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월의 노래
2020년의 봄.
우리에게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세상이 도래했다.
코로나19.
중국 우한에서 비롯된 바이러스가 세계를 펜데믹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나라도 잠잠했던
상황이 8월 중순‘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확산일로에 있어 정부,
방역당국이 긴장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발효 중이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많이 바뀌었고, 앞으로 얼마나 더 변화될
것인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앞으로 일주일이 고비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행동반경이 줄어들었고, 모임이나 친구나 가족끼리의 음식점
모임도 대폭 저지당하는 상황은 점차 그 정도가 심해지지 않을까 우리
모두가 걱정을 안고 살고 있다.
어서 빨리 종식에 가까운 상황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며,
진인 조은산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린 시무 7조를 개선하는 정치로
변하여 국민이 희망을 갖고 사는 사회 분위기로 바뀌어 지길 두 손
모아 빌어본다. 민주당의 새 대표가 된 이낙연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볼 수 있을까....?
오늘이 2020년 9월 1일.
가을로 접어들었다는 의미를 줄 수 있는 9월의 첫날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우리들이 느끼는 정서나 생활도
달라지는 것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사람들보다 한결 행복한 생활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다.
이 글의 제목으로 ‘구월의 노래’라고 붙인 것은 그 노랫말 속에서 요즘 어지러운 우리들의 상황에 조금이나마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를 원하는 내
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 ... 당신 생각 뿐!
얼마 전 읽은 책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샐리 티스데일)와
‘죽음의 수용소’(빅토르 E. 프랭클)를 읽고 나서 생각한 것들을
일기 형식으로 또는 친구들과 한 자리에서 좌담하는 것처럼
쓰려고 한다. 전에 썼던 글 속에 내가 간간히 썼던 - 삶, 행복,
인간관계, 죽음... - 것들을 조금은 심도 있게 쓴다고 생각하면 맞는
말일 것이다. 두 작품 속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곧 내가
친구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비롯해 네 곳의 수용소를 거치면서
인간으로써 한계에 부딪히는 극한 상황 속에서 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을 상실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상태와 인간의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지를 보여주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프랭클은 정신과 의사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저자
프랭클은 우리에게 강조한다.
삶이 무엇이 길래?!
나치의 치하 강제수용소 네 곳을 거치면서 치열하게 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인가! 무자비와 폭력, 인간의 한계를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한
극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OECD 국가 중
자살 1위를 랭크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 오히려 자살하는 횟수가 적은 것은
그만큼 삶의 의지가 확실하였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화내지마.
절망의 날 그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꼭 올 거야‘
푸쉬킨 시의 한 부분이다.
This too, shall pass Away !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가 어려울 때 많이도 마음속으로 외웠던
시의 제목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이 과연
언제인가는 지나갈 것일까...? 아니면 더욱 어려운 환경으로 바뀔
것인가....?
프랭크는 강제수용소에서 겪는 극한 상황 속에서 “정신력을
회복시키려면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명언을 남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다.“
지금으로써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필이면 생뚱맞게 이런 시기에 삶, 행복... 이런 내용을 다루는
글을 써야만 하는 것일까...? 행복하지 않으니 행복을 말할 수 있고,
그렇게 살고 싶으니까 죽음을 말하는 것은 역설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행복한 삶이냐 하는 연구는 기원전의
철학자, 심리학자들부터 지금 현재에 이르기까지 현재진행 중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풀리지 않는 숙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률적으로
또는 포괄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진
풀리지 않는 과제인 것이 분명하다.
사람의 삶, 행복을 간단한 말로 정의 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한 마디로 표현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것이리라. 많은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불행한 사람들, 겨우 살만한 형편으로 행복한 가정을
주위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세계적인 부자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성공을 말하다’라는 좌담에서...
‘진정한 성공은 무엇입니까?’란 어느 기자의 질문에.
“그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속에는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 후 많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고 우리가 마음 속 깊이 새겨야할 명언이라 생각한다.
쉬운 것 같지만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함수가 그 속에 있다.
그 함수를 푸는 것이 누구나에게 과제이기도 하다.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행복은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학자들 마다, 또는 필부필부라 할지라도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은 왜일까...?
먼저 얘기한 것처럼 사람마다 사는 방법과 생각이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 정의도 다르다 할 수 있겠다. 지금 지구상에는
80억을 웃도는 인구가 살고 있다. 삶과 행복의 정의도 그 숫자만큼이나
많다고 보면 될 것이다.
