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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주도(高陽酒徒)
고양 지방의 술꾼이라는 뜻으로, 술을 좋아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高 : 높을 고(高/0)
陽 : 볕 양(阝/9)
酒 : 술 주(酉/3)
徒 : 무리 도(彳/7)
출전 : 사기(史記) 권97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
술은 극단적으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 존재다. 술은 마시지 않아도 아무 말도 않는데 이렇게 말이 많으니 억울하다.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은 "근심을 없애는 데엔 술보다 나은 것이 없다(銷憂者 莫若酒)"는 말을 남겼다.
반면 러셀은 "음주는 일시적인 자살이다. 음주가 갖다 주는 행복은 단순히 소극적인 것, 불행의 일시적인 중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악을 경계했다.
모두들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지나치게 마셔 문제가 되는 것은 탈이다. 주위는 아랑곳없이 기고만장하는 술꾼은 술 권하는 사회라 해도 지탄받으니 조심할 일이다.
고양(高陽) 땅의 술꾼이라는 말의 주인공은 역이기(酈食其)다. 사기(史記) 역생육가(酈生陸賈) 열전에 실린 이야기다.
진(秦)나라가 쇠퇴하고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초한(楚漢) 대결로 압축됐을 때 유방의 휘하로 들어가 공을 세우며 '이식위천(以食爲天)' 성어를 남긴 바로 그 사람이다. 먹는 것으로써 하늘을 삼는다. 백성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가장 소중함을 이르는 말이다.
그는 중국 진류현(陳留縣)의 고양에서 태어나 평소 독서를 즐겼지만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의식주를 해결할 직업이 없어 하는 수 없이 그는 고을 성문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술을 즐기고 성격이 괴팍하여 사람들이 '미친 선생'으로 불렀다.
어느 날 역이기(酈食其)는 유방의 군영 문 앞으로 가서 위병에게 말하였다. "고양의 천민 여식기가 유방과 더불어 천하대사를 획책하려 찾아와서 만나 보잔다고 알려라!"
위병이 들어가 유방에게 이 말을 전하자 유방이 물었다. "찾아온 사람의 모양새가 어떻든가?" "선비 옷을 입고 선비 모자를 썼는데 틀림없이 대단한 유생 같습니다." 위병은 자못 실감나게 말했다. 유방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난 선비들을 만나 볼 겨를이 없다고 전해!"
위병이 유방의 말을 그대로 전하자 역이기는 버럭 성을 내며 칼자루를 틀어 잡으며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난 선비가 아니라 고양의 술꾼이라고 빨리 들어가 알리라(吾高陽酒徒 非儒人也)."
위병이 황급히 다시 들어가 보고했다. 발을 씻고 있던 유방은 고양의 술꾼이 만나러 왔다는 말을 듣고는 대뜸 "들어오라고 해!" 라고 했다. 그리고는 맨발로 달려 나와 역이기를 맞아들였다.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두 여인에게 발을 씻기며 뒤돌아 보지도 않는 유방에게 선비의 중요성을 일깨워 역이기는 모사로 일하게 되었고, 훌륭한 의견과 계책을 많이 제공하여 유방이 승전을 거두는 데 크게 협조하였다.
중국의 술이야기
술은 고대 중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음료 중의 하나로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술의 기원에 관해서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여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일설에 의하면 술의 기원을 기원전 7,000년 전 신석기(新石器) 시기의 신농시대(神農時代)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황제(黃帝)시기에 이미 술을 제조하기 시작했다는 견해도 있다.
또 한가지 비교적 보편적인 견해는 의적(儀狄)과 두강(杜康)이 술을 제조하였다는 것인데 이들은 모두 하우(夏禹)시대(夏王朝를 창시한 禹를 말함)의 사람으로서 술을 빚었는데 매우 맛이 있어 우에게 진상하니 우는 그것을 마셔보고 만족해 했다. 그 후부터 의적과 두강은 사람들에 의해 '주신(酒神)'으로 받들여 모셔졌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 유물로서 약 5,000년 전의 용산 문화(龍山文化) 유적 중에 이미 준(술단지), 가(옥잔), 고각배(와인글라스) 등 술을 마시는 도구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 이미 술을 마시는 풍(風)이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술은 중국의 음식 문화에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요리는 술이 곁들여짐으로써 그 맛이 더 나며 술은 또한 입맛을 돋구어 주기도 한다. 제사, 명절, 손님접대, 송별식, 환영식, 승전 축하연회, 경사스런 모임 등에 있어서 술은 언제나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었다.
인생의 통과 의례 중 혼례식 때 마시는 술을 '결혼 축하주'라 칭하였으며, 사회 활동중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마시는 술을 '성공 축하주'라 불렀다. 술은 정치, 경제, 군사, 철학, 문학, 예술, 관광, 사교, 의약, 위생 등 여러 분야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다.
수천년의 변화 발전을 거쳐 청(淸)나라 때 와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십 종의 명주(名酒)가 출현하였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향긋한 내음에 뒷맛이 깨끗한 모태주(芽台酒)이다. 모태주는 귀주성(貴州者) 모태촌(芽台村)에서 제조된 것이다. 모태 강은 심곡에서 흘러 나오는데 수질이 깨끗하고 물맛이 달짝지근하며 광물질도 조금 함유되어 있어 술을 빚는데는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그 곳의 기후는 제조 원료인 수수가 자라는데 적당하기 때문에 수수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모태주는 빚는 기술이 독특하여 주질(酒質)이 좋기로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져 왔으며, 270여 년의 제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형적인 간장향의 배갈(白酒)로서 비록 알코올 농도가 53~55°에 이르지만 독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1915년 파나마 엑스포에서 모태주는 금상을 수상함으로써 세계 명주(世界名酒)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모태주는 중국 명주의 상징으로서 '국주(國酒)'로 불려지고 있다. 국빈의 연회석상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이 '모태주'이다.
중국에는 모태주 이외에도 유구한 역사를 가진 명주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지경이다. 술의 종류가 많다보니 술을 즐기는 사람도 많게 마련이다.
