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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¹. 가톨릭 굿 뉴-스 성인록 ▷
▶성 바오로 미키 수사, 순교자(2.6)◀
△ 성 바오로 미키 (Paul Miki) 예수회 수사, 순교자
▶ 성인명: 바오로 미키 (Paul Miki)
축일: 2월 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순교자
활동지역: 나가사키(Nagasaki)
활동연도: 1564-1597년
같은이름: 미끼,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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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설명 :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三木)는 지금의 오사카 인근 도쿠시마(德島)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고, 10여 세 되었을 무렵 아즈치야마(安土山)의 예수회 신학교에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22세 때인 1585년 졸업과 동시에 수사가 되었다.
수사가 된 성 바오로 미키는 타고난 성품과 열정으로 전교 활동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후에 주교 마르티네즈(Martinez Pedro)를 따라 오사카(大阪)에서 활동하던 중 예수회 신부인 오르간티노(Organtino Gnecchi-Soldi)의 눈에 띄어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함께 활동했다.
이후 그는 불교 승려들과 많은 토론을 벌였고, 자신이 저술한 교리서들을 통해 불교 신자들을 깨우치기도 하였다.
• 당시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1590년 순찰사 발리냐노(Valignano Alessandr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596년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금교를 무릅쓰고 교토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히데요시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그 결과 1597년 초에는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작은 형제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3명과 일본인 신자 15명 등 24명이었다.
성 바오로 미키는 이때 오사카에 있다가 뜻하지 않게 체포되어 1597년 1월 1일 교토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어 그는 1월 3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오사카를 거쳐 1월 9일에는 나가사키로 출발하였고, 27일 동안 혹한 속을 걸어서 2월 5일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들 일행은 도중에 일본인 신자 2명이 자진하여 체포됨으로써 모두 26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날 저녁, 성 바오로 미키는 동료들과 함께 나가사키(長崎)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西坂)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순교 직전에 그는 당당한 얼굴로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으며,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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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². 가톨릭 굿 뉴-스 성인록 ▷
▶성 베드로 밥티스타(2.6)◀
△ 성 베드로 밥티스타 프란치스코회 1회 수사, 순교자
▶ 성인명: 베드로 밥티스타 (Peter Baptist)
축일: 2월 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순교자
활동지역: 나가사키(Nagasaki)
활동연도: 1545-1597년
같은이름: 밥티스따,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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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설명 :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베드로 밥티스타(Petrus Baptista)는 에스파냐의 아빌라(Avila)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는 1567년에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어 멕시코 선교사로 떠났다가 1583년에는 필리핀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가서 학교와 병원을 짓고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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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 성인록 ▷
< 2월6일 성베드로밥티스타,성바오로미키와 동료순교자(1회,3회) >
......... (안젤라 | 2010.02.06 Ud.)
▶ 축일:2월 6일
< 성베드로 밥티스타,성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
- Sts. Peter Baptist, Paul Miki and companions, martyrs, I and III Orders -- Memorial
- St. Paul Miki & Companions
- San Paolo Miki e compagni Martiri
- Sts. Peter Baptist and Twenty-Five Companions
(- (영) 성 베드로 밥티스타,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1회와 3회 ..기념
- (영)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 (이) 성 폴 미키와 동료 순교자
- (영) 성 베드로 밥티스타와 25명의 동료들)
- Died:crucified on 5 February 1597 at Nagasaki, Japan
(- 사망: 일본, 나가사키에서 1597.2.5일에 십자형으로 순교)
- Beatified :14 September 1627 by Pope Urban VIII
- Canonized :8 June 1862 by Pope Pius IX
(- 시복: 1627.9.14, by 교황 우루바노 8세
- 시성: 1862.6.8, by 교황 비오9세)
* 위 (한역 韓譯/ '19.2.6, -아타시 韓)
• 일본에서 태어난 바오로 미키(1564,1565-1507년) 성인은 예수회에 들어간 다음,
복음을 널리 퍼뜨리는 데 큰일을 하였다.
박해 때 다른 동료 25명과 붙잡혔는데,
그 25명은 베드로 바스티와 5명의 프란치스코 제1회 회원들과 17명의 제 3회 회원을,
그리고 미키 신부와 일하던 2명의 교리교사였다.
