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청261차 강의[1].hwp
현(玄)의 시학(1) 玄의 사유와 미학적 함의
“노래하지 않고,/노래할 것을 더 생각하는 빛./눈을 뜨지 않고/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 빛.//꽃들의 이름을 일일이 묻지 않고/꽃마다 품안에 받아들이는 빛.//사랑하기보다 사랑을 간직하며, 허물을 묻지 않고/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모든 빛과 빛들이 반짝이다 지치면,/숨기어 편히 쉬게 하는 빛.//그러나 붉음보다도 더 붉고/아픔보다도 더 아픈,/빛을 넘어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
-김현승, 「검은 빛」 전문
1. 玄의 개념과 특징 :『道德經』,「鸞郞碑序」
1.1. 玄의 사전적 풀이를 보면, 검다/검은빛, 적흑색/붉은 빛을 띤 검은 빛, 하늘빛. 아득히 멂, 깊다/깊이 숨음, 고요하다, 통(通)하다, 북방(北方)/북향(北向), 음력 9월의 별칭, 신묘(神妙)하다/불가사의함, 현손(玄孫), 도(道)/천지 만물의 근원, 이치의 미묘한 것, 마음, 빛나다, 현기증이 나다 등 실로 다양하다. 우석영의『낱말의 우주』에서 또한 玄은 단순히‘검다’는 뜻만이 아니라, 그윽한 것, 먼 것, 고요한 것, 신묘한 것, 도(道)와 마음, 혹은 갓난아이처럼 부드럽고 연약하나 그 존재의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諸橋轍次의『大漢和辭典』에 의하면, 玄은 붉은 색이 들어간 검은 색, 혹은 흑색, 하늘의 색, 아득함, 유원함, 깊고 고요하며 불가사의함, 神 ․ 神 ․ 仙 ․ 理의 이름을 말하며, 형태 없고 소리 없고 시작과 끝이 없으며, 공간과 시간을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天地萬象의 근원인 道의 이름을 일컫는다. 도덕경 제1장을 보기로 하자.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老子,『道德經』1장)
이 경우‘玄’이라는 단어는 주로 도가철학 계통에서 쓰는 말이며, 도덕경의 玄은 道를 묘사하는 속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道란 만물이 어둠에서 나와 빛으로 가고 다시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이치를 말한다. 이 빛과 어둠의 원리는 삼라만상을 이루면서 영원히 상호작용하고 다양하게 결합한다. 그런 점에서‘玄之又玄’은 오묘하고 또 오묘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道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함을 찬탄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듯 노자에서 비롯된 玄의 의미는 단순히 문자적 기호나 기표와는 유다른, 하나의 사유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하여 玄을‘검다’,‘가물하다’,‘현묘하다’는 식의 어휘적 개념보다는, 하나의 철학적 이미지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玄의 사유 방법론을 통해 추구되는 대상은 존재 원리로서의 道이며, 도에 이르기 위한 존재의 행위 방법론은 無爲고, 도의 존재 형태의 논리적 토대는 自然이다. 玄은 그 텅 빈 중심에 있다. 道는 이름 지어지기 이전의 존재이며 玄은 그‘이미지’다. 그런가하면, 원효의『본업경소(本業經疏)』에는
無非門故 事事皆爲入玄之門 문 아닌 것이 없기에 일마다 모두 현묘함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無不道故 處處咸是歸源之路 도 아닌 것이 없기에 곳곳이 모두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라 하여, 처음과 끝(始終)으로서의 玄을 말하고 있다. 入玄의‘玄’, 歸源의‘源’은 들어가고 돌아가는 목표에 다름아니다. 玄은‘玄之又玄’의 약자이며,‘三空之海’(금강삼매경론 대의)를 말한다. 이밖에 玄은 인간의 욕망(론), 과정과 관련해 해석되기도 한다. 예의“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에서 보듯이, 노자는 도덕경 제1장에서 인간의‘欲’을 문제삼고 있다. 그리고 욕망의 유/무는 결코 상반된 성질의 것은 아니다. 다음 두 편의 글은 이를 뒷받침한다.
