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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Ⅰ부. 내가 겪은 1946년-6‧25전쟁 <순 담>
1. 밤손님이라는 빨치산
올해는 북한의 6‧25불법남침 60주년이 되는 해다. 광복 후 1946년부터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빨치산반란군과 군경토벌대가 수없이 격전을 벌리던 곳에서 위험천만하게 겪었던 체험을 기술해 보고자 팬을 들었다. 나는 광복 후 일본에서 나와 전라남도 장흥(長興)군 유치(有治)면 금성리 앞 삼거리와 노루목에서 잠간 그리고 강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46년 초부터 빨치산들의 활동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초기 이 지역 밤손님으로 활동했던 빨치산들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유치면 일부는 6‧25이후 얼마동안도 빨치산의 영향권에 들어있었다. 유소년들은 빨치산사상교육을 받고 노래를 배우며 소년단훈련을 받았는데 나는 매포(전문)를 전달하려 다니기도 했었다.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에 있는 가지산-보림사는 인도와 중국에 있는 가지산-보림사와 더불어 세계 삼보림(三寶林)으로 일컬어지는 천년의 고찰이다. 통일신라 말기인 860년경에 세워진 보림사는 산세가 깊고 물이 맑은 탐진강 상류 가지산 아래 있는데 주변에는 귀한 비자나무가 무성했다. 절 앞으로 흐르는 냇물에는 등이 검고 배가 누리끼리한 큼직한 쏘가리와 어린애 팔뚝만 만큼 자란 향긋한 은어가 많고 고동(다슬기)가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이와 주변 환경이 좋은 보림사를 품고 있는 가지산 자락의 봉덕리에서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죽동과 연결된 암천리라는 유치 분교가 있는 천연요새와 같은 마을이 나온다. 암천리는 6‧25 후 지리산 다음으로 가는 빨치산들의 행정보급 전진기지로 1951년도까지 전라남도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절터가 될 깊은 소(沼)에 살았던 용을 쫓아내려고 도사가 주변사람들에게 눈에 피(안질)가 생기게 하여 그 치료의 방법으로 숯 한 섬과 모래 바지게씩을 용이 사는 소에다 넣게 했다. 계속 숯을 넣고 모래를 부으니 소의 물이 줄어들어 용이 쫓겨 내려가면서 화가 나서 앞을 가리고 있는 산자락을 꼬리로 쳐서 깊게 생긴 용소(龍沼)가 있다. 이 소에서 용이 피를 흘리며 넘어갔다는 피재와 보림사로 들어가는 삼거리에는 안쪽으로 금성리 마을이 있고 소 우측 아래로는 우리 외갓집이 지역의 부호로 동학란을 겪다가 떠난 용문리가 있다.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가 고향이신 아버지는 일본에서 귀국하여 외갓집에 다니러 왔다가 보림사를 구경하시고 나오시다 경치가 좋은 삼거리 여관집을 사들인 바람에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암천리와 봉덕리 앞을 흘러내려 금성리와 용문리 앞을 지나고 다른 한쪽으로는 조양리와 덕산리 앞으로 흘러내려 면소재지 장터 앞에서 합쳐진 탐진강은 금사리와 단산리 앞으로 흐른다.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궁성산 범바위골 성터샘에서 시작한 탐진강 물줄기는 유치면을 양 갈래로 적시면서 부산면 앞들과 장흥읍내을 거쳐 강진군 군동면 삼신리 삼각점에 이르러 강진만으로 들어간다. 근래에는 유치면과 부산면 사이를 막아 장흥다목적댐이 생긴 후 유치면의 낮은 지역은 물에 잠겨 큰 호수가 되어버렸다. 유치면소재지는 조양리로 옮겨가고 인구가 줄어들면서 남은 산간지역이 더 깊숙한 곳이 되어 발길이 닿지 않은 것 같고, 6.25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한 보림사의 역사와 더불어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아픈 흔적들은 곳곳에 묻혀 있다.
이러한 유치면은 산세가 험하고 깊은 골짜기와 분지로 돼있어 40년대 초반까지도 금성리 옆 아흔아홉 골짜기라는 엉골과 보림사 위쪽 깊은 산속에 호랑이와 곰 늑대가 살았다고 한다. 나는 46년부터 살면서 밤에는 호랑이가 나와 사람도 물러간다고 하고 호랑이 불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자주들 었다. 하지만 내 눈으로는 보지 못했는데 여우는 한낮에도 산마루나 고갯길에서 종종 보았고 문씨네 문중산소와 토지를 관리하는 둘째 외삼촌이 은어낚시와 사냥의 명수셨다. 겨울철이나 이른 봄에 사냥개가 발견한 오소리 굴에 마른 풋고추대와 생솔가지로 불을 지펴 연기를 들여보내면 오소리가 연기를 피해 밖으로 나올 때 일차적으로 몽둥이로 타격을 가한 후 사냥개들이 잡았다.
