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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죄를 알게 한다
롬 7:7-13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롬 7:7-13 / [마음의 법과 육체의 법] 그렇다고 하나님의 율법이 악하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줄 아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게 죄를 알게 한 것이 율법입니다 만일 율법이 ㄱ) `탐욕을 품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들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죄, 그 잠복해 있는 악한 욕망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ㄱ. 출20:17(참조,신5:21) 8) 그러나 죄는 이러한 욕망이 악한 것이라는 것을 내게 알게 해주면서 내 속에 숨어 있는 모든 금지된 욕망을 충동시킴으로써 이 율법을 어기게 만들었습니다. 어길 율법이 없었다면 죄를 범하는 일도 없었을게 아닙니까? 9) 나는 율법이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몰랐을 때는 마음 편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았을 때 나 자신이 율법을 어긴 자이며 죽음을 선고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0) 그러므로 내 경우에는 생명의 길을 보여줄 것으로 생각했던 선한 율법이 그와 반대로 내게 죽음의 벌을 내려 준 결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11) 죄가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가시고 나를 속여서 그것으로 나를 죽을 죄인이 되게 만든 것입니다. 12) 그러나 율법 그 자체는 바르고 선한 것임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13) 그러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를 파멸시킨 원인이 된 율법이 어떻게 선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를 파멸시킨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실은 죄입니다. 죄가 율법을 사용하여 내게 죽을 죄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얼마나 교활하고 악착같고 가증스러운지 아셨을 것입니다. 악한 목적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한 율법조차 서슴없이 이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의 본질과 율법이 인간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7) 바울은 여기까지 본문의 편지를 읽는 독자들이 그럼 율법이 악인가? 죄를 유발시키는 원인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에 대해 혼돈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알려 준다고 말합니다. 한 예로 만일 “율법이 탐내지 말아라”하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탐심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도다(8-10) 여기서 탐욕을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들이라고 상투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생명의 존재입니다. 생명은 생명력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인간의 욕구, 욕망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욕망은 자기중심적이며, 멈출 수 없는 가속성과 방향성에서 잘못되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지 않은 보다 근원적인 변질된 욕망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는 멈출 수 없는 쾌락욕, 눈과 마음으로 아무리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 하나님 자리까지 넘보는 교만욕 혹은 우월욕입니다. 이런 변질된 욕망들이 사람의 인생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이런 욕망들에 한계를 정하거나 어떤 욕망들은 아예 금지라는 족쇄를 채웠습니다. 욕망은 일시적으로 제어될 수는 있어도 결국은 활화산같이 폭발할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11-13) 사실 율법 없이 살 때는 내가 무엇을 탐하든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몰랐습니다. 율법이 선물로 주어졌을 때 그 규정들을 알고 경이로움으로 그것들을 지키려는 순간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 앞에 죄인 되었다는 것과 사망이 되었다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 사실 인간은 모르는 것을 욕망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본 것과 아는 것이 욕망을 일으켜 탐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율법의 규정들을 아는 순간 금지와 한계를 정한 금지된 욕망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적용: 사실 우리는 욕망의 존재입니다. 다만 욕망의 방향성과 한계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얼마만큼 열망합니까?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 같은 목마른 갈망이 있습니까?
율법은 죄가 어떠함을 알려 주며 인간은 율법대로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게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뜻을 생각해 볼 때, 율법의 요구를 이룬다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의 성품과 의지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만이 이룰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 설 교 >
그리스도인의 영성
로마서 7:5-6 / 피종진 목사
우리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될 영성이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라고 육신에 따라 사는 사람의 생활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체를 가지고 있는데, 이 지체가 만약에 죄의 정욕에 의한 지체로서 쓰임을 받으면 사망의 열매가 맺혀진다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교회에 나와도 아직도 육신에 치우쳐서 생활하기 때문에 감정, 혈기, 분노, 이기심, 복수심 이런 것들이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육신에 치우쳐서 살게 되면 신령한 것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또 그 일에 대해서 사모하지도 않고, 또 그 일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6절에 보면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라고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사는 사람의 생활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지배를 받을 때에 취미가 달라지고, 사모하는 대상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의 보람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만 좋아질 수 있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고, 또 성령이 우리 가운데 모든 에너지가 되어질 뿐 아니라 성령이 우리의 지혜도 되어주시고, 우리의 모든 일에 보혜사로서 보호해주시고 위로해주시며 인도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세계보다 영적인 세계에 더 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영성은
첫째, 사랑의 영성입니다.
성령님을 모신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성 중에 가장 큰 영성은 사랑의 영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예수님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말씀이 거하시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고,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셔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제일 큰 은사가 사랑의 은사이고, 반드시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영성을 소유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용서가 있게 되고, 하나님과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도 이 사랑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해주시고, 인류를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이 사랑이 있는 곳에는 행복이 있게 하여주셨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전쟁과 싸움, 죽음과 멸망뿐이며, 사랑이 없는 곳에는 자멸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7∼40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참 힘드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참 쉬운데,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특히 원수를 사랑한다(마 5:44)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든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정말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곧 참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4∼7에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스펄젼의 좋은 사람이 되는 5대 비결에 대한 글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①꿈을 가져야 된다. ②영혼을 사랑해야 한다. ③중생을 체험해야 된다. ④항상 배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⑤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성품을 가져야 한다.」 이 다섯 가지 중에 '영혼을 사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사랑하는 자에게 많은 영혼을 맡겨주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감사의 영성입니다.