유와 무는 동근원적(同根源的)인 것이어서 그 이름만 달리할 뿐이다. 하여 유와 무는 결코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현(玄)하고 또 현(玄)한 것은 온갖 미묘한 작용이 일어나는 문과 같아서, 여기엔 끊임없는 과정과 생성만이 수반될 따름이다.
‘玄之又玄’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그 밝아진 것이 다시 어둠 속으로, 그리하여 어둠에서 총체적인 밝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노자』에서의‘玄’을 不可思議한 것, 神秘莫測한 것, 幽味不可測知한 것, 玄遠幽深한 것, 심지어는 도와 동일한 존재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 ‘드러남과 사라짐의 공존’, 그리고‘사라짐과 드러남의 공존’,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온전한 사라짐에 의한 온전한 드러남을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玄之又玄, 衆妙之門”의 의미이다.
1.2. 한편, 최치원의「鸞郞碑序」에 나타난‘玄(妙)’의 경우는 또 어떤가? 우선 원문을 보기로 하자.
(원문)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曰 風流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 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삼국사기』권4,「신라본기 진흥왕 37년」조)
(국역)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말하기를“우리나라에는 현묘한 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 가르침을 설치한 근원은 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또한 그들은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魯司寇(공자)의 敎旨이며, 또한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 아니하면서 일을 실행하는 것은 周柱史(노자)의 宗旨였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행실만 신봉하여 행하는 것은 竺乾太子(석가)의 敎化이다.
내용은 신라의 화랑도인 풍류도가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인데, 화랑도를‘玄妙의 道’,‘風流’라 일컫고, 화랑의 역사책을〈仙史〉라 하여‘仙’과 관련시킨 것이 특징적이다. 여기서 '현묘'나 '선'은 비록 老莊的인 용어로 표현된 것이지만, 중국의 도교사상이 들어오기 이전 신라의 고유한 무속(巫俗)과 관련된 화랑의 풍속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묘의 도라는 것은“國有玄妙之道”라 하여 본래 일 개인의 미덕과 가치를 함의한다기보다는, 국가의 기강과 통일을 지향하는 이념이자 실천적인 (풍류)도를 앞세운다. 하여 이런 풍류도를 두고 위당 정인보 같은 이는‘풍류’는 원래‘나라’라는 뜻으로, 풍류도가 바로‘국학’이고‘국교(國敎)’라고 지적하면서,「난랑비서」는 단군 조선의 최고 이념인 홍인인간을 잘 설명하는 글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玄-妙’의 이미지에는 보다 깊은 뜻이 내재해 있다. 즉〈玄〉은‘거물 현’자로 먼동이 트는 모습, 주위 어두움이 깔린 중에 빛이 나는 모습, 바탕에 음을 깔고서 양이 시작되는 모습을 말하며,〈妙〉는 낮이 밤으로 변화될 때 해가 질 무렵. 훤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것으로 낮이 밤으로 에너지가 변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양도 음도 아닌 것이 妙다. 이와 관련해“사물들이 보이게끔 만드는 빛은 동시에 많은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어둠과 그늘이 없었다면 창조의 가장 고귀한 부분이 가려진 채로 남아 있었을 것” 이라는 토마스 브라운卿의 말 또한 그런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2. 玄의 사유와 미학적 함의
2.1. 우리나라 전통 문화는 물론, 문학 예술 작품에는 유독 검정색과 흰색이 많이 동원된다. 하여 한국의 새로 우리는 서슴없이 까치를 지목한다.“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 민족은 까치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즐거워한다. 문제는 까치가 한국의 새이자 한국의 아름다움을 표상하는 데에는‘까치’라는 단순 사물에 있지 않고,‘(검은) 색과 빛’에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미감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검은 색, 즉 玄에서 비롯한다. 玄은 색이자 미학적 개념이다. 전통미학에서 玄은 천자문의‘天地玄黃’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玄은 검다기보다는 위(上)에 있는 그윽한 것이며 깊은 것이다. 이 경우 하늘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땅도 마찬가지다.“동양에서 깊은 것들은 모두 어둡다. 현은 땅의 색이기도 하면서 사유의 깊은 지경을 나타낸다. 아름다움에는 우울과 신비가 섞여 있다. 그것은 깊은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둡다.”
