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소년의 외사랑
하늘은 높고 들녘에는 곡식이 알알이 익어가는 가을날, 시골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얍 얍 앞 발차기 옆 발차기 얍, 5학년 재범이는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힘차게 구령을 붙여가며 태권도 시범을 보인다. 조금 전에 달리기했을 때 재범이가 꼴찌를 해서 같은 반 친구 미나 보기가 민망해서 숨었던 것을 만회하고픈 마음에 더 멋지게 최선을 다한다.
도시에서 부모님과 살던 재범이는 5학년이 되면서 시골 할머니 댁으로 오게 되었다. 전학생 재범이는 짝꿍이 된 미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을 뺏겼다.
미나는 하얀 피부에 단발머리를 하고 새초롬한 모습이 도도하고 새침데기 같아 보이지만, 어떤 꽃과도 견줄 수 없는 예쁜 친구였다.
재범이 마음속에는 자나 깨나 미나에게 잘 보이고픈 생각만 있었다.
미나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예배를 보는 미나의 차분한 모습과 찬송가를 열심히 부르는 모습을 뒷자리에서 보는 것이 너무 행복했고, 그것이 재범이에게는 교회 다니는 목적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날 전교생에게 위문품으로 나누어준 책받침에 예쁜 캐릭터 그림이 있었는데, 미나는 재범이가 받은 책받침의 그림이 맘에 든다고 했다. 미나에게 점수를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재범이 책받침을 미나에게 주었다. 미나가 고맙다고 받아서 들며 환한 미소를 보이는데 천사를 보지는 못했지만, 천사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재범이는 미나를 향한 마음이 날이 갈수록 더 간절하게 커지고, 식을 줄을 몰랐다.
재범이가 미나에게 바라는 건, 같이 얘기하고, 운동장도 뛰어다니며 놀고, 그런 단순한 것인데 미나는 시시때때로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재범이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가방을 던져두고, 같은 동네 사는 미나의 집 돌담 사이에 숨어 미나의 모습 한번 보는 것이 재범이 혼자만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숨죽이는 긴장된 순간이고 심장이 콩닥콩닥 떨리는 시간이었다.
6학년 여름 어느 날 재범이는 할머니가 시키는 밭일을 하고 돌아오다가 밤나무 아래에서 걸어오고 있는 미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작은 망태기를 메고 오는 미나가 밭둑이 외길이기에 비껴갈 때가 없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가오는 미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갔다 와?”라고 말하니 미나는 토끼 줄 풀을 뜯어온다고 했다. 이렇게 단둘이 만나게 되니 재범이는 “소나기”라는 소설처럼 미나와 특별한 인연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주변을 돌아봤다. 하늘은 맑고, 밭둑에 걸쳐 자란 뽕나무에 잘 익은 보라색 오디가 주렁주렁 열려있고, 밭에는 돌나물이 무더기로 노란 꽃을 피워 아기자기하게 예뻤다.
이렇게 미나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단둘이 만나니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 이후에도 미나가 재범이에게 아주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종종 같이 놀기는 했다.
한여름 하교 후에는 친구들이 너도나도 집 앞에 있는 강으로 가서 물놀이도 하고 다슬기도 잡으며 더위를 식혔다. 그때는 물놀이할 때 친구들이 거의 옷을 입지 않았지만, 재범이는 미나 앞에서는 창피해서 꼭 옷을 입고 물놀이를 했다. 미나가 물놀이를 그만하고 들어가면 재범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집으로 갔다. 배고픈 줄 모르고 놀다 이제야 들어온다고 나무라시는 할머니의 꾸지람에 “미나를 보고 있으면 배고픈 것도 잃어버려요”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렇게 5~6학년을 미나와 같은 반이 되어 보낸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아쉽게도 초등학교 졸업을 했고, 미나와 재범이는 서로의 행방을 모른 채 각자 도시로 떠났다. 중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객지로 떠나 공장 생활을 하면서 못다 한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나와 나도 그런 경우였다.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하자니 처절한 시달림과 고통이 따랐지만, 재범이는 기술을 배워서 빨리 자리를 잡고 군대에 입대했다.
군 복무를 하는 동안에도 미나에 대한 그리움은 식을 줄 몰라서 친구들을 통해 수소문했다. 휴가를 나오면 고향에 와서 미나가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을 듣고 안도했고, 언젠가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군 복무를 마칠 무렵 친구들을 통해서 들으니 미나가 서울 길동 쪽에 산다고 했다. 군복을 벗고 제일 먼저 갔던 곳이 길동 사거리였다. 매일 몇 시간씩 길동 사거리를 거닐며 언젠가는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한 달간을 가봤지만, 미나의 그림자도 못 본 채 포기하고 청주로 내려와서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다 보니 재범 이에게 미래를 같이할 여자가 생겼다.
물안개처럼 만지지도 갖지도 못하는 미나를 마음에 품고 재범이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재범이의 아내는 생활력도 강하고 남편에게도 잘하는 착한 여자였다.
서로 마음 맞춰 살다 보니 이른 나이에 집도 사고, 아이도 낳고 남부럽지 않은 결혼 생활을 했다.
몇 년이 지나 미나도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멀리서나마 잘 살기만을 기도하며 미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미나 남편이 미나를 불행하게 한다면 달려가서 혼내주고 싶은, 사랑의 오지랖이 생겼다.
재범이도 미나도 열심히 살다 보니 돌아볼 여유도 있고, 세월이 흘러 중년의 나이에 자연스레 친구들과 연락이 닿으면서 동창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마음속 물안개 같은 미나를 다시 보는 재범이는 12살 때처럼 변함없이 속마음은 그대로였다. 이제는 각자 가정이 있어서 다른 마음은 품지 못해도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환갑을 앞둔 지금은 동창 모임에서 미나를 만나면 아름답던 지난날을 소환해서 대화하며 의연하게 웃는다.
12살에 좋아했던 미나의 기억은 오래도록 재범이의 기억 속에 살아서 방긋방긋 미소 지을 것이다.
첫댓글 저번주에 만난 초등 친구가 부탁해서 친구의 일을 제가 쓴 겁니다.
실명이 거론은 안 되었지만, 톡으로 옮기는 건 좀.. 요기 에서만 읽어주세요~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히고 있는 본인 이야기가 아닌가 십네요 초등학교때 이런 추억은 하나씩 간직 하고 있지요 역시 작가의 시선은 섬세 하네요
난 이글을 읽으면서 나의 "마음속 물안개 같은 미나"를 떠 올려 봅니다 과연 나의 "마음속 물안개 같은 미나"는 잘 사나?
마음속의 하나의 추억쯤은 간직한채 살아가고 있지요.
난 선생님을 많이 좋아한 기억이 아직도 선합니다.
지금은 많이 건강이 좋지않아 사람도 못알아 본다고 들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