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플룻의 거장 허비 만(Herbie Mann)은 재즈와 다양한 음악 장르간의 교합을 시도하며 대중적인 재즈 연주의 가능성을 제시한 인물이다. 50년이 넘는 활동 기간 동안에 그는 아프리카 ,아프로 큐반, 브라질 음악, 소울/펑키 등 50-60년대 미국 대중 음악계에서 각광받은 첨단 음악 사조를 재즈 플룻 연주로 소개해왔다.
일반적인 재즈 뮤지션답지 않게 히트곡을 다수(?) 보유한 허비만은 국내 음악 애호가들, 특히 대중을 상대로 하는 뮤지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70-80년대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나이트 클럽에선 허비 만의 'Memphis Underground'. 'Hi Jack', 'Comin' home baby'가 울려 퍼졌다. 연주한다는 사람치고 허비 만의 연주 1곡 정도는 누구나 알 정도로 현장에서 종사하는 뮤지션들에게 허비 만의 연주는 늘 동경과 카피의 대상이었다.
이렇듯 굳이 '재즈'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허비 만의 플룻 연주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성을 띄고 있었다. 한편으론 시류에 영합해 재즈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했던 그였지만 재즈 솔로악기 중에서도 변방에 자리했던 플룻 연주의 가능성을 주류 재즈계에 한껏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평가받아야 할 재목이다.
1930년 미국 뉴욕 블루클린 출생이 허비 만은 9살 때 접했던 베니 굿맨 오케스트라의 스윙 연주를 통해 재즈의 충격을 접한다. 이후 베니 굿맨처럼 클라리넷 주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이내 클라리넷 연주에 두각을 나타냈고 13살이 되던 해엔 프로 세션 연주인으로 나섰다. 세션 맨으로 활동하려면 멀티 주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로 이때부터 허비만은 색소폰과 플룻 같은 리드 악기를 하나씩 섭렵해간다.
찰리 파커로 대변되는 비밥의 열풍을 앞둔 상황에서 허비 만은 신세대 재즈 뮤지션들의 초절 즉흥연주에 매료됐고 관심은 자연히 색소폰으로 향했다. 그중에서도 시원한 느낌의 즉흥 솔로를 구사한 테너 색소폰주자 레스터 영에게 깊은 영향을 받는다. 재즈 맨이 되기로 결심한 허비 만은 1948년, 군에 자원입대해 4년간 이태리에 소재한 미군 부대 군악대에서 테너 색소폰주자로 일한다.
1952년 군에서 재대한 허비만이 먼저 찾아 간 곳은 재즈의 본령 뉴욕이었다. 이미 스탄 게츠, 알 콘, 주트 심스와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뉴욕을 점령한 상태인지라 허비 만은 선택의 여지없이 재즈 밴드에 합류해 내공을 다지는 수밖에 없었다. 1953년 맷 매튜 퀸텟의 일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허비 만은 필 우즈, 찰스 루즈, 샘 모스트등 많은 재즈 아티스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톤을 개발해간다.
테너 색소폰 주자로 커리어가 굳혀지는가했던 허비만은 보컬 주자 카멘 맥레(Carmen Mcrae)의 세션에서 사정상 녹음일정에 참여 못한 플룻 주자를 대신해 플룻 세션을 담당한다. 이를 계기로 허비 만은 다른 재즈 뮤지션들로부터 플룻 연주 요청을 받게 되었고 특히 보컬 사라 본의 1954년 작 < Sahra Vaughan with Clifford Brown > 에서 플룻 주자로 참여하며 명성을 얻는다. 이듬해인 1955년, 허비 만은 플룻 주자로 버브 레이블과 계약하며 밴드 리더로 나서게 된다.
당시까지 플룻이 자주 쓰이는 연주는 정통 재즈쪽보다 맘보-차차차를 연주한 아프로 큐반 밴드에서였고 자연히 그의 음악성 역시 라틴 재즈쪽으로 향한다. 그는 미국 내에서 활동하던 아프리카, 쿠바출신 타악기 주자를 대거 영입했고 밴드 내에 드러머가 4명이나 있을 정도로 리듬을 강조했다. 50년대 말까지 그의 밴드엔 레이 바레토, 윌리 보보, 올란투지, 파타토 발데스와 같은 라틴 출신 타악기 주자들이 거쳐간다.
