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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레방다리 이야기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는 굴레방다리
지금은 다리가 다 없어지고 개천이 모두 복개됐지만
옛날에는 제법 큰 내가 흐르고 그 내 위로 다리 들이 놓여 있었다
한 두개가 아니고 아주 여러개였다고 기억한다
굴레방다리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봄까지 살았던
나의 유년기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런 동네다
굴레방다리 아래를 흐르던 작은 내가 시작되는 곳은
안산의 끝자락 복준물이라고 불렀던 "복수천"이란 곳이다
복준물 뒤로는 우뚝 솟은 바위인 해골바위가 보였다
거기서부터 발원한 내가 흘러서 경의선이 지나는 철다리 밑을 거쳐
지금의 굴레방다리 정류장을 거쳐 계속 흘러 그 건너 경기공전과
아현국민학교를 거쳐 흘러흘러 한강으로 흘러드는 마포까지 연결되었다
복준물 뒤로는 이대와 연대 뒷산이 이어졌다
울창한 오리나무숲이 있었는데 연애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서로 끌어안고 키스도 하고 그랬는데
몰래 숨어서 그런 장면을 엿보면서 킥킥대기도 하고,
가끔씩은 돌멩이를 던져서 방해도 하고 그랬다
그 오리나무 숲을 넘어가면 새절이라고 하는 봉원사가 있었다
자주 새절에 가서 놀았다. 봉원사는 대처승들이 있는 절이다
살림집에서 엄마, 아부지하며 사는 애들을 보았다
나는 어려서는 스님들도 다 장가를 가는 줄 알았다
아직 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린 시절에는 복준물 바로 아래
일본 적산가옥 마을에서 살았다.
주로 경기도청에 근무하는 공무원 들이 살았던 관사였는데
나중에 개인불하를 하여 개인주택이 되었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경기도청에 근무하셨던 관계로
이 곳에서 살게 되었는데 내가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겨울이면 안산 쪽으로 줄지어 날아가던 철새들을 올려다 보면서
유년시절의 꿈을 꾸었던 곳이다
뒷산의 복준물에도 약수를 뜨러 다녔다
주전자에 약숫물을 담고 풀을 뜯어 주둥이를 막았다
집에 있던 식모누나(영자)와 함께였다
영자누나가 오빠라며 재워 보냈던 군인이 다녀간 뒤로 배가 불러와
새로 명자누나가 왔다
여름이면 복준물 아래 냇가에서 개를 잡아 솥에 넣고
삶아먹는 아저씨 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목에 수건을 걸치고 반바지 차림으로 술잔을 나누고 그랬다
내를 따라 내려가면 능안이라고 부르던 동네가 나왔는데
커다란 고목나무가 있는 동네라서 고목나무골이라고 했다
그 아래 경의선 철도가 지나는 철다리 아래를 지나면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 있었다
그 곳에서 사는 애들은 머리를 박박 깎고 까만 옷들을 입었다
그 애들이 몰려서 나타나면 우리는 도망을 쳤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걔네들이 두려웠다
냇가에서 놀다가 "고아원 애들 온다"라고 누군가 소리치면
허겁지겁 신발을 줏어 신고 마구 도망을 쳤다
철다리 옆 철로에 대못을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납작하게 펴진 대못을 한성학교 담벼락에 긁어서 날카롭게 만들어
작은 주머니칼을 만드는 놀이도 유행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탈선을 유발할 수도 있는 위험한 놀이였다
능안에 있던 중앙여고는 우리누나가 다닌 곳이다
애기능 터를 없애고 학교가 들어셨다고 했다
그 애기능터 때문에 동네 이름이 능안이라고 했다고 들었다
아버지, 누나와 함께 중앙여고 원예반에서 운영했던
온실에 가서 꽃을 사온 적도 많았다
집에는 유도화, 각종 선인장, 수국, 양아욱, 국화 등의 화분이 즐비했고
마루 앞에는 지붕까지 철사줄을 걸어 수세미와 유자를 심었다
나중에 이사를 할 때 이사갈 집이 협소하여
집에서 키우던 화초들을 모두 최계환 아나운서네한테 주었다
내 아래아래 남동생은 나중에 생긴 추계국민학교엘 다녔다
추계는 중앙여고 설립자인 황신덕의 아호이다
그 녀석이 2학년때인가 생겼는데 신입생을 뽑는 바람에
그 녀석만 사립국민학교인 추계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누님과 나는 북성국민학교를 졸업했고
바로 아래 여동생은 북성을 다니다 전학해서 청운을 졸업했다
막내 여동생은 나중에 이사한 서강에서 서강초등학교를 다녔다
북성에서 바로 옆 반 담임이셨던 송옥혜 선생님이
막내 6학년 때 담임이셨다.
