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가튼 렐름-은둔한 영웅의 기록
1. 200년 전, 문-포레스트 근처의 록울 마을 “드리쯔트도 날 인정했지. 그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문-웰레이즈의 시대다.” 록울이라는 작은 마을에 하나 있는 펍에서 들린 여린 음성에 마스터는 술잔을 닦는 것을 멈췄고,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는 시시껄렁한 술주정뱅이 셋은 컵을 들어올리려는 손을 허공에 띄운 채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젖내 나는 애송이 엘프를 바라보았다. 얼굴과 몸이 여자처럼 곱상하고 가늘었다. 피부는 투명하다고 할 정도로 창백한 탓에 인간이 본다면 병약하게 느껴질 것이다. 입술은 연지를 잔뜩 칠한 것처럼 붉다. 주정뱅이 하나가 손가락으로 엘프를 가리키며 묻는다. “네가 영웅이라는 것이냐? 이 애송아.” 그러면서 몇 번 머리를 쥐어박자 엘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손바닥을 그가 쥐고 있는 컵에 가까이 가져가서 집중을 한다. 잠시 그대로 있는 듯싶더니, 컵이 둥실 떠올랐다. 손을 움직이는 대로 컵이 움직였다. 주정뱅이의 머리 위에까지 가져가서 손바닥을 홱 뒤집으니 컵이 빙글 돌면서 맥주가 머리 위로 뒤집어 씌워졌다. 날벼락 같은 맥주 세례에 주정뱅이가 당황하는 사이에 엘프는 몇 마디 남기고 도망간다. “영웅에게는 시기하고 좌절시키려고 쫓는 자가 있기 마련이지. 난 그만 간다.” 옆문으로 나감과 동시에 펍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가볍게 무장한 네댓 명의 엘프들이 들이닥쳤다. 인근 숲에 살고 있는 문엘프들이다. 의심스런 눈초리로 펍 내부를 싹 훑는 가 싶더니, 그중에서 대장으로 짐작되는 자가 마스터에게 묻는다. “여기에 어린 엘프 한 놈 오지 않았소?” 마스터는 옆문을 가리키면서 방금 전에 저리로 나갔다고 알려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들어온 문으로 나가려는데, 당겨지는 것이 있어 돌아보니 맥주 세례를 받은 술주정뱅이가 엘프 대장의 갑옷 끈을 잡고 있었다. 그는 술 냄새 섞인 입김을 뿜으며 옷값을 물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에 엘프 대장은 불쾌해하지 않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문엘프 식 해결책을 조언했다. “냇가에 한번 뛰어들었다가 햇빛 아래에 누워 말리게.” 화가 난 주정뱅이가 욕을 퍼부을 찰나, 섬광 하나가 그의 눈 사이로 파고들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엘프가 미간을 향해 롱소드를 한 번 휘저은 뒤였다. 주정뱅이는 코를 감싸 쥐고 뒹굴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으나 콧등에 가로로 길게 상처가 났다. 엘프 대장은 비웃는 웃음을 흘리며 부하들을 이끌고 펍을 나가버렸다. “낮부터 술만 마시는 게으른 자와는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 주정뱅이는 문 쪽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마스터는 물론이고 두 친구들마저 하나같이 “네가 잘못했다.”라고 하며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초보 영웅에게는 갖가지 시련이 닥치게 마련이야. 강철 같은 몸을 힘들게 하여서 의욕을 없애는 것, 선하고 굳은 마음을 파괴해서 타락시키는 것, 어떤 것이든 이겨내야 진정한 영웅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 그래 이깟 시련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라고.” 눈앞에 번쩍하고 불꽃이 튄다. 때린 녀석을 노려보니까 몇 대 더 주먹이 날아온다. 저항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진흙 골렘에게 단단히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빌어먹을, 날 놔줘! 이게 영웅의 꼴이라고 생각해?!” 발버둥쳤지만 무의미했다. 어른 엘프들은 듣고 있지도 않고 있다. 대장이 작은 엘프의 귀를 당긴다. 닥치고 가만있으라고 협박했다. 어린 엘프, 웰레이즈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존경하는 숙부님. 당신은 아시겠지요?