당(唐)나라 대시인 이백(李白)이 지은 명시(名詩)중에 "옛부터 성현은 모두 적적하였으니 오직 술을 즐긴 자만이 그 이름을 후세에 남겨두었네(古來聖賢皆寂寞, 唯有飮者留其名)"란 구절이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고양의 술꾼(高陽酒徒)'이라고 칭하였는데, 이 말은 한고조(漢高祖)가 중용한 유생(儒生) '역이기(酈食其)의 고사'로 고양(高陽) 사람 역이기가 자기가 품었던 뜻을 펴기 위해 유방(劉邦)을 찾아갔으나 만나 주지 않자, "나는 무슨 케케묵은 지식이나 자랑하는 융통성이 없는 유생이 아니고, 명성이 자자한 고양의 술꾼이다"고 고함치자. 유방이 황급히 뛰어나와 맞이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금왕래(古今往來)로부터 수많은 명인과 술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영웅 호걸들은 대다수가 술을 잘 마신 자들인데 삼국시대 관우(關羽)의 영웅 고사는 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수호전(水滸傳) 중의 영웅인 무송(武松)이 술을 연거푸 열 여덟 사발이나 마시고 나서 사람을 해치려는 호랑이를 맨주먹으로 때려 잡았다는 고사는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더욱이 문인과 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다. 위진(魏晋) 시대 문인명사(文人名士)인 완적(阮籍), 계강(稽康), 산도(山濤), 유영(劉怜), 완함(阮咸), 상수(向秀), 왕융(王戎) 등 일곱 사람은 걷잡을 수없이 방탕하여 항상 '대나무 숲(竹林)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시 읊기를 즐겼다'고 하여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동보(東普)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도 술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가 지은 시에는 '구절구절 술이 스며있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중국 동진(東晋) 말기 부터 남조(南朝)의 송대(宋代) 초기에 걸쳐 생존한 중국의 대표적 시인이다.
당나라 때 문인 가운데 유명한 주중팔선(酒中八仙; 술 마시는 정도가 신선의 경지에 오른 8명) 즉 하지장(賀知章), 이진(李璡), 이적지(李適之), 최종지(崔宗之), 소진(蘇晋), 이백(李白), 장욱(張旭), 초수(蕉遂) 등이 있었는데 대시인 이백은 스스로는 '주중선(酒中仙)' 이라고 불렀다.
당나라 때 유명한 서예가인 장욱의 아주 흘려쓰는 초서 예술이나 청나라 초기 화가 팔대산인(八大山人; 청나라 때의 승려 화가, 본명은 주답. 팔대산인은 그의 호이다)이 그린 불후의 명작은 모두 영감을 떠올리게 한 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중국에 '술이 없으면 자리를 마련했다고 할 수 없다(無酒不成席)'는 속담이 있다. 일찍이 선봉(先奉) 시대부터 손님 초대는 중국 음식 문화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어 왔다. 중국 사람에게 있어서 연회를 베푸는 것은 인간교제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그것은 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기능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친구들과 모여 앉아 술을 나누는 것은 기쁨과 우정을 돈독히 하기 위한 것이며 사업상 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서로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기 위함이며 정치가들이 건배를 제의하는 것은 정감을 교류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가운데는 예지도 많고 또한 음험한 권모술수도 있는 것이다.
한(漢)나라 때 유방과 항우(項羽)가 천하를 다투기 위해 베푼 마음을 놀라게 하고 넋을 뒤흔든 홍문연(鴻門宴; 섬서성 임동현의 홍문에서 초왕 항우가 한고조 유방을 죽이기 위한 계략으로 베푼 잔치. 유방은 계책을 써서 도망감)도 이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역사상 연회를 베푸는 기풍은 종종 사치악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왔으며 술로 인하여 큰 일을 그르치고 국사를 망친 뼈에 사무치는 비통한 교훈은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술은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 마시면 천 잔으로도 모자란다(酒筵知己千杯少)'는 말이 있듯이 중국의 술문화에서 술은 사람들의 찬사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탐욕에 젖어 마시는 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마시는 술, 재산과 부를 겨루어가며 마시는 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마시는 술, 아첨하기 위해 마시는 술, 육욕에 빠져 절제를 못해서 마시는 술, 사치에 넘쳐서 낭비해 가며 마시는 술, 서로 옥신각신 하면서 마시는 술 등은 사람들의 증오심을 불러 일으킬 뿐만 아니라 사회로 부터 질책도 받게 된다.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전해 내려온 중국의 술 문화 중에는 중국의 여러 민족들이 다종다양하고 풍부하며 다채로운 술의 풍속을 이루어 놓아 그야말로 일일이 다 살펴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오랜 세월에 걸친 술의 공(功)과 과오(過誤)는 결코 한 편의 짧은 글로는 이루 다 언급할 수 없다.
역이기(酈食其, ? ~ BC 204)
중국 진(秦) 말기의 인물로서 유방(劉邦)의 참모(參謀)이자 세객(說客)으로서 한(漢)이 천하를 평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전한 초기 진류(陳留) 고양(高陽) 사람이다. 참모이자 세객(說客)으로서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도왔으며, 특히 제후들을 설득하여 끌어들이는 외교 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제왕(齊王) 전광(田廣)에게 한(漢)에 복속(服屬)할 것을 설득하기 위해 제(齊)에 머물다가, 공(功)을 탐한 한신(韓信)이 제(齊)를 침공하여, 분노한 제왕(齊王)에게 살해되었다.
역이기(酈食其)가 죽자 유방(劉邦)은 몹시 애석해했으며, 천하를 평정한 뒤에 그의 아들 역개(酈疥)를 고량후(高梁侯)로 봉하고 무수(武遂)를 식읍(食邑)으로 주어 역이기의 공을 기렸다. 역이기(酈食其)의 동생인 역상(酈商)도 무장(武將)으로 활약하여 한(漢)에서 승상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곡주후(曲周侯)로 봉해졌다.
출신이 미천하다
전한 초기 진류(陳留) 고양(高陽, 지금의 河南省 杞縣) 출신이다. 이름은 이기(食其)이며, 역생(酈生)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생(生)'은 '선생님' 정도의 의미로, '역생(酈生)'은 그가 학자임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그는 글을 즐겨 읽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생계조차 이을 수 없게 되자, 마을 성문을 관리하는 감문리(監門吏)가 되었다. 그러나 진류(陳留)현의 현인이나 호걸들 누구도 그를 데려다 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술을 즐기고 능력을 드러내지 않아 진류현 사람들도 모두 그를 미치광이 선생이라고 불렀다.
패공의 사과를 받아내다
진승(陳勝)과 항량(項梁) 등이 진(秦)에 반기를 들고 군사를 일으키자, 여러 장군들이 각지를 공략하면서 고양(高陽) 땅을 지나갔다. 역생(酈生)은 그 장수들이 모두 도량이 좁고 복잡하고 자질구레한 예절을 좋아하며,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원대한 구상을 말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깊이 감추어 두고 있었다.