그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다.
• 1596년 12월 9일 일본의 절대 통치자인 타이코사마 는 26명의 그리스도교인을 체포하고 오사카에서 사형시킨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행동을 인정했다.
그들은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 외곽에 있는 니시자 언덕에서 순교했다.
그 26명 중에는 바오로 미키, 베드로 밥티스타와 다섯 명의 프란치스코 제1회 회원들,17명의 제3회원들, 그리고 2명의 교리교사가 있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이들 중 다수는 노예 생활 중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그들의 쓰라린 생활을 극복해 나갔다.
그 당시 일본에는 프란치스꼬 회원들이 전교를 하고 있었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프란치스꼬 재속 3회에 입회했던 것이다.
• 1597년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26명이 나가사끼에서 순교의 화관을 쓰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프란치스칸으로 성 베드로 밥티스타를 비롯하여 17명의 프란치스꼬 재속 3회원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 3명이 조선인이었다.
사제가 되기위해 1년의 공부가 더 남은 튜노쿠니에 태어난 30살된 바오로 미키,
20살된 요한 데 고 또는 예수회 수련자로서 감옥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처형되는 날 아침 첫 서원을 하였다.
바울 미키는 첫 일본에서 순교한 첫 번째 예수회원이 되었고 첫 번째 일본인 순교자가 되었다.
그 26명 중에 요코야마에서 태어난 예수회 평수사인 64살된 제임스 기사이는 공동체의 손님담당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1627년에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862년 6월 8일에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동시대의 저자가 쓴 [성 바울로 미끼와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 사기]에서
(Cap. 14, 109-110: Acta Sanctorum Febr. 1, 769)
•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리라.
그들이 못박혀 있던 십자가들이 땅 위에 세워졌을 때
놀라웁게도 모든 이들은 파시오 신부와 로드리게스 신부가 준 격려의 말에 응하여 견고한 자세를 취했다.
원장 신부는 거의 부동 자세로 시선을 하늘에다 못박아 놓고 있었다.
마르띠노 수사는 시편을 노래하면서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주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라는 시편을 외웠다.
프란치스꼬 블랑코 수사도 낭랑한 목소리로 하느님께 감사 드렸고
한편 곤살보 수사는 목소리를 좀더 높혀 주의기도와 성모송을 낭송했다.
우리 형제인 바울로 미끼는 자신이 이제까지 서 보았던 강단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강론대 위에 서 있다고 느끼고서
우선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기는 일본인이자 예수회원이라고 밝히고, 자기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자신이 받은 그 위대한 특전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강론을 마쳤다.
"이제 이 순간을 맞아 내가 진리를 배반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여러분 중에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이 나의 원수들과 내게 폭력을 가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라고 나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국왕을 용서하고 나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동료들에게 시선을 돌려 이 마지막 고뇌의 순간에 동료들을 격려하기 시작했다.
모든 동료들의 얼굴에 커다란 기쁨의 표정이 나타났고 특히 루도비꼬에게서 그러했다.
군중 가운데서 한 교우가 루도비꼬에게 "당신은 조금 있으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고 외치자,
그는 기쁨에 넘친 동작으로 손과 온 몸을 위로 뻗쳐 모든 군중들의 주의를 끌었다.
루도비꼬 곁에 있던 안또니오는 하늘에다 시선을 못박고는 예수와 마리아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부르고 나서
나가사키의 주일 학교에서 배운 "찬양하라, 주님을 섬기는 아이들아."라는 시편을 노래했다.
그 곳의 아이들에게 주어진 과제 가운데는 이와 같은 몇 가지 시편의 학습이 있었다.
다른 이들도 평온한 얼굴로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구경꾼에게 참된 그리스도교 생활을 영위하라고 격려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행위들로써 그들은 기꺼이 죽는다는 충분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네 명의 회자수들이 칼집에서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장검을 꺼냈다.
모든 신자들은 이 무서운 장검을 보자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외치고 슬피 울면서 탄식하여 그 울음 소리는 하늘까지 치솟았다.
