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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다음주쯤 설렁설렁 쓸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전편 반응이 좋아서 버닝해 버리는 바람에 그냥 오늘 올리겠습니다 ㅋㅋ
한니발 vs 스키피오 - 2
9. 스키피오의 등장
바로 이 때, 24세밖에 되지 않은 한 젊은 청년이 원로원 안으로 들어옵니다. 청년의 이름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이베리아에서 전사한 코르넬리우스 사령관의 아들이자 그네우스 사령관의 조카였죠. 스키피오는 자신에게 에스파냐 파견군 사령관직을 부여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원로원 의원들은 당연히 코웃음을 쳤습니다. 병력을 직접 지휘해본 경험이라고는 전무했고 원로원 의원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직경험이 풍부한 것도 아닌, 그야말로 애송이가 2개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직에 자신을 추천했으니 좋게 본 사람은 당연히 없었죠. 하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청년의 강력한 주장에 결국 마음이 움직입니다. 사실 뛰어난 장교들은 모두 한니발을 상대하러 남쪽 전선에 가 있어 적임자가 없기도 했고 더구나 아버지와 숙부의 원한을 갚겠다는 데 반대할 마땅한 명분도 없었죠. 그리고 죽은 코르넬리우스와 그네우스는 원로원 의원들의 동료이기도 했기 때문에 어느정도 감정적인 면도 작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법무관을 한 적도 없는 스키피오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2개 군단의 지휘권을 부여받고 에스파냐로 향합니다. 로마 공화국 역사상 처음 있는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인사조치였습니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어제까지만 해도 민간인이었던 일반인이 임관하자마자 별 세 개를 달게된 격이나 마찬가지죠.
10. 격동하는 전장, 로마의 반격
기원전 209년, 서부 지중해 세계의 모든 이목이 한니발과 마르첼루스가 화려하게 붙은 이탈리아 남부 전선 쪽에 쏠려 있는 사이, 25세가 된 스키피오와 2개 군단이 타라고나의 로마군 진영에 조용히 도착합니다. 진영에는 패잔병 7천명이 남아있었고 스키피오가 데려온 병력과 합해 총 병력은 2만8천. 이 병력으로 거의 8만에 달하는 한니발 동생들의 병력에 맞서 보급선을 차단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은 셈이죠. 하지만 스키피오는 아예 이 병력만으로 카르타고의 에스파냐 식민지 전체를 점령할 속셈을 품고 있었습니다. 겨울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본토에 직접 쳐들어간 한니발의 무모함에 견줄만한 무모함을 이 청년은 지니고 있었죠.
1) 카르타헤나 (BC 209)
스키피오는 봄이 되자마자 행동을 개시하여 이베리아 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항구도시 카르타헤나를 급습합니다. 에스파냐의 로마군 본거지인 타라고나에서 20일 걸리는 거리지만 스키피오는 강행군으로 7일만에 카르타헤나에 도달합니다. 설마하니 에스파냐에 오자마자 처음부터 카르타헤나를 넘볼 생각을 할 줄은 상상도 못한 카르타고는 눈 뜨고 당할 수 밖에 없었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에게 로마가 허를 찔렸듯이, 에스파냐의 8만 카르타고군 또한 완전히 허를 찔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에스파냐 최대 거점이었던 카르타헤나가 함락되는 걸 그저 손가락 빨면서 지켜봅니다.
2) 바이쿨라 (BC 208)
카르타헤나를 함락한 이듬해 스키피오는 곧바로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의 3만 군세가 진을 치고 있는 바이쿨라로 진군합니다. 하스드루발은 자신에게 유리한 지형을 골라 언덕 위에 진을 치고 막내동생 마고네의 군대와 합류할 목적으로 진영에서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고네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 역시 빠른 행군이 장기인 스키피오의 군대가 먼저 도착하게 되는데 스키피오는 바이쿨라에 도착하자마자 한 눈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지형임을 간파하고 속공을 전개합니다. 스키피오의 전력은 고작해야 2만, 그리고 기병은 없는거나 마찬가지여서 절대적으로 불리했지만 마고네의 병력과 합세할 목적이었던 하스드루발은 줄곧 수동적인 자세를 보였기 때문에 전투의 주도권은 오히려 스키피오가 쥐게 됩니다. 두 진영은 얕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는데 하스드루발의 군대가 느긋하게 전투태세를 갖추는 모습을 본 스키피오는
먼저 에스파냐 원주민 용병들에게 신속한 도강과 함께 적의 전위부대를 칠 것을 명령하고 놀란 하스드루발의 군대가 급히 반격하여 용벙들을 치자 스키피오는 전군을 일시에 도강시켜 아직 채 진형을 차리지도 못한 하스드루발의 측면으로 돌아가 세 방면에서 몰아칩니다. 카르타고군이 자랑하는 우수한 기병대는 도움닫기를 할 시간조차 얻지 못해 무력화 되었고 코끼리 부대는 아예 활용해보지도 못하고 격퇴당하게 됩니다. 여태껏 한니발의 군대가 그랬듯, 바이쿨라에서 스키피오의 주력부대 또한 타격을 거의 입지 않고 대승을 거두었죠. 로마의 입장에선 간만에 통쾌한 복수를 한 셈이었습니다.
