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마태오 6,19-23)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also will your heart be.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자신의 출신과 신분을 드러내고 선교를 하면서 경험한 온갖 위험과 고통을 나열한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자신을 자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코린토에서 활동하는 ‘거짓 사도들’을 신자들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교회를 그들에게서 보호하려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고 가르치신다. 하늘에 쌓는 보물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정의, 사랑, 진실, 선행 등과 같은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서 ‘폼페이의 최후’라는 이름으로 고대 도시의 유물을 전시한 적이 있습니다. 폼페이는 79년에 활화산 베수비오 산의 폭발로 화산재가 덮쳐 인간의 역사에서 사라진 곳입니다. 한순간에 멈추어 버린 도시가 타임캡슐처럼 우리 시대에 이르러 발굴되어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닥친 화산재로 식사를 하다가 최후를 맞은 가족도 있고, 아기를 감싸 안고 죽음을 맞이한 여인의 모습도 보입니다. 생생한 당시 모습들 가운데 양손에 보석을 한 움큼 움켜쥐고 그대로 화산재를 쓰고 굳은 사람의 모습이 특별히 눈에 띕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재물을 놓지 못하고 움켜쥔 미련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면 어떨지요? 그리고 죽음 앞에서 자신은 무엇을 움켜잡고 싶은지요? 자신이 집착하며 살던 재물도 사람도 아무것도 죽음과 함께 데려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살아왔던 자신의 한 생애만이 오로지 내 것이 되어 하느님께 안고 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온 시간들이 내 인생의 보물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살고 있는 하루하루가 바로 우리 인생의 보물인 것입니다. 비신자들마저도 죽음의 순간을 마주하여 가장 후회하는 것이 ‘좀 더 사람들에게 베풀고 살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며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탐욕과 허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사는 동안 어느새 생의 마지막 자리에 와 닿은 것입니다. 폼페이 최후의 어느 모습처럼, 한 움큼의 보석만을 움켜쥐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보물은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과 함께 0(zero)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자신이 거룩하고 아름답게 만든 시간만이 영원한 나의 것이 됩니다. 그 시간이라는 보물은 움켜잡아서 나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내어 줄 때 나의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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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적 인간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재물을 섬길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을 섬기자니 눈앞의 재물이 탐나고, 재물을 섬기자니 양심이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하느님보다는 재물을 선택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재물은 눈앞에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땅에다 쌓아 두지 말고, 하느님과 재물 가운데 양자택일하여 하느님만 주인으로 섬길 것을 명령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바로 그 가치관이 각 사람의 존재 방식, 생활 방식과 인생관을 결정하지요. 그렇다면 지금 나 자신에게 절대적인 가치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입니까? 재물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나눔과 섬김과 형제애를 발휘하시고, 정의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고 살리십니다. 그러나 재산을 축적하는 일에 눈이 멀면 어떤 형태나 경로로든지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착취하거나 노예화하고, 또 더러는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렇게 얻어 낸 재산은 결국 우리의 인생이 다하는 날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따름입니다. ☆☆☆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늘에 쌓는 보물’은 무엇입니까? 공로입니다. 주님을 위해 애쓴 일들입니다. 사람들은 못 봐도 주님께서는 보시는 일입니다. 참고 인내하며 절제했던 것들이지요. 사람을 의식하고 일하면 피곤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 교회 일을 하면 더욱 피곤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일하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교회 일을 하면 기쁨이 생깁니다. 하느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쌓는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맑은 눈은 그 속에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하늘이 주는 기쁨입니다. 하늘의 보화가 땅의 기쁨으로 바뀐 것이지요. 어린이는 눈이 맑습니다. 부모의 사랑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인 우리도 어린이처럼 살면 맑은 눈이 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도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눈은 맑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보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보십니다. 화려한 겉모습을 뚫고 속내를 보십니다. 세상 편견을 넘어 참모습을 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눈빛을 닮아야겠습니다. 그분처럼 보기 시작하면 그런 눈빛이 됩니다.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눈빛이 됩니다. 두려움을 주는 눈빛은 주님을 닮은 눈빛이 아닙니다.