감사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짐승만도 못합니다. 짐승도 자기 주인에게는 감사할 줄 압니다. 그러나 오늘 감사가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헤칠 수도 있고, 자신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오늘 감사가 넘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7에 보면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믿음 위에 서있을 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 위에 서 있지 아니하면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만 감사하고, 괴롭고 어려울 때는 불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 위에 서 있는 감사가 아닙니다. 믿음 위에 서 있는 감사란 '앞으로 이런 어려움을 통해서 좋은 일이 있을 줄 믿습니다.'하고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가 믿음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미래지향적인 미래의 축복을 소망하면서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있을 줄 믿을 때 그런 감사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 2:9에 보면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소리를 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목소리로 감사하는 말을 많이 해야 됩니다. '믿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많이 할수록 말대로 더 좋은 일이 많이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말을 많이 해야 됩니다. 찬송의 소리를 높여야 됩니다.
셋째, 기쁨의 영성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자기가 기쁠 때 남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기쁠 때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영국의 시인 엘 프라이어는 말하기를 '네가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즐거워하기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이 멋있는 생활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항상 불평 속에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은사 중에 가장 큰 은사는 웃는 은사다'라고 말했습니다.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보통 축복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즐겁게 사는 사람,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도 찬송하면서 먹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욥기 8:21에 보면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편 126:2에도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기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기쁨의 영성을 가지고 있으면 양약(良藥)이 되어집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또한 얼굴을 빛나게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넷째, 인내의 영성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통해서라도 인내의 영성을 가지게 합니다. 믿음의 시련을 겪고 나면 인내의 영성이 만들어집니다.
인내는 ①영혼을 살립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②온전케 하고 부족함이 없게 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③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게 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④환난과 핍박 중에서 승리하게 합니다.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살후 1:4) ⑤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게 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영성 즉 사랑의 영성, 감사의 영성, 기쁨의 영성, 인내의 영성을 소유하여 육신의 세계보다 영적인 세계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마서 7:7-25, 예레미야 17:12-18절 / 정영구 목사
로마서 7장은 오늘 우리에게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남편과 은혜의 남편이 있었는데 오늘 율법의 남편이 죽었거나 또는 내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의 남편이 나를 주관하지 않고 나를 메이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은혜의 남편에게 메여있고 그에게 속해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자유함의 영, 자유하신 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원하는 사랑 그리고 헌신하는 사랑 그리고 내어줄 수 있는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믿으면 되는데 왜 사람들이 그 믿음의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할까? 우리가 70년 80년을 또는 평생을 예수라는 이름을 듣고 살았는데 왜 변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하는 우리들의 실제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법 자체가 들어가는 순간에 그 메카니즘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법이라고 하는 메카니즘 속에 들어가는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라고 하는 것 속에서 똑같이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진리지식은 알고 있지만 악한 몸, 악한 지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악한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가운데 왔다 갔다 좌충우돌 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인생을 갈지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법 가운데 들어가는 순간에 또 다른 죄의 동기가 되고 결과가 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이 말씀 속에 아주 중요한 세 가지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법이든 죄의 법이든 나와 상관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는 하나님의 법을 쫓아가지만 내가 죄의 법 앞에 서 있는 순간에는 죄의 법으로 갈 수밖에 없는 나와 상관없는 또 다른 이 원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죄와 죄인을 동일시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러 가시겠다고,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고 했을 때 완강하게 저지하고 완강하게 반대했던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고 말씀하시는 주님, 왜냐하면 베드로 그 자신이 아니라 베드로를 붙잡고 있는 죄의 법, 죄의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죄와 죄의 법을 구별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사람을 죽이는, 생명을 죽이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으로 들어가거나 죄의 법으로 들어가는 ‘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무지한 나일 수도 있고 또는 믿음이 좋은 나일수도 있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나일수도 있고 죄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나’가 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죄와 나를 분리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로서의 죄가 있고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절망스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지식을 가지고 있는 나, 이미 복을 받은 나, 이미 하나님 앞에 축복받은 나라고 생각하는 나가 있는데 여전히 내가 허우적거리고 절망할 수밖에 없고 또 다르게 반복할 수밖에 없는 나가 있다고 하는 이 비참함, 이 절망스러운 나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사도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는, 너희는 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얘기하던 사도바울이 이 순간에는 1인칭 ‘나’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은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도바울은 ‘나를 본받으라.’라고 아주 자신 있게 얘기하고 있고 생명을 통해서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할 정도로 어떻게 보면 대단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 믿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자기의 정체성을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곤고함, 이 비참하고 절망스럽고 심각하고 계속 그것을 반복하고 있는 그래서 자기 자신 스스로도 보기 싫은 너무나 보기 싫은 그 모습, 비참한 자기의 모습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법은 결코 아름다울 수도 없고 우리가 어떻게 포장할 수도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빨리 절망스러운 상황으로부터 심각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23절)’
17절에 가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가 행하고 있느니라(17절)’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딜레마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고 죄의 법이 있는 이 두 가지 상황 속에 늘 처해있는, 하나님의 법으로만 살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는 내가 직면한 문제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내 모습, 그것이 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아니 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보내셨습니다. 율법을 보내신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그 율법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12절에 그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말씀합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데 사람들은 그 율법을 통해서 죄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그 안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죄가 살아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진노하심, 하나님의 뜻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이 율법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인간의 추함이 있고 인간의 회피가 있고 인간의 욕망이 그 안에 숨겨져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율법이 우리 몸속을 보여주는 X-ray 라고 생각합니다. X-ray를 찍으면 내 몸의 어디가 막혔는지 어디가 아픈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X-ray는 나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를 치료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X-ray의 용도는 어디가 아픈지를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입니다. 치유의 도구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치유할 것이라고 얘기하고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추악함을 봅니다. 그래서 말해주고 싶어 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말해주고 싶습니다. 내가 속을 훤히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뇌를 찍은 사진을 봤는데 뇌가 막히니까 한 쪽이 하얗게 보였습니다. 어디가 막혔는지 아는 것입니다. 막혔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막혔다고 얘기를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와 아니오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정죄하는 것으로 쓰고 싶어 합니다.