3) 하스드루발의 로마 진군 (BC 207)
바이쿨라에서의 패배는 카르타고군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3만의 군세였던 하스드루발은 고작 1만 남짓 남은 군대를 이끌고 도망쳐 시스코네와 마고네와 합류하는데 이때 하스드루발은 스키피오를 상대하지 않고 3만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스키피오의 군대가 에스파냐에 깊숙이 들어온 지금 이탈리아에 고립되어 있는 한니발을 지원한다는 본래의 목표를 달성하기 쉽게 되었고 이 사실을 생각해 낸 카르타고군은 재빨리 결정을 내렸죠. 그리고 남은 병력을 마고네와 시스코네가 이끌고 스키피오를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스드루발의 3만군대는 곧바로 북상하여 스키피오의 추격을 뿌리치고 타라고나에 있는 로마군을 피해, 알프스로 향합니다. 하스드루발을 놓쳐버린 거죠. 명백한 스키피오의 전략적 실수였습니다. 때는 기원전 207년, 하스드루발이 로마로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의 방패' 파비우스는 격노하여 이후 스키피오를 불신하게 됩니다.
4) 메타우로 (BC 207)
스키피오의 실수로 하스드루발이 형과 재회하러 로마로 향하게 되었지만 우연찮게 한니발도 똑같이 실수를 범합니다. 이때 한니발은 마르첼루스와의 피 튀기는 공방전에서 거의 승리를 거머쥔 상황이었습니다. 한니발이 유일하게 존경했던 로마의 장군 마르첼루스는 전사했고 노예군단을 이끌고 게릴라 작전을 수행하던 셈프로니우스도 역시 전사하여 고착되어있던 남부전선에서 한니발이 다시 우세를 보이기 시작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한니발 또한 휘하 병력이 많이 줄어들어 로마와 결판을 내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때문에 하스드루발의 원군 소식을 들은 한니발은 쾌재를 불렀죠.
하지만 당시 지중해 세계는 한니발의 명성이 너무 높아져 있었습니다. 때문에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의 진군을 막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죠.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프랑스 남부의 갈리아 부족, 그리고 알프스의 산악부족들에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간단히 이탈리아 반도에 진입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리 없는 한니발은 동생이 이미 알프스를 넘었을 줄은 꿈도 꾸지 못하고 아직도 이탈리아 남부에 틀어박혀 있었죠. 그리고 이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이탈리아의 메타우로에 이르렀을 때쯤 이제 막 북상하기 시작한 한니발보다 먼저 로마의 군대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 메타우로 회전에서 하스드루발의 3만 군대는 전멸하게 됩니다. 하스드루발은 결국 형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전사하게 되죠.
이 사실을 알리 없는 한니발은 슬슬 동생이 올 때 쯤 되었다 싶어 북상하는 중이었는데 이때 한니발의 진영에 로마군이 꾸러미 하나를 던집니다. 꾸러미 안에는 하스드루발의 목이 담겨 있었죠. 이걸 본 한니발의 심정이 어땠는지 전해주는 사료는 없습니다. 11년만에 만난 동생의 목을 본 한니발은 이후 이탈리아 남부에 틀어박혀 다시는 나오지 않습니다.
