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선연동을 지나며
이덕무(李德懋)
선연동 무덤의 풀은 떠나간 기생을 위해 나부끼고
부드러운 분 냄새 은근히 무덤에 풍기네
오늘의 예쁜 낭자들 아름다움 자랑 말게
이 중에는 옛날 아름다운 여인 무수하다네
嬋娟洞(선연동)
嬋娟洞草賽羅裙(선연동초새라군) 壤粉遺香暗古墳(양분유향암고분)
現在紅娘休訑艶(현재홍낭휴이염) 此中無數舊如君(차중무수구여군)
[어휘풀이]
-嬋娟洞(선연동) : 평양에 있던 기생들의 공동묘지
-賽羅裙(새라군) : 기생을 위해 굿을 하다. 賽(새) : 굿하다. 羅裙(라군) : 비단 치마. 곧 기생 을 뜻함.
-訑艶(이염) : 아름다움을 자랑하다. 訑(이) : 으쓱거리다.
[역사이야기]
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조선 정조 때의 학자로 호는 아정(雅亭) 또는 청장관(靑莊館)이다. 실학파의 한 사람으로 문장과 그림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가 있다.
이덕무는 경서에서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나 서자 출신으로 출세에 제약을 받았다. 그는 가난한 환경으로 인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책을 사 볼 형편이 아니었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의 책을 필사했다. 이덕무의 저술 총서이자 조선 후기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청장관전서』에서는 사실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여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는 1776년(26세) 서얼들의 문학동호회인 백탑시파(白塔時派)의 일원으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를 비롯하여 홍대용, 박지원 등과 교유했다. 1779년(39세)에 정조에 의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었다. 조선 후기인 18세기는 실학자들의 중국 방문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였다.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이들은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후 연행록을 남겼는데, 청나라 선진 문물에 경도된 연암파 실학자들과 달리 그는 청왕조의 지배 체제를 부정적으로 봤다. 중국은 중국일 따름이고 조선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용서성학(傭書成學)
이덕무와 관련된 말로 그는 살림이 곤궁하여 경문을 필사해 주고 받은 품삯으로 살았으며 자신을 위해 책 한 권을 더 베껴 공부하여 학문을 성취했다는 뜻이다.
이덕무에 관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이제 삼동 추위도 물러가고 / 아침 햇살에 언 벼룻물 녹으니 / 붓을 들어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습니다. / 손목은 끊어질 듯하고 / 온몸 자근자근 저려 오지만 / 식솔들 입에 더운 밥 한술 떠 넣는 일이 / 어찌 공으로 될 일이겠습니까”
(졸시 「벼루에 언 물 녹으니」 중에서 )
출처 : 한시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