그리고 논밭을 갈아엎어 가을 농사를 망치게 하는 멧돼지는 함정을 파서 빠뜨려 잡거나 여러 겹 가는 철사 줄로 덧을 만들어 잡기도 하고 노루는 빠르지만 사냥개로 잡고 껑은 솔개들도 잡아먹고 작은 외숙은 여름철엔 은어 낚시를 하고 가을에는 멧돼지와 노루 겨울 봄에는 꿩을 무더기로 잡고 특별한 방법으로 오소리사냥을 했다. 그 때마다 우리는 구경은 잘했지만 우리아버지는 소질이 없어서 손수 잡아보지는 못해서 섭섭했다. 이런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동학란 난을 겪고, 6.25전후로는 지역 좌익분자들과 여수14연대 반란군 잔당들까지 모여들면서 좌익들의 빨치산 활동이 더 심했다.
일본에서 나온 지 두어 달 밖에 되지 않았을 때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말이 서투른 형 누나 그리고 나와 두 살 아래 누이동생 우리 사남매는 생활이 답답하고 불편하여 일본으로 다시 갔으면 했다. 특히 철없는 나는 일본에서 먹던 사탕을 사내라고 떼를 쓰고 울면서 졸라대기가 일수였지만, 해가 바뀌어 46년 이른 봄이 되었다. 겨울 못지않은 찬바람이 심하게도 불고 숯을 실려 왔던 목탄차가 내려앉은 목조다리 옆으로 난 도랑 길 언덕을 못 오르고 멈춰선 것을 동네사람들이 밀고 당겨서 겨우 나간 후 날이 저물었다. 인적이 끊기고 호롱불마저 꺼진 적막한 밤중인데 금성리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 집 앞 냇가 길로 누군가 쫒기고 떼를 지어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와 온 가족이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웠다.
일제 때부터 금성리에서 구장으로 행세하는 자그맣고 당당한 체구의 박채동영감과 그의 큰아들이며 유치지서 순경인 우람한 체구의 박노호가 간밤에 들이닥친 괴한들에게 변을 당한 것이다. 가지산에서 내려온 것으로 추측된 십여 명의 괴한들은 동네에서 터주 대감 노릇을 하며 세도를 부리고 사는 박영감을 마당으로 끌어내어 몽둥이로 패고 칼과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 때 옆방에 있던 박순경은 재빠르게 뒷문으로 빠져나 밖으로 튀었는데 임시 경찰인 둘째 아들 박병찬은 미쳐 빠져나가지 못하고 헛간으로 들어가 섯가래를 붙잡고 천정에 납작 붙어있는 통에 화를 면했다. 맨몸으로 마을을 빠져나온 박순경은 그들에게 쫓기면서 우리 집 뒤 냇가 길을 따라 용소 쪽으로 뛰다가 송들 앞 요강沼 못 미쳐서 추격해 온 무리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2. 빨치산과 반란군
한반도에 합법적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이 과도기를 틈타 준동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나름대로 지식이 들었다는 일부좌익분자들이 소위 밤손님으로 빨치산 짓을 하기위해 입산하여 쓸 만한 청년들을 선동 회유를 하다가 납치해 가기시작 했다. 장흥군내에서는 산악지역인 유치면 가지산 일대를 아지트로 밤에 나타나 자기네 맘에 안든 사람을 괴롭히고 해치기 시작했다. 순박한 주민들은 누가 밀고하여 화를 당할까봐 두려워 서로 경계를 하고 산사람들이 이번에는 누구 집에서 이러고저러고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서로 눈치를 보아 밤손님이라고 우대해 불렀다. 금성리에 나타났던 밤손님 빨치산들은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경찰관을 살해하고 주로 우익성향이 짙은 유력인사들을 회유협박하며 납치해갔다.