회자수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두 차례 칼을 휘둘러 그들을 쳐죽였다.
(가톨릭홈에서)
• 일본의 나가사키는 두 번째의 원자 폭탄이 떨어져서 수십만 명이 사망한 도시로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
약 4세기 전에는 26명의 일본 순교자들이 오늘날 거룩한 산으로 불리고 있는,
나가사키를 내려다보고 있는 언덕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들 가운데에는 신부들과 수사들, 평신도, 프란치스코회 회원, 예수회 회원, 프란치스코회의 제3회원 등이 있었다.
또한 교리 교사와 학자, 단순한 기능공과 하인들도 있었고, 노인과 무죄한 어린이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공통된 믿음과 사랑 속에 일치되어 있었다.
일본 출신의 예수회 회원인 바오로 미키 수사는 일본의 순교자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바오로 미키는 십자가에 매달려서 처형장에 모여든 군중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판결문은 ’이 사람들이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다른 나라 출신이 아닙니다. 나는 진정 일본 사람입니다.
내가 살해되는 유일한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나는 내가 이 이유 때문에 죽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죽기 전에 진리만을 말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내 말을 믿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여러분이 내 말을 믿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이 행복해지도록
그리스도께 도움을 청한다고 여러분 모두에게 한번 더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복종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서 나는 나의 박해자들을 용서합니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청하며,
나의 피가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는 비처럼 나의 동포에게 내리기를 바랍니다."
• 1860년대에 선교사들이 일본에 되돌아왔을 때 처음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고 난 뒤에 그들은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나가사키 근처에서 살아가며
간신히 그들의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1627년에 이미 시복된 일본 순교자들은 1862년에 마침내 성인품에 올랐다.
오늘날 일본 교회에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비록 가톨릭 신자들의 수는 많지 않지만 교회는 존경받고 있으며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극동 지방에서 그리스도교의 전교는 느리고 힘든 일이다.
26명의 순교자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신앙과 열성 은 1597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으므로,
주님과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최대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특히 박해자들에게 증거하도록 어떤 신자들은 이미 초기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앞으로도 항상 부르심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죽임을 당하신 스승을 본받고 스승을 닮아 피를 흘리는 제자의 순교는 교회에서 최상의 은혜요, 사랑의 최고 증명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은혜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것이기는 하나, 모든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가 언제나 당하고 있는 박해중에서도
십자가의 길로 그리스도를 따라갈 준비는 갖추고 있어야 하겠다’ (교회헌장 42항)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 성 베드로 밥티스타, 작은형제회 >
- St. peter baptist ofm.
- San Pietro Battista Blasquez Francescano martire a Nagasaki (Giappone)
- 1545 at San Esteban del Valle, Avila, Spain ~
crucified on 5 February 1597 at Nagasaki, Japan
body reported incorrupt after two months exposure to the elements
- Patronage: Japan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베드로 밥티스타(Petrus Baptista)는 에스파냐(스페인)의 아빌라(Avila)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는 1567년에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어 멕시코 선교사로 떠났다가 1583년에는 필리핀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가서 학교와 병원을 짓고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 1592년 무렵 일본 군부 독재자 히데요시는 당시 스페인 왕국에 속해 있던 필리핀을 점령 할 계획을 품고 있었다. 스페인 필립 2세 왕은 평화를 타협하려고 마닐라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베드로 밥티스트 블라케즈신부를 대사로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베드로 밥티스타는 3명의 동료와 함께 1593년 6월 말에 일본에 도착했다.
그는 성공적으로 평화협정도 맺고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수 있는 허락까지 받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수 백 명의 보조자들과 함께 자신의 수도회 수도원도 여러 개를 설립하고 교회와 병원도 지었다.
히데요시는 그들에게 버려진 사원을 교회로 재건하는 허락까지 주었다.
일본 승려들은 이러한 사건의 반전에 크게 분개하였다.
그들은 통치자에게 선교사들은 그를 왕위에서 밀어내고 일본을 스페인에게 넘기려고 기획하고 있다고 믿게 하였다.