그후 역생은 패공 유방(劉邦)이 군사를 이끌고 진류현의 외곽 지역을 공략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때 패공 수하의 기마병(骑兵) 한 사람이 마침 역이기(酈食其)가 살던 마을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패공 유방이 때때로 그에게 읍에서 눈길을 끄는 현자나 호걸들에 대해 물어본다는 것이었다.
그 기마병이 고향에 들렀을 때, 역이기가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그 대화를 이러했다.
역이기(酈食其): "내가 듣기에 패공이 사람을 깔보고 업신여기지만, 원대한 뜻을 지녔다고 들었소.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사귀며 가까이 지내고 싶은 사람인데, 나를 그에게 소개시켜 줄 만한 이가 없소. 자네가 만약 패공을 보거든 그에게, '제 고향 마을에 역생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이는 예순 살 남짓이고 키는 팔 척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미치광이 선생이라 부르지만 그는 자신을 미치광이 선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고 전해주게."
기마병(骑兵): "패공은 학자를 좋아하지 않아서 여러 빈객들 중에 유관을 쓰고 오는 자가 있으면 언제나 그 관을 뺴앗에 그 안에 소변을 누곤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늘 목청 높여 유생을 욕합니다. 학자가 유세해 봐야 소용 없을 것입니다."
역이기(酈食其): "다만 말이나 전해주게."
그 기마병은 패공 유방에게 차분하게 역이기가 일러준 대로 말을 전하였다.
패공 유방이 고양 땅의 객사에 이르자, 사람을 보내 역이기를 불러오게 하였다. 역이기가 객사에 이르러 패공을 만나러 들어갔을 때, 패공 유방은 마침 침상에 걸터앉아 두 명의 여자로 하여금 발을 씻기게 하면서 역이기를 만났다. 역생은 들어가서 절을 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장읍을 한 뒤 패공 유방과 나눈 대화는 이러하다.
역이기(酈食其): "족하(足下; 당신의 존칭)께서는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하려 하십니까?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치려고 하십니까?"
유방(劉邦): "이 글쟁이 놈아! 천하 사람들이 진나라에 의해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해 왔기 때문에 제후들이 함께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려 하고 있는데, 어째서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한다는 말을 하고 있느냐?"
역이기(酈食其): "만약 무리를 모아 의병으로 조직하여 무도한 진나라를 토벌하시려면, 장자(덕망이 있는 사람)을 오만한 태도로 접견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자 패공 유방은 발 씻던 것을 멈추고 일어나 의관을 바로 하고 역생을 상석에 앉힌 뒤 그에게 사과하였다. 이에 역이기는 육국이 합종과 연횡을 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패공은 기뻐하며 역이기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물었다.
유방(劉邦): "계책으로 장차 어떤 것을 내는 것이 좋겠소?"
역이기(酈食其): "족하께서 오합지졸을 모으고 뿔뿔이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두어들였지만 만 명도 채 못 됩니다. 이 정도 병력으로 강한 진나라에 쳐들어가려 하신다면, 이는 소위 호랑이 입안으로 찾아 들어가는 격입니다. 이곳 진류현은 천하의 요충지이자 사방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교통이 편리하며, 지금 성안에는 많은 곡물이 쌓여 있습니다. 소인은 진류현의 현령과 친분이 있으니 신을 사신으로 보내 주시면 그를 족하께 항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현령이 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족하께서 군대를 일으켜 그곳을 치십시오. 신은 성안에서 호응하겠습니다."
패공은 역생을 사신으로 보내고, 군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갔다. 마침내 진류현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진류현을 점령하는 데 공(功)을 세운 역이기에게는 광야군(廣野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역이기는 자기의 동생 역상(酈商)을 채공에게 천거하여, 수천 명을 이끄는 장수가 되어 패공 유방을 따라 서남쪽으로 가 여러 지역을 공략하도록 하였다. 한편 역이기는 늘 유세하러 다니는 선비의 신분으로, 급한 일이 생기면 세객(說客)으로서 제후들을 회유하고 설득하는 일을 맡아 활약하였다.
천하의 민심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기원전 204년, 한(漢) 3년 가을, 서초패왕 항우(項羽)가 한(漢)을 공격하여 형양(滎陽)현을 함락시키자, 한나라 군사는 공공(鞏; 지금의 河南省 鞏縣)현과 낙양(洛陽)현 일대로 달아나서 주둔했다.
그 무렵 초(楚)는 회음후 한신(韓信)이 조나라를 격파하고, 팽월(彭越)이 옛 양나라 땅에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나누어 보내 조나라와 양나라를 도왔다.
이때 회음부 한신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제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한왕 유방(劉邦)은 형양현과 성고(成皐)현에서 여러 차례 고전하고 난 뒤라, 성고현 동쪽 땅을 내주고, 공현과 낙양에 주둔하여 초나라에 대항할 심산이었다.
이때 역이기(酈食其)는 이에 반대하며, 항우(項羽)의 군대가 양곡(糧穀) 교역(交易)의 중심지인 오창(敖倉, 지금의 河南省 成皐縣 敖山에 설치한 창고)을 버려두고 동진(東進)한 것은 초(楚)의 천운(天運)이 다한 것이라며, 성고 지역을 포기하지 말고 이 기회에 오창을 빼앗아야 한다는 계책을 제시하였다. 역이기가 한 말을 이러했다.
역이기(酈食其): "신이 듣건대, 하늘이 하늘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제왕의 대업을 이룰 수 있고, 하늘이 하늘된 까닭을 모르는 사람은 제왕의 대업을 이룰 수 없다 합니다. 제왕은 백성을 하늘로 여기지만,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깁니다.
오창(敖倉, 敖山에 세워진 식량 창고)에는 천하 물자의 운송을 담당해 온 지 오래되어, 제가 듣기로는 그곳에 막대한 식량이 저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초나라 군대가 형양을 함락시키고도 오창을 굳게 지키지 않고 오히려 군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면서 죄를 지어 변방으로 쫓겨나 병사가 된 자들에게 성고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한나라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초나라의 군사를 공격하여 쉽게 취할 수 있을 때인데, 한나라가 군사를 돌려 퇴각하는 것은 스스로 좋은 기회를 버리는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또한 두 영웅은 함께 존립할 수 없는 법입니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오랫동안 맞서 싸우면서 승자와 패자를 분명하게 결정짓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천하는 동요할 것이며, 농부들은 쟁기를 내려놓고 길쌈하는 여인들은 베틀에서 내려와 천하의 민심이 불안할 것입니다. 부디 족하께서는 시급히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형양현을 탈환하고 오창의 식량을 손에 넣은 뒤 험준한 성고현을 단단히 방어하십시오.
