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라면왕 박종태[1].hwp
불가리아 라면왕, 박종태
1. 출장에서 만난 1990년대의 불가리아
그가 낯선 땅 불가리아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광운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무역회사에서 일하던 중 첫 출장을 가게 된 나라가 바로 불가리아였다. 그는 출장지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 불가리아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개방이 막 시작됐을 무렵이라 사회 전체가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생필품이 부족했다. 과거 사회주의 시절에는 국가가 무역을 관장하고, 모든 상점의 물품 공급이나 유통을 국가가 담당했었다. 하지만 체제가 바뀌면서 심각한 물자 공급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거리의 상점들은 물건을 공급받지 못해서 텅텅 비어있었고, 사람들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난리였다. 언제, 어떤 물건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사람들은 항상 비닐봉지(비상용 쇼핑백)를 들고 다녔다. 그렇게 거리를 지나다니다가 상점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뒤따라 줄을 서는 상황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는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물자가 필요한 시장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넘쳐나는 물건들을 가져다가 팔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10월 초에 출장을 끝내고 한국에 오자마자 사표를 냈고, 11월에 바로 회사를 차려 불가리아로 떠났다. 당시 그가 수중에 가지고 있던 돈은 한국의 집 전세금을 뺀 돈인 600만원이 전부였다. 그는 그 돈으로 자동차를 샀고, 물건은 한국에 있는 그의 친구가 공급해 주었다. 초반에는 식료품, 유아용품, 장난감, 카세트테이프, 신발, 문구류 등 다양한 물건을 취급했다. 시장이 아예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데다 현대자동차 등이 진출한 덕에 한국의 이미지가 좋아 예상보다는 쉽게 자리를 잡았다. 초기에 집중하던 원단 수입 사업은 특히 잘 되어 시장점유율이 30∼40%를 기록할 정도였다.
그 때 그가 팔았던 여러 품목들 중에 비전이 있다고 생각한 게 바로 라면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후 식량문제가 심각했던 1960년대 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준 고마운 식품이 라면이었기에 거기에서 착안한 것이다.
문제는 당시 불가리아의 라면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라면의 꼬불꼬불한 면발을 보고 벌레 같다고 질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유럽에는 뜨거운 국물이 있는 요리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들이 먹는 수프나 스튜는 따뜻하거나 미지근한 수준에 그쳤던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들에게 뜨거운 국물에 둥둥 떠 있는 전혀 생소한 음식을 소개하려면 이벤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유명한 호텔에서 5성급 호텔 셰프들을 초청해 라면 시식회를 열었다. 소고기, 닭고기, 야채, 커리 등 6가지 맛의 라면을 준비했고, 따뜻한 국물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끓여서 식힌 면에 토마토소스나 치즈를 얹은 라면도 따로 준비했으며 매운 맛도 거의 없앴다.
시식이 시작되고, 한 셰프가 뚱한 표정으로 면발을 쥐똥만큼 자르더니 국물에 살짝 담갔다가 입에 쏙 넣었다. 그가 ‘저래서는 라면의 참맛을 알 수 없는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셰프의 표정이 달라졌다. 맛이 괜찮았는지 그 셰프는 스파게티 먹듯 면발을 포크로 돌돌돌 말아서 먹었고, 다른 셰프들도 따라서 먹기 시작했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셰프들은 입을 모아서 “레스노! 꾸스노! 브루조!” 라고 말했다. 간편하고 맛있고 빠르다는 뜻이었다.
지금이야 라면 시식회라는 게 이야깃거리도 안 되지만, 그 때는 불가리아가 뉴스에 목말랐을 때라 그의 라면 시식회에 관심을 가져 주었다. 그에게 신문, 라디오, 국영 TV에서 기자들이 몰려와 취재를 하면서 뉴스에 라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 위기를 기회로
그렇게 그의 사업은 대박은 아니지만 꾸준히 상승 곡선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사업을 다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가 그에게 찾아왔다. 바로 사람들 때문이었다. 동양에서 온 서른 갓 넘은 젊은 사장을 직원들이 무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외상거래처에서 공금 횡령을 한다거나 창고에서 물건을 훔쳐가거나 중간에서 거래처를 빼가는 일들까지, 그를 좌절하게 만드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는 여러 가지 일들을 계속 겪으면서 점점 지쳐갔고, 영어를 잘해서 뽑은 회계사는 알고 보니 알코올 중독자여서 나중에는 권총으로 그를 협박하기까지 했다. 결국 문제를 일으킨 직원들을 다 내보내자 여직원 한 명이 남았는데, 그 직원은 그에게 많은 위로가 됐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양말 컨테이너가 와서 하역 작업을 하는 곳을 우연히 지나다가 여직원이 가방에 양말을 넣는 장면을 보게 되었고,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란 것이 무엇인지 몸소 경험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제대로 찍히고 나니 더 이상 이 나라에서는 회사를 운영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 그는 아내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 때는 1994년 11월이었고, 그에게 마지막 라면 컨테이너가 들어왔다는 연락이 온 시점이기도 했다. 보통은 인부들이 하역 작업을 하기 마련이지만, ‘마지막이니까 그냥 나 혼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비는 추적추적 오는데 조명도 없이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하다 보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비워졌고, 거의 작업이 끝나갈 무렵엔 ‘경험도 없이 외국에서 사업을 벌일 만큼 과감하게 도전한 내가 이 정도 위기를 견디지 못하다니. 지금이 다 포기하고 돌아갈 만큼 최악의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는 당장 다음날 직원들을 새로 뽑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 사람들이 나쁜 게 아니라 당시 혼란기였던 사회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허술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자신의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과 다르게 관리 체계를 확실하게 재정비했고, 직원들과의 유대관계에 신경을 썼으며 그들을 존중한다는 마음을 자꾸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3. ‘불가리아 라면왕’ 타이틀을 석권하다
그는 그렇게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라면 시장도 넓혀나갔다. 현재 불가리아에서 라면은 인기 식품인 동시에 불가리아 모든 식품 매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며, 유럽을 비롯해 세계 25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또한 그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합자(合資) 유통법인을 세우고 서유럽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으며 현지 파트너와 함께 터키, 중국, 미국에 현지 유통법인을 설립하는 중이다.
한민족글로벌벤처네트워크(INKE) 소피아 지부 의장인 그는 지난 2009년 10월 불가리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때 동행을 요청할 정도로 현지에서는 성공한 기업인이며, 유럽 내 손꼽히는 한상(韓商)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