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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가 피었습니다 주황색 석류 밑동이 내 엄지손가락만 하고 푸른 감나무 열매도 내 엄지손가락만 하며 쓰러진 담장 대신 서 있는 옥수수는 내 키보다 조금 더 클 무렵에 작년의 그 골목길 그 흙돌담 위 검은 기와에 기대어 연한 주황색 능소화가 피었습니다 사람의 일이고 꽃의 일일뿐인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도 서로 기쁘고 부끄러울 수가 있는 것입니까 사랑한다는 말도 못해보고 헤어지게 된 옛 님을 만난 것도 같습니다 청소를 했는지 말끔한 골목길에 장마 비는 쉬엄쉬엄 가랑비 되어 내릴 때 노을 색 화장을 하고 능소화가 피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송이마다 입천장에 달라붙은 혀를 보아 말도 못하는 모양입니다 하긴 하고 싶은 말은 그 때도 못했었고 들어 줄 사람은 오질 않는데 입이 있어 무엇하겠습니까 온다고 하더라도 잃어버린 내 입맞춤을 가져올 것도 아닌데 온전한 입이 있어 무엇하겠습니까 노을에 물든 구름 다섯 쪽 씩 어깨동무를 하고 늘어진 줄기에 붙은 꽃송이마다 마치 섹소폰 대가리 마냥 고개를 바짝 치켜든 채 빈 골목길에 벙어리 능소화가 피었습니다 입안의 선명한 핏줄은 금방이라도 터져 피를 토할 듯 하여 가슴 아프게도 합니다 애써 찾아야 보이는 슬픈 미소를 감추고 능소화가 피었습니다 단정하고 정숙하며 귀티가 흐르고 두 볼은 도톰합니다 화려하기도 하지만 지나침이 없는 다소곳한 자태의 능소화가 피었습니다 --------------- --------------- 올 여름 장마 비에 내내 젖으며 이 골목길에 누가 오기를 기다리는지 그 사람이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시들 무렵에 오려면 차라리 오지를 말고 미안하면 우산을 쓰고 그 사람이 다녀갔으면 좋겠습니다 발자국 하나 깊게 남겨 주면 능소화는 오래도록 바라볼 것입니다 더운 여름에 저토록 곱게 화장을 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흰 고무신이 벗겨지도록 버선 뒤꿈치를 바짝 든 채 흙돌담에 고개를 내밀고 기약도 없는 사람에게 이토록 애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날 또 와서 기웃거리다가 능소화가 다 져버렸을 때 골목길에 누워 말라 가는 능소화를 주워서 돌담 너머 제 뿌리 곁으로 모두 던져 줄 생각입니다 다시 태어나서 기다려보라고 정성을 한번 들여 볼 생각입니다 흐린 저녁 무렵 골목길에 능소화가 내려앉아 발길을 붙듭니다 능소화 붉은 꽃 아래서 긴 숨 몰아 쉴 때 이 알 수 없는 잔잔한 기쁨과 반가움은 왜 슬픔만 같을까요 가슴 가득한 이 알 수 없는 슬픔과 아쉬움은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약속이 없다는 말은 끝났다는 말이고 끝이 없다는 말인데 왜 우리는 약속한 듯이 무엇을 기다릴까요 떠나는 사람은 마치 지만 슬픈 이별인 듯 울고 가는데 왜 남은 사람의 슬픔은 잘 모를까요 왜 남은 사람을 잊기까지 할까요 능소화 붉은 꽃 아래서 해마다 점점 더 아쉬워질 그 무엇이 고개 떨구게 합니다 능소화 핀 골목길을 돌아 나갈 때...... 골목길의 땅거미가 대숲바람과 어우러지니 허전함인지 빈혈인지 나는 비틀거리고 결국 텅 비고 말았다는 생각은 가을처럼 쓸쓸합니다 2004년 6월에 길산이 <EMBED hidden=true src=http://pds54.cafe.daum.net/original/4/cafe/2008/01/02/11/08/477af2394eb42&.wma type=application/octet-stream volume="0" loop="-1" autostart="tr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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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마비는 쉬엄쉬엄 내리고 골목마다 능소화가 주렁주렁 만개한 이 때쯤이면 꼭 이 글을 다시 올리고 싶어집니다.인연이라는 노래가 이 글하고 너무 잘 어울릴것 같아 곁들였습니다.그런데 길산님은 요즘 토옹 보이지를 않네요.
길산님~~~어서 오이소~~~산골아이님 목이 길어졌어요~~~
올해는 능소화를 아직 못보았어요. 이사를 한 탓에... 오늘 장마비는 종일이네요. 산골아이님 잊지 않으시고 '능소화---'를 기억해 주셔 감사합니다. 노래가 좋아서 한참을 앉았다가 갑니다. 요즘은 아무 곳에도 글을 올리지 않는 답니다. 선아님 잘지내시나요. 바깥분께서도...
우와~~길산님..금방 오셨네요. 잘 계셨으리라 믿어요. 이 노래는 이선희의 [인연]이라는 노래에요. 저도 남편도 여전히 잘 지냅니다.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길산님의 글을 볼 수 없어서 서운합니다. 어서 필을 드시옵소서^^*
저도 선아님 마음과 똑같아요.475에도 어디에도 길산님의 글을 볼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어서 필을 드시옵소서^^*(선아님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