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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풍류정신 문화 (2)
나채근(한국과정사상연구소)
I. 시작하는 글
지난주에는 풍류문화의 모더니즘적인 다양한 특성을 살펴보았다. 이번 시간에는 풍류문화의 대표적 특성을 유기체적 관점에서 정의해 보려고 한다. 그동안 풍류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한 데에는 문헌 자료의 빈약함에도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풍류정신이 갖추어야 할 정합성과 논리성의 부족과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질 실천적인 일반성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풍류정신이 결핍하고 있는 정합적인 논리와 실천가능한 일반성을 보완해 줄 수 있는 구조를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고, 풍류정신 문화에서 핵심적인 요소인 '멋'과 ‘신명’과 '조화'의 특성을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의 관점에서 고찰하려고 한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은 영속하거나 불변하는 실체를 실재(reality)로 간주하는 기존 철학체계와 달리 생성과 과정을 실재로 보는 철학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 화이트헤드 철학의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와 ‘창조성’ 개념은 풍류정신 문화를 올바르게 정의하는데 유용한 요소이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적 입장에서 보아도 존재와 관련된 궁극자의 범주인 ‘창조성’, ‘다자’, ‘일자’가 어떻게 동양사상인 풍류정신에 적용되고 조화될 수 있는지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II. A. N. Whitehead의 유기체 철학(the Philosophy of Organism)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 즉 실재를 과정으로 보는 관점은 19세기 이후 과학적 실증주의, 기계론적 결정론, 환원주의를 대체하며 나타난 비유클리드 기하학,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양자역학과 같은 자연과학적 관점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인간의 관측행위가 전자(electron)의 행동을 바꾼다는 양자역학을 대변하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라 우주는 인간이란 주체와 관측대상인 객체로 더 이상 구분될 수 없으며 서로의 관계성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하나로 얽혀있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즉 관찰자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objective reality)란 없다는 인식에 이른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은 존재를 근본으로 하고 존재에 대한 탐구에 몰두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실체철학의 존재론적 영속성이나 불변성, 초월성을 비판하고, 변화와 유동을 전제로 과정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내재성의 철학을 탐구하였다. 화이트헤드는 어떤 물질도 홀로 고정되어 영속하지 않으며 그 물질이 존재하는 데에도 초월적 창조자가 전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물질은 상호 내재적 변화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불변이 아닌 변화의 원리를 궁극자로 하는 철학을 통해 ‘다자’인 존재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하여 창조적 본성을 이어간다고 보았다.
화이트헤드의 궁극자 범주는 각기 ‘사물’, ‘존재’, ‘존재자’의 의미와 동의어인 ‘창조성’, ‘다자’, ‘일자’이고, “창조성은 이접적인 방식의 우주인 다자를 연접적인 방식의 우주인 하나의 현실적 계기로 만드는 궁극적 원리이다. 다자가 복합적인 통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궁극자의 범주는 우연성(accident)에 의해 생성되어 간다. 이러한 과정은 보다 구체적으로 미시적 과정인 ‘합생 (concrescence)’과정과 거시적 과정인 ‘이행(transition)’과정으로 나누어진다. 합생과정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일자를 형성하는 것이며, 이행 과정은 상대적으로 완결된 현실세계를 사물의 본성에 따라 새로운 합생을 위한 여건으로 만들어 가는 창조성이다. 화이트헤드는 다자인 존재들이 창조성을 통해서 하나의 현실태 속으로 ‘공재(togetherness)’하는 것을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로 보았다.