☆☆☆ 다이아몬드가 가장 많이 매장되어 있는 땅은 아프리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초 세계 각지의 많은 사람이 한탕을 노리며 그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벼락부자의 꿈을 꾸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결코 만만한 대륙이 아니었습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장애물 앞에 많은 사람이 죽어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몇몇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어린이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온 이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현존하는 가장 큰 다이아몬드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어마어마한 돈을 제시하며 그것을 구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하여 가지고 온 이들은 팔지 않았습니다. 숱한 동료들의 삶이 서려 있는 보석이었기에 돈과 바꿀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그 다이아몬드를 나라에 기증하였고, 그래서 지금까지 영국의 박물관에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벼락부자의 꿈을 안고 험난한 땅을 찾았던 그들이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깨달은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 무엇이겠는지 우리 각자 묵상해 봅시다.
어제 오후 잠깐의 시간이 있어 텔레비전을 켜게 되었습니다. 마침 전에 한참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재방송되고 있었지요. 잘 보지 않는 드라마이지만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이 드라마를 좋아했을까 싶어 잠시 그대로 보았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 애틋한 사랑이 나오더군요. 아마도 이 드라마의 내용에 동화되면서 그러한 사랑을 그리고 그러한 행복을 자신 역시 누리고 싶다는 바램 때문에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빠진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드라마 속의 사랑이 내 사랑보다 결코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내 사랑이 더 크고 더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은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또한 자신의 행복은 아주 작은 행복인 것처럼 오해하기도 합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속담처럼 우리들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 안에서의 사랑과 행복을 더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로 내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만 큰 사랑이 그리고 아름다운 행복이 존재한다는 오해와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지를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
내가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곳에 내 마음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내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내 마음 역시도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 안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내 진정한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내 마음 역시도 주님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행복도 마찬가지이지요. 내가 아닌 다른 곳에만 사랑과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면, 내 마음 안에 사랑과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 사랑과 행복이 있다고 확신하면, 언제나 내 마음 안에 사랑과 행복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 안에서 보물을 찾다보면 내 안에 사랑과 행복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 안에서 만족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하나를 얻게 되면 또 다른 하나를 얻고 싶은 욕심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에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보물을 찾다보면 주님의 사랑을 익히게 되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큰 행복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보물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주님 안에서 그 보물을 발견하도록 하십시오. 진정한 행복을 위해……. 준 것은 기억하지 않고 받은 것은 잊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엘리자베스 비베스코).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양승국신부-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 어린 시절, 형과 함께 강가로 놀러갔을 때의 일입니다. 좀 더 좋은 낚시 포인트를 찾아 물을 건너다가 그만 급류에 휩쓸려버리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한 손에는 이것저것 들고 있었는데, 무의식중에 그것들이 떠내려가지 않게 꼭 쥐고 있으니, 몸은 더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꼴까닥 꼴까닥 물을 몇 번 먹고 나니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 시작하며 이게 죽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겨우 겨우 물속에서 자라난 나뭇가지 하나를 붙들게 되었는데, 마음을 진정시키고, 손에 든 것 다 버리고 가까스로 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 생각하면 정신이 다 아찔해집니다. 하느님께서 평생 3번 정도는 기회를 주신다는 데, 그때 한번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한 번은 모험심 강한 형제들과 어설픈 뗏목 하나를 만들어 타고 바다로 나갔던 적이 있습니다. 마침 썰물 때라 바다를 향해 잘도 나갔습니다. 먼 바다로 나오니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와도 너무 멀리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빨리 돌아가자며 노 비슷한 것을 저었지만, 워낙 썰물의 흐름이 심해 전혀 진척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바다 위에 떠서 죽을 고생을 하다 겨우 지나가던 어선의 도움으로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모험 같은 것은 절대로 안해야겠다, 남들이 안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결심 을 했습니다. 이런 들추고 싶지 않은 기억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 소개되고 있는 바오로 사도의 ‘고난의 여행길’을 눈여겨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세계여행을 몇 차례나 하게 됩니다. 