이에 화가 치민 히데요시는 프란치스칸 선교사들과 보조자들을 왕권의 반역자로 감옥에 가두고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군인들은 수도원을 습격하여 수도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베드로 밥티스타, 그의 동료 아센션의 마틴 사제와 프란치스코 블랑코 사제, 멕시코 원주민 성직자인 예수의 빌립보, 성 미카엘의 프란치스코와 곤살보 가르시아 평수사가 감옥에 갇혔다.
또한 이들을 도와 교리교사, 교사, 병원보조로 있던 17명의 3회원들과 3명의 예수회원도 있었다.
1597년 1월 3일 이들 모두 잔인한 감옥에서 미야코 광장으로 끌려나와 십자가형을 받고 그 도시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그 행렬 중에 그들은 무수한 학대와 모욕을 받았다.
1월 4일 그들은 처형당하기 위해 나가사키를 향해 떠났다.
이 슬픈 여정은 4주일이 걸렸다.
형리들의 난폭함과 군중들의 분노 때문에 이 자체가 순교였다.
여기에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온갖 종류의 박탈이 더해졌다.
2월 5일 아침에 그들은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곧 그들은 십자가에 묶였다.
그들은 큰 소리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처럼 죽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리고 시편으로 찬미를 드렸다.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리자 집행관들이 창으로 찔렀다.
순교자들이 숨을 거두자마자 하느님은 비범한 징표와 기적으로 그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다.
1627년 그들은 우르바노 8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62년 6월 8일 성령강림 축일에 비오 9세 교황은 거룩한 십자가의 적들에 대적하는 힘찬 중재자로서 이들을 성인품에 올렸다.
(재속프란치스코 한국 국가형제회홈에서)
< 성 바오로 미키>
- St. Paul Miki
- San Paolo Miki
- 1562 at Tsunokuni, Japan ~
crucified on 5 February 1597 at Nagasaki, Japan
• 기리시이땅(?그리스티안) 시대의 대표적인 일본인 순교성인 바오로 미키는
1564년에서 1565년 사이에 일본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1568년 부친인 판다유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인은 1580년 예수회 교육기관인 세마나리오에 입학하여, 1589년 22세 때 예수회에서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신앙이 독실하고 재능이 뛰어난 그는 사제 수업 동안에도 예수회의 오르간티노 신부를 수행하여 게이한 지방에서 포교에 힘썼습니다.
1597년 1월 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그리스도교 금압령에 의해 체포된 성인은 1598년 2월 5일 나가사끼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이때 같이 순교한 일본 26성인중 일본인 20명 가운데서 중심인물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최후의 설교를 한 후, 신앙을 위해 의연하게 순교하였습니다.
1862년 다른 25명과 함께 시성되었는데 나가사끼 교구에서는 성인의 축일을 특별히 기념합니다.
· 그와 함께 순교한 평신도들은 다음과 같다.
목수이던 프란치스코는 박해 광경을 지켜보다가 십자가형을 받았고,
19세의 가브리엘은 프란치스칸의 문지기였고,
레오 기우야는 미야코 출신의 목수였으며,
요아 킴 사가키바라는 오사카의 프란치스코회 주방일을 하던 분이고,
디에고 키사이는 예수회의 보조자였으며, 베드로 수케고스마 다케야, 벤투라 등이다.
이들은 모두 1862년, 일본 순교자들로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三木)는 지금의 오사카 인근 도쿠시마(德島)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고, 10여 세 되었을 무렵 아즈치야마(安土山)의 예수회 신학교에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22세 때인 1585년 졸업과 동시에 수사가 되었다.
수사가 된 성 바오로 미키는 타고난 성품과 열정으로 전교 활동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후에 주교 마르티네즈(Martinez Pedro)를 따라 오사카(大阪)에서 활동하던 중 예수회 신부인 오르간티노(Organtino Gnecchi-Soldi)의 눈에 띄어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함께 활동했다.
이후 그는 불교 승려들과 많은 토론을 벌였고, 자신이 저술한 교리서들을 통해 불교 신자들을 깨우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1590년 순찰사 발리냐노(Valignano Alessandr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596년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금교를 무릅쓰고 교토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히데요시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그 결과 1597년 초에는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활동하던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프란치스코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3명과 일본인 신자 15명 등 24명이었다.