환자의 병은 의사와 가족들만 알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다르게 이용할까봐 그 환자의 정보를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다 X-ray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공항에서 적외선 카메라를 통과하는 것이 인권침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라고 하는 율법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계속 들여다 볼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가 막혀 있구나. 어디가 아프구나. 위가 안 좋구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것인데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의롭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선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정죄하고 있습니다. 죽은 시체를 찾고 다니는 하이에나 같은 느낌입니다. 쓱 지나가며 누가 죄를 짓는지 둘러봅니다. 말씀을 배우면 배울수록 더 날카롭고 더 분명하게 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 ‘친절해지려면 때로는 잔인해져야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은 무조건 다 받아주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보여주는 인간의 실상들을 보면서 정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비참함과 인간의 절망을 보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개인을 얘기합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합니다. 그런데 개인을 이야기하면서 이기주의로 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와 관점에 대해서 주관 있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주관이라는 것이 객관성을 읽어버리면 감정주의로 치우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람직한 행동규범이라고 하는 도덕과 윤리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도덕과 윤리는 소위 성공이라고 하는 성공주의에 빠져있는 도덕과 윤리입니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비참함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곤고함입니다.
어떤 때는 내가 개인이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가 어느 순간에 이기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나를 보게 되고 늘 뭔가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라고 하는 것을 얘기하면서 감정주의로 치우치고 뭔가 도덕과 윤리를 얘기하면서 어느 순간에 어떤 것이 성공하는 것이냐, 어떻게 하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느냐 라고 하는 성공주의에 빠져있는 나를 봅니다.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17절)’
내 안에 죄가 작동하는 순간에 사람은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나도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와 내 속에 있는 죄를 동일시하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하는 이 절망 가운데에서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하는 이 비참함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고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율법의 정신은 ‘나는 할 수 없다.’ 라고 얘기합니다. ‘나에게 어떠한 희망도 없다.’ ‘나는 입법자도 될 수가 없고 심판자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기능은 나는 곤고한 사람인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설명은 다른 사람이 몰라서 해 줘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감해주기 위해서 변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외면하기 위해서 침묵합니다. 율법의 기능은 설명도 변명도 침묵도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곤고한 나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빨리 깨닫고 있어야지만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 얘기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사도바울이 갑자기 25절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라고 얘기합니다. 곤고한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가장 비참하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할 수 없음을 통해서 할 수 있는 다른 존재,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변명을 하든 어떤 설명을 하던 침묵을 하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심과 생각들을 계속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열심이 끝나야지만 하나님의 열심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그칠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어느 순간에 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자기의 비참함과 자기의 곤고함을 보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점프를 해서 로또와 같은 인생, 지름길로 가는 인생, 어쩌면 우리는 기적이라고 하는 이름을 통해서 또는 신비를 통해서 하나님을 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선물을 주시는 그 분으로만 생각하고 자기인식을 못하는 것입니다.
맑스는 얘기합니다. 종교가 아편이라고. 현실을 못 보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현실직시를 못하게 합니다. 얼마나 비참한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이 얼마나 곤고한지를 못 보게 하는 것이 아편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은 떠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곤고한 사람인지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답이 없는 사람인지를 보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6절)’
이 두 가지 상황 속에서도 나는 꿋꿋하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겠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 아닙니까? 내가 현실을 외면한 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질구질하고 비참하고 곤고한 이 삶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에 내가 하나님의 법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가 있는 현실 속에서도 내가 감사하고 살겠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 ‘복음은 있는데 복음의 능력이 없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 비참함이 어떻게 보면 쥐엄열매 먹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내 삶 속에서 이럴 바에는 아버지 집에 가서 종노릇이라도 하겠다고 하는 심정을 가지고 아버지 집으로 가는 내 발걸음, 그 비참함, 그 곤고함을 가지고도 나는 여전히 살겠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주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망해도 덤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감리교라고 하는 교회를 세우면서 감리교정신이 없어지는 것은 두렵지만 감리교회가 없어지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송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목적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찬송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사방에 우겨쌈이 있다 할지라도 누가 뭐라고 해도 찬송하는 것입니다. 내 입에서 단물과 쓴물을 동시에 낼 수 없는 것처럼 내 입술에서 하나님의 찬송이 끊이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상황 속에서도 주님 앞에서 ‘물러가지 말라.’ 고 합니다. 물러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문용어이긴 하지만 ‘못 먹어도 고’ 하는 것입니다. 어제 조카가 집에 와서 하루 종일 Let it go 노래를 불렀는데 Let it go.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 비참하다고 얘기하십니다. 인생, 고난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종교가 그 고난 가운데서 어떻게 벗어날까를 얘기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고난의 발자국을 하나하나 밟고 물러서지 말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바꿀 수 없으면 Let it go. 하셔야 됩니다. 물러서지 말고 주님 안에서 주님의 것을 지키면서 진리를 가지고 분명하게 기다리면 새롭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식민지의 삶을 살았고 포로의 삶을 살면서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오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재앙의 날에 내가 심판자가 될 수 없고 내가 정죄할 수 없고 내가 입법자가 아닌데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재는 좀 어떻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비참함 속에서도 내 입술로 찬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비참함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내고 그 원리를 지키고 그 믿음의 뜻을 좇아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주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주님 내가 찬송했습니다.’ 말하는 것입니다.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세계관은 반드시 여호와의 날이 있을 것이고 여호와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심판의 날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축복 받고 더 풍성해지고 더 존귀해지는 존재가 되기를 그래서 이 속에서 견디고 이기고 버티고 그래서 그렇게 주님 앞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우리 하나교회 지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말이 있습니까
로마서 7:7-17 / 백장흠 목사
사람을 만나 인사할 때 언어구사를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들은 보통 날씨로 인사합니다. 지난해 많이 더웠지요.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아니면 식사 여부로 인사합니다. 인사할 때에는 듣는 이에게 칭찬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인사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듣는 이에게 구체적인 내용이 훨씬 우호적입니다. 무엇보다 상황이 참 중요합니다. 즐겁고 축하할만한 일이 있을 때에는 같이 기뻐하는 마음을 보이면서 말해야 합니다. 슬픔을 만난 사람에게는 위로의 말로 인사하는 겁니다. 그러나 상가 집에 가서 인사말은 쉽지 않습니다.