또한 태항산을 넘어가는 태항형을 봉쇄하고, 비호구(비호의 입구)를 틀어막고, 백마(白馬)진을 지키십시오. 이로써 제후들에게 실력을 과시하고 유리한 지형으로 적을 누르고 있는 형세임을 보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천하가 알고 귀의해 올 것입니다. 지금 연나라와 조나라는 이미 평정되었지만 제나라는 아직 항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전광(田廣)은 1000리의 넓은 제나라를 차지하고 있고, 전간(田間)은 20만 군대를 이끌고 역하(歷下; 지금의 山東省 歷城)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전씨 일족의 세력은 아직 막강합니다. 제국은 바다를 등지고 황하와 제수에 의해 막혀 있으며, 남쪽으로는 초나라와 인접하고 있는 한편, 그 나라 사람들은 권모술수에 뛰어납니다.
족하께서 비록 수십만 명의 군사를 보내더라도 몇 년 몇 달이 지나도록 격파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조서를 받들고 제나라 왕에게 가 제나라가 한나라에 귀속하여 동쪽의 속국이 되도록 설득하겠습니다."
유방은 역이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시 오창(敖倉)을 수복하여 지키면서, 역이기를 제왕(齊王) 전광(田廣)에게 보내 전광을 설득하여 한(漢)의 편으로 끌어들이도록 하였다.
제나라에 가 유세하다
제왕(齊王) 전광(田廣)을 만난 역이기는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음은 그들이 나눈 대화이다.
역이기(酈食其): "대왕께서는 천하의 민심이 어디로 돌아가실지 아십니까?"
전광(田廣): "모르오."
역이기(酈食其): "대왕께서 천하의 인심이 어디로 귀속될지 아시면 제나라는 보존될 수 있고, 만약 천하의 인심이 어디로 귀속될지 모르시면 보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광(田廣): "천하의 인심이 어디로 귀속되겠소?"
역이기(酈食其): "한나라에 귀속될 것입니다."
전광(田廣): "선생께서는 무슨 연유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역이기(酈食其): "한왕과 서초패왕 항왕이 힘을 합쳐 서쪽으로 나아가 진나라를 공격할 때, 함양에 먼저 들어가는 자가 그곳의 왕이 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한왕이 먼저 함양에 먼저 들어갔지만, 서초패왕은 약속을 어기고 함양을 내주지 않고, 한중 지역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서초패왕은 의제를 다른 곳으로 옮겨 가게 한 뒤 살해하였습니다. 한왕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촉과 한중 지역의 군사를 일으켜 삼진을 공격한 뒤, 함곡관을 나와 의제를 죽인 죄를 따져 물었습니다. 그리고 천하의 병사들을 거둬들여 각 제후들의 후예를 세웠습니다. 성을 항복시키면 그 공을 세운 장군을 열후로 봉하고, 재물을 얻으면 그것들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며 천하 사람들과 이익을 함께하였습니다.
이에 영웅, 호걸, 현인, 재사들이 모두 기꺼이 한왕을 위해 능력을 발휘하려 합니다. 제후들의 군사가 사방에서 모여 들었으며, 촉과 한중 지역의 식량이 나란히 이어 만든 큰 배에 실려 내려오고 있습니다.
서초패왕은 약속을 어겼다는 오명과 의제를 살해하였다는 부담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공로는 기어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죄는 잊는 일이 없습니다. 싸움에서 승리해도 상을 내릴 줄 모르고, 성을 함락시켜도 봉읍을 주지 않습니다.
또 항씨의 일족이 아니면 아무도 중요한 자리에 앉을 수 없으며, 사람을 봉하기 위해서 관인은 새기더라도 아까워 손에서 닳아 없어질 때까지 주지 못합니다. 성을 공격하여 재물을 얻어도 쌓아 두기만 할 뿐 상으로 주는 일이 없습니다.
때문에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어진 사람과 재능 있는 유생들은 그를 원망하며 그를 위해 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유생들이 한나라 왕에게로 귀의한다는 것은 앉아서도 예측 할 수 있습니다.
한왕은 촉과 한중 지역의 군사를 일으켜 삼진을 평정하였으며, 서하를 건너 밖으로 나와 상당군 지역의 군사를 거두어 들였고, 정형을 함락시키고 성안군 진여를 죽였으며, 북위를 깨뜨려 성 서른두개를 함락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치우의 군대와 다름없는 활약으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내려준 복입니다.
지금 한나라는 이미 오창의 곡식을 차지하였으며, 험준한 성고현을 단단히 방어하면서 백마진(백마 나루터)을 지키고, 태항산을 넘어가는 태항형의 고갯길을 봉쇄하고, 비호구를 틀어 막았습니다.
천하의 제후들 중에서 뒤늦게 한왕에게 항복하는 자는 먼저 멸망할 것입니다. 대왕께서 서둘러 먼저 한왕에게 항복한다면 제나라의 사직은 지킬 수 있지만, 한왕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면 멸망의 위기는 즉시 들이닥칠 것입니다."
제왕 전광은 역이기의 말이 옳다고 여겨 한(漢)에 투항하기로 한 제(齊)는 한군(漢軍)에 대한 방어 태세를 풀어 버렸다. 그리고 역이기와 함께 날다가 폭음을 하였다.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다
이 소식을 들은 한(漢)의 장수 한신(韓信)은 역이기의 공을 시기하여 밤에 평원(平原)에서 강을 건너 역하를 점령하고 제(齊)의 도읍인 임치(臨淄)로 쳐들어왔다. 이에 한군의 공격 소식을 들은 전광은 자신을 속였다고 분노하여 역이기를 솥에 삶아 죽였다.
아래는 역이기가 죽기 전 전광과 나눈 대화이다.
전광(田廣): "네가 한나라 군대를 멈출 수 있으면 내 너를 살려 줄 것이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너를 삶아 죽일 것이다."
역이기(酈食其): "큰일을 하는 자는 사소한 일에 일일이 얽매이지 않는 법이며, 높은 덕을 쌓은 자는 다른 사람의 비난에 개의치 않는 법이오. 이 몸이 그대를 위해 달리 할 말은 없구려."
후대
한나라 12년, 역이기(酈食其)의 동생 곡주후(曲周侯) 역상(酈商)이 승상의 신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경포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이에 한나라 고조 유방이 공신을 고르고 열후를 봉하면서 역이기를 떠올렸다.