당시 교통수단이라는 것이 변변치 않았습니다. 주로 도보여행이었습니다. 재수가 좋으면 마차를 얻어 탔을 것입니다. 너무 먼 거리는 배로 여행을 했는데, 안정성이 별로 보장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목선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오로 사도의 회상처럼 바다를 건너다가 파선되는 경험을 3번이나 했습니다. 겨우 나무 조각 하나를 붙잡고 하루 온종일 바다 위에 떠있기도 했습니다. 구조를 기다리는 그 순간의 두려움과 고통은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옥됩니다. 투옥된다는 것,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 자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제약을 받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갇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매도 엄청 맞았습니다. 유다인들에게 39대씩 다섯 차례나 맞았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사용한 매가 회초리, 눈금자는 아니었겠지요. 한 대 맞으면 신음이 자동으로 새어나올 정도의 모진 매였습니다. 그 매 몇 대 맞으면 보통 사람들 평생 후유증에 시달릴 것입니다. 그런 매를 바오로 사도는 195대난 맞은 것입니다. 몇 대 맞았냐 하는 것보다 누군가로부터 이유도 없이 폭력을 당한다는 것 얼마나 치욕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바오로 사도의 생애, 외적, 인간적인 눈으로 보니 참으로 혹독하고도 험난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스스로 나열하고 있는 ‘고난의 여정’을 하나하나 챙겨 나가보니, 정말 눈물이 다 날 정도로 힘든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는 그 모든 고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고생이었으므로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오히려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너무나 끔찍해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사건들이었지만 스승 예수님으로 인한 사건들이었기에 바오로 사도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여정도 돌아보면 결코 순탄치만은 않겠지요. 다들 소설로 쓰면 몇 권은 될 스토리들을 갖고 계시겠지요. 때로 도무지 수용하기 힘든 사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사건, 정말 이해하기 힘든 사연들도 겪으셨겠지요. 그래서 때로 하느님을 원망도 하셨겠지요. 그리고 지금도 힘겨워하고 계시겠지요. 이런 우리 모두에게 바오로 사도의 태도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는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통을 겪을수록 더 강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통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 ‘십자가에 대한 가치부여 작업’이 바오로 사도의 생애 안에 이미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 그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연결시키려는 노력,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가 다가올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참 사도로 거듭나는 노력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시력 -안승태 신부-
인간이 생각할 수 있음은 눈을 통하여 무엇인가 외부의 세계를 접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게 창조하신 이 세상에 인간의 나약함을 통해 생겨난 아름답지 못한 어둠의 모습도 함께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너무 밝은 하느님과 그분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곳을 향하기보다 인간적이라고 생각되는 어둠과 죄와 연관된 곳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 익숙해지면 밝은 빛을 오히려 두려워하고 피하게 되듯이 우리의 영혼도 자주 바라보고 머무르게 되는 곳에 익숙해질 것입니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우리는 영혼과 육체 안에서 분열을 체험합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로마 7,22-23)라고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는 내적이고 영적인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시력은 우리가 청해야 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인간 안에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져 있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영이 부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빛이신 하느님 안에서만 참행복과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적인 눈을 넘어서서 영적인 눈이 갈망하는 주님과 주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움에 우리의 마음을 둘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쌓는 보물 - 이자희수녀-
하늘나라에 쌓는 보물은 사랑 실천입니다. 남을 도와줄 때는 소리 없이 티 내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도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나약한 사람인지라 실패를 거듭합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후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왜냐면 티 내기를 좋아하고 후원받는 아이가 받았는지를 확인하고 때로는 큰소리까지 오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고 대개 1년 반 정도로 끝이 납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때나 후원을 중단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의 변덕에 저도 지쳤습니다. 언젠가 성숙한 사람이 되면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로 청했습니다. 그 후원자가 소리 없이 가난한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그는 불교신자인데도 가톨릭 수도자인 제가 추천해 주는 곳을 좋아합니다. 한번은 고아들을 돌보아주는 스님을 소개해 드렸는데, 무엇인가 못마땅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그 스님이 전 재산을 아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놓고 사는 분이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그는 믿지 않았고 급기야는 후원해 준다는 약속도 어겼습니다. 결국 저는 이제까지 도와준 것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분은 도움을 주고도 칭찬을 못 받는 사람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이 하늘에 보화를 잘 쌓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 기도가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에게 은총과 자비 베풀어주소서.