어느 대학생이 친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문상 차 갔습니다. 뭐라고 인사하였는가 하면 안녕하세요? 그때 상주는 대답하기를 안녕하지 못합니다. 그랬답니다. 그 다음 분위기는 어떠했겠습니까? 문상인사는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얼마나 애석하십니까? 사람들이 흔히 할 말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화가 나면 할 말이 없다고 합니다. 할 말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자랑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겨우 두 살짜리 아이인데 어찌 나 똑똑하고 분명한지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누가 큰소리치면 자기도 큰소리칩니다. 겨우 소변을 구분한지 몇 차례입니다. 그 아이가 어느 시간에 분간을 못하고 볼 일을 보았습니다. 자기 엄마가 뭐라고 나무랍니다. 혼냅니다. 이 아이 좀 보세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딴전을 피웁니다. 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랑스럽지 못한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했을 때 할 말이 없어집니다.
로마서 7:1절 이하에서 율법이라는 남편이 죽었을 때 자유자가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나쁜 것이냐?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율법 앞에서 할 말이 있느냐? 율법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1. 율법이 죄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운전하는 이들이 단속반에 걸립니다. 경찰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귀하는 도로 교통법 몇 조 몇 항을 위반하셨습니다. 면허증을 제시하십시오. 운전자들은 대부분 나는 법규를 어기지 아니하였다라고 우겨봅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차라리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나 바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싼 걸로 끊어주세요. 이것이 낫습니다. 교통법규를 어긴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도로 교통법이 있어야 합니까? 없어야 합니까? 자유롭게 운전하고 싶은 이들이 하는 말 도로 교통법을 폐지하라 그래야 자유롭다 자유롭다는 말은 좋습니다. 그러나 도로교통법은 있어야 교통질서를 유지하고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겁니다. 사람이 세상을 바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법이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합니다. 법 중에 양심의 법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도덕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는 국법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법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죄로 알게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 있다는 것이 나쁜 겁니까? 그 율법이 있기에 살인하면 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율법이 인격을 존중하고 생명을 보호하라고 주신 법입니다. 율법이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그 예로 탐내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탐심이 죄라고 아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그리고 탐심은 표현이 잘되지 아니합니다. 욕심이 많아 그러면서 그것이 정당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탐심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좀더 갖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범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탐심입니다. 바울 자신도 탐내지 말라는 율법 계명이 없었다면 죄인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 같이 율법은 죄를 알게 합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죄라고 알려주는 게 잘못하는 겁니까? 의사가 건강을 위한 진찰하고 결과를 알려주는 게 잘못이 아닌 것 같이 율법이 죄를 알려주는 게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율법이 죄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율법이 아니었으면 죄를 죄로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알려줍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나쁜 것입니까?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사람과 그리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행위문제 이전에 관계 문제입니다. 죄는 마음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한 것이라 하셨고, 마음으로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젊은이가 예수를 믿고 성경을 읽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라는 성경을 읽고 묵상 하다가 이 말씀을 실천하기로 마음먹고 교회로 갔습니다. 가장 믿음이 좋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깨달은 바는 어김없이 실천한다는 지긋하신 장로님에게 다가가 아무 이유 없이 뺨을 후려갈겼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장로님이 노발대발하시는 것입니다. 청년은 씩~씩~대면서 마태복음 5:39절을 펼쳐 보이면서 이것 보세요. 그랬더니 장로님이 청년의 머리를 툭 때리며 내가 화가 안 나겠어 성경대로라면 오른 편을 먼저 쳐야지 자네는 내 왼편을 후려쳤잖아 그러더랍니다. 누가 죄가 없습니까? 율법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 율법의 대 주제는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이 모든 관계를 맺어주는 고리입니다. 사랑하면 관계가 좋아집니다. 비교적 고부간에는 관계가 항상 불편한 관계입니다. 예전에 여자가 친정 갈 때에는 여자가 앞섭니다. 빨리 가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친정에 갔다가 시댁으로 돌아올 때는 여자가 뒤에 섭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어렵다는 겁니다. 시누이는 꼭 시누이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시집간 젊은 새댁이 시금치를 먹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시편은 안 읽는답니다. 왜 시 자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가 깊어져 있으면 반대 현상입니다. 어느 며느리는 시어머니보고 엄마라고 부른답니다. 실제 엄마 같이 느끼기에 엄마라고 한답니다. 그러니 자연이 시어머니가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행복한 며느리입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사랑 받을 때 살맛 납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며느리, 사랑하지 못하는 시어머니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대주제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지켜 행하면 복을 주신다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데 문제입니다. 율법이 죄를 알려 줄뿐만 아니라 정죄합니다. 너는 율법대로 살지 못하였으니 죄인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 율법 앞에서 할 말이 있느냐 그겁니다.
2. 율법이 정죄 한대로 죄가 나를 죽게 하였습니다.
무슨 말을 하겠느냐? 그겁니다.