역이기의 아들 역개(酈疥)는 일찍이 군대를 이끌고 싸움터에 몇 차례 나갔으나 그 공이 열후로 봉할 정도는 못 되었다. 그러나 고조 유방이 그 아버지 역이기의 공로를 생각하여 역개를 고량후(高梁侯)로 봉하였다. 나중에 무수(武遂)땅으로 식읍(食邑)을 바꾸어 주었으며, 3대에 걸쳐 대를 이어 갔다.
史記列傳 酈生陸賈列傳
사기열전(史記列傳) 권97 역생육고열전(酈生陸賈列傳)
①酈生(역생: 역이기)
②陸賈(육고)
③朱建(주건)
이 편은 역생(酈生,역이기), 육고(陸賈,육가), 주건(朱建) 세 사람의 합전이다. 세 사람은 진나라 말기 및 전한 초기의 달변가인 점에 공통점이 있다.
역생(酈生)의 이름은 이기(食其)이며, 진류(陳留) 고양(高陽) 출신이다. 진나라 말기에 가난하고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유방을 설득하여 참모이자 세객(說客)이 되었으며,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제후들을 설득하여 끌어들이는 외교 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다. 제왕(齊王) 전광(田廣)에게 한(漢)에 복속할 것을 설득하기 위해 제(齊)에 머물다가, 공을 탐한 한신(韓信)이 제(齊)를 침공하자 역이기에게 속았다고 분노한 제왕(齊王)에게 팽살(烹殺)되었다.
이 장은 역생과 고조 유방이 처음 만나는 모습을 재차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이 편 앞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고양주도(高陽酒徒) 역이기(酈食其)
1
初, 沛公引兵過陳留, 酈生踵軍門上謁曰: 高陽賤民酈食其, 竊聞沛公暴露, 將兵助楚討不義, 敬勞從者, 願得望見, 口畫天下便事.
당초 패공 유방이 군대를 이끌고 진류(陳留)를 지나갈 때, 역생은 군영의 문 앞까지 이르러 알현을 청하는 명함을 주면서 말했다. "고양(高陽)의 천민 역이기(酈食其)는 패공께서 햇볕과 비바람에 시달리며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도와 불의한 진나라를 토벌한다는 소식을 사사로이 듣고서 삼가 따르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패공을 멀리서 뵙고서 천하 대업에 대한 계획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使者入通, 沛公方洗, 問使者曰: 何如人也.
사자가 들어가서 고했는데 패공은 마침 발을 씻고 있다가 사자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냐?"
使者對曰: 狀貌類大儒, 衣儒衣, 冠側注.
사자가 대답했다. "용모로 보아 대학자로 선비의 옷을 입고 측주관(側注冠)을 쓰고 있습니다."
沛公曰: 為我謝之, 言我方以天下為事, 未暇見儒人也.
그러자 패공이 말했다. "나 대신 그에게 사과하고, 내가 지금 천하의 대업 때문에 선비를 만날 겨를이 없다고 전해라."
使者出謝曰: 沛公敬謝先生, 方以天下為事, 未暇見儒人也.
사자가 밖으로 나와 사죄하며 말했다. "패공께서 선생께 삼가 사죄하시며, 지금은 천하의 대업으로 바쁘기 때문에 선비를 만날 겨를이 없다고 하십니다."
酈生瞋目案劍叱使者曰: 走. 復入言沛公, 吾高陽酒徒也, 非儒人也.
그러자 역생은 두 눈을 부릅뜨고 검을 잡고 사자를 꾸짖었다. "들어가 보시오! 다시 들어가서 패공께 나는 고양의 술꾼이지 선비가 아니라고 전해주시오."
使者懼而失謁, 跪拾謁, 還走, 復入報曰: 客, 天下壯士也, 叱臣, 臣恐, 至失謁. 曰; 走. 復入言, 而公高陽酒徒也.
사자는 두려워 명함을 떨어뜨렸다가 허리를 굽혀 명함을 주워서 다시 들어가 아뢰었다. "손님은 천하의 장사이옵니다. 저를 꾸짖었는데 저는 두려워서 명함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들어가 보시오! 다시 들어가서 고양의 술꾼이라고 전하시오'라 했습니다."
沛公遽雪足杖矛曰: 延客入.
그러자 패공은 황급히 맨발로 창을 잡고서 말했다. "손님을 들어오게 하라!"
2
酈生入, 揖沛公曰: 足下甚苦, 暴衣露冠, 將兵助楚討不義, 足不何不自喜也. 臣願以事見, 而曰; 吾方以天下為事, 未暇見儒人也. 夫足下欲興天下, 大事而成天下之大功, 而以目皮相, 恐失天下之能士. 且吾度足下之智不如吾, 勇又不如吾. 若欲就天下而不相見, 竊為足下失之.
역생은 들어와서 패공에게 읍하고 말했다. "족하께서는 몹시 고생을 하시며, 옷은 햇빛에 쏘이고 관은 비에 젖은 채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도와 불의한 진나라를 정벌하고 계시는데 족하께서는 어찌 스스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까? 저는 천하의 일 때문에 족하를 뵙기를 원했으나 '내가 지금 천하의 일로 바쁘기 때문에 선비를 만날 겨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족하께서는 천하의 대업을 일으켜 천하의 큰 공을 세우려 하시면서 사람의 겉모습만 보시니, 좋은 인재들을 놓쳐버리실 까 염려됩니다. 또한 족하의 지혜가 저보다 못하고 용맹함 또한 저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족하께서 천하의 대업을 이루고자 하시면서 저를 만나 주시지 않으면, 족하께서는 실수를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沛公謝曰: 鄉者聞先生之容, 今見先生之意矣.
패공은 사과하며 말했다. "아까는 선생의 용모에 대해 들었을 뿐인데, 지금은 선생의 뜻을 알았소."
乃延而坐之, 問所以取天下者.
그리고 역생을 이끌어 자리에 앉히고 천하를 취할 방법에 대해 물었다.
酈生曰: 夫足下欲成大功, 不如止陳留. 陳留者, 天下之據衝也, 兵之會地也, 積粟數千萬石, 城守甚堅. 臣素善其令, 願為足下說之. 不聽臣, 臣請為足下殺之, 而下陳留. 足下將陳留之眾, 據陳留之城, 而食其積粟, 招天下之從兵. 從兵已成, 足下橫行天下, 莫能有害足下者矣.
