정서(1971)를 문교부로부터 받음 한국외국어대학, 서울대(교양과정부), 고려대(문과대, 사범대, 교육대학원), 숙명여대 대학원, 국민대 대학원, 상명여대 대학원, 중앙대 대학원, 연세대 대학원 등에 출강
1965년 4월. 월간 <시문학> 주재(2년간), 홍신선(동국대 교수), 양왕용(부산대 교수), 고창수(외교부 대사), 양채영, 이상개 등 시인들이 배출됨
1971년 7월. 월간 <시문학> 주간, 1977년 7월호부터 현재까지 김규화 발행인으로 발행.
1974년 1월. <한양>지 사건(문인간첩단) 발생. 이호철, 김우종, 장백일, 정을병 씨들이 투옥됨. 이들의 무죄와 석방운동을 하다가 연행되어 고문을 받다. 정부의 법정증언을 거부하다.
1979년 쓰쿠바대 대학원에서 한‧일 비교문학 연구(1979~1980)
1981년 4월.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1981-1984)
1981년 8월.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받음
1982년 3월. 홍익대학교 사범대학장, 이어 교육대학원장(1984. 3.)
1984년 4월. 태평양 연안 지역의 대표시인들의 작품집 『태평양연안시집』(Antbology, Poets of the Pacific Countries,성문각 84)을 주재년 Angela Ball, Theodore Weiss, Martha Collins, Peter Cooley(이상 U년S년A), Jose’ Emilio Pacheco(Mexico), William E년 Morris(New Zealand) 등이 참가
1991년 7월. 몽골 작가동맹초청으로 몽골 방문. 최초의 한‧몽 방문, 최초의 한‧몽 문학교류를 함
1992년 1월. 국제팬클럽 한국본부 회장. 재임 중 투옥작가 및 실직문인에 대한 권익옹호에 주력함
1992년 7월. 제9대 UNESCO 한국위원회 위원
1992년 9월. 아시아문학심포지엄(서울) 개최
1993년 7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94년 3월. 홍익대학교 교수 정년퇴임, 명예교수가 되다
1995년 3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이 되다
1999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에 징용되어 남태평양에서 희생된 한국인 노무자, 병사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중위령비’(KBS 주관, 사이판 근해)에 조시 「고이 잠드소서」를 쓰다
2000년 2월. 청마문학회 회장이 되다
2000년 ‘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은관문화훈장을 받다
2000년 6월. 도서 약 1만 5천권을 마산 창신대학에 기증(후에 약 5천권을 더 기증함)
2001년 2월. 국가유공자(6.25 한국전쟁 부상자로서)가 되다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으로 제47회 예술원상 ‘문학부문’을 받다
2006년 제7회 청마문학상을 수상하다.
상훈
1964년 현대문학상 수상
1978년 현대시인상 수상
1981년 아카데미학술상 수상
1983년 국민포장 수상
1985년 펜문학상 수상
1990년 유럽문학상(이탈리아) 수상
199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1994년 국민훈장목련장 수상
1996년 춘강상 수상
1997년 서울시문화상 수상
2000년 은관문화훈장 수상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2007년 청마문학상 수상
시집『황홀』(1956), 『선·공간』(1966), 『본적지』(1968), 『새벽바다』(1975), 『영원한 꽃밭』(1976),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1980), 『다리 놓기』(1982), 『문덕수 시선』(1983), 『조금씩 줄이면서』(1986), 『그대 말씀의 안개』(1986), 『만남을 위한 알레그로』(1990),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1991), 1997년 시집 『빌딩에 관한 소문』(1997), 『꽃잎 세기』(2002), 『우체부』(2009)가 영어, 중국어, 불어, 일본어, 스웨덴어 등 6개국의 언어로 번역 출판됨.
시론 및 평론집『현대문학의 모색』(1966), 『한국현대시론』(1974),『한국 모더니즘시 연구』(1981) 『현대시의 해석과 감상』(1982),『현실과 휴머니즘문학』(1985), 『오늘의 시작법』(1987), 『시론』(1993), 『청마평전』(2004), 『현실과 초월』(2014)/
기타저서『세계문예대사전』(1975) 등 20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출처] 6. 문덕수 장시집 - 우체부|작성자 김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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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박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