삶의 의미도 행복의 기준도 친구들과 내가 다름은 당연한 것이다.
부부는 다름을 인정하면서 그 차이를 좁히는 노력이 있을 때 행복으로
가는 길이 가까울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이웃과, 친구들과, 형제들과, 부부와 자식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함으로써 행복으로 가는 길은 가까울 수도
멀 수도 있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렇게 노력하는 인간의 생활이 곧 그들의 삶이 아닐까. 때문에 행복의
정의도 삶의 정의만큼이나 많은 것은 당연하다.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다.“ 라고 한
프랑스 빈민의 아버지 피에르 신부의 말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를 말해준다.
죽음!
인생을 여행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탄생이 여행의 출발이라면 죽음은 그 여행의 종착지라는 이론이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는 것이 인생의 실존적인
여행이라면 여행을 마치고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여행이
죽음인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여행 중 하차하는 지점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친구들이나 친척들 중에 병이나 사고로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이 곧 중간에 하차하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일찍 하차한
친구들이 있어 안타깝다.
사람들은 좋은 죽음을 위해 끊임없이 운동을 하거나 건강은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시쳇말로 ‘꼴깍’하고 죽기 위함이다. 9988 234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라 할 수 있는 바람직한
죽음이지만 그렇게 바람대로 될 수 없는 것.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라는 책을 통해 많은 것들을 느꼈고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타인들의 죽음에
대해는 말할 수는 있어도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강 건너 등불을
보듯 한다. 죽음은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그 책에서 다룬 것들은 죽음에 가까워 온 사람과 그를 보살피는
가족이나 호스피스, 의사들에게 이르는 이야기들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본인의 생각이나 마음가짐,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행동거지...
가급적 편안한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방법은 한 마디로 말할 수 없고
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대응해야함이다.
지구상의 만물이 탄생과 생장을 거쳐 죽음으로 이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이고, 인간도 그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것 또한
자연스러움이다. 선조들의 삶이나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바로 위 세대인
부모님들의 삶을 이어받은 우리들 세대가 죽음을 논한다는 것 또한
자연스러워야 함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죽음을 막아주던 ‘방패’가 사라졌다고 말한
카나다 출신 서명원(예수회)신부.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죽음의 벼랑 끝에 서 있게 됐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해도 해결이라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자신이 죽어봐야 체험할 수 있지, 간접적으로 남의
죽음을 목격한 걸로는 알 수 없다는 것.
‘100세 시대’라 해도 1953년생인 자신은 인생의 3분의 2는 지나가고
있다고 말한다.(오늘 조선일보). 물론 개인적인 건강으로 인한 수명의
장단은 있을 수 있지만, 필연적인 죽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것이 곧 생물학적 죽음이다. 종교적 입장에서 말하는 영적인 존재는
별개로 생각하여 더 이상 논하고 싶은 대목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먼 사람들의 죽음은 말할지언정 바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려들지 않는 것은 어인일일까?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으로 안내한다.“고 한 말은
레오나르 다빈치가 1500년 그 옛날에 한 말이다.
잘 사는 것이야말로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일까...?
내 주변에는 그 방법을 알고 잘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 나도 더불어
행복하다.
오래 전부터 회자되고 있는 행복에 관한 말 중에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도 대단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단어가 아닌가 한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행복해 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행복은 찾아오는 게 아니고 만들어야 한다는 이론에 접근해 생각하면
이를 위해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의 순서도 정해질 수 있다.
지금 불행하다면 무엇을 제거해야 할 것이며, 행복해지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또 무엇인가? 알면서 하지 않는다는 것은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가 말하는 행복할 수 있는 행동령이
있다. 명예도 지위도 권력도 돈도 아니다. 긍정적인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돈으로 무엇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그것으로 경험을 사고
시간을 사고, 여행을 하는 일이야말로 바고 ‘소확행’을 실천할 수 있는
일이라 말하고 있다. 죽을 때는 지폐 한 장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답이 나온다. 자손에게 물려주는
자산 중에 최고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전수해 주는 것이라 한다.
작금 이 나라 부모들이 꼭 반성해야할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삶의 정의나, 행복의 정의가 학자들마다 또는 사람들마다 다르게
정의하는 것은 그만큼 그것이 주관적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리라.
