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개월 아기 앗아간 폭우 산사태
30일 새벽 경북 영주시 상망동에서 산사태가 발생하면서 3대가 함께 살던 주택이 토사에 묻혔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2시간 동안 구조작업을 펼쳐 일가족 10명 중 9명을 구조했지만 14개월 된 여아는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끝내 숨을 거뒀다. 영주에는 이틀 동안 340mm가량의 집중호우가 내렸다. 1일에는 제주에 최대 250mm 이상의 비 등 전남과 경남 지역에 많은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됐다.
경북소방본부 제공
“아내는 구했는데 14개월 딸이…” 340㎜ 폭우가 앗아가
경북 영주 산사태에 주택 1채 매몰
3代 일가족 10명중 9명은 구조돼
호남서도 옹벽붕괴-정전 등 피해
“남부 오늘까지 비, 당분간 소강”
“아내는 어떻게든 꺼냈는데 우리 아이는….”
경북 영주 산사태로 딸을 잃은 A 씨는 장례식장에서 취채진에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밤새 내린 집중호우로 30일 새벽 영주의 한 주택이 산사태로 매몰돼 14개월 여아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호우주의보가 발령된 영주에 이틀 새 누적 강우량 340㎜에 달하는 물 폭탄이 쏟아지는 등 경북 북부와 호남 지역에 비가 많이 내리며 피해가 이어졌다.
● 일가족 10명 매몰돼 14개월 여아 참변
경북소방본부에 따르면 30일 오전 4시 43분경 경북 영주시 상망동의 한 야산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주택 한 채가 매몰됐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포클레인 2대와 인력 70여 명을 투입해 2시간가량 구조 작업을 진행한 끝에 매몰된 주택 내에서 일가족 10명 중 9명을 구조했다. 하지만 오전 6시 40분경 심정지 상태로 발견된 여아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 판정을 받았다.
A 씨는 “벽 바로 옆에 내가 있었고 중간에 아이, 침대 끝에 아내가 자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벽에 금이 가더니 흙더미가 밀려 들어와 아내와 아이가 깔렸다. 몸으로 무너지는 벽을 막으며 구하려 했지만 아이는 도저히 구할 수 없었다”면서 울먹였다. 아내는 잠에서 깬 다른 가족들이 가까스로 토사 속에서 꺼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주택에는 3대가 함께 살고 있었다.
상망동 행정복지센터 등에 따르면 이날 사고는 집중호우가 산비탈을 무너뜨리면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갑자기 많은 양의 토사가 주택 뒤편 벽과 지붕을 뚫고 밀려든 것이다.
영주시는 구조된 9명을 인근 경로당으로 옮겨 건강 상태를 확인했지만 큰 부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날 산사태로 이 마을 15가구 주민 43명이 긴급 대피했다. 경북도소방본부에는 이날 오후 3시까지 비 피해 신고가 123건 접수됐다.
● 옹벽 붕괴, 정전·단수 등 피해 속출
집중호우에 유실된 도로 지난달 29일부터 밤새 내린 집중호우로 남부지방에 피해가 속출했다. 하천에 물이 불어나 경북 봉화군 명호면의 도로가 유실된 모습. 경북 봉화소방서 제공
호남에서도 피해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광주시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5시 반경 광주 동구 지산동 지산유원지 인근에서 옹벽이 무너졌다. 옹벽 붕괴 당시 주택과 연결된 계단 및 난간도 함께 무너졌다. 집에 있던 일가족 4명이 긴급 대피해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날 오전 7시 10분경 광주 동구 계림동의 한 아파트 단지 3개 동에선 정전 및 단수 피해가 발생했다. 동구 관계자는 “밤사이 내린 폭우가 지하 펌프실로 흘러들어 정전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30일 오후 5시까지 소방 당국에 접수된 비 피해 신고는 광주 17건, 전남 13건이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전날부터 30일 오후 5시까지 누적 강수량은 영주 342㎜, 전남 신안 156㎜, 강원 춘천 140㎜, 충북 영동 120㎜에 달한다. 이날 오후 6시까지 12개 국립공원 352개 탐방로, 둔치주차장 31곳의 출입이 금지됐다. 여객선 7개 항로 11척도 기상 악화로 통제됐다. 전남, 경북 등에서 302가구, 430명이 산사태 및 침수 우려 등으로 마을회관으로 대피했다.