율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라와 하지 말라입니다.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하고 싶고 하라 하면 더하기 싫어집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하게 됩니다. 이것을 본성의 부패라고 말합니다. 부패한 인간들이 해서는 안 되는 짓만 합니다. 부패한 자유의지라는 말을 합니다. 자유 의지를 선용하는 게 아니라 악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범죄 하게 되는 겁니다. 미국의 유명한 뉴스 해설가인 ‘폴 하비’(Paul Harvyy)는 추운 지방에 사는 에스키모들이 어떻게 늑대를 잡는가? 그 특별한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늑대를 잡기 위하여 날카로운 칼날에 피를 묻힌 후에 그것을 얼리는데 이것을 반복하면 나중에 칼날이 얼어붙은 피에 숨겨지게 됩니다. 이 칼날이 들어있는 피로 된 얼음덩어리를 늑대가 많이 다니는 툰드라(Tundra) 지역에 묻어 둡니다. 에스키모들은 칼날을 위로 올라오게 묻습니다. 그러면 늑대는 피 냄새를 맡고 다가와서 얼어붙은 피를 혀로 핥기 시작합니다. 늑대가 계속 피를 핥아먹으면 날카로운 칼날이 나타나지만 늑대의 혀는 이미 차가운 얼음을 핥은 중에 감각이 없어져서 자기의 혀가 갈라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 줄을 모른 채 더욱 열심히 계속 핥아먹습니다. 드디어 늑대는 피를 많이 흘리고 쓰러질 때까지 피를 마시다가 죽는 다고 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다음은 욕심으로 무감각해진 상태에서 계속 범죄 하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신앙은 형식화고 죄에 대하여 감각이 없어졌습니다.
죄에 대하여 내성이 생겨 죄책감도 없습니다. 어떤 약을 계속 복용하면 그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약효가 처음보다 떨어지게 되는 것 같이 독약도 조금씩 분량을 늘려 가면 독에 대한 저항력이 생겨서 보통 사람에게 치사량이 되는 양을 먹어도 죽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기원전 1세기경 소아시아에서 번영하던 폰 투스라는 나라가 있었답니다. 국왕의 이름은 미트라다테스였고, 그 당시 독약에 대하여 많이 개발됨에 권력투쟁에서 독약을 사용하는 암살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왕은 한 가지 묘안을 고안해 냈는데 여러 가지 독약을 각각 맨 처음에는 아주 소량으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복용량을 늘려서 체질을 순응시켜 드디어 치사량의 독약이 몸 속에 들어와도 죽지 않을 수 있는 내성이 생기게 하였답니다. 미트라다테스는 40년간 권좌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로마와 전쟁 중에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잡혀서 죽느니 자결하려고 독약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아니합니다. 결국은 휘하의 병졸이 창으로 자기를 찌르게 하여 자결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을 지금도 미트라다테스 방법이라고 하여 내성을 획득하는데 응용되고 있습니다. 독약보다 강한 내성을 갖고 있는 게 죄입니다. 사단은 죄의 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인간들을 쉽게 파멸시킵니다. 처음에는 조금씩 죄 같지도 않은 죄에 인간을 접촉시킵니다. 결국은 죄에 대하여 감각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그 죄는 나를 죽게 하였다는 겁니다. 범죄하고 잘되는 사람 보았습니까? 어쩌다가 그런 사람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지금 숨겼다고 다른 이들이 모른다고 안심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세상에서는 숨겨질지 모르나 주 앞에 설 때 다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죄 값은 반드시 지불해야 합니다. 흔히 하는 말이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고 공짜면 양잿물도 큰 것으로 마신다고 합니다. 신용카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보아왔습니다. 일본도 한국도 그것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죄의 신용카드를 사용하도록 권면 합니다. 사인 할 때는 좋았는데 뒤에 청구서가 나옵니다. 죄도 그러합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형 당할 대상이 바로 인간입니다. 율법 앞에 의인이 없습니다.
사형선고를 당한 사람에게 당신은 몇 년형이요, 그러면 처음에는 억울합니다. 대부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형집행을 당하게 되면 할말이 있는가? 대부분 할 말이 없다고 한답니다. 죄 값으로 죽게 되었는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3. 선을 알면서 행치 못하였기에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잘못을 하였어도 처음으로 몰라서 그랬다면 정상이 참작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알면서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결심한대로 행치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년벽두에 나는 성경을 하루에 적어도 다섯 장은 읽겠다라고 결심하였는데 며칠 하다가 못하게 됩니다. 그때 결심은 오늘은 사정이 생겨서 못 읽었으니 내일 배나 더 읽자 그랬는데 그 약속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새해를 맞습니다. 회개 기도하면서 새로운 결심을 하지만 또 실행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문제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대로 “내 속에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함은 없노라”( 롬 7:18) 바로 이겁니다. 신약에서 베드로라고 하는 예수의 수제자가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선생 예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의지입니다.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작은 여인 앞에서 선생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탄식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나는 곤고 한 사람이로다 탄식하게 합니다. 곤고 하다는 말은 못이나 철사로 계속하여 찌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롭다는 겁니다. 죄 앞에서 탄식할 뿐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우리는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할 말이 있다.”
1) 율법은 죄를 알려주고 죄 값으로 죽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예수의 보혈로 너희 죄는 사하여졌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나는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죄에서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 사함 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할렐루야) 누가 묻기를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면 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거룩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까? 술 담배를 하지 않기에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의 보혈로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힘있는 사람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1심에서 3년 6개월을 받았는데 상고심에서 1년 6개월로 줄었습니다. 그 사람 줄이 좋구만 그럽니다. 감형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고 죄질에 대하여 많이 뉘우침을 참작하여 감형한다는 겁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죄를 감해 주는 게 아니라 무조건 사하여 주신 답니다.