11. 통한의 일격, 일리파
이듬해, 기원전 206년에 이르러 에스파냐의 카르타고군은 총력을 기울여 반격에 나서기로 결의합니다. 근래에 연달아 크게 패한 카르타고 측에서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결하려 했고 이때 가장 손쉬워 보이는 타겟으로 역시 병력이 적은 스키피오를 목표로 합니다. 카르타고는 에스파냐의 군대를 모두 끌어모아 무려 7만의 보병과 4천의 대군을 구성하고 코끼리 32마리를 동원합니다.이 대군이 일리파(Ilipa)에 집결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스키피오의 군대는 로마가 이길 낌새를 눈치 챈 에스파냐 원주민이 많이 참가하여 당초의 2만8천에서 병력이 많이 불어나 있었는데 그래도 보병이 4만5천, 기병이 3천으로 마고네와 시스코네의 카르타고군에 비해 병력이 많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스키피오는 대담하게 적 진영에 먼저 접근합니다. 그리고 일부러 남쪽으로 빙 돌아가 진영을 설치하는데 남쪽에 있는 카르타고의 항구도시 카디스로 도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죠.스키피오는 여기서 에스파냐의 카르타고군을 전멸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병력에 자신이 있던 카르타고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평원을 가득 채우며 진영을 설치합니다. 스키피오도 진영을 치고 적의 동태를 살핍니다. 시스코네와 마고네는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스키피오를 경계하여 섣불리 싸움을 걸진 않았고 스키피오도 먼저 싸움을 걸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키피오에게는 이미 계산된 행동이었죠. 양군이 서로 대치한 채 전쟁터에 나왔다 진영으로 돌아가기를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동안 스키피오는 어느 날 부하들 모두에게 동이 트기 전 미리 식사를 끝내고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라고 요구했죠. 그리고 교묘하게 병력의
포진을 바꿉니다.
카르타고군은 이튿날 새벽 이미 진용을 모두 갖춘 채 돌격 준비를 하고 있는 로마군을 보고 깜짝 놀라 서둘러 진형을 갖추느라 밥도 먹지 못하고 코끼리 부대를 배치할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합니다. 반면 로마군은 이미 배를 든든히 채우고 포진까지 달라진 상태였죠. 중앙에 비주력 부대인 에스파냐 용병들을 배치하고 주력부대인 중무장 보병은 어느새 좌우로 비스듬히 포진해 있었죠. 우왕좌왕하고 있는 카르타고의 코끼리 부대는 스키피오의 궁병대의 공격에 넋을 잃고 오히려 아군 기병대 쪽에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혼란에 바진 카르타고 기병대를 스키피오의 기병대가 유린하고 스키피오군의 정면으로 달려든 카르타고의 주력 보병대는 모두 비스듬하게 진형을 바꿔놓은 스키피오의 중무장 보병대에 포위되어 버립니다.
주력부대인 코끼리 부대와 기병대를 모두 잃고 좌측,우측,전방 세 방면에서 포위되어버린 카르타고군은 결국 유일하게 열려있는 후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일리파 회전이 끝난 직후 에스파냐의 카르타고군은 7만4 천이었던 병력이 6천으로 줄어들게 되고 총사령관 시스코네와 한니발의 막내동생 마고네는 서쪽 끝 대서양까지 달아나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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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의 이 통렬한 일격으로 카르타고는 에스파냐의 식민지 전체를 로마에 빼앗기게 되었고 줄곧 수세였던 로마가 공세로 전환하게 되는 일대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카르타고 본국이 로마의 공격을 받을 차례가 되죠. 한 마디로 형세가 역전된 것입니다.
(로마, 에스파냐 획득)
12. 자마로 가는 길
에스파냐를 제패한 스키피오의 나이는 불과 29살,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이 젊은이는 수도 로마로 개선하자마자 원로원에 출두하여 로마공화국의 최고 사령관직인 집정관(대통령,혹은 총통) 직위를 요구합니다. 집정관의 자격연령은 최소 40 세로 원칙적으로 스키피오에게는 불가능한 자리였죠. 하지만 스키피오는 로마인에게 최고의 영예로 여겨졌던 개선식을 포기하면서까지 집정관직을 요청했습니다. 이미 스키피오에게 한번 특례를 허용했던 원로원으로서는 당연히 난색을 표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이미 위대한 청년 영웅이 되어 귀국한 스키피오에게 로마의 민심이 모두 쏠려 있던 상황이라 원로원은 울며 겨자먹기로 스키피오에게 집정관 직위를 부여합니다.
당초 원로원은 '이탈리아의 방패' 파비우스의 권유에 따라 이탈리아 남부에 틀어박혀 있는 한니발을 스키피오와 대결시킬 생각이었지만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본국을 침략하여 한니발을 끌어낸다는' 전략을 끝까지 고수하여 결국 안 그래도 심통이 나 있던 원로원은 말 안 듣는 이 청년에게 완전히 등을 돌려 알아서 군단 편성을 하라고 심술을 부립니다. 다행히 스키피오의 명성이 이미 하늘을 찌를 듯하여 수만명의 지원병이 모집되었는데 총 3만여명의 병력을 모은 스키피오는 드디어 카르타고에 치명적인 일격을 선사하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상륙하게 됩니다.