역생이 말했다. "무릇 족하께서 큰 공을 이루고자 하신다면 진류(陳留)에 머무르시는 편이 낫습니다. 진류는 천하의 요충지이며, 군사들이 모이는 땅이며, 수천만 석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고 성의 수비가 대단히 견고합니다. 제가 평소에 그곳의 현령과 친분이 있으니 족하를 위해 그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제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제가 족하를 위해 그를 죽여 진류를 항복시키겠습니다. 족하께서는 진류의 무리를 거느리고 진류성을 점거하고 그곳에 쌓아놓은 식량을 먹으면서 따르는 천하의 군사를 모집하십시오. 군사를 다 모집하신 후에 족하께서 천하를 횡행하시면 아무도 족하를 방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沛公曰: 敬聞命矣.
패공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삼가 가르침에 따르겠소."
3
於是酈生乃夜見陳留令, 說之曰: 夫秦為無道而天下畔之, 今足下與天下從則可以成大功. 今獨為亡秦嬰城而堅守, 臣竊為足下危之.
이에 역생은 그날 밤 진류 현령을 만나 그를 설득하며 말했다. "무릇 진나라는 무도해 천하가 반기를 들고 있으니, 지금 그대가 천하와 더불어 따른다면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만약 혼자서 망해가는 진나라를 위해 성을 둘러싼 채 굳게 지킨다면, 신은 그대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오."
陳留令曰: 秦法至重也, 不可以妄言, 妄言者無類, 吾不可以應. 先生所以教臣者, 非臣之意也, 願勿復道.
그러자 진류 현령이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의 법은 매우 엄해 망언을 해서는 안 되며, 망언을 하는 사람은 멸족당할 것이니, 나는 그대의 말에 따를 수 없소. 그대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니 다시는 말하지 마시오."
酈生留宿臥, 夜半時斬陳留令首, 踰城而下報沛公.
역생은 그곳에 머물러 자다가 한밤중에 진류 현령의 머리를 베고 성을 넘어와서 패공에게 보고했다.
沛公引兵攻城 縣令首於長竿以示城上人, 曰: 趣下, 而令頭已斷矣. 今後下者必先斬之.
이에 패공은 군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고, 진류 현령의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성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빨리 항복하라, 현령의 머리는 이미 베어졌다! 지금부터 뒤늦게 항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베겠다!"
於是陳留人見令已死, 遂相率而下沛公. 沛公舍陳留南城門上, 因其庫兵, 食積粟, 留出入三月, 從兵以萬數, 遂入破秦.
이에 진류현 사람들은 현령이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마침내 잇달아 패공에게 항복했다. 패공은 진류 남쪽 성문 위에 주둔하면서 그곳의 병기와 저장해 놓은 식량으로 3개월 동안 머무르니 따르는 군사가 수만 명에 달했고, 마침내 진나라를 격파했다.
4
太史公曰: 世之傳酈生書, 多曰漢王已拔三秦, 東擊項籍而引軍於鞏洛之閒, 酈生被儒衣往說漢王. 乃非也.
태사공은 말한다. "세상에 전하는 역생(酈生)에 관한 책에는 대부분 한왕(漢王)이 이미 삼진(三秦)을 함락시킨 뒤 동쪽으로 항우를 공격하고 군대를 이끌고 공현(鞏縣)과 낙양(洛陽) 사이에 물러나 있을 때, 역생이 유생의 옷을 입고 한왕에게 가서 유세했다고 되어 있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自沛公未入關, 與項羽別而至高陽, 得酈生兄弟.
그때 패공은 함곡관에 들어가지 않았고, 항우와 헤어져 고양(高陽)에 이르렀을 때 역생(酈生) 형제를 얻었다.
余讀陸生新語書十二篇, 固當世之辯士.
내가 육고(陸賈)의 신어(新語) 12편을 읽어보니 과연 당시의 변사(辯士)였다.
至平原君子與余善, 是以得具論之.
평원군(平原君)의 아들과 나는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주건(朱建)의 일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 高(높을 고)는 ❶상형문자로 髙(고)의 본자(本字)이다. 성의 망루의 모양으로 높은 건물의 뜻이다. 후에 단순히 높음의 뜻이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高자는 ‘높다’나 ‘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高자는 높게 지어진 누각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高자를 보면 위로는 지붕과 전망대가 그려져 있고 아래로는 출입구가 口(입 구)자로 표현되어있다. 이것은 성의 망루나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던 종각(鐘閣)을 그린 것이다. 高자는 이렇게 높은 건물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높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지만 높은 것에 비유해 ‘뛰어나다’나 ‘고상하다’, ‘크다’와 같은 뜻도 파생되어 있다. 高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상용한자에서는 관련된 글자가 없다. 그래서 高(고)는 (1)높은을 뜻함 (2)높이 또는 어떤 일을 한 결과 얻어진 양을 뜻함 (3)높이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높다 ②뛰어나다 ③크다, ④고상하다 ⑤존경하다 ⑥멀다 ⑦깊다 ⑧비싸다 ⑨뽐내다 ⑩높이, 고도(高度) ⑪위, 윗 ⑫높은 곳 ⑬높은 자리 ⑭위엄(威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윗 상(上), 높을 항(亢), 높을 탁(卓), 높을 교(喬), 높을 준(埈), 높을 존(尊), 높을 아(峨), 높을 준(峻), 높을 숭(崇), 높을 외(嵬), 높을 요(嶢), 높을 륭/융(隆), 밝을 앙(昻), 귀할 귀(貴),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래 하(下), 낮을 저(低), 낮을 비(卑)이다. 용례로는 높은 지위를 고위(高位), 비싼 값을 고가(高價), 나이가 많음을 고령(高齡), 아주 빠른 속도를 고속(高速), 등급이 높음을 고급(高級), 뜻이 높고 아담함을 고아(高雅), 높고 낮음을 고저(高低), 몸가짐과 품은 뜻이 깨끗하고 높아 세속된 비천한 것에 굽히지 아니함을 고상(高尙), 상당히 높은 높이를 가지면서 비교적 연속된 넓은 벌판을 가진 지역을 고원(高原), 인품이나 지위가 높고 귀함을 고귀(高貴), 여러 층으로 높이 겹쳐 있는 것 또는 상공의 높은 곳을 고층(高層), 등급이 높음이나 정도가 높음을 고등(高等), 술을 좋아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고양주도(高陽酒徒), 지위가 높은 큰 벼슬자리를 고관대작(高官大爵),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을 고산유수(高山流水), 베개를 높이 하고 누웠다는 고침이와(高枕而臥), 베개를 높이 하여 편안히 잔다는 고침안면(高枕安眠),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된다는 고안심곡(高岸深谷), 높은 누대와 넓은 집이라는 고대광실(高臺廣室) 등에 쓰인다.
