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7](월) [동녘글밭] 검찰의 줄에 한껏 기대어
https://youtu.be/uNX1q1SFdwQ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대개 엇비슷하게 살아 갑니다.
서로의 갈등을 느끼면서 그 갈등을 풀어 가며 살아 가지요.
갈등은 이해를 통하여 이해의 폭을 넓혀 가면서 풀어 갑니다.
그러자면 필요한 것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야 합니다.
어떤 상태의 ‘나’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어떻게든 풀기 위한 ‘고육책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은 자연스럽게 감추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감춘 것 속에 들어 있는, 가려진 부분을 잡아내야 하니까요.
또한 ‘나’에 대해선 너무도 ‘관대’하여 ‘합리‘에 빠지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스스로 그러한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속성이 다 엇비슷하여 ‘너’를 통하여 어느 정도 ‘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너’의 눈에 비친 그 ‘나’의 모습에서 ‘나’를 보게 되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나’를 찾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나‘를 바로 보자면 꿰뚫어 보는 ’마음의 눈‘으로 ’나‘에서 찾아야 합니다.
누구 보다 속속들이 ’나‘는 ’나‘를 잘 아니까요.
모순 덩어리인 ’나‘를 그냥 안고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용기‘가 없으면 허물을 인정할 수가 없고, ’중심‘이 흔들리면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까요.
이러한 과정은 바로 ’나‘를 철저하게 ’객관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건 ’너‘의 눈으로 ’나‘를 보는 일을 넘어 내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는 일입니다.
따라서 내가 풀어야 할 ’갈등‘은 내 안의 문제부터 풀어 ’평화‘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안고 있는 갈등을 평화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 갈등은 더욱 커져 심각한 문제로 바뀌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평화를 주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게 안 되는 경우가 많이 생겨 아쉬움을 크게 느끼게 되는 지경에 이르지요.
그런데 이 문제가 사사로운 것이 아닌 공적인 경우, ’극단‘에 이르게 됩니다.
공공의 문제이기에 실제로 피해를 입히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에서 어느덧 ’우리들‘이 아닌 데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지요.
그래서 모두의 분노를 사는 ‘공분’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이미 말씀을 드린 바 있는 그 예전의 횃불이요, 얼마전의 촛불입니다.
그렇다면 몰상식이 판을 치는 윤석열 정권인 오늘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분노할까요?
그건 줄탁동시(啐啄同時)의 현상으로 이해가 됩니다.
안팎에서 동시에 허물어지는, 깨나 재미있게 구경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지요.
오늘도 고마움으로 ‘검찰의 줄(啐)에 한껏 기대어 봅니다. 정말, 고마워요.
첫댓글 오늘의 글밭 마무리가 힘이 들었읍니다.
마무리를 짓느라 1시간 쯤 늦게 방송을 켰읍니다.
이제, 방송을 끝내고 이렇게 글밭에 따른
댓글을 올립니다.
'검찰의 줄(啐)에 한껏 기대어'라는 제목의
글밭 중심 방송이었지요.
기회가 되시면 한번, 살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