그 무렵 유치면에는 1922년 송정리에 개교한 유치국민학교(현 초등학교)가 본교로 있고 조양리와 대리 그리고 암천리에 분교가 있었다. 어느 날 밤 본교 교감으로 학교관사에 사는 문여익교감이 밤손님들에게 납치돼 간 사건으로 면내에 큰 파장이 일고 학교가 뒤숭숭해 졌다. 유치면은 외가 집안 문 씨들의 세가 있는 고장이라 면장도 문씨요 암천리 분교장도 먼 외할아버지 벌 되는 분이셨다. 한편 왜정 때부터 순천경찰서 요직에서 유도가 5단이던 외할아버지의 사촌 벌되는 문창호씨가 8.15후 지역좌익의 두목이 되어 입산했다. 문씨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친 조카인 문교감을 찾아와 입산을 몇 번 권유했으나 듣지 않자 어느 날 밤 부하들을 시켜 강제로 끌어갔다.
이때 우리 외가 집안은 동학란 때 용문리을 떠나 장흥읍내에서 가까운 부산면 구룡리 자미부락에서 큰 외숙과 막내 외숙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교토에 사시다 귀국한 작은 외할아버지 댁이 조금씩 떨어져 있었다. 큰 외숙은 강진군과 영암군을 포함해서 장흥군에 있는 재판소에서 유일하게 사법대서소를 하고 계셨고, 암천리 분교장인 먼 외할아버지의 큰아들은 육군 소위였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강동마을 건너 공수평에 사는 둘째고모 댁 장진철 큰형이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있었기에 좌익들에게 입장이 곤란한 형편이었지만 한편 빨치산 활동을 하는 다른 외가 집은 보호막이 되었다.
또 해가 바뀌어 1947년 봄이 되었는데 아버지는 시국이 불안하고 생활대책이 서지 않자 일본으로 되돌아갈려던 길을 막았던 외할아버지를 원망하며 방황하셨다. 여관집도 팔고 엉골 입구 노루목 문씨들의 제각 문간방으로 잠시 옮겨 살면서 아버지께서 공수평 산 아래 있는 밭에다 새집을 짓다가 보림사 절에 다녀오신 후 집터가 좋지 않다고 집짓는 일을 중단해 버렸다. 이후 아버지는 집을 비우고 부산으로 광주로 목포로 돌아다니시고 어머니가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게 되자 외할아버지께서 아버지를 유치면서기로 취직을 시켜주시고 송정리 물가에 있는 강동마을로 이사를 하게 해주셨다.
이무렵 국방경비대로 출발한 여수14연대는 좌익분자인 지창수상사 등 40여명이 주동이 되어 47년 10월 19일 국군장교 20명과 하사관 43명을 살해하고 연대를 장악한 후 여수와 순천 벌교와 광양을 점령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반군을 우선적으로 진압하라고 군에 엄명을 내렸다. 진압작전에 돌입한 국군에게 수적으로 열세한 반란군들은 쫓기고 소멸되면서 살아남은 자들이 회문산과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유치가지산에도 들어왔다. 밤손님들과 합류하여 더 강해진 그들을 더 이상 밤손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반란군이라고 했다. 무기가 열약한 밤손님은 반란군들이 가지고 온 성능 좋은 미제 M1소총을 가지고 한낮에도 전선줄을 끓고 지서를 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식량을 거둬가고 쓸 만한 젊은이들을 회유하다 강제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국방경비대 모병이 있을 때 우리 동네 앞 냇물 건너 공수평에 사는 장진철 고종형님과 전에 면장 지냈던 분의 아들이 국방경비대에 지원해 가 있었다. 그러던 어는 날 고종형님이 사지군복에 멋진 정모를 쓰고 나타났는데 그 시점이 여수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때였다. 고종형님은 반란군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부대를 이탈해 나와 숨어 한동안 지내다가 6‧25가 터지자 육군에 재 입대하여 동부전선 최전방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이마에 총상을 입고 치료를 받은 후 53년 일등중사로 명예 제대하여 여생을 보내고 있다.
3. 산천이 풍성한 고장
또 한해가 가고 48년 봄, 일본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온 여섯 살 위의 형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학년까지 다니다온 네 살 위의 누나가 4학년으로 올라갔다. 나는 1학년에 입학하였는데 학생 수가 많아 한반에 60명씩 2개 반으로, 우리2반 담임선생님은 덧니가 나고 맘씨가 고운 외가 쪽 먼 친척이었다. 말이 서툴고 일본에서 가져온 가방을 매고 다닌다고 우체부체부로 놀림을 당해 학교가기가 싫어 일부러 가방을 길가에 던져버려 잃어버렸다. 또래들처럼 책보를 매고 싶었는데 또 가방을 꺼내주면서 메고 다니라는 통에 여전히 놀림을 당하느라 겨우겨우 억지로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다.