카르타고에 상륙한 스키피오는 시스코네와 시팍스의 카르타고 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마우리타니아의 왕자 마시니사의 기병전력마저 끌어들여 병력이 더욱 불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카르타고에 막대한 배상금과 항복을 요청하는데 카르타고 정부는 급히 한니발에게 본국으로 복귀할 것을 명령하고 교섭을 끌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한니발은 묵묵히 생사고락을 함께한 병사들에게 카르타고로의 귀환을 발표하고 곧바로 이탈리아를 떠날 채비를 합니다.
로마 원정을 시작한지 어느덧 16년이 지나가고 있었고 한니발은 끝내 로마를 멸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생의 대부분을 보낸 에스파냐 식민지마저 잃은 후의 귀환이었습니다. 한니발은 항상 그리스인 기록자 실레누스를 개인 서기로 대동하고 있었지만 한번도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의 공적이 후세에 자세히 알려진데 반해, 이때의 감정이나 심정이 어땠는지는 후세의 우리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어쨌든 한니발이 카르타고에 도착하자, 카르타고 정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강경한 태도로 돌변해 스키피오의 강화제의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남은 병력을 있는대로 끌어모아 한니발을 사령관으로 앉혀 최후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이제 드디어 길었던 전쟁의 끝, 2차 포에니 전쟁 최후의 순간이 도래하게 됩니다.
13. 자마 (BC 202)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자마 전투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전술의 최고 걸작이면서도 로마인의 집요함 때문에 결국 전쟁의 행방을 결정하지 못한 칸나이 전투와는 달리, 자마 전투는 전쟁의 행방을 결정짓는 동시에 지중해 세계 전체의 장래를 결정지었다."
이 자마 전투는 희대의 전략가 둘이 맞붙었다는 점에서는 카이사르vs폼페이우스, 살라딘vs리처드의 대결에 버금가고 이후 역사의 향방을 결정지었다는 점에서는 항우와 유방이 붙은 가이샤(垓下) 전투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붙은 파르살루스 회전과 맞먹습니다.
때는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자마.
총병력 4만, 기병 6천의 스키피오의 군대와 총병력 5만,기병 4천,코끼리 80마리의 한니발 군대가 맞닥뜨립니다. 양쪽 군대 모두 불패의 사령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기는 양측이 모두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양군이 자마에서 대치한지 사흘째, 한니발이 회담을 제의합니다. 한니발로서는 아무래도 스키피오에 대한 궁금증이 컸을 것입니다. 이미 중년에 접어든 한니발로서는 흡사 자신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천재적인 전략가이자 자신의 가문이 그토록 공을 들여 식민화한 에스파냐를 정복한, 그리고 자신을 로마에서 귀국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이 젊은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한번쯤 보고 싶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이 회담제의를 수락한 스키피오는 양진영의 중간쯤에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거기서 한니발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이때 두 사람 모두 통역을 대동하고 갔는데 이걸로 보아 한니발은 16년 동안이나 이탈리아에 원정을 갔으면서도 라틴어를 구사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죠. 명문가의 자제인 스키피오라면 몇 개 국어를 했을 법도 하지만 그리스어는 구사할 수 있어도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어는 구사하지 못했었나 봅니다. 아무튼 이 회담에서 별다른 얘기는 오가지 않았습니다. 둘 다 전투로 결판을 낼 생각은 마찬가지였으니 이 회담은 순수히 서로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튿날 아침, 양군 모두 포진을 시작합니다.