남부지방에 집중됐던 폭우는 당분간 소강상태로 접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제주는 1일 오전까지 20∼60㎜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 예상 강수량은 경남 남해안은 10∼50㎜, 경남 내륙은 5∼30㎜다.
이소정 기자, 영주=장영훈 기자, 광주=이형주 기자
모래주머니-대형비닐… ‘탈출’ 못한 반지하, 임시 자구책
침수 대비해 빗물받이 청소하고
일부는 아예 임시거처 준비나서
30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반지하 주택 입구 앞에 비닐이 벽돌로 고정돼 있다. 지난해 8월 폭우로 이 지역 일가족 3명이 사망했다. 장마가 본격화되면서 미처 물막이판을 설치하지 못한 반지하 주민들은 자구책을 고민하는 모습이다. 이승우 기자
“물막이판(차수판)을 설치하면 뭐 합니까. 하수구가 역류해 물이 차오르니 방법이 없더군요.”
30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반지하 주택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유모 씨(74)는 이같이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유 씨가 사는 주택은 2019년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기록적 폭우 당시 배수구에서 역류한 물이 허리 높이까지 차올랐다. 유 씨는 “이웃 도움으로 겨우 목숨만 건졌는데 이후 빗소리만 들어도 잠을 설친다”며 “돈이 없어 반지하를 떠날 수 없으니 여름 동안이라도 지인이나 친척 도움을 받아 신세질 곳을 찾고 있다”고 했다.
최근 전국에 폭우가 쏟아지며 곳곳에서 피해가 발생하자 지난해 침수 피해를 겪었던 반지하 주택 주민들이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물막이판을 설치하거나 모래주머니를 쌓기도 하고, 유 씨처럼 임시 거처를 수소문하는 이들도 있다.
전날 침수가 발생한 서울 동작구 상도동 주민 일부는 이날 집 앞에 모래주머니를 쌓고 있었다. 전날 주택 반지하 창고가 침수됐던 집주인 한모 씨(86)는 “업자를 불러 배수관을 수리하는 동시에 지하실을 전부 비우고 입구 주변에 가림판을 설치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 주택은 지난해 8월 폭우 때 50대 여성이 사망한 반지하 주택에서 1km 거리에 있다.
인근 반지하 주민 최성호 씨(42)는 “폭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20만 원을 들여 미세하게 금이 갔던 창문 유리창을 교체했다”며 “물막이판이 아직 설치되지 않아 임시방편으로 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조치했는데 솔직히 걱정된다”고 했다. 다른 상도동 주민 이모 씨(70)는 “지난해 침수로 집이 다 잠겼다”며 “올해는 장마 기간 동안에만 집주인에게 지상층 방 하나를 빌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살림살이를 임시로 담아 둘 대형 비닐봉지 등을 구매하는 이들도 있었다. 서울 관악구 반지하에 사는 임모 씨(30)는 “지난해 여름 가전제품과 가구가 전부 침수돼 고생했다”며 “물막이판 설치를 알아보니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더라. 출장이 잦아 집을 비울 일이 많은 만큼 현실적 대안으로 대형 비닐봉지를 사서 침대 등을 덮어두려 한다”고 말했다.
일부 주민들은 집에서 집게 등을 들고 나와 집 앞 빗물받이를 직접 청소하기도 했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 반지하 주민 박모 씨(56)는 “자치구에서 청소해주기만 기다리다가 집이 잠기면 누가 책임져주느냐”며 “물막이판도 없다 보니 불안해 폭우 전후에 시간을 내 빗물받이 안에 쌓여 있던 담배꽁초 등을 치웠다”고 했다.
이승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