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연광정에서
이가환
사월 강변의 누각에는 꽃이 다 지고
대나무 발에 훈훈한 바람 부는데
제비는 하늘 비껴서 나네
강물은 언덕의 풀과 한 빛으로 푸른데
이별의 한스러움 어느 집에 있는지 모르겠네
練光亭(연광정)
江樓四月已無花(강루사월이무화) 簾幕薰風燕子斜(염막훈풍연자사)
一色碧波連碧草(일색벽파연벽초) 不知別恨在誰家(부지별한재수가)
[어휘풀이]
-練光亭(연광정) : 평양 대동강 덕암 바위 위에 있는 정자
-簾幕(염막) : 대나무 발.
[역사이야기]
이가환(李家煥:1742~1801)은 조선 말기 정조 때의 문신이자 실학자이며 천주교 신자이다. 호는 금대(錦帶)이다. 한때 천주교를 박해하기도 했으나 마침내 천주교 신도가 되었으며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이익의 실학을 이은 대학자로 당대부터 지목되었고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했다. 저서로 『금대유고(錦帶遺稿)』가 있다.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순조 1년)에 일어난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 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지배 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확장되었다.
천주교 전래에 크게 공헌한 사람으로 이벽(李蘗)을 들 수 있다. 그는 조선 후기 주자학의 모순과 당시의 유교적 지도 이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아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사신들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西學書)를 열독하였다. 중국의 실학자 서광계(徐光啟)와 이지조(李之藻) 등이 저술한 한문으로 천주교 서적들은 천주교의 교리와 신심, 철학, 전례와 함께 서구의 과학, 천문, 지리 등의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벽은 잉러한 서적들을 치밀히 연구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1777년(정조 1년) 권철신, 정약전 등 기호지방의 남인 학자들이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실학적인 인식을 깊이 하고 새로운 윤리관을 모색하려는 목적으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다. 이때 이벽이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 학자들에게 전하여 후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 신앙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1784년 이승훈의 부친이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게 되었을 때 이승훈을 팜께 보내 세례를 받아 올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져오자, 그들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 정식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벽은 서울 수표교(水標橋)에 집을 말ㄴ해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교분이 두터운 양반 학자와 인척들 및 중인 계층의 인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천주교를 전했다. 이대 세례받은 사람들이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윤하 등 남인 양반 학자들과 중인 김범우 등이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주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세력 확대는 유교사회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 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이로 인해 정조가 죽자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靖順大妃)는 사교인 서교를 엄금하고 근절하라는 금압령(禁壓令)을 내렸다. 이 박해로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는데, 이때 주문모를 비롯하여 권철신,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을 포함하여 신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산되는 천주교 교세에 대한 위협을 느낀 지배 세력의 종교 탄압이자, 이를 구실로 노론 등 집권 보수 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 세력을 탄압한 다툼의 일환이었다.
출처 : 한시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