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이 조카의 야망을. 부디 절 놓아주세요.” 대장 엘프는 돌아보지도 않고 헛방귀를 뀌었다. “사랑하는 조카여. 문엘프 일족이 자유롭게 숲을 나설 수 있는 때는 성인식 이후이다.” 그러면서 긴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술은 성인이 된 후에나 할 수 있으며, 선하고 정의로운 인간이 아니면 절대 어울리지 말 것과 자연을 사랑하라는 숲의 율법을 늘어놓음으로서 어린 엘프의 귀를 괴롭게 했다. 성인식까지는 3개월 밖에 남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자유를 원하는 엘프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유달리 자유혼이 강한 이 어린 문엘프에게 마을에만 있으라는 것은 창공을 날고 싶은 큰 알바트로스를 좁디좁은 새장에 가두어 둔 것과 같았다. 저항도, 발버둥 치는 것도 소용없다면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몸이 자라고, 충분한 힘이 비축되기를 기다려서 때가되면 일시에 몸을 묶은 족쇄를 끊는 것이 현명하다. 어린 새끼 때에 저항하면 족쇄는 몸을 죄어오고, 힘은 무의미하게 낭비되기만 한다. 적절하게 시기를 잘 파악하고, 대처하는 순발력이 영웅의 조건이라고 어떤 왕이 말했던가. 네더릴의 군주 모르엔다르 3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간에 끌려 다니면 비천한 노예라 할 수 있고, 시간을 잘 조절한다면 비범한 자질이 엿보이는 모탈Mortal일 것이며, 시간을 지배한다면 다스리는 주인이다. 그는 시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철학을 좋아했던 이 군주가 후세에 남긴 한마디의 경구에 대해 네더릴의 역사서는 단지 세 줄을 할애하고 있다. 시간의 쓰임은 중요하다는 옳은 주장을 하였으나, 일국의 군주로서 가질 미덕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도덕과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지, 철학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다. 모르엔다르 3세는 그다지 현군Wise King이라고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말년에 아들의 반란으로 어두컴컴한 탑에 유폐되어 굶어죽었다고 한다. 수백 년이 지나서 네더릴이 추락할 때에 도시의 파편, 왕이 갇혔던 탑은 문-포레스트 서쪽으로 떨어졌다. 부서지고 황량해진 채로, 이제는 토끼나 사슴 같은 온순한 동물들의 서식처가 되어 덩그러니 놓여있다. 석양이 아름다운 날에 가보면 탑 끝에 걸린 해가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고 간혹 회상한다. 영웅은 시기를 옳게 파악할 줄 알고,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알며, 주어진 것을 지혜 있게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것은 영웅의 조건 중에서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웰레이즈는 마을로 끌려와서는 자택에서 25시간 근신을 명령받았다. 너구리를 연상케 하는 -천 년을 살아서 꾀보에다 음흉하기까지 한- 인상의 장로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연설과 함께 기운 넘치는 시기인 어린 엘프를 방에 처박아두려고 했다. 투덜거리며 집에 돌아온 웰레이즈는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유일한 형제가 멍한 모습으로 빵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엌에서는 완두콩 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어머니가 완두콩 수프를 끓이고 있을 것이다. 엘프 치고는 식탐 성향이 강한 형의 앞에는 책이 놓여있다. 아마 그는 어려운 문장을 읽고서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형이 천정에 시선을 둔 채, 빵을 먹는 모습은 그다지 좋은 광경으로 비추어지지 않았다. 마치 썩다말고 일어난 리빙 데드Living Dead가 자기 살을 뜯어먹는 모습 같기도 했다. 더 참지 못하고 벽에 놓인 막대기를 집어 그의 연수를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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