사랑, 천국의 화폐 -김찬선신부-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진주 목걸이를 하늘에 보관하라는 뜻일까요?
진주 목걸이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금고에 보관해야겠지요. 그런데 이 진주 목걸이를 금고가 아니라 하늘에 보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러시아에 가면 러시아 화폐로 돈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 돈 5만 원 권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아니 그 이상의 화폐가 있어도 러시아에서는 아무 쓸 모가 없습니다.
하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늘의 화폐를 써야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늘의 화폐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 화폐의 한 면에는 사랑해야 할 하느님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른 한 면에는 역시 사랑해야 할 이웃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5만 원 권이 이 세상에 유용하고 하늘에서는 아무 쓸 모가 없지만 이 화폐는 이 세상에서도 쓸 모가 있고 하늘에서도 쓸 모가 있습니다. 5만 원으로 향수를 사면 자기 몸을 향기롭게 하지만 5만 원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세상을 향기롭게 하고 이 세상을 하늘나라로 바꿀 것입니다. 보물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 한창현 신부-
요즘 대학생들의 기말고사 기간입니다. 집에서든 도서관에서든 모두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합니다. 어떤 학생들은 시험만 없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경험한 분들은 ‘그래도 학생 때가 제일 좋다.’ 라는 말을 합니다. 시험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학교가 있습니다. 모든 학생은 기숙사 생활을 합니다. 때문에 공부시간이나 체육시간, 심지어 휴식시간도 함께합니다. 아침 기상 벨이 울리면 다같이 일어나고 취침을 알리는 소리에 모두 불을 끄고 잠을 청합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더욱 잘 알아갑니다. 눈빛만 봐도 고민이 있는지 알아냅니다. 시험 기간 동안 평소 보지 못한 간식이 저녁마다 배달됩니다. 작은 간식 하나로 시험 기간의 긴장을 잠시나마 풀어봅니다. 시험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학년대표가 시험문제를 받아 와 칠판에 적습니다. 시험지에 답을 쓰는 데 커닝을 하는 사람도 없고, 커닝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감독도 없고요 …. 신학교 얘기였습니다.
복음을 보면서 신학교 생각이 났습니다. 일등을 하려고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되 혼자 잘하려 하지 않는 곳입니다. 저는 가끔 일반 학교에서 커닝을 하거나 혼자만 열심히 하려는 것을 볼 때면 괜히 숨이 막힙니다. 신학교라는 공간 ! 여기서는 최고이든 꼴찌이든 졸업을 하고 사제품을 받으면 신부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기만 한다고 해서 졸업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은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고 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우리의 마음도 세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때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하느님의 말씀대로 따라나서기를 다짐해 봅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마음과 시선은 늘 하늘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
저는 어제 교구청 성소국에 무사히 들어왔습니다. 주교님을 비롯한 많은 신부님들 그리고 교구청 직원들이 환하게 맞아주어서 간석4동 성당 떠날 때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헤어짐과 만남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자전거 여행을 할 때에도 오르막 언덕이 있어서 힘이 들지만 이렇게 오르면 신나게 내려오는 내리막도 반드시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헤어짐을 통해 어려움을 겪지만 이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을 가져오기에 다시금 신나고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부정적인 생각과 일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고, 항상 나의 기준을 주님께 맞추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이 늘 필요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할머니께서 독립기념관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함께 이곳저곳 구경을 하다 보니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마침 저쪽에 빈 의자 하나가 보입니다. 그래서 얼른 그 의자에 앉아서 편안하고 쉬고 계셨지요. 이렇게 의자에 앉는 할머니를 본 관리인이 얼른 할머니에게 다가와서 말씀하십니다.