여기서 삶에 대한 정의를 예를 들어 몇 가지 써보기로 한다.
데이비스 부룩스 :
“삶은 결함 있는 자아와 끊임없이 싸우며 성장하는 과정이다.”
니체 : “삶이란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과 같아서,
건너가는 것도, 돌아서는 것도 힘들고, 멈춰 서 있는 것도
힘들다.“
삶은 어찌 보면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양한 경험이야말로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내 경우에 위의 세 가지 모두가 해당 된 삶이 곧 나의 삶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많이 힘들었지만 잘 견디어 지금에
이르러 ‘소확행’을 위해 작은 꿈을 가지고 열심히 운동하고 독서하며,
어렵기도 하고 향상은 더디지만 성악공부를 지속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하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떠는 일을 못해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편한 마음을 갖고 기다려 본다.
“살아남는 자는 가장 강한 자도,
가장 현명한 자도 아닌 변하는 자다.“
찰스 다윈이 한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시기이다.
모두 변화에 달인이 되어 행복을 쟁취하기를 바라며...
2020년 9월 1일. 하남에서 김상연
***
구월의 노래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지는 소리
꽃잎이 피는 소리
가로수에 나뭇잎은 무성해도
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이 지고
쓸쓸한 거리를 지나노라면
어디선가 부르는 듯 당신 생각뿐.
첫댓글 두서없이 쓰다보니 글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함을 느끼게 됩니다.
읽는 친구들의 양해를 구하오니 넓은 마음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타자를 치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도록 자주 점검을 해야할 텐데...
그냥 내리 쓰다보니 이런 결과를 ....
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대충 담은 것 같아 다행인데...
쓸 말은 더 있는데 그냥 마무리 같지 않게 마무리 했습니다.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다.라고 말한 피에르 신무의 말.
을 우리는 마음 깊이 새겨야할 것이다.
"구데기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
동물과 인간, 거지와 와이 모두 똑같다.
거기서 당신은 진정한 평등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평등을 얻는다." - 프랑스의 위대한 곤충학자. 파브르
사람들은 파브르의 이 말을 얼마나 이해하고
스스로를 어떤 위치에 놓을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스 호메로스의 그 유명한 장편 서사시 <알리아스>의 이야기를
'트로이'라는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포로로 잡혀온
트로이의 공주 브르쉐이스에게 인간의 매력에 대해 들려준다.
"네게 아무도 모르는 비밀 한 가지를 말해 줄까?
신은 인간을 질투해, 왜냐하면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거든."
그의 말 속에는 인간과 인생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다. 인간은 죽을 운명이라는 것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영원히 사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는 않다. 영원히 사는 것은 현재의 가치를 무너뜨린다는 것.
영원한 삶에게 지금은 소중하지 않다. 당연히 삶 전체도 소중하지 않다.
언젠가 죽을 운명이므로 지금이 소중하고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다.
삶은경험이다. 우리가 사는 이야기의 연속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다.
그래서 삶은 스토리라고 말한다. 부부와 또는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험속에 만들어지는 스토리가 바로 내 삶이고 우리들의 삶이다.
이왕이면 근사하고 멋진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는 지혜과 용기와 실천이
필요하다. 코로나 핑게만 대기에는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우여곡절, 파란만장, 희로애락.... 우리들 인행을 한마디로 말하는 단어들이다.
평탄한 인생과 파란만장한 싸인곡선이 되풀이된 인생 중에 어떤 삶이 잘 살았다고 할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이야기 거리가 많은 인생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이야기 거리란 다양한 경험을
주제로 한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 삶을 살아왔고 그에 따른 경험담은 그 사람의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에겐 다양한 이야기 거리가 없고 재미도 없다.
힘든 과정을 거친 사람들의 아야기는 스릴과 맛이 담겨 있어 자꾸 들어도 실증이 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여곡절도 많았고 파란만장의 싸인곡선을 많이도 오르내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힘들었던 모든 일들이 승화되어 나만의 자산으로 쌓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어려운 과정이 곧 충만한 삶을 말해준다고 감히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다.
어느 누가 '당신의 삶이 행복하였느냐?'고 묻느다면.... 나는 그리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대답할 수 있다. 지금도 그런 삶을 살고 있어 그것이 행복이라 말할 수 있다.
일상에서 무언가에 빠져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다면 바로 그런 삶이 충만한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