▶️ 陽(볕 양)은 ❶형성문자로 阦(양), 阳(양), 氜(양)은 통자(通字), 阳(양)은 간자(簡字), 昜(양)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좌부변(阝=阜; 언덕)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昜(양)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昜(양)은 旦(단; 해뜸)을 조금 변경한 자형(字形)이며 '해가 뜨다', '오르다', '벌어지다', '넓어지다' 따위의 뜻을 나타낸다. 좌부변(阝=阜; 언덕)部는 언덕, 산, 언덕의 볕이 드는 쪽, 양지쪽, 해, 따뜻하다, 적극적(積極的)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陽자는 '양달'이나 '볕', '낮'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陽자는 阜(阝:언덕 부)자와 昜(볕 양)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昜자는 햇볕이 제단 위를 비추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볕'이라는 뜻이 있다. 여기에 阜자까지 결합한 陽자는 태양이 제단과 주변을 밝게 비추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陽(양)은 (1)태극(太極)이 나뉜 두 기운(氣運) 중(中)의 하나. 음(陰)에 대하여 적극적(積極的), 능동적인 면을 상징하는 철학적(哲學的) 범주(範疇). 밝음, 하늘, 해, 수컷, 더움 등으로 나타난다는 것임 (2)양전기를 이르는 말 (3)약성, 체질(體質), 증세(症勢) 같은 것이 적극적이고, 덥고, 활발한 것을 이름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볕, 양지(陽地) ②해, 태양(太陽) ③양, 양기(陽氣) ④낮, 한낮 ⑤남성(男性) ⑥하늘 ⑦인간(人間) 세상(世上) ⑧음력(陰曆) 시월(十月)의 딴 이름 ⑨봄과 여름 ⑩돋을새김 ⑪나라의 이름 ⑫거짓으로 ⑬따뜻하다, 온난(溫暖)하다 ⑭가장(假裝)하다(태도를 거짓으로 꾸미다) ⑮드러내다 ⑯밝다 ⑰맑다 ⑱선명(鮮明)하다 ⑲양각(陽刻)하다 ⑳굳세고 사납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갤 청(晴),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그늘 음(陰), 흐릴 담(曇), 비 우(雨)이다. 용례로는 햇볕이 바로 드는 곳을 양지(陽地), 따뜻한 봄으로 음력 정월의 다른 이름을 양춘(陽春), 봄날의 따뜻한 햇볕을 양광(陽光), 양의 기운으로 적극적인 기운을 양기(陽氣),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질이나 볕을 좋아하는 성질을 양성(陽性), 음화를 인화지에 박힌 사진으로 실물과 명암과 흑백이 똑같이 나타남을 양화(陽畫), 양기있는 사람을 놀리는 말 또는 남성 바깥 생식기의 길게 내민 부분을 양물(陽物), 남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양도(陽道), 0보다 큰 실수를 양수(陽數), 바탕이 되는 물건의 거죽에 도드라지게 새긴 조각을 양각(陽刻), 빛의 율동으로 적에 대한 속임수로 하는 전술 기동을 양동(陽動), 원자핵을 구성하는 잔 알갱이를 양자(陽子), 여자들이 볕을 가리기 위하여 쓰는 우산같이 만든 물건을 양산(陽傘), 만물을 나서 자라게 하는 해의 덕을 양덕(陽德), 볕이나 성질이 환하게 밝음을 양명(陽明), 봄이나 여름에 잘 자라는 나무를 양목(陽木), 열이 몹시 오르고 심하게 앓는 병을 양병(陽病), 두 개의 산이 있을 때 험한 쪽의 산을 양산(陽山),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집을 양택(陽宅), 양기가 허약함을 양허(陽虛), 서울의 옛 이름을 한양(漢陽), 천지만물을 만들어 내는 상반하는 성질의 두 가지 기운 곧 음과 양을 음양(陰陽), 해질 무렵에 비스듬히 비치는 해 또는 햇볕을 사양(斜陽), 저녁 나절의 해를 석양(夕陽), 저녁 때의 햇볕을 만양(晩陽), 기울어져 가는 햇볕을 잔양(殘陽), 봄볕을 춘양(春陽), 바람과 볕을 풍양(風陽), 산의 양지 곧 산의 남쪽편을 산양(山陽), 양기를 다함을 노양(老陽), 참깨의 잎을 청양(靑陽), 양기가 움직여 일어남을 발양(發陽), 몹시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염양(炎陽), 몸의 양기를 도움을 보양(補陽), 보는 앞에서는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딴마음을 먹음을 일컫는 말을 양봉음위(陽奉陰違), 따뜻하고 좋은 봄철을 일컫는 말을 양춘가절(陽春佳節), 따뜻한 봄의 화창한 기운을 일컫는 말을 양춘화기(陽春和氣), 음양이 서로 조화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음양부조(陰陽不調),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 좋은 일을 베풀면 반드시 그 일이 드러나서 갚음을 받음을 일컫는 말을 음덕양보(陰德陽報), 화창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이란 뜻으로 따뜻한 봄날씨를 일컫는 말을 화풍난양(和風暖陽), 입춘을 맞이하여 길운을 기원하는 말을 건양다경(建陽多慶) 등에 쓰인다.
