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뒤에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을 설하지 않아야 할 사람의 종류와 부처님의 법을 비방한 자가 받는 죄 및 법화경을 마땅히 설해야 할 사람의 종류를 상세히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법화경을 설하지 않아야 할 사람의 종류를 14가지로 들고 있는데 이를 십사비방이라고 합니다.
앞의 "불자의 자각"에서도 설명하였지만 불교는 믿음으로써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저 덮어놓고 아무렇게나 믿는 것은 믿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신해(信解) 즉, 깊이 믿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앎(解)으로부터 들어온 사람은 특히 믿음에 힘써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증상만심에 빠지기 쉽게 되어버립니다. 믿는데는 여러 가지 장애가 일어나므로 그 장애를 서로 잘 분별해서 그것을 제거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의 장애가 되는 것을 열 네가지로 나누어 이것을 옛날부터 십사비방이라고 한 것입니다.
비방은 간단히 말하자면 욕한다는 뜻이지만 천태대사는 이를 "배반하여 어긴다."라고 풀이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동이 곧 비방이라는 것입니다.
"사리불아 또는 교만하고 게으르거나 아견을 세우는 자에게는 이 경을 설하지 말라."
여기서 "설하지 말라"라는 말은 설해도 좀처럼 믿지 못하니 그 나쁜 마음을 없이한 다음에 설하라는 뜻입니다. 열네 비방의 첫째는 교만(驕慢)입니다. 이것은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처럼 불교의 신앙을 처음 시작한 사람에게 흔히 있기 쉬운 일입니다. 조금만 새로운 말이나 문구를 알게되면 그것으로 굉장히 많은 것을 안 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 듣는 말을 약간 알게된 것일 뿐 실상은 교를 알게된 것은 아닙니다.
둘째는 해태(懈怠) 곧 게으름입니다. 인간이 게을러지는 것은 쓸데없는 일에 머리를 쓰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일에는 게을러집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것은 사정없이 버려야 합니다. 우리들도 새로운 각오를 할 때에는 머리를 깍거나 주위를 정리합니다. 쓸데없는 것을 버린다는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적한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에 중요한 일에 마음을 집중한다면 부지런하고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계아(計我)라는 것입니다. 계아란 아견(我見)을 세우는 것. 즉, 모든 사물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교리의 공관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모든 인간관계라는 것은 연기의 관계이고 상주불변의 자기란 것은 없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견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법화경에서도 이 경의 한 구절, 한 글자라도 받으면 성불한다고 부처님께서 기별을 주셨지만 아견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법화경을 아무리 읽고 외워봐야 한 글자도 제대로 받은 것이 아님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해한다는 것은 아견을 버리는 것입니다.(저는 금생(今生)에서 법화경의 한 글자라도 제대로 받는 것이 소원입니다.)
"범부는 식견이 얕고 깊이 오욕에 착하여 들어도 능히 알지 못하리니 또한 설하지 말라."
넷째는 천식(淺識) 즉, 식견이 얕다는 것으로 사물의 겉면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이나 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허망분별(虛妄分別)입니다. 그러므로 말이나 글로는 진정한 뜻을 완전히 나타내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뜻은 그 말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천태대사는 문저비침(文低秘沈)이라고 하였습니다. 법화경문의 그 밑바닥에 숨어있는 뜻을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은 몸으로 읽어야 한다고들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법화경을 제대로 받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다섯째는 착욕(著欲)입니다. 색욕(色欲), 성욕(聲欲), 향욕(香欲), 미욕(味欲), 촉욕(觸欲)의 다섯 가지 욕심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오욕을 즐기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집착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오욕에 집착하는 사람은 가지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부처님의 교를 배울 근기가 없는 것이므로 이것은 깊이 경계해야할 일입니다.
여섯째가 불해(不解) 즉, 들어도 알지 못함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자기 멋대로 해석한다면 가장 중요한 점을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점을 버리고 쓸데없는 것에 힘을 들이고 그것에 감탄하고 있는 것이 곧 알지못함입니다.
"만약 사람이 믿지 아니하고 이 경을 헐어 비방하면 곧 일체 세간의 부처님 종자를 끊는 것이 되느니라."
일곱째는 불신(不信) 즉, 믿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남의 일을 짐작하여 단정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런 일이 심해지면 부처님이나 선지식의 고귀한 말씀도 나름대로 해석하여 믿지 않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자기 한사람만이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미쳐 다 같이 믿지 않는 무리를 만들게 되므로 결국 우리 모두에게 있는 불성을 깨우칠 기회를 잃게 하므로 일체 세간의 부처님의 종자를 끊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혹은 상을 찡그리고 의혹을 품게 되리니 너는 마땅히 이 사람의 죄의 업보를 들으라."
여덟째는 빈축(嚬蹙)입니다. 빈축이란 미워하는 마음을 얼굴에 나타내어 얼굴을 찡그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과 마찬가지로 세상사람들에게 몹시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즉, 얼굴을 찡그려 교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상에 퍼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깊이 경계하여야 합니다.
아홉째가 의혹(疑惑)입니다. 법화경이 좋은 경전이라는 것을 알고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거룩하다는 것도 알지만 지금과 같은 복잡한 세상에서 그런 것이 필요할까 하고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것도 큰 죄가 됩니다. 좋은 줄을 알면 그것을 행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한 나쁜줄 알면 그것을 과감히 끊어버리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만한 용기, 결심이 없기 때문에 의혹이 생기는 것입니다.
"혹은 부처님이 세상에 게실 때나 혹은 멸도하신 후에 이 경전을 비방하고."
열째는 비방(誹謗)인데 이것은 대단히 큰 죄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위사람들의 결점을 들춰내어 나쁘게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심해지면 부처님의 정법이 세상에 퍼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경을 읽고 외우고 써서 가지는 사람을 보고 가벼이하고 천대하며 미워하여 질투하거나 원한을 품으면, 이 사람의 죄의 업보를 너는 지금 또 들으라."
여기에는 가벼이 여김, 미워함, 질투함, 원망함의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는 차례차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열한 째는 경선(輕善)입니다. 좋은 것을 가벼이 여기고 천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선이라도 선은 선입니다. 작은 선부터 시작해서 큰 선을 행하게 되는 것이므로 아무리 작은 선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혹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 작더라도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그 마음이 귀중한 것이므로 그러한 마음을 길러서 키워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열두째는 증선(憎善) 즉, 선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못 믿게 하려고 합니다.
열세째는 질선(嫉善)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한 사람에게는 좋은 과보가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운이 좋다고 비하하고 질투합니다.
열네째는 한선(恨善)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을 적으로 삼아서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박해를 가합니다. 그러므로 한선의 죄는 가장 중합니다.
이상이 십사비방입니다. 우리들 중에서 이 중의 한가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결점을 없이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믿으려고 해도 깊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어도 표면만의 믿음이 되고 마음속으로 깊이 믿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열 네가지 조건을 들어 이와 같은 잘못을 제거하게 해 주시는데 노력하십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잘못이 없어짐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저절로 마음속으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된 말로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는 짓을 하지 않고 부처님의 자비에 기대어 수지, 독, 송, 해설, 서사의 오종공덕을 꾸준히 닦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