이때 창조성을 통하여 다자가 일자가 되는 공재는 다자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다. 이것은 이전의 다자들이 새로운 일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다자가 일자가 되고, 그 일자가 다시 다자 중 일자가 되어 새롭게 생성되는 일자의 대상이 되는 사건을 말하며 이러한 사건, 즉 새로운 생성의 과정이 사물의 본성이라고 화이트헤드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물의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 ‘현실적 존재자’이며 이 ‘현실적 존재자’는 곧 진정한 사물인 것이다. 이때 사물은 존재하기 위해 자신 이외의 것은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데카르트식의 사물이 아닌, 존재하기 위해 타자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화이트헤드식의 사물이다. 즉 창조성은 전혀 이질적인 새로운 일자를 구성하는 새로움의 원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III. 풍류정신 문화의 ‘멋’과 화이트헤드의 ‘미적 가치’
이러한 한국인의 미적 의식의 기반을 형성하는 풍류정신 문화의 멋이 화이트헤드의 미적 가치와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알아보자.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저서 Process and Reality에서 “사변철학이란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 낼 수 있는 일반적인 관념들의 정합적(coherent)이고 논리적(logic)이며 필연적인 체계를 조직하려는 시도”라고 말하며 정합적이며 논리적인 철학적 도식과, 적용가능(applicable)하고 충분한(adequate) 해석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이후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사변철학은 사변이성을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은 물론이고, 추상을 구체로 오인하는 대표적인 개념인 단순정위(simple location)와 실체 속성 개념을 과신하게 되었고 그 결과 철학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도한 사변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며 실천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화이트헤드는 합리적 측면과 경험적 측면을 모두 아우르는 사변철학적 도식으로 자신의 우주론 속에 인간 경험의 모든 요소를 설명하려고 한다.
물론 화이트헤드의 경험은 경험주의 철학자 흄의 경험과는 다르다. 흄이 실험과 관찰로부터 귀납되고 논증되는 사실만 진리로 인정하고 인간의 지식과 사고를 지각에만 근거시키는데 반해, 화이트헤드는 경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의 실재의 모습으로 여긴다. 그러한 경험의 모습에는 사물의 현상(appearance)에 대한 동시적 느낌뿐만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직관적이고 인과적인 느낌이 모두 포함된다. 화이트에게서 경험이란 주체가 대상을 ‘자기화’하는 것 즉 ‘자기향유(self-enjoyment)’하는 것이다. 주체는 주체의 대상이 된 다자인 대상을 자기향유하여 일자인 자신을 형성해 간다. 이때 주체는 경험을 정서적(emotional)인 것까지 확대하여 의식 이전의 원초적인 경험인 물리적 경험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은 현실적 존재자인 까닭에 경험의 모습은 곧 현실적 존재자이면서 현실적 존재자의 느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궁극자의 존재 범주에 속하는 현실적 존재자는 복잡하고도 상호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미적 경험은 동일성 아래에서의 대비의 실현으로부터 생겨나는 느낌(All aesthetic experience is feeling arising out of the realization of contrast under identity)"이라고 표현하면서 느낌과 대비의 강도로 더욱 분명해지는 느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현실적 존재자의 경험에서 실현되는 미적 가치는 풍류정신의 멋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신라시대의 화랑인 사다함은 많은 왜병을 포로로 잡은 공적으로 노예와 토지를 나라로부터 하사받았지만, 결국 하사받은 노예를 모두 풀어주고 토지도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친한 친구가 병사하자 자신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인물이다. 사다함의 일화에는 풍류 정신의 멋이 잘 구현되어 있다. 사다함은 자신이 경험하는 사건 이면의 고차원적인 멋을 느끼고 그 멋의 미적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인물인 것이다. 노예를 해방시켜 준 것은 제선봉행 제악막작이라는 불교의 정신을 구현한 것이고, 토지를 부하에게 나누어 준 것은 박애 정신을, 그리고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죽은 것은 우애정신을 구현한 것이다. 김유신 역시 부모의 생각을 이해하고 자신의 애마가 여전히 천관의 집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말의 목을 벤다. 그리고 삼국을 통일한 후 천관사라는 절을 짓는다. 김유신의 이런 효, 용기에서도 풍류정신의 멋을 느낄 수 있다. 사다함과 김유신의 지고한 미적 실천은 동일한 사건 속에서 대비의 강도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 느낌이 동반되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풍류정신의 멋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관념적이든 실천적이든 일상의 제도적 인습적 범위를 넘어선 보편적 미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다. 선을 행하고 박애와 우애정신을 구현하고 효와 용기를 실천하는 것은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미적 실천이다. 이는 곧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현실적 존재자가 경험을 통해서 실현해 나가는 미적 가치와 같은 맥락의 미적 실천이다. 화이트헤드는 “개체를 특징지우는 감각여건이 대비의 패턴을 통해 파악의 주체적 형식에 개입한다”는 미적 경험을 언급하고 있거니와 동시에 “감각여건이 제공하는 인식론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인 인류애로 승화되는 미적 경험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 존재의 모든 경험과 사고에서 미적 가치를 발견하려는 화이트헤드의 시도는 사다함과 김유신의 일화에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IV. 풍류정신 문화의 ‘신명’과 화이트헤드의 ‘창조적 생명력’