성 바오로 미키는 이때 오사카에 있다가 뜻하지 않게 체포되어 1597년 1월 1일 교토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어 그는 1월 3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오사카를 거쳐 1월 9일에는 나가사키로 출발하였고, 27일 동안 혹한 속을 걸어서 2월 5일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들 일행은 도중에 일본인 신자 2명이 자진하여 체포됨으로써 모두 26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날 저녁, 성 바오로 미키는 동료들과 함께 나가사키(長崎)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사카(西坂)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순교 직전에 그는 당당한 얼굴로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으며,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3. 성 바오로 스즈키, 3회.
- St. Paul Suzuki
- 1563 at Owari, Japan ~
crucified on 5 February 1597 at Nagasaki, Japan
• 일본 오와리 출신인 성 바오로는 1584년에 예수회원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프란치스칸 3회원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교리교사로 사제들을 도왔다.
바오로는 25명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나가사끼 교외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바오로 스즈키(Paulus Suzuki)는 일본 오와리(Owari) 출신으로
1584년에 예수회원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교리교사로서 사제들을 도왔고,
교토에 있는 성 요셉 병원의 운영을 담당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4. 성 레오 가라수마루, 3회
- ST. LEO KARASUMARU
- in Owari, Korea ~
crucified on 5 February 1597 at Tateyama (Hill of Wheat), Nagasaki, Japan
- First Korean Franciscan tertiar
(* 한국 첫 프란치스칸 순교자)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레오 카라수마루는 한국 태생으로 젊은 시절 불교의 승려가 되었다.
그는 1589년에 일본에서 예수회원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었고 또 전교 회장이 되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25명의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와 함께 순교한 교우 중에는 그의 형인 성 바오로 이바라키(Paulus Ibaraki)와 조카인 성 루도비쿠스 이바라키(Ludovicus Ibaraki)도 있다.
그들은 모두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 나가사키 순교자 언덕
5. 성 필립보, 1회
- St. Philip of Jesus, OFM M (RM)
- St. PHILIP of Jesus
- 1575 in Mexico as Philip de al Casas ~
crucified on 5 February 1597 at Nagasaki, Japan
- Patronage: Mexico City
• 스페인 부모를 두고 멕시코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필립 라스 카사스이다.
그는 처음에 푸에블라에서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으나,
1589년에 수도회를 떠나 장사꾼이 되어 필리핀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또 다시 생각을 바꾸어, 1593년에 재차 마닐라의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다.
1596년, 그가 사제서품을 받기 위하여 멕시코로 돌아가던 중에 그의 배가 항로를 잃고 일본에 기항하였다.
그는 1596년에 체포되었으며, 다음 해에 나가사끼에서 25명의 신자들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1597년의 일본 순교자로서 1862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필리푸스 데 라스 카사스(Philippus de las Casas, 또는 필립보)는 에스파냐에서 멕시코로 이주한 부모에 의해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두 형제는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였고 그 중 한 명은 순교하였다.
그는 10대 초에 멕시코의 푸에블로(Pueblo)에서 산타 바르바라(Santa Barbara)의 개혁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1년 후에 수도원을 나와 아버지와 함께 해외무역을 위해 필리핀 마닐라(Manila)로 갔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수도생활에 대한 성소를 느꼈고, 결국 1594년 마닐라의 천사의 모후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다시 들어가서 수사가 된 후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1596년 그는 가족들의 요구와 주교품을 받기 위해 멕시코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태풍에 항로를 잃은 배는 일본 해안으로 떠밀려가 좌초하였다.