중앙여고 인근에 한성고등학교도 있었는데
럭비부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가끔 한성학교에 운동을 하러 가면 정문앞 수돗가에서
럭비선수들이 근육질의 몸을 닦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성학교 옆 한옥촌이 내가 살던 동네였다
국민학교 입학 바로 전에 복준물 아래 일본식 관사에서
한성학교 옆 한옥촌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곳이 나의 본적지로 등재되어 있는 곳이다
나중에 내 동생이 대한항공에 입사했는데
대한항공 내 한성고 동문회가 있는데 제법 멤버가 된다고 하며
특히 기장을 하는 동문 들 중에 럭비부 출신 들이 많다고 하였다
럭비 운동부 장학생으로 공사를 거쳐 파일럿을 하다가
대한항공 조종사로 입사한 선배 들이라고 하였다
한 골목에 살았던 사람 들 중에 김영조 야구감독도 있었다
매일 아침 아들과 함께 야구공을 받고 그랬다
이마에 수건을 두르고 뭐라고 코치를 하며 공을 주고 받았다
명절 때면 당시 이름을 날리던 국가대표 야구선수였던
박현식, 김성근 선수 등이 김영조 감독에게 세배를 왔다.
유명 야구선수 들이라며 동네 아이들이 둘러싸고 얘기를 들었다
그 아들이 승수였는데 나중에 보니 중앙고 포수가 됐다
경기마다 김영조 감독이 나와 뒤에서 코치를 하고 계셨다
나보다 두 살 아래였고, 나보다 한 살 위인 예쁜 누나도 있었다
맨 위의 누나는 우리 누나와 같은 중앙여고엘 다녔는데
한 학년 위였고 나중에 보니 문희상 국회의장 부인이 돼 있었다
승수 덕분에 우리 동네 애들이 모두 할 수 있을 만큼
야구 글러브와 배트 등을 마련해 주어 한성학교에 가서
야구를 하며 놀았다
야구장에서 경기 중 부러진 배트는 승수 아버지를 통해
동네집 들에 전달되어 동네집 절구공이가 됐다
부러진 부분을 잘 다듬어 절구공이로 썼다
우리집에도 한 개 있었다
동네형 들과 함께 경기공전에 있는 철봉과 링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던 생각도 난다
경기공전은 굴레방다리 북아현동에서 길 건너에 있었다
한번은 누군가의 제안으로 걸어서 마포까지 갔었고
얼마간의 돈을 내고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여의도까지 갔었다
온통 모래밭인 여의도에서 깨끗하고 파란 한강물에서
헤엄을 치던 생각도 난다. 백사장이 참 고왔다고 기억한다.