▶️ 酒(술 주)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동시에 음(音)을 나타내는 닭 유(酉; 술, 닭)部와 水(수; 액체)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酒자는 ‘술’이나 ‘술자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酒자는 水(물 수)자와 酉(닭 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酉자는 술을 담는 술병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술병을 그린 酉자에 水자가 더해져 있으니 酒자는 ‘술’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고대에는 酒자와 酉자의 구별이 없었다. 酉자도 ‘술’이라는 뜻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酉자가 십이지(十二支)의 열째 글자인 ‘닭’을 뜻하게 되면서 지금은 酒자가 ‘술’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酒(주)는 어떤 명 아래에 쓰이어 술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 ①술(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취하는 음료) ②잔치, 주연(酒宴) ③술자리, 주연(酒筵) ④무술(제사 때 술 대신에 쓰는 맑은 찬물) ⑤술을 마시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술을 마시며 즐겁게 노는 간단한 잔치를 주연(酒宴), 시골의 길거리에서 술이나 밥 따위를 팔고 또 나그네도 치는 집을 주막(酒幕), 술을 따라 마시는 그릇을 주배(酒杯), 술 친구를 주붕(酒朋), 술을 마시며 노는 자리를 주석(酒席), 술을 파는 집을 주가(酒家), 술집을 주점(酒店), 주포(酒舖), 주옥(酒屋), 주청(酒廳), 술의 종류를 주류(酒類), 술에 취하여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거나 막되게 하는 것 또는 그런 말이나 행동을 주정(酒酊), 술을 마시는 분량을 주량(酒量), 술을 잘 마시는 사람으로 주량이 아주 큰 사람을 주호(酒豪), 술을 마심을 음주(飮酒), 아침에 마시는 술을 묘주(卯酒), 약주를 뜨고 남은 찌꺼기를 모주(母酒), 끼니 때 밥에 곁들여서 한두 잔 마시는 술을 반주(飯酒), 술을 먹던 사람이 술을 끊음을 단주(斷酒), 술을 못 먹게 금함 또는 먹던 술을 끊고 먹지 않음을 금주(禁酒), 빛과 맛이 좋은 술을 미주(美酒), 별다른 방법으로 빚은 술 또는 이별할 때 마시는 술을 별주(別酒), 약재를 넣어서 빚은 술을 약주(藥酒), 아무렇게나 빚어서 맛이 좋지 않은 술을 박주(薄酒),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술을 우려 마심 또는 그 술을 엽주(獵酒), 곡식으로 만든 술을 곡주(穀酒), 술을 마실 때 곁들여 먹는 고기나 나물 따위를 안주(按酒), 술을 썩 좋아함을 애주(愛酒), 술이 못을 이루고 고기가 수풀을 이룬다는 뜻으로 매우 호화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이르는 말을 주지육림(酒池肉林), 술을 마시는 사람은 장이 따로 있다는 뜻으로 주량은 체구의 대소에 관계 없음을 이르는 말을 주유별장(酒有別腸), 술과 밥주머니라는 뜻으로 술과 음식을 축내며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주대반낭(酒袋飯囊), 술 마시는 용과 시 짓는 범이라는 뜻으로 시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주룡시호(酒龍詩虎), 술이 들어가면 혀가 나온다는 뜻으로 술을 마시면 수다스러워진다는 말을 주입설출(酒入舌出), 돼지 발굽과 술 한 잔이라는 뜻으로 작은 물건으로 많은 물건을 구하려 한다는 돈제일주(豚蹄一酒) 등에 쓰인다.
▶️ 徒(무리 도)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두인변(彳; 걷다, 자축거리다)部와 止(지; 발자국의 모양)를 합(合)하여 이루어진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에 음(音)을 나타내는 土(토; 땅, 흙)를 더한 글자이다. 수레 따위를 타지 않고 걸어가는 일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徒자는 ‘무리’나 ‘제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徒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走(달릴 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徒자를 보면 土(흙 토)자와 止(발 지)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土자 주위로는 점을 찍어 흙먼지가 날리는 모습을 표현했다. 이것은 발을 내디디며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彳자가 더해지면서 ‘길을 걷다’라는 뜻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徒자의 본래 의미는 ‘걷다’나 ‘보행’이었다. 그러나 후에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의미가 파생되면서 ‘무리’나 ‘제자’를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徒(도)는 (1)사람 무리의 뜻을 나타내는 말 (2)도형(徒刑) 등의 뜻으로 ①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동아리(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무리) ②동류(同類) ③제자(弟子), 문하생(門下生) ④종(從), 하인(下人) ⑤일꾼, 인부(人夫) ⑥보졸(步卒), 보병(步兵) ⑦맨손, 맨발 ⑧죄수(罪囚), 갇힌 사람 ⑨형벌(刑罰), 징역(懲役), 고된 노동을 시키는 형벌(刑罰) ⑩헛되이, 보람없이 ⑪홀로 ⑫다만, 단지(但只) ⑬곁, 옆 ⑭걸어다니다, 보행하다 ⑮헛되다, 보람없다 ⑯따르는 이가 없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떼 부(部), 무리 휘(彙), 무리 대(隊), 무리 훈(暈), 무리 조(曹), 무리 등(等), 무리 군(群), 무리 중(衆), 무리 배(輩), 무리 류(類), 무리 당(黨), 어지러울 방(龐)이다. 용례로는 타지 아니하고 걸어감을 도보(徒步), 보람없이 애씀이나 헛되이 수고함을 도로(徒勞), 도보로 가는 길을 도로(徒路), 떼를 지은 무리나 불순한 사람들의 무리를 도당(徒黨), 헛되이 씀을 도소(徒消), 무익한 행위 또는 소용없는 짓을 도위(徒爲), 걸어서 감을 도행(徒行), 도보로 물을 건넘을 도섭(徒涉), 도보로 운반함을 도운(徒運), 함께 어울려 같은 짓을 하는 패 또는 무리를 도배(徒輩), 유명무실한 법을 도법(徒法),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한갓 먹기만 함을 도식(徒食), 아무 보람없이 양육함을 도양(徒養), 힘들이지 아니하고 취함을 도취(徒取), 쓸데없는 토론을 도론(徒論), 헛된 말이나 보람없는 말을 도언(徒言), 기약 없는 목숨 또는 아무 소용이 되지 아니하는 목숨을 도명(徒命), 무익한 죽음을 도사(徒死), 한갓 착하기만 하고 주변성이 없음을 도선(徒善), 화장하지 아니한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도안(徒顔), 사람의 무리를 도중(徒衆),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문도(門徒),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신도(信徒),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그 무리를 교도(敎徒), 학생의 무리나 학문을 닦는 사람을 학도(學徒), 간사한 무리를 간도(奸徒), 목에 칼을 쓴 죄인을 겸도(鉗徒), 의를 주창하는 무리를 의도(義徒), 반란을 꾀하거나 거기에 참여한 무리를 반도(叛徒), 폭동을 일으켜 치안을 문란시키는 무리를 폭도(暴徒), 같이 한 패를 이룬 무리를 붕도(朋徒), 애만 쓰고 이로움이 없음을 도로무익(徒勞無益), 헛되이 수고만 하고 공을 들인 보람이 없음을 도로무공(徒勞無功), 공연히 말만 많이 하고 아무 보람이 없음을 도비순설(徒費脣舌), 마음과 힘을 기울여 애를 쓰나 아무런 보람이 없음을 도비심력(徒費心力),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놀고 먹음을 유수도식(遊手徒食), 술을 좋아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고양주도(高陽酒徒), 똥도 핥을 놈이라는 뜻으로 남에게 아첨하여 부끄러운 짓도 꺼려하지 않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상분지도(嘗糞之徒),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을 무위도식(無爲徒食), 집안이 네 벽 뿐이라는 뜻으로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가도사벽(家徒四壁)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