그 지방의 장군은 성 필리푸스와 선원들을 구금하고, 그들이 싣고 온 화물을 빼앗기 위해 그들을 에스파냐 왕의 일본 침공 준비를 위해 파견된 스파이로 몰았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갇혔다가 다음해 나가사키에서 다른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 성 루도비코(루이스) 이바라키, 3회 >
- St. Louis Ibaraki
- Born: c.1585 in Owari, Japan
- Died: crucified on 5 February 1597 at Tateyama (Hill of Wheat), Nagasaki, Japan
- Beatified: 14 September 1627 by Pope Urban VIII
- Canonized : 8 June 1862 by Pope
Pius IX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루도비쿠스 이바라키(Ludovicus Ibaraki, 또는 루도비코)는
성 레오 카라수마루(Leo Karasumaru)와 성 바오로 이바라키(Paulus Ibaraki)의 조카이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복사로서 활동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 성 군디살보 가르시아, 1회 >
- St. Gundisalvus Garcia
- Born: 1556 at Bassein, India
- Died: crucified on 5 February 1597 at Nagasaki, Japan
- Beatified: 14 September 1627 by Pope Urban VIII
- Canonized: 8 June 1862 by Pope Pius IX
- Patronage: Bombay India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군디살부스 가르시아(또는 군디살보)는 인도의 바셀인(Bassein)에서
포르투갈계 이민자인 아버지와 인도인 개종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예수회의 평신도 교리교사로 활동하던 그는 일본과 마카오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였다.
1591년 그는 필리핀의 마닐라(Manila)에서 프란치스코회 평수사가 되어
성 베드로 밥티스타(Petrus Baptista)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와 통역가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곤살로(Gonsalo), 곤살보(Gonsalvo), 곤잘로(Gonzalo) 등으로도 불린다.
(가톨릭홈에서)
< 성 디에고 카시아 >
- St. Diego Kisai
-:ST JAMES KISAI, S.J.
- Also known as
Diego Kisai; James Kizayemon
- Born:1533 in Okayama, Japan
- Died:crucified on 5 February 1597 at Nagasaki, Japan
- Beatified:14 September 1627 by Pope Urban VIII
- Canonized:8 June 1862 by Pope Pius IX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일본인 평신도인 성 디에고 키사이는
예수회의 보조자로서 오사카에서 교리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64세의 나이로 순교하기 직전에 감옥에서 예수회 입회 허가를 받았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 미야소의 성 마티아, 3회 >
-St. MATTHIAS of Miyako
- Born : Japanese
- Died : crucified on 5 February 1597 at Tateyama (Hill of Wheat), Nagasaki, Japan
- Name Meaning : gift of Jehovah (Matthias)
- Beatified : 14 September 1627 by Pope Urban VIII
- Canonized : 8 June 1862 by Pope Pius IX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미야코(Miyako)의 성 마티아는 일본 태생으로 프란치스코회의 3회원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군인들이 그리스도인을 체포하러 왔을 때 그들은 그 자리에 없던 다른 마티아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바로 마티아라고 하여 다른 마티아를 구하고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10. 성 가브리엘(St. Gabriel, St. GABRIEL de Duisco), 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19세의 나이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가브리엘은 프란치스코회의 일본인 문지기의 아들이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평수사인 성 군디살부스 가르시아(Gundisalvus Garcia)에 의해 개종하고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11. 성 고스마 다케야(St. Cosmas Takeya), 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코스마 다케야(또는 고스마 다케야)는 칼 제작자로서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통역자로서 또 프란치스코회를 도와 교리교사로서 오사카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12. 성 마르티노 로이나스(St. Martin Loynaz), 1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마르티누스 로이나스(Marinus Loynaz, 또는 마르티노)는 에스파냐의 기푸스코아(Guipuzcoa)에서 태어났다.
그는 1586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었다.
그는 멕시코와 필리핀 선교사를 거쳐 잠시 일본의 오사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었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13. 성 미카엘 코자키(Michael Cozaki), 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미카엘 코자키는 함께 순교한 성 토마스 코자키(Thomas Cozaki)의 아버지이다.
목수였던 그는 프란치스코 선교사들과 함께 교리교사로서 또 그들이 세운 병원의 간호사로서 활동하였고, 교토와 오사카에 수도원과 성당을 짓는 것을 도왔다.
그러다가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아들과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14. 성 바오로 이바라키(St. Paul Ibaraki), 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바오로 이바라키(Paulus Ibaraki)는 함께 순교한 성 레오 카라수마루(Leo Karasumaru)의 형이다.
그는 사무라이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서 작은 사케(술)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가족들을 부양하였다.
그러다가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었다.