율법이 너의 죄는 주홍같이 붉다 태산보다 많고 크다고 할 때 우리 주님은 널 무조건 모두 용서하였다라고 하십니다. 철저한 믿음의 집안에서 자녀들을 교육합니다. 주일은 교회에 꼭 다녀야 한다 동생이 하루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헌금으로 맛있는 것을 사먹었습니다. 이것을 형이 보았습니다. 그것이 약점입니다. 동생을 종같이 부려 먹습니다. 너 아빠한테 이를 거야 그러면 동생은 형이 하라는 대로 합니다. 괴로움을 당하던 동생이 하루는 아빠를 찾아와 아빠 나 잘못했어. 아빠는 무슨 일을 잘못 했다는 거니. 나 지난 몇 일 주일에 교회가지 아니하였거든. 그리고 헌금으로 맛있는 거 사먹었어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예요. 아빠가 웃으면서 그래 다시는 그런 짓 하면 안돼. 아빠로부터 용서받은 동생은 기쁨이 있습니다. 매이지 아니합니다. 다음에 형이 심부름을 시킵니다. 안 하지요. 야 아빠한데 이를 거야. 그때 하는 말 일러 겁날 것 없어 그럽니다. 동생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담대합니다. 왜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범죄 한 우리에게 율법이 자꾸 고발합니다. 마귀가 고발합니다. 걱정할 게 없습니다. 두려울 게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예수의 보혈로 이미 용서함 받았습니다. 사죄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고 할 말이 있습니다.
2) 할 말이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를 살게 하였다 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은혜는 우리를 살립니다.
3)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예수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나니 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무조건 구원을 얻었습니다. 믿고 행함으로 준비된 축복이 있습니다. 나는 구원 얻었다.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율법이 죄를 알려주고 그 죄가 우리를 죽게 하였으나 할 말이 생겼습니다. 나는 예수의 의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보호가운데서 할 말이 많아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로마서 7:6 / 김성찬 목사
교육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로서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자는 표어 아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달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일으키는 율법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율법 아래의 상태와 복음 아래의 상태의 차이점을 결혼하는 비유로써 설명합니다.
결혼 법은 어느 쪽이든지 간데 둘 중의 어느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만 유효하고 그 이상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한다고 합니다(1절)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수가 유대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은 율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속력이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데 특별히 결혼법이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의 의무나 율법의 정죄가 죽음 후에까지 계속 되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죽음의 율법의 끝입니다. 아무리 가혹한 율법이라도 몸은 죽일 수 있을지언정 그 후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결혼법도 그와 같습니다(2절). 여자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매어 있어서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없습니다. 만일 다른 남자에게 간다면 그녀는 음부가 됩니다(3절). 이같이 우리도 처음에는 율법아래 있었습니다(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죄의 물결에 휩쓸려 내려가고 있었고 율법은 한낮 불완전한 둑에 지나지 않아 그 물살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물만 더 높이 불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욕망이 죄를 향해 있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지배하였습니다. 아내가 결혼 법아래 매여 있는 것처럼 죄와 죽음의 법아래 매여 있었습니다. 이 결혼의 산물은 죽음에 이르는 열매였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잉태된 정욕은 죄를 낳고 죄는 장성하여 사망을 낳았습니다(약 1:15).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함 같이(3절)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는 죽음에 의해서 하나의 계약인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4절). "율법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너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6절).
이렇게 하여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마치 남편이 사라진 것처럼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이제 율법이 죽었습니다. 즉 그 효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4절) 즉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당하신 고난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의 몸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과의 연합에 의해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죽은 종이 주인의 명예와 상관이 없듯이 율법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그를 의지하는 생활과 그에 대한 의무에 들어가게 됩니다.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일치하는 것처럼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일치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여 높아지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4절).
이 연합의 한 가지 목적은 열매를 많이 맺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중대한 목적은 사랑과 은혜와 선한 모든 행실 가운데서 열매를 많이 맺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죄와함께 하는 생활이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두 번째로 갖는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생활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선한 행실은 새로운 성품의 산물입니다. 우리가 어떤 신앙 고백과 주장을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일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운데서 행해졌다는 이 사실이 신자의 선한 행실과 위선자와 자기 합리화를 하는 사람의 선한 행실을 구별 짓습니다.
우리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의문은 묵은 것으로 아니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는 진술은 율법에서 벗어난 방법에 대한 설명입니다(Murray). 율법은 사람을 얽매는 것이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범죄 하는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우리가 여전히 누군가를 섬겨야 하지만 죄를 섬기는 일이 몹시 고된 것이었던 반면에 지금의 섬김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행하는 섬김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은 '새 시대의 지배 원리를 따라' 섬김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은 '의문'(儀文)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의문'이 옛 시대의 지배 원리였던 것과는 반대로 '영'은 새 시대의 지배 원리입니다.
어떤 아파트를 임대해서 산다고 생각해 봅니다. 임대한 아파트의 주인은 엄청나게 비싼 집세를 부과합니다. 지불할 수 없을 때 그는 무서울 정도의 고금리로 돈을 빌려주어 더 심한 빚에 빠져들게 할 뿐 아니라 임대 조건을 지키지 않았다며 벌금을 물립니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이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아파트를 인계 받았소. 원한다면 언제까지나 여기서 공짜로 살 수 있어요. 집세는 지불되었소.” 얼마나 좋습니까! 옛 집주인의 가혹한 수중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서 문을 열었더니, 거기에 옛날 주인이 서 있습니다. 집세를 받으러 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자신 있게 말하면 됩니다. “그 문제는 새 주인과 말씀하시죠.” 만약 그가 온갖 협박과 논쟁과 법률적 서류로 보이는 문서를 흔들지라도 단순히 이 말만 해주면 됩니다. “그 문제는 새 주인과 말씀하시죠.” 그는 단지 으르고 위협하고 속여서 새 집주인이 모든 것을 실제로 처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였으면 하고 바랄 따름입니다. 그러한 그를 새 주인, 예수님께 보내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실 때,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분에게 복종케 하실 때 우리는 영적으로 무적의 상태가 됩니다. (새롭게 된 마음-예화뱅크-섬기는 삶은 이처럼 아름답다-찰스 R. 스윈돌)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을 감당하되 새 시대의 지배 원리에 따라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됩시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은 성령 안에서 섬김입니다.