한니발은 기병전력이 열세임을 깨닫고 코끼리와 정예보병으로 결판을 내려 했습니다. 코끼리를 전열인 1선에 배치하고 바로 뒤 2선에 카르타고 시민병과 용병들,기병대를 배치, 그리고 200미터 뒤에 이탈리아 원정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최정예부대 1만5천을 배치합니다. 개전과 동시에 코끼리로 후려쳐 혼란을 유도한 다음 2선의 병사들을 투입해 로마군의 주력인 중무장보병대를 상대로 버티기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죠. 한니발의 예상대로라면 코끼리에 휘둘린 로마군은 바로 뒤이어 들이닥친 2선의 카로타고군을 맞아 힘겨운 전투를 벌이게 되고 정오쯤에 이르면 양군의 투입 병력수는 엇비슷한 상태로 조금씩 카르타고군이 로마의 중무장 보병에 밀리기 시작할 시점입니다. 바로 이때 1만5천의 쌩쌩한 '한니발 부대' 가 진격하여 지친 로마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죠. 어차피 한니발이 진짜로 믿는 부대는 자신이 직접 키운 이 1만5천의 정예부대일 뿐이고 나머지 어중이 떠중이들은 모두 희생양으로 로마군을 지치게 만든 후 죽든 말든 상관 없다 생각한 것입니다. 섬뜩하리만치 냉혹한 전술이었죠.여태까지 한니발이 로마군을 상대할 때의 전술을 요약하면 로마군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의 허를 찔러 무력화 시키고 포위하여 사방에서 동시에 몰아치는 포위섬멸 작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마전투에서의 포진 또한 비슷한 맥락이었고 한니발은 이번에도 자신이 승리할 것을 의심치 않았죠.
이에 맞서는 스키피오는 처음부터 기막힌 포진을 구사합니다. 주력인 중무장 보병을 소대단위로 쪼개 점점이 배치시킨 후 그 사이사이에 역시 경무장 보병대를 소대단위로 잘게 나누어 배치시킨 것이죠. 멀리서 볼 때는 일자로 죽 늘어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만 사실은 선이 아닌 점이었죠.
그리고 희대의 전략가인 한니발을 상대로도 겁을 먹지 않고 자신의 장기인 속공을 여지없이 선보입니다. 스키피오는 포진이 끝나자마자 양측 기병대에게 돌격 명령을 내립니다. 자신의 기병력이 우세함을 깨닫고 지체없이 활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주도권을 가져간 셈이죠.
스키피오의 기병 돌격과 함께 드디어 역사상 유명한 자마전투가 시작됩니다. 한니발은 이에 질세라 코끼리 부대를 지체없이 돌격시킵니다. 하지만 이 때 한니발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일이 생깁니다. 코끼리가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키피오군의 중무장 보병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있던 경무장 보병 부대가 중무장 보병 사이로 파고 들어갑니다. 그러자 일자로 길게 늘어서 있던 보병대의 전열에 중간중간 구멍이 뚫려 커다란 간격이 생깁니다. 이 간격으로 코끼리가 그대로 지나가 버립니다. 전력질주하는 코끼리는 방향을 틀거나 멈추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스키피오는 포진의 묘로 코끼리를 아무런 피해 없이 무력화 시켜버린 것이죠. 이렇게 한니발의 전술 첫단계가 어긋납니다. 코끼리 부대는 그냥 지나가버리다가 도망치거나 사로잡혀 로마군을 혼란에 빠뜨리긴 커녕 오히려 사기만 북돋워 줘버립니다.
스키피오는 내친김에 총공격을 감행합니다. 이미 스키피오의 빠른 기병 돌격으로 양날개가 무너진 카르타고군 2선의 용병부대는 비록 수는 3만여명으로 로마군의 보병보다는 수에서 약간 더 우세했지만 스키피오의 중무장 보병이 전방과 양측 세 방향에서 동시에 들이치자 별 힘도 못 써보고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합니다. 비어있는 곳이라곤 후방 뿐인데 뒤로 도망치면 아군인 '한니발 부대' 가 가차없이 베어버리는 상황. 결국 오도가도 못한 3만의 용병부대는 필사적으로 싸우다 전멸합니다.
한니발의 예상밖으로 별 피해도 주지 못하고 2선이 전멸했지만 로마군 또한 많이 지친 상황이었고 이때 1만5천의 한니발 최정예 부대가 움직입니다. 이때 스키피오는 다가오는 한니발의 부대를 눈 앞에 두고 다른 장군이라면 생각도 못할 짓을 감행합니다. 다가오는 적을 앞에 두고, 군대 전체에 진형을 다시 짜라고 명령한 것이죠.
스키피오의 보병 부대는 비록 많이 지쳤다고는 해도 수에서 앞서는 상황, 움푹 들어간 반달 모양 진형으로 넓게 포진하여 한니발 부대를 반달모양 안에 들이고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한니발의 기병부대를 멀리 패퇴시킨 로마의 기병대가 전선에 복귀하여 이미 세 방향의 포위망에 갇힌 한니발 부대의 유일한 활로인 후방을 차단하며 돌진해 옵니다.