돌아온 후에 부모님께 엄청난 꾸중을 들어야 했다
굴레방다리 버스정류장 인근은 번화가였다
북아현시장이 있었고, 병원, 약국, 금은방, 포목점,
책방, 문구점, 양복점, 사진관, DP점, 등
볼거리가 아주 많은 제법 번화한 곳이었다
내가 다녔던 대한의원도 그 곳에 있었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다니셨던 여의사가 하던 청파의원도 거기 있었다
초등학교 동기생네서 하던 유금사라는 금은방도 거기 있었고
성심당약국이라는 제법 큰 약국이 카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거래하던 상업은행도 그 곳에 있었다
조금 더 시내 쪽으로 가면 아현삼거리 왼쪽으로
초록색첨탑에 하얀 색깔로 지은 교회당이 있었다
누나 입주 과외교사였던 서울신학대학 여대생의 권유로
내가 다녔던 감리교회가 그 곳에 있었다
목에 출석부를 걸고 매일 주일학교엘 갔다
예수님 얘기도 듣고, 그림도 그리고, 춤도 배우고
가을이면 즐거운 운동회도 그 곳에서 했다
모두 아련한 즐거운 그 시절의 추억 들이다
지금은 대충 다 헐려 나가고 대림건설에서 지은
e편한 세상 아파트 단지가 그 곳에 들어섰다
처가가 그 쪽에 있어 다니면서 알게된 사실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유금사는 우리 장모님 단골집이었다
내 혼수반지 등도 모두 유금사에 가서 맞추었다
유금사는 유씨네가 하는 금은방이라는 뜻이다
유금사 살림집도 우리집 두 골목아래 인근에 있었다
그 집 큰 아들은 나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다
한 때는 부부동반으로 만나기도 했던 친구였다
10년 쯤 전에는 고교동기회 회장도 했다
나는 동기회 사이트를 관리하며 열심히 그 친구를 도왔다
저녁에 퇴근시간이 되면 버스정류장 근처에 가서 놀며
아버님을 기다리던 생각도 난다
아버님과 마주치게 되면 근처의 빵집에 가서 카스테라를 사주셨다
딱딱한 상자에 담긴 노란색의 야들야들한 카스테라가
왜 그렇게 맛있는지 몰랐다.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그 카스테라가 먹고 싶어 아버지를 기다렸다
두서없이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50년대 말 이야기다
어느 덧 60년이 훌쩍 넘어 70년 가까이 지난 시절 이야기
안산자락 복준물에서부터 흘러내린 냇물이 지나가던 동네
그 냇물 위로 고만고만한 작은 다리 들이 놓여있던 동네
그 냇가에서 멱감고 빨래하던 정경이 눈에 선하다
냇가 양 옆으로 빨아서 널어 놓은 광목천 들이 즐비하던 곳
바람에 날아갈까봐 돌로 지끌러 놓았던 긴 광목천들
아마도 일광표백을 하던 게 아니었나 생각된다
누런 광목을 햇볕에 널어 하얀 천으로 만들던 곳
굴레방다리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바로 하얀 광목천이다
이제 우리 세대가 가고나면 누가 이런 일 들을 기억할까?
지금은 모두 복개가 되어 냇가도 다 없어졌고
그 복개된 도로 위로 자동차 들이 쌩쌩 달리지만
그 시절에는 그 곳에 내가 흘렀다
그리고 그 내 위로 다리 들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동네 이름이 굴레방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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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레방다리의 어원-1]
굴레방다리는 순수 우리말의 방언에서 나온 말로
현재 아현고가도로 아래 개천이 복개된 지점에 있던 다리로
김포쌀을 장안으로 실어 나르는 쌀장수들이
주막, 객주집이 많은 이 곳에서 쉬거나 유하였다고 하는데,
이 때 쌀을 끌던 우마의 굴레를 벗기는 방(옛 날의 동명)의 다리라 하여 부른 이름이다.
[굴레방다리의 어원-2]
서울 西大門區 北阿峴洞과 麻浦區 阿峴洞 사이에
남북으로 흐르는 倉川(滄川)이 있다.
그리고 이 근처 마을 이름을 滄川洞이라 부른다.
근래 복개공사를 한후 시내(川)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는데
倉川이란 조선시대에 시내 서편에 관리들에게 줄 祿俸(급여 곡식)을 관리하던
廣興倉이 있었으므로 창고 근처에 있는 시내라는 뜻이다.
북쪽 무악재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줄기가 이 일대를 지나고 있는데
지리풍수설에 입각하여 이 일대의 지세를 보고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지명을 지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북쪽에서 소(牛)가 무악재(毋岳峴)에 길마(鞍)를 벗어 놓은 뒤,
남쪽으로 내려와 애고개(阿峴)에서 굴레(勒)를 벗어 놓고,
소(牛)는 시내를 건너 서쪽으로 가서 편히 누워버렸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달리표현하면 길마를 벗어놓은 산을 鞍山(무악산. 길마산)이라고 하고,
굴레를 벗은 곳을 굴레바위(勒岩),
소(牛)가 누워버린 곳을 臥牛岡(臥牛山)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倉川에 놓여진 다리를 그후 굴레방다리라고 불렀다.