새 시대의 지배 원리는 '성령'에 의해 주도됩니다. 성령 안에서 섬길 때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한 장로님이 한 때 자신의 부끄러웠던 불신앙과 허물들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자신과 같은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갖게 했다는 간증이 있습니다. 집사 때, 교회가 건축을 앞두고 부흥회를 열었답니다. 집회 마지막 날에는 틀림없이 건축헌금을 작정할 것인데 그 날만 빠질 수도 없고 처음부터 나가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답니다.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전화를 하거나 가게까지 찾아와서 왜 부흥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할 것 같아서 아주 기도원으로 들어가 버렸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답니다. 답답한 심정으로 기도를 시작했답니다. "하나님, 헌금을 얼마나 하면 됩니까? 1백만 원 하면 되겠습니까?"하고 어려운 결심을 해보았답니다. 20여 년 전이니까 상당히 큰 금액이었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성령의 감동이 왔답니다. "그러면 하나님, 5백만 원입니까... 그러면 1천만 원이요..." 했지만 확신이 오지 않았답니다. 고민하고 또 기도하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전 재산을 다 바치기로 결단했답니다. 주택과 점포를 포함하면 3천만 원 가량 되었답니다. 결혼 할 때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해서 모았던 것을 전부 드리기로 마음을 정하고 돌아와서 아내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답니다. 아내는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하고 깜짝 놀랐지만 집사님의 결심을 눈치 채고는 "당신 생각대로 하세요" 하고 승낙했답니다. 그 날은 부흥회 마지막 날이었답니다.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은 하늘을 나는 것 같았고 그 날 밤 헌금을 작정하고는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 후로 복을 받아서 사업을 잘하다가 한 번은 건축 사업에 동업을 했는데 몽땅 망하고 빚보증까지 짊어졌답니다. 부엌도 없는 사글세 단칸방에 짐을 쌓아두고 살면서 몸까지 병들어 눈물 골짜기에 주저앉아 로뎀 나무 밑의 엘리야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집사님을 비록 연단을 하시지만 그렇게 망하도록 버려두지 않았답니다. 몸도 사업도 기적적으로 회복시켜 주셨답니다. 전도주일에 1026명을 교회로 초청했답니다. 이런 일이 알려지면서 간증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국내외로 2천5백 여 교회에서 집회를 했답니다.
이 장로님을 모시고 전도 집회를 했던 어느 교회에 큰 도전과 확신이 되어서 많은 분들이 전도를 위해 2천명 만나기를 다짐했다합니다. 장로님이 권하는 대로 집회 시간마다 감사헌금을 드리기도 했지만 마지막 날에는 전도를 위한 특별헌금을 작정하였다합니다. 집회 시간마다 그러니까 여덟 번이나 감사헌금을 드린 일도 어려운 훈련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은 당황했다합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힘에 겨운 헌금을 작정하신 분들이 많았다합니다. 장로님이 작정 액을 집계해서 발표할 때는 예상 밖의 결과에 감격하게 되었다 합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였다고 합니다.
전도헌금을 작정한 한 고등학생은 대학에 진학하면 장학금으로 매월 10만원씩 드릴 것이라 하고 또 3십 만원을 작정한 대학생은 겨울에 봉사를 해서 드릴 것이라 하니 그 믿음과 정성이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여자 집사님 한 분은 예배가 끝난 후에 자리를 떠나지 않고 울고 있어 "집사님, 헌금하고 싶어서 그러시지요? 형편대로 하면 되요."하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집회가 끝나고 성도들과 얼굴을 마주칠 때면 함박같이 환한 미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은혜의 잔치이며 드리는 일 또한 즐겁고 기쁜 일임을 확인하게 했다고 간증합니다.(부흥회 비켜가기)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을 감당하되 성령 안에서 섬길 때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줄 믿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은 자원하여 섬김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은 자유의 길로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섬김은 쉽고 재미있고 가치가 있고 보람을 느끼게 되고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섬김의 길에 두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억지로 하는 섬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원하여 일하는 섬김입니다. 이를 옛 길과 새 길로 말합니다.
옛 길은 율법에 따른 강제적 요구에 순종하여 억지로 하는 섬김입니다. 섬겨야만 거룩해지고 의로우며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요구가 늘 있습니다. 이런 섬김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업적은 쌓을 수 있을지 몰라도 보람을 느끼지 못합니다.
섬기는 모델이 히브리서 3장의 모세와 예수님입니다.
모세는 비록 노예(slave)는 아니었지만 사환(servant) 곧 일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들로 섬기셨다고 했습니다. 즉 주인의식을 가진 섬기는 자였습니다. 주인의식은 책임감이고 자원하는 마음이고 자유의 길이요 신령한 영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원하는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말씀을 하십니다.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 :17-18) 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고 합니다.