그는 교토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통역자이자 교리교사로서 활동하였고, 천사들의 모후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근방에서는 평신도 설교가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15. 성 베드로 수케지로(St. Peter Sukejiro), 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베드로 수케지로(Petrus Sukejiro)는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자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의 성구(聖具) 보관인이었다.
교리교사로도 활동하던 그는 감옥에 갇힌 동료들을 돌보던 중 교토에서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16. 성 벤투라(St. Ventura, St. BONAVENTURE of Miyako),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벤투라는 일본의 교토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아기일 때 어머니가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양어머니에 의해 불교 사원으로 보내져 자라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결정할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에 자신의 출신 배경을 밝히고 사원을 나와 교토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가서 교리를 배우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그는 그곳에서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어 교리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미야코(Miyako)의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로도 불린다.
17. 성 안토니오 데이난(Anthony Deynan), 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안토니우스 데이난(Antonius Deynan, 또는 안토니오)은 나가사키에서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복사로 활동하던 그는 나가사키의 예수회원와 오사카의 프란치스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18. 성 요아킴 사카키바라(Joachim Sakakibara), 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요아킴 사카키바라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서 의사가 되어 가난한 이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되어 교리교사로 활동하였고, 때때로 오사카의 프란치스코 회원들을 위해 주방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19. 성 요한(St. John, St. JOHN SOAN de Goto)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요한(Joannes)은 일본의 고토(Goto)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성장하였는데, 고토 섬에 박해가 닥쳐오자 이를 피해 나가사키로 갔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예수회원들로부터 수학한 후 오사카에서 예수회의 보조자이자 교리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20. 성 요한 키사카(St. John Kisaka), 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요한 키사카(Joannes Kisaka)는 비단 짜는 사람으로 그리스도교 개종한 후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21. 성 카이오 프란치스코(St.Caius Francis), 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카이우스 프란치스코(Cajus Franciscus, 또는 카이오)는 일본 군인 출신으로 개종한 후 프란치스코회의 3회원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군인들이 수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왔을 때 그는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22. 성 토마스 시코(Thomas Xico), 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토마스 시코는 일본 태생으로 난폭한 성격의 약사였다.
그러다가 신앙을 갖게 된 그는 부드러운 마음을 지닌 프란치스코회의 3회원이 되었다.
프란치스코회가 천사들의 모후 수도원을 개원했을 때 그는 자신의 약국을 그 옆으로 옮기고 교리교사와 선교사들의 통역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토마스 다우키(Thomas Dauki)로도 불린다.
23. 성 토마스 코자키(St. Thomas Cozaki), 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토마스 코자키는 함께 순교한 성 미카엘 코자키(Michael Cozaki)의 아들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여 복사로 활동하였고, 목수인 아버지가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건립에 참여했을 때 아버지를 도와 함께 일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아버지와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는데, 그가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고별 편지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24. 성 프란치스코 다케야(Francis Takeya), 3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Takeya, 또는 프란체스코)는 일본 나가사키의 미야코(Miyako)에서 태어났다.
커서 의사가 된 그는 프란치스코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어 병든 이들을 무료로 돌보아주었고, 교리교사와 설교가로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25. 성 프란치스코 블랑코(Francis Blanco), 1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프란치스코 블랑코(Franciscus Blanco, 또는 프란체스코)는 에스파냐(스페인) 갈리시아(Galacia) 지방에서 태어나서 살라망카(Salamanca)에서 수학한 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멕시토와 필리핀 그리고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26. 성 미카엘의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of St. Michael), 1회.
•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미카엘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Valladolid) 근방 라 파릴라(La Parilla)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평수사가 된 후 선교사로서 필리핀과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오사카에서 활동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성 베드로 밥티스타(Petrus Baptista)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선교사의 수호자 >
• 동방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서구 열강의 정복 민족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정복하는 데에 골몰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부분의 정복자들과는 달리,
로욜라의 이냐시오를 따라 한 분뿐이신 임금께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506년 스페인 나바라(Navarra)의 하비에르(Javier)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수학하던 1534년에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를 창립하였다.