풍류정신 문화가 지니는 또 하나의 속성은 신명이다. 신명은 개체적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적 측면으로 발현되는데 우리는 이를 ‘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명이란 춤과 노래를 통해 나타나는데 신명이 날수록 개체들은 어떤 정해진 틀이나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감정과 느낌을 드러내게 된다. 즉 신명은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내면적으로 숨겨져 있던 생기가 표출되는 모습이다. 역사적으로 신명은 무교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무당은 춤과 노래를 통해 몰입과 황홀경에 빠지게 되는데 그러한 몰아의 상태에서 신명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신명은 무당의 전유물이 아니고 주변의 신도와 관객이 모두 느끼는 종교적 체험으로, 이러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무당과 주변 모든 사람들은 몰아의 황홀경에서 현세의 고통과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가는 창조적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완고한 사실(stubborn fact)을 어떻게 수용하고 파악하느냐는 문제이다. 거의 그대로 답습하며 반복하는 단계를 넘어 긍정적, 부정적 파악을 통해 창조적으로 변해가려는 진취적이고 모험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즉 대비를 통한 새로운 패턴으로 파악해나가려는 창조적 욕구인 자기향유(self-enjoyment)를 통해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고, 그 새로움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모네의 눈에 비친 루앙성당이나 수련은 날마다 새로움으로 태어나고 모네는 그 모습에서 새로움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V. 풍류정신 문화의 ‘조화’와 화이트헤드의 ‘관계성’
김범부는 ‘조화’의 정신에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문화를 찾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치판단의 기준을 선과 악의 분별에서 찾고 있으나 한국인은 가치판단의 근거를 ‘조화’의 정신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싱겁다’, ‘짜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한국인들은 단지 이 표현을 미각을 표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싱겁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고, 조화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즉 사우(造化)가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화와 관련된 풍류정신 문화는 음악에도 나타난다. 김범부는 우리 전통음악의 ‘장단’은 조화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말하고 있다. 음악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단이 맞는 일이고, 여러 음 사이의 조화야 말로 음악의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음악 뿐만 아니라 풍류정신 문화에서 조화의 의미는 우리의 신체와 정신에서도 나타난다. 몸이 불편하여 병이 난 것은 신체의 조화가 깨졌기 때문이고, 거짓을 말하고 사려분별을 못하는 것은 정신의 조화가 깨졌기 때문이다. 집안이 조화를 잃으면 그 집안이 위태로울 것이고, 나라가 조화를 잃으면 국운이 기울 것이다. 이와같이 풍류정신 문화란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모든 분야에서 적용되는 말이다.
조화의 중요성을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교육론을 통해서 밝힌 바 있다. 화이트헤드는 학문과 지식이 파편화, 추상화, 구획화 된다고 비판한다. 그는 학문하는 올바른 자세는 사실들 간의 상호관련성을 바탕으로 일반화된 원리나 범주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즉 부분적인 지식과 전체적인 지식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조화될 때 진정한 지식의 습득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어 교향악이 하나의 현상(appearance)으로서 통일체(unity)를 구성하고 큰 음을 낼 때 그 단일성을 지닌 음을 지각하는 것은 다양한 악기라는 요소들의 결합체(nexus)에 의해서이다. 교향곡을 들으며 개념적 느낌으로 감지되는 선율 이면의 교향악단원들이 내는 다양한 악기 소리까지 느낄 수 있을 때 진정한 교향곡을 감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VI. 나오는 글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우주는 멈추지 않는 생명력과 사변적 모험으로 진보를 거듭해오고 있다고 한다. 동시에 열린 사고로 다른 제 양상들인 문화·사고·제도와 상호 관계하고 조화하여 새로운 창조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열에너지를 가진 물질이라도 동일한 공간 안에 변화없이 놓이게 되면 열평형상태와 더불어 엔트로피는 커지게 마련이다. 엔트로피적 무질서성과 개체성만으로 일관한다면 그 문화의 변화나 성장 가능성은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새로운 에너지의 유입으로 에너지 간 상호관계성에 의해 물질 내 원자나 분자의 운동에너지가 커지게 되면 엔탈피(Enthalpy)는 증가함으로써 새로운 창조성에 대한 가능성은 확대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