윌리암 스티져 씨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떤 곳에 아이들의 마음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득 들어 있는 한 궁전이 있었습니다. 여러 어린이들이 그 궁전에 들어가는 열쇠를 얻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떤 날 한 소녀가 궁의 문지기에게 "저는 제 머리카락이 금과 같이 빛나도록 잘 빗었고 그리고 세마포를 많이 짰습니다. 들어갈 수 있습니까?""소용없단다. 매일 아침 남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단다."그래서 그 아이는 도와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는 여러 주일 동안에 모았던 값있는 동전들을 한 늙은 거지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자, 이제야 되겠지." 생각하며 소녀는 문지기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머리를 흔들면서"다시 노력 하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좀 낙심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 절름발이 부인의 등에 무거운 보따리를 지고서 고통스럽게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와줘야지 그러면 이번에는 꼭 열쇠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소녀는 절름발이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문지기에게 달려갔을 때 다시 서글픈 표정으로 "다시 한번 더 힘써 보아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아주 낙심 하였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집으로 걸어오면서 열쇠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무 있는 곳을 지나가다가 어디서 가냘픈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와 가보니 어린 강아지가 덫에 걸려있었습니다. "아, 불쌍한 강아지." 그는 덫을 풀려고 애를 썼다. 손에서 피가 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개를 덫에서 풀어서 상처를 싸매주고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늙은 문지기가 손에 열쇠를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 아이는 놀란 표정으로 "아닙니다. 그 열쇠는 내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열쇠를 얻으려고 강아지를 도와 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열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얘야, 이 열쇠는 자신을 모두 잊어버리고 봉사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란다." 하면서 그 열쇠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열쇠가 있어야)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44-45)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삶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자는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압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날까지 보존될 것을 압니다. 그러기 에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함과 함께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중요한 일은 자신을 이해서가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삶의 동기는 끝없는 사랑과 자비의 긍휼로써,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율법에 대하여는 죽고 영의 새로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새 시대의 원리로 섬깁시다.
성령 안에서 섬깁시다.
자원하여 섬깁시다.
깨닫지 못할 때에는
신성종 목사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깨달음이 있다는 점입니다. 또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의 차이점도 깨달음의 정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깨달음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현대의 가장 큰 불행은 깨달음의 상실에 있습니다. 느낌으로 살아가고,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무속적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의 텔레비전이 그렇게 만들고 있고, 너무도 바쁜 현대의 생활이 우리를 마치 채 바퀴 속에서 살아가는 다람쥐처럼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분들은 율법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구약 시대의 율법을 가지고 논하느냐 하면서 그러나 또 한국에 있는 교인들 중에는 율법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율법이 우리들과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구약성경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율법에 얽매여 산다면 우리는 신약성경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율법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왜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는가?
크게 세 가지의 이유로 주셨습니다. 전에 여러 번 그것을 살펴보았습니다.
(1) 갈3:24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즉, 율법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잡이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율법을 보면 나는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도 없고, 천국에 갈 만큼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을 주신 첫 번째 목적입니다.
(2) 둘째의 목적은 내가 지은 죄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롬7:7절,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평소에는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율법으로 우리는 나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하, 내가 우상을 섬기고 있구나, 아하 내가 미워하는 죄를 짓고 있구나, 아하 내가 부모를 섬기지 않고 있구나 하고.
(3) 세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하라], [하자 말라]의 두 가지의 형태로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임을 가르쳐줍니다. 시119: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등과 빛은 우리를 환하게 비추어 앞을 보게 해줍니다.
2. 그러면 이 율법의 본질은 무엇인가?
롬7:12절,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은 우리들을 정죄하고,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주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 회개를 깊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한 것이며 의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멀리하는 사람도 잘못이고 그렇다고 율법으로 주님을 대신하는 사람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율법일 뿐 복음이 아니며 주님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한계입니다.
3. 결론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는 다 나의 옛 사람에게서 비롯됩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 사람이 죽을 때 나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내가 살면 주님이 죽고, 내가 죽으면 주님이 삽니다.
(1) 그러려면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활의 문제점은 바쁘다 보니 생각하는 것이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매일을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생각까지 한다는 것은 골치 아픈 일입니다. 생각한다고 무슨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책을 보는 사람들이 드뭅니다.
성경도 깊이 연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설교를 해도 축복이나 말해야 겨우 아멘, 아멘 하지 조금만 어려운 얘기를 해도 따라오지 못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위해서는 아무리 바빠도 독서도 하고, 성경도 연구하여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깨달음이 없다면 동물처럼 느낌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그린의 [권력과 영광]이란 소설을 소개했는데 교인들이 전혀 관심이 없는데 대해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권력투쟁입니다.
왜냐하면 권력을 가지면 영광을 가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린이란 작가는 참 영광은 권력과 관계가 없다. 영광은 자아성취와 사명의 완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술주정뱅이라고 놀리는 호세라는 신부의 죽음에서 참 영광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바로 살겠다고 신앙인이 되었으면 생각하면서 살고, 책을 읽으면서 깨달음을 가져야 하는데 오히려 기독교인이 더 독서를 안 하고, 깊은 생각을 안 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지도자가 될 수 없고,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기독교는 망합니다.
(2)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한다.
인간의 근본적 변화는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깨달을 때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달을 때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바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나의 죄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3) [나는 죽고 주님이 살 때]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성장한즉 죽음을 낳느니라.” 우리의 문제는 자기의 주장에서 비롯됩니다. 이기주의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 사람이 죽어야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못 박혀 죽어야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건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믿음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의 간격을 좁혀주고, 과거를 현재로 만들어줍니다.
맺는 말
그러므로 하루를 살더라도 동물처럼 깨달음과 생각이 없이 살지 말고, 힘들고 괴롭더라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칼트의 철학이 현대철학의 시작이었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오늘을 바로 살수가 있습니다.
영어의 thank란 단어와 think란 단어는 서로 연결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는 생각할 때 일어납니다. 깨달을 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율법을 주셨는지 생각하고 그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주님이 사는 삶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