한편, 玄과 관련한 미적 범주로서의‘흰 그늘’이 있다. 이는 흰 빛이 여러 색채의 빛으로 펼쳐져 동시성이 발휘되는 순간, 신명이 체험되는 것이다.‘흰 그늘’은 그 펼쳐진 빛이 다시 수렴된 상태다. 이렇듯 한과 씻김, 신명과 연관성을 지니는 흰 그늘은 빛이면서 어둠이고 어둠이면서 빛이 되는 셈이다. 동양의 풍경화를 보면 빛과 어둠, 어둠과 빛만이 존재한다. 눈을 돌릴 때마다 빛과 어둠은 다양한 음영을 이룬다. 흰 그늘과 관련한 일본의 미적 개념으로‘유겡(幽玄)’이 있다. 이는 애매하고 어둡다는 뜻으로, 표현의 어슴푸레함과 詩心의 깊이를 지적하는 말, 혹은 절반이 드러나거나 암시된 미를 말한다. 유겡의 본질은 미와 고상함이며, 궁극적으로 예술가가 들어가야 할 영역이다.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전적으로 정신적이다. 그런가하면, 유겡은 객관적이다. 유겡을 정관한다는 것은 예술작품의 본질적인 생명을 스스로, 그리고 그 자신으로서 감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사진작가 이갑철의「해탈을 꿈꾸며-2」(사진2)라든가, 김수철 회화(그림1)의 특징 또한 玄의 범주에 포함된다. 김수철의 화면은 온통 검은데, 그 검은 빛은 흑연(黑鉛, graphite)에서 비롯된다. 흑연은 지구가 응결한 가장“순수한 어둠의 뼈”다.
(사진1) 료안지의 석정. 깊이 응시하면 할수록 수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이곳은 일본의 3대 정원 중 하나. 모래와 15개의 돌로 이루어져 禪의 세계를 표현한다.
이 경우‘玄=(순수한) 어둠의 뼈’의 이미지는 하이데거의 용어로는“밝힘의 현현(顯現, Epiphany)”, 즉‘어두운 밝힘’에 해당하며, 릴케의 시 에서는‘세계내면공간(Weltinnenraum)’으로 통한다. 그것은 시가 나타나는 공간이며, 더욱더 모험적인 자들이 더욱더 참답게 말하는 말함이다. 그런즉 노래는 현존재(Gesang ist Dasein)에 다름아니다.
(사진2) 이갑철,「해탈을 꿈꾸며-2」, 해인사, 1993.
(그림1) 김수철,「GNOSIS-天蓮華, 흑연, 그을음」, on panel 2004. (아래 사이트 참조)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ediation7&logNo=40114532875
2.2. 마가레테 브룬스의 경우『색의 수수께끼』에서 검은 색과 빛의 의미에 대해 새로움과 미학적 깊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검정은 하나의 색인가 아니면 반대로 색채 세계의 한 구멍 즉 허무인가?
② 검정은 본래 존재하는 게 아니라“구멍”, 틈 또는 텅빈 사이 공간에 불과하다. 파랑이 무한한 공간의 높이와 깊이 그리고 거리라면, 검정은 높을 수도 깊을 수도 없는 허무 공간이다.
③ 빛이 흰색이 아니듯 밤도 검정색이 아니다. 우리가 가장 깊은 검은 색으로 체험하는 것은 우리 내부에 숨어 있다.
④ 검정과 흰색은 피안의 색이다.
⑤ 검정은 공간도 공허도 아니고 무인 동시에 모든 것이다.
⑥ 가장 검은 검정색은 가장 모순적일 뿐 아니라 동시에 모든 색들 가운데 가장 풍부하고 가장 심오한 것. (......) 고흐는 회청색과 붉은 갈색을 섞었고 그것을 가장 심오하고 가장 아름다운 검정색으로 간주.
⑦ 우리가 검은 표면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표면이 비본래적인 검정색이기 때문에 즉 역설적으로 아주 어두운 흰색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