굴레방다리는 勒橋라고 쓰며 "굴레방"은 굴레를 닮은 바위 즉, 굴레바위의 방언이다.
이 다리가 있었던 곳을 굴레방다리골(勒橋洞)이라고 불러왔다.
굴레방다리가 있었던 자리는 복개공사로 볼 수 없게 되었고
그 위치는 京義線철도의 굴다리 자리(北阿峴 1洞 118번지, 170번지 사이)이다
첫댓글 굴레방 다리 하니 옛추억이 하나 둘 기억이나 댓글 써 봅니다 난 소의 국민 학교 출신 마포 강 빨래 빨러 가면 드럼통 에 빨래 삶아 주고 돈을 받읍니다 새우젓 배도 있고 옛생각 하며 몇 자적어봅니다 ㅎ
네 제 친척 중에도
소의국민학교 출신 있습니다
균명중학교 아래 잘 사는 집이었죠
저는 북성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우리집사람은 미동국민학교 나왔습니다
저랑 가까운 곳에서 사셨네요
반갑습니다
청솔님 글을 읽다보니
유년시절 서울 모습들
굴래방 다리는 강원도 태생
처음 서울구경
큰언니 남친 덕분에
각자 세월이 지나고 보니
참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나를 돌아보는 것같아
재미있게 읽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강원도가 고향이시군요
처음 서울구경을 오셨었군요
네 지금 생각해 보니
자연도 깨끗했고
사람들도 순박했던 시절입니다
6.25가 끝나고 얼마 안 지나서
상이군인 들이 겁을 주며
물품을 강매하고 다니던 시절입니다
상이군인들이 나타나면 문을 걸어 잠그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청솔님~
옛 추억들을 실타레 처럼 술술 풀어 놓으셨네요
그 시절이 그래도 아름다웠던 시절이었지요
전 지금도 가끔 잠 들기전에 어릴적 고향에서의 추억들을 곰씹어 본답니다
눈물도 찔끔 거리면서 말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그렇습니다
그 시절이 참 부족했지만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제게는 아직도 맑은 물이 흐르던
여러 개의 다리가 걸쳐져 있던 냇물이 생각납니다
복준물에 가서 옹달샘의 샘물을 퍼 담던 생각도 나구요
영자 누나랑 뒷동산에 앉아서 주전자 뚜껑에
약수물을 딸아 마시던 생각도 납니다
배가 불러와 엄마한테 야단 맞고 쫓겨나던 생각
울면서 보따리를 들고 나를 꼭 안아주면서
공부 잘 하고 훌륭한 사람 되라고 하던
마음씨 착하고 내게 잘 했던 영자 누나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아름다운 추억들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서울 본토라
북아현동 마포 참 많이 다니고 정겨운 곳입니다
고향을 찾아보듯 합니다
왕십리 쪽이라고 하셨던가요?
그 때는 서울이 참 좁았습니다
굴레방다리나 왕십리나 모두 문밖이었지요
문안의 일류학교 애들이 부러웠던 시절
덕수, 수송, 혜화 등이 일류학교였지요
북아현동을 잘 아시네요
감사합니다
@청솔 당시 일가들은 전부 종로 안. 그런데 우리집은 전주 이씨 효령 손이라 해도
중간에 상인으로 풀려 본적은 동대문.
육이오 이후 왕십리 중앙시장 근처에서 살았어요.
북아현동은 일가가 살아서 자주 갔었여요.
우린 흔히 얘기하죠 이마가 맨질맨질하면 마포에 젓 장사고
목덜미가 탔으면... 천호동쪽 무슨 장사라 했는데...잊어 먹었어요
다시 글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서울 본토의 향수에 젖어 봅니다
@낭만 그러셨군요. 효령대군 손이시로군요.
