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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같은 미모, 아침 햇살 같은 행실” 唐 황족과 결혼… ‘끌려가 핍박’ 추정 뒤집어 “백제 왕실 후손 행적-가계도 공백 메울 자료” “남국(南國) 사람의 얼굴처럼 아름다우니 봄날의 숲과 가을 단풍 같았다. 아주 좋은 집에 살았으나 아침 햇살처럼 조용히 움직여 드러나지 않으니 세상에 드물게 어진 사람이며 덕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같았다.” 백제 패망(660년) 뒤 중국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의 후예로 당 제후의 왕비가 된 ‘백제의 여인’이 이토록 아름다웠다.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夫餘太妃)의 묘지가 중국에서 발견됐다. 그의 존재가 드러난 것은 처음이다. 김영관(한국고대사) 청계천문화관 관장은 13일 “중국 산시 성 고고연구소가 2004년 중국 산시 성의 헌릉(당 고조의 무덤)에 딸린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부여태비와 남편 이옹의 묘지와 묘비석을 발견했다”며 “최근 묘지 비문의 글자 831자를 판독한 결과 부여태비의 생애와 의자왕 후손의 가계도를 밝혀냈다”고 말했다. 이옹은 당 현종의 아저씨뻘 황족으로, 부여태비가 황족과 결혼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백제 왕실의 후손이 당으로 끌려가 핍박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정은 잘못됐음이 드러났다고 김 관장은 설명했다. 비문에는 부여태비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隆)의 손녀이자, 부여융의 아들인 부여덕장(德璋)의 딸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옹은 당의 수도 장안 외곽의 영토를 다스렸던 제후 사괵왕(嗣괵王)이었으며 690년에 태어난 부여태비는 711년 이옹과 결혼했고 727년 이옹이 죽은 뒤 맏아들이 왕위를 잇자 태비로 책봉됐다. 부여덕장은 당나라에서 종5품 고위 관직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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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왕건 설화중에 한 갈래인데요, 작제건이 용왕 딸을 얻어왔다는게 주류 설화라면 당 황제가 등장하는 설화가 비주류입니다. 황자시절 황해에 뱃놀이 나왔던 당 황제가 어찌저찌 떠밀려서 고려에 와서 씨뿌리고 갔다는 거.
효용 가치가 있는 동안은 고구려와 백제 지배층은 대우를 해줬습니다. 당에 항복한 연남생 자손도 묘지명이 발굴되고 있고. 보장왕도 스스로 부흥운동 비슷한 걸 꾸미기 전까지는 요동에서 대우해줬죠. 3, 4대쯤 지나면 거의 중화에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후손들의 묘지명을 통해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설마 후대에 이런 연구결과가 나오기를 예측한 당나라 황실의 융화정책은 아니겠죠?
당나라가 선비족계통이라 외주민족에게 관대한 편이였죠
차이나드림!~? 지금의 미국과 비슷하게 이민?(이라고 할수 있나?)자들이 성공한 사례가 많았던 당시 중국의 시대상 아닐까요?
흐음....
정복지 융화에 귀천상혼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