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나를 만나러 온 사람 중 나이가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라 부를 수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메리였다. 십 년 전쯤에 그녀의 이웃이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중 한 명은 태어난 직후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메리는 그 아이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부터,
비록 그녀의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가 아니었음에도, 그 아이들에게 끌렸다고 내게 말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요람에 누워 있는 그 아기 조시를 처음 보았을 때,
메리는 아기의 얼굴을 만지기 위해 요람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이미 자신과 그 아이 사이에 하나의 연결,
하나의 유대 관계가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소울메이트(영혼의 동반자)'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개 완벽한 연인, 어쩌면 결혼할 상대 같은 남녀 관계의 관점에서 그 단어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소울메이트는 그런 게 아니다.
소울메이트는 어른일 수도 있지만 아이일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하지만 그 혹은 그녀는 당신 가까이가 아닌 세상의 다른 장소에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도우려고 얼마의 돈을 보냈던 사람일 수도 있고,
길에서 당신이 언젠가 지나친 휠체어 탄 남자나 다운증후군 아이일 수도 있다.
어느 누구라도 당신의 소울메이트일 수 있다.
조시가 자라면서 메리는 그 아이와 계속 아주 가깝게 지냈다.
아이가 아플 때나 문제가 있을 때 메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조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아이는 메리 아줌마를 보러 가야겠다고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엄마가 그 이유를 물을 때면 아이는 늘 같은 대답이었다.
"메리 아줌마에게는 지금 내가 필요해."
아이 엄마는 조시가 메리를 보러 가는 것을 늘 허락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어두워진 뒤거나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시는 허락을 받아 낼 때까지 끝까지 간청했다.
조시는 메리의 집 현관에 도착하면 문을 두드리며 말하곤 했다.
"메리 아줌마, 무슨 일이에요?"
메리는 다만 이 어린 소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 세상에! 오늘 내가 슬프다는 것을 알고 있네!'
두 사람은 소울메이트였다.
서로 나이차가 많고 같은 여자이지만 그럼에도 소울메이트였다.
메리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조시가 나의 소울메이트라는 것을 알아요. 나의 남편은 나의 소울메이트가 아니었다는 것도."
그것은 그녀가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해하게 된 사실이었다.
메리의 죽음은 나 또한 알고 지낸 조시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메리가 죽었을 때 조시는 마치 자기 가슴의 큰 부분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꼈다.
물론 조시는 앞으로의 삶에서 또 다른 소울메이트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 생애에 한 명 이상의 소울메이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따금씩 소울메이트를 그리워 하는 것은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너무 바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또한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를 소중히 여길 수 있고 그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바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꼭 우리의 소울메이트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소울메이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젊은이들이나 나이 든 사람들을 보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아닐 수도 있는,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행복을 가져다 줄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발견하는 일에
스스로 걸림돌을 놓는 셈이다. 소울메이트를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의 소울메이트가 당신의 삶을 통과하게 된다면,
짧은 순간이든 긴 시간이든 반드시 당신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호천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