마치 칸나이 전투의 재현을 보는 듯한 광경이 자마에서 펼쳐집니다. 결국 한니발과 함께 알프스를 넘고 위대한 승리들을 일궈낸 한니발의 전사들은 여기서 전멸하게 됩니다. 포위섬멸전의 대가인 한니발의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를 장식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포위섬멸전이었습니다.
14. 두 영웅의 종말.
제2차 포에니 전쟁은 고대 전술의 걸작 자마전투와 함께 종언을 고합니다. 바로 이 순간 서부 지중해 전체의 패권은 온전히 로마공화국으로 넘어갑니다.
한 영웅은 쓸쓸히 수도 카르타고로 돌아와 항복 강화조인식에 참석한 후 훗날 동쪽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고 한 영웅은 로마로 개선합니다. 기원전 201년, 배를 타고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하여 수도 로마로 개선하는 이 33세 청년 영웅의 행렬은 수도 로마로 입성할 때까지 흩뿌려지는 꽃과 환성으로 가득찼으며 이 행렬의 주인공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를 제압한 자라는 명칭을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자마 전투가 끝나고 9년 뒤, 지중해 동부의 시리아로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스키피오는 로도스 섬에서 망명중이던 한니발과 다시 대면하게 됩니다. 이때 한니발은 54세, 스키피오는 42세였죠. 이때 첫글의 도입부에 썼던 최고의 전략가를 논하는 유명한 대화가 오갑니다.
자기 자신을 알렌산드로스 대제와 피로스 왕의 다음가는 세번째 전략가로 꼽은 한니발에게 스키피오가 "하지만 당신은 자마에서 나한테 졌잖소?" 라는 식으로 반문하자 한니발이 "그것만 아니었어도 내가 최곤데..." 라는 식으로 답변하여 이 말의 뜻을 해석하는 역사가들의 의견 또한 분분합니다. 얼핏 보면 자신은 운이 없었을 뿐, 실질적인 전략전술에선 역대최고라고 자화자찬하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다른 해석들도 많이 존재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로마연합을 몇 번 싸워서 이기면 쉽게 해체할 수 있을 것이란 전략적 오판을 하고 하스드루발과의 합류시기도 잡지 못한 굵직한 실수를 두번 저지른 한니발보다는 알렉산드로스가 더 뛰어나다고 봅니다.
전술적인 면에서는 한니발이 더 뛰어나다고 보는 사람도 많은데 막상 전투에선 알렉산드로스가 더 강한 느낌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적진의 어느 곳을 어느 순간에 돌파해야 하는지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천부적인 감을 지니고 있었죠. 그리고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돌파하는 용맹함도 갖추고 있었고요. 마치 맞짱의 귀신같은 느낌이죠. 반면,한니발은 냉혹한 사령관 같은 느낌이고요.
어쨌든, 로도스 섬에서의 회담 이후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합니다.
스키피오는 후에 공화국 특성상 영웅을 싫어하는 원로원으로부터 배척당해 탄핵을 당하게 되는데 여러가지 월권행위같은 죄목을 물고 늘어진 원로원으로부터 범죄자 취급을 당하게 되고 은둔하게 됩니다. 하지만 원로원도 시민들에게 인기가 높은 스키피오를 처벌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하고 공직에서 쫓아낸 정도로 만족하죠. 스키피오는 이 일로 마음에 병을 얻어 별장에서 두문불출하다 기원전 183년 52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납니다. 죽기 전 스키피오는 가문의 묘지에 매장되는 걸 거부합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깁니다.
"배은망덕한 조국이여. 너는 내 뼈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도, 한니발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납니다. 한니발은 죽기 전 비티니아라는 흑해 연안의 나라에 망명해 있었는데 이미 여기까지 세력을 뻗친 로마군의 한 장교가 우연히 한니발의 소재를 파악하게 되고 비티니아의 왕에게 한니발의 신병을 요구합니다. 이를 알게 된 한니발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합니다. 스키피오가 죽은지 얼마 안 된 이 때, 한니발의 나이는 64세였습니다.
그토록 로마의 멸망을 바랬던 한니발의 바람과는 반대로, 로마는 한니발 사후에도 그칠 줄 모르고 끝없이 뻗아나가 이후 로마는 지중해 세계 전체를 제패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라는 또 하나의 천재적인 전략가를 배출하여 결국 지중해를 완전 제패하게 됩니다. 반면, 한 때 찬란한 번영을 구가했던 카르타고는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죠.
이때부터 비로소 거대한 로마문명, 로마제국이 출범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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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