1960년 어틀랜틱 레코드와 계약한 허비만은 아프로-재즈 섹스텟을 조직하며 앨범 < The Common Ground > 를 세상에 내놓는다. 앨범 타이틀처럼 허비 만의 밴드는 '대중적인 기반'에서 수용될 수 있는 인기 절정의 라틴 재즈를 메인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리듬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멜로디와 화성전개를 보강할 의도로 그는 밴드를 재편했고 1961년, 두 대의 베이스가 들어간 허비만 밴드는 < Live at Village Vanguard > 를 녹음해 수록 곡 'Comin' home baby'로 골드를 기록한다.
첫 히트로 고무된 허비만의 관심은 차츰 브라질에서 건너온 보사노바로 향하고 있었다. 색소폰 주자 스탄 게츠와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가 함께 발표한 < Jazz Samba > (1962) 가 미국 전역을 강타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허비 만은 직접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루로 날라가 보사노바의 명인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을 찾아간다. 조빔이 만들어내는 보사노바의 독특한 화성전개와 운치 있는 멜로디와 가사는 허비만을 매료시켰고 조빔의 보컬로 녹음된 'One note samba'가 수록된 < Do the Bossanova with Herbie Mann > (1963)을 발표한다.
보사노바에 심취한 허비 만은 한편으론 윌리 보보, 칙 코리아, 로이 아이어와 같은 뮤지션들의 음반에서 라틴 재즈를 연주했고 메인스트림 재즈쪽에서 각광받던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 트리오와의 협연 작 < Nirvana > (1964)를 통해 클래식 소품을 연상시키는 정통 재즈 연주를 소개한다. 그리고 그를 고민케 할 음악을 찾던 중 허비 만에게 다가온 건 60년대 후반, 대중적인 인기를 몰아 온 흑인 소울/펑키 뮤직이었다.
자신이 소속된 어틀랜틱 소속 소울 뮤지션들의 음악이 인기 상종가를 기록하는 걸 목격한 허비 만은 소울의 그루비한 리듬 진행에 흥미를 갖는다. 허비 만은 샘 앤 데이브(Sam & Dave) 와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을 배출한 소울의 본령 멤피스로 향했고 보사노바에 경도됐던 그의 음악성은 다시 한번 전환점을 맞는데 그 시작이 바로 그에게 두 번째 히트를 안겨줬던 < Memphis Underground > (1969) 였다.
단숨에 미국 내 댄스 홀을 점령한 'Memphis Underground'로 허비 만은 R&B 성향의 연주 음악으로 이후 70년대 내내 히트 행진을 이어간다. 비운의 천재 기타리스트 듀언 올맨(Duane Allman)이 참여한 'Push Push'(1971), 스페인 출신 그룹 바라바의 노래로도 각광받은 디스코 연주 'Hi Jack'(1975), 레게 리듬을 차용한 'Draw your back'(1976)이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상업적인 성공으로 인해 70년대 그가 선보인 연주는 재즈보다는 당시 인기를 모우던 R&B로 치우쳐지면서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은 퇴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1980년,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줬던 어틀랜틱 레이블을 떠난 허비 만은 한동안 두문불출하다 10년이 지난 1990년, 밴드 'Jasil Brazil'을 이끌고 재즈계에 복귀한다. 토리 카이뮈, 이반 린스와 같이 80년대 부상한 브라질 싱어송 라이터들의 곡을 연주한 앨범 < Caminho De Casa > 로 그가 라틴 재즈의 지존임을 만방에 과시한다.
90년대 들어 허비 만은 정통 재즈로의 복귀를 시도한다. 시류에 영합한 재즈 연주인으로 한동안 비난을 받은 그였지만 여전히 허비 만의 플룻 연주는 재즈 본연의 즉흥성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1995년 작 < America/Brazil > 은 인기 절정의 플룻 연주자 허비 만이 과거 촉망받던 정통 재즈 연주인으로 복귀되는 순간이었다. 65세 생일 기념 콘서트로 기획된 앨범에선 랜디 브렉커, 파키도 드 리베라와 같은 재즈 명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All Blues'와 'Summertime'를 재현해 냈다.
재즈 플룻티스트의 표상이었던 허비 만은 지병인 전립선 암으로 2003년 7월 유명을 달리한다. 반세기의 긴 활동기간 동안 허비만은 당대 첨단의 음악을 적극 수용하며 재즈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해왔다. 그가 발표한 모든 연주에 대해 균등한 평가를 내릴 순 없겠지만 대중적인 연주 음악을 선도하며 재즈가 연주자의 영역에서 대중의 영역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평가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