1541년에 성 이냐시오의 권고를 따라 포르투갈령 인도로 가서 선교하였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참회하는 모범을 보였으며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뛰어난 설교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켰다.
그는 인도(1541-43,48,51-52년)와 스리랑카(1544-45년), 몰로카스 제도(1545-47년)
그리고 일본(1549-51년)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이러한 활동적인 모습은 그리스도교 모든 젊은이에게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정열을 쏟으라는 격려가 된다.
그는 1552년 중국으로 들어가던 도중 상찬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몰루카스 지방에서 말라카에 돌아온 때였다.
그는 사또미 야지로오라는 일본인을 만났다.
이 사람은 본국에서 추방되어 그곳에 온 사람이었다.
하비에르는 그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다.
또한 그사람을 통해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요 주민들은 모두 선량하다는 말을 듣고 그 나라로 향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시 고아에 파견되어 있던 포르투갈 국왕의 대리인 총독의 허락을 받고 1549년 6월 24일에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어려운 고비를 거듭한 항해를 마치고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한 것은 그해 8월 15일이었으며, 야지로오도 동반했다.
하비에르는 즉시 전교에 착수했으나 예상한 바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가고시마 영주는 그에게 전교의 자유를 주었으나 그의 설교를 듣는 이는 매우 적었다.
그래서 다시 북쪽으로 가볼 생각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야마구치에 당도했다.
그곳에서의 전교는 약간의 희망을 보여 주었다.
그는 영주 오오우치 요시다카에게서 한 절간을 기증 받아 이를 교회로 사용했다.
그는 또한 일본의 수도에서 젼교하기 위해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교토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시 오오닌(應仁) 이래의 내란으로 인해 인심이 어지러웠으므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아무 열매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서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1551년 11월 4일 일찍이 일본을 떠났다.
체류 기간 불과 2년 반,
그동안 가장 오래 머문곳이 야마구치였다.
그의 체류 기간은 짧았으나 일본의 사도임에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 들어온 최초의 신부였고, 일본에 최초로 교회를 설립한 공로자인 것이다.
그는 일본을 떠남에 앞서서 다른 선교사에게 사업을 인계했다.
그는 일본 국토를 좋아했고 일본을 잊을 수 없어 상부에게 끊임없는 서한으로 그 후계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독촉했다.
그리하여 가톨릭 신부가 계속 들어오게 되고, 일본 남쪽에서 북쪽까지 많은 성당을 세우게 되었다.
이 같은 융성을 초래한 것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의 선물인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이 계획은 중국 본토에 도착하기 전에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중국에 전교하려고 광뚱(廣東)에 가까운 산첸(山天) 섬에 이르러, 그곳에 체류하며 대륙에 들어갈 편의를 찾던 중
그곳에서 병을 얻어 죽음을 앞두고 4일 동안 고투하면서 항상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단 한마디의 불평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다윗의 후예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를 최후로 46세의 나이에 성스러운 생애의 막을 내렸다.
유해는 고아에 이송된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부패되지 않아 얼굴이 산 사람과 같다 한다.
그는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라고 불리며,
1622년에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으며,
비오 10세에 의해 외국 선교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축일:12월3일. 게시판150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한 나가사키 순교라 언덕
[ 순교자의 피 ]
•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창조의 가장 큰 신비 중의 하나다.
’혼돈 이론’에 따르면 지구 한쪽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면 지구 반대편에서는 그것이 엄청난 기후 변화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주는지는 ‘혼돈 이론’까지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잘 알고 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마음에 깊은 상처와 균열을 만들기도 하고, 한 조각의 선행이 영원한 거룩함의 물결을 일으키기도 한다.
추운 2월의 어느 날 아침, 예수회 수사였던 바오로 미키는 다른 25명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나가사키가 건너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다.
그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 자신의 피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하는 비가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아무런 응답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60년대, 일본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재 정착한 후 조사해 보니 나가사키 주변에만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의 피는 소망대로 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적셔서 200년 후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어 오게 했던 것이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후손에게 신앙의 유산을 전할 것인가?
나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해 준 분들에게 감사한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Canto Gregoriano-Salve Festa Dies
https://youtu.be/hDY2zq354l0
ㅡㅡ끝.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