분교가 있는 조양리 쪽에서 경찰관이 또 살해되어 유치지서장과 문보고 면장이 무장한 경찰관들과 3/4톤 스리쿼터를 타고 금정면 상가를 향해 신풍리에서 덤재를 넘다가 반란군의 기습을 받았다. 전원이 살해되고 차량과 함께 시신이 불태워진 끔직한 사건이 대낮에 발생하자 광주에 있던 국군20연대의 2개 중대가 내려와 학교주변에 주둔하면서 토벌작전을 시작했다. 텃세를 부리는 빨치산들은 신풍리 아래 신작로 모퉁이에 매복해 있다가 작전을 마치고 해가 지기 전에 부대로 돌아가는 군인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기습공격을 받아 죽은 군인과 부상한 군인을 소달구지에 실고 내려와 죽은 군인을 강변에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화장을 하는 걸 멀리서 지켜보았다.
유치면은 이웃 부산(夫山)면과 장동(長東)면을 합친 것 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조양리 쪽에서 흘러내는 냇물과 암천리 쪽에서 흘러내는 냇물이 면소재지 장터 앞에서 만나 탐진강 본류가 됐다. 유치면은 장흥군에 속한 일개 면이지만 영암군 금정면, 강진군 옴천면, 화순군 도화면, 그리고 장흥군 부산면, 장평면, 장동면으로 둘러싸였다. 골짜기가 많고 지형이 흐르는 냇물을 따라 크게 세 갈래로 갈리어졌다. 송정리 앞 장터를 중심으로 동쪽은 단산리와 대리를 지나 빈재를 넘어 부산면을 거쳐 읍내에 이르고, 장터에서 서쪽은 학교를 왼쪽으로 끼고 갈모리를 지나 우리가 살았던 강동에서 내을 건너 공수평 노루목 용문리 금성리 삼거리에 이른다. 용소 앞 삼거리에서 빈재을 넘어 장평면으로 빠져 보성과 벌교에 이르고 곧장 보림사 쪽으로 봉덕리를 거쳐 죽동 암천리를 지나면 영암군 금정면과 화순군 도화면에 이른다.
그리고 남쪽으로 길은 장터에서 국도를 따라 조양리를 지나 덤재를 넘으면 영암군 금정면을 거처 나주 영산포에 이르고 다시 광주와 목포로 가는 길이 열린다. 전기시설은 물론 신작로에 자갈만 깔려있던 시절이라 가끔 장작과 숯을 실러 왔다가는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다니고 장흥읍에서 광주까지 가는 버스가 하루에 왕복으로 한번 지나다녔다. 우리가 살았던 금성리 용소 앞 삼거리에서 장평으로 가는 피재에는 차량통행이 전혀 없고 강도가 숨어있다고 하여 사람들도 잘 다니지 않았다. 보림사까지는 소구루마가 다니고 운전석 적재함 한쪽에 보일러 통을 장착하고 숯불을 피우면서 다니는 일제목탄차가 엉골과 일대에서 구어 낸 숯과 장작을 실러 드나들었다.
유년시절은 밤손님 빨치산과 반란군 빨치산들 때문에 위험한 생활을 하면서 피해를 많이 받았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산과 들 냇물과 계곡에 봄이 오면 삐비를 뽑아 벗겨먹고 찔레나무 새순 찔구를 꺽어 먹으면서 약초에 버금가는 취, 고사리, 고비, 더덕, 도라지와 온갖 산나물을 반찬으로 풍성하게 먹었다. 보리를 베고 모를 내는 초여름부터는 산딸기, 보리딸기, 먹딸기를 실 컨 따먹고 가을에는 참나무열매 상수리와 상수리보다 납작한 떡갈나무열매와 도토리는 지천이라 거들어보지도 않았다. 주로 산밤과 산감을 따고 어름 달래 개금 야생복숭아를 입맛에 당기는 데로 골라서 간식거리로 따먹으면서 겨울에서 봄까지는 꿩 노루와 멧돼지를 사냥해 포식을 했었다.
여름에는 약초가 많은 산 계곡물 바위틈에서 뱀장어와 메기를 냇물에서 는 크게 자란 은어를 잡아 조림을 해먹고 자갈 모래밭에 반쯤 묻혀 사는 모래무지를 발로 밟아서 잡아 제자리에서 날것으로 먹으면 고소하고 향긋한 맛이 났다. 징거미를 손쉽게 잡으면서 냇물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누리끼리한 고동(다슬기)을 건져다가 된장국에 삶아 속살을 탱자나무 가시로 맛있게 빼먹으면 그 국물에 밥을 말아주시던 어머니의 손길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2010년 5월 18일)
첫댓글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