북아현동엘 자주 오셨었다니 반갑습니다
저희는 이북 출신이라서 가호적입니다
북아현동 한성학교 옆 한옥에 살 때
그 주소지가 본적입니다
지금 가 보면 옛날 흔적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아파트촌으로 변모했습니다
굴레방다리ㅡ
소의국민학교였지요
등하교전매일매일을
친정아버지점심도시락을엄마가준비해주면앞가슴에끌어안고그굴따리밑을걸어오가던때가생각이났습니다ㅡ가슴먹먹해지는청솔님의글에한참머물었습니다ㅡ
소의국민학교를 다니셨군요
제가 다녔던 감리교회에서 바라다 보이는 곳
그쪽에서 교회에 오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아버님 도시락을 나르셨군요
예전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수원 영동시장에서 포목점을 하셨던 큰아버님
방학 때 수원엘 가면 식사 때마다
장바구니에 넣은 식사를 들고 가게엘 갔지요
사촌동생과 둘이서 밥을 날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세월을 세필로 그리듯 표현했군요.
저는 70년대 이후의 굴레방다리 인근 지역만 떠오르는데요.
그러시군요
저는 52년 생인데, 중학교 가던 65년까지
북아현동에서 자랐습니다
이후에는 통인동으로 이사를 했구요
나중에는 서강, 공덕동 등지에서 살았습니다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 북아현동입니다
감사합니다
외할아버지가 청주에서 일본순사를 때려눕히고 만주를 유랑하다 돌아와 마포 공덕동에 자리잡으셨다 합니다. 아버지는 일제때 선린상업을 나와 청파동에서 사셨지요. 그래서 용산과 마포일대와 우리집은 인연이 많습니다 ^^
그러셨군요
공덕동은 제가 대학생 시절 살았던 곳입니다
수도공고 바로 아래 마포경찰서 뒷쪽에 살았습니다
청파동에도 친척집이 두 집 있었습니다
갈월동 지하도 나서자 마자 바로 왼쪽에서
자전거포를 하셨던 엄마 외사촌동생 아저씨
살림집도 그 맞은 편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외숙모 되시던 분이 사셨던
꽤 넓은 일본식 집이 생각납니다
내 동갑내기 여자애가 있었구요
가서 놀기도 하고 자고 오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내 동갑내기 여자애 이름이 혜선이였습니다
딸 부잣집. 딸 다섯에 아들 하나
용산 후암동에는 작은아버님께서 사셨습니다
미8군에 근무하셨습니다
사촌형이 숭실고를 다녔습니다
감사합니다
옛날에 53년부터
서대문에서 살면서
영천시장,독립문,서대문형무소붉은벽돌담을 지나다니면서
동양극장,화양극장,적십자병원을 다니면서 살았지요
새절에 동네친구들과
놀러도 갔구요
인창중고등학교도 아현동 넘어가는길에 있었지요 ㅎ
굴레방다리 유명했지요
서대문사거리에서 노라노예식장도 유명했구요
새절가는곳으로
약수물도 뜨러다녔어요 ㅎ
옛날이 새록새록 생각나게 하는 글입니다
금화산에는
여름에 더울때
저녁을 일찍먹고
가서 놀다가 내려왔지요 ㅎ ㅎ ㅎ
재미있게
옛생각에 한참 잠겼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ㅎㅎ
시험때면
마포도서관도 가서 공부한다고 갔어요 ㅋ
영천시장,동양극장,화양극장,적십자병원,인창중고등학교,아현동넘어가는길,노라노예식장,마포도서관ㅡ어릴적옛기억이새록새록떠오르는단어이내요하얀솔님⚘️⚘️
제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영천에 있던 박명수 침술원
거기 한 달 여 침을 맞으러 다닌 적이 있습니다
고목나무골목을 지나 인창고를 지나서 갔지요
꽤 먼 거리를 걸어서 다녔습니다
한번은 안산에 올라 갔다가 길을 잘못 들어
금화산으로 해서 영천쪽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한참을 돌아서 집에 오기도 했구요
말씀하신 곳들이 모두 낯익은 곳들입니다
안산에 올라가면 서대문형무소가 손에 잡힐 듯
동양극장, 화양극장 다 다녔던 곳이구요
적십자병원에 아버님께서 입원하셔서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문병갔던 생각도 납니다
노라노예식장도 유명했지요
새절가는 곳의 약수터가 복준물(복수천)입니다
마포에 있던 도서관은 아현도서관입니다
저도 중학교 1학년 때 거기 가서 공부했습니다
65년도 얘기입니다
긴 댓글 감사합니다
서대문 어디쯤 활명당 약국도 아시는지요
처음 들어 봅니다
와우, 추억을 소환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굴레방다리(아현)아래쪽(이대)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현 시장에 가서 선지 사오고
경기공전 자리는 직업학교인데 제가 미용과 졸업했어요.
안산은 지금도 가끔갑니다.
60~70년대 민둥산이었던 안산 지금은 푸른산
이대 정문을 통과하여 후문으로 나가서 언덕으로 올라가면 봉원사 나오고요.
이대정문밑인 경의선철도 옆 또랑에서 개구리잡고 깜부기 따먹던 초등시절도 있었어요.
요즘은 안타깝게 근처인 세브란스병원만 줄창 다니고있습니다.
그 시절에 부잣집인 아드님이신 청솔님
공순이들의 흠모 대상인 대학생이셨군요.ㅎㅎ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대입구 쪽이 고향이시군요. 창천동!
네 그 쪽도 제가 아주 잘 압니다
아버님께서 신촌로타리에서 연탄공장을 하셨지요
서강대 바로 맞은 편에서...
신영극장, 대흥극장엘 자주 다녔습니다
아현시장 쪽으로는 어머님이 좋아하셨던 목욕탕
고려탕엘 다니느라고 갔었구요
경기공전에서 공부하셨군요
안산이 자그마하지만 좋은 곳이지요
저도 지금도 가끔씩 가는 산입니다
주로 독립문쪽에서 올라갔다 내려오지요
영천시장 골목에 가서 뒷풀이 하구요
네 봉원사는 돌아가신 장인어른께서
신도회장도 하셨고 돌아가신 후에 49재까지
매주 가서 불공도 드린 곳입니다
네 이대입구 쪽에 저도 가서 미꾸라지 잡고 그랬습니다
밤에 잡아다 놓은 미꾸라지가 도망치고...
저희 집사람도 세브란스 병원에 다닙니다
다음 주 월요일날이 정기검진 가는 날입니다
아이고 부잣집은 아니구요
그냥 밥먹고 살 정도였지요
대학교는 서강 살 때 들어 갔습니다
와우아파트 아래 창전동 살 때...
감사합니다
그 근처 나 하고도 인연이 많네요.
청솔님과 동갑입니다.
부곡(지금은 의왕)이라는 수원 가까운 곳에서 기차통학으로 경기공전과 같은 울타리 안에 있던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석탄 때는 증기기관차.....그때는 몹시 추웠지요.
겨울에 추우면 한시간 연착은 보통이었습니다.
집사람이 중앙여고, 손 아래 큰동서가 한성고등학교 출신입니다.
기억 속에 가물거리던 이름들을 보게 되니 반갑습니다.
잘 봤습니다.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부곡 잘 알지요
저도 대학2학년때 수원으로 기차통학을 했습니다
처음엔 증기기관차, 나중에 디젤로 바뀌었지요
부곡쪽에 한라양행인가 하는 곳이 있었는데...
3학년때는 기숙사 생활을 했지요
경서중학교를 다니셨군요
제 고교동기 중에 경서출신이 몇 명 있습니다
아 중앙여고, 한성고, ㅎㅎ
저랑 연관이 많으시네요
중앙여고가 배구를 아주 잘 했구요
누님 학창시절에 방송반에 두 선배
송도순과 장유진이 교내방송을 했다고 합니다
패티킴도 중앙여고를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참대"라고 하는 교지도 본 기억이 납니다
여러가지로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솔 경서중 우리 때 한 학년이 네반 뿐...대략 240 명...이어서 오래 됐어도 동기들 대부분 압니다.
한라양행...남영금속...대우중공업...현대로템 이렇게 바뀌었는데, 지금은 모릅니다.
부곡 떠난지도 44 년 째입니다.
@흐르듯이(無香) 김상호라고 혹시 아시나요?
@청솔 알지요. 3 학년 때 같은 반이었습니다. 차분하고 호리호리했던 친구로 기억합니다.
@흐르듯이(無香) 그러시군요
제가 동기산악회 회장할 때
함께 총무를 했습니다
요즘도 저랑 자주 통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