“할머니, 이 의자는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앉으시던 의자에요. 여기 앉으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소리를 빽 지르시면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봐! 주인 오면 비켜 주면 될 거 아냐?”
할머니께서는 백범 김구 선생님을 잘 모르셨기 때문에(혹시 잘 듣지를 못했는지도) 이렇게 말했던 것이지요. 이는 우리들도 마찬가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주님을 잘 모른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 정반대의 행동을 할 수밖에 없으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당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기를 그리고 당신의 관점에 맞게 생활하기를 간절하게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보물의 예화 역시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사실 우리들은 주님을 잘 모르기에 세상의 보물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을 내 것을 만들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하늘의 보물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을 잘 알도록 더욱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에 보물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주님의 충실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이란 인생의 모든 경이로움을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따뜻한 마음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하늘의 보물 -김훈일 신부-
성경에서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은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땅에 보물을 쌓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헛된 삶을 살 것이냐 귀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천국에 쌓는 보물이란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고, 땅에 보물을 쌓는 일은 결국 자기가 대접을 받고 추앙받으려는 욕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우리의 신앙생활이 성당 활동에만 집착되어 있고 미사 참례에만 국한된 것을 봅니다. 말하자면 하루 중 신앙적인 행사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참여하는가로 하늘 나라에 무언가 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생활에서의 삶이 신앙생활과 관계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식과 금육제를 지키거나 많은 돈을 기부해야만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물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께서 주신 하루하루의 삶에서 용서하는 마음, 너그러운 마음, 희생하는 마음,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양승국신부-
<소유 보다 존재> 라이크(like)와 러브(love) 사이의 차이점을 소개하는 글을 읽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좋아하게(like) 되면 먼저 드는 느낌은 소유요, 집착이랍니다. 들길을 가다가 좋아하는 꽃을 만나게 되면 소유하고픈 마음에 꺾는답니다. 결국 꽃 입장에서는 고통이요, 죽음입니다. 그러나 꽃을 사랑하게 되면 그 꽃 존재 자체로 행복합니다. 그 꽃을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합니다. 가장 바라는 바는 그 꽃이 활짝 만개하는 것입니다. 다소 어색한 논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인간 사이에 오고가는 관계에 적용해보면 ‘말’이 꽤 됩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소유하고, 집착하기보다는 그가 더 높이 비상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고, 그의 삶이 더욱 찬란히 빛을 발하도록 자유를 줘야 하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사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하겠지요. 자연에게도 자연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 숨 쉬도록 자유를 주는 것,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재물이나 사물도 자연스런 흐름이 필요합니다. 돈이 왜 돈입니까? 돌고 돈다고 돈입니다. 누군가가 막대한 돈을 꽉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면, 큰 지하 비밀금고에 엄청난 돈을 보관하고 있다면 말만 돈이지 참된 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돈입니다. 보다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 정말 요긴한 곳에 사용되기 위해 돌고 또 돌아야 진정한 화폐로서의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난리법석들입니다. 인간은 더 많은 소유를 위한 수단으로 자꾸만 전락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만사를 지배하고 있는 소유 양식과는 대비되는 존재 양식을 향해 나아가야 할 시점에 서있습니다. ‘소유’보다 ‘존재’에 더 많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세상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너무나 속화되어버린 이 땅에서, 모든 것이 경제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없이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먼저 세상에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소유보다는 존재가 더 중요하고, 더 우선적이며, 훨씬 우위에 서있음을 우리들의 나눔을 통해서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도 정확하게 소유보다 존재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금 잔뜩 움켜쥐고 있는 이 세상의 재물들, 우리가 보기에 더없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다 부질없는 것이란 것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보물을 쌓는 일보다는 천상에 보물을 쌓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이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나눔과 섬김, 이웃봉사와 사랑의 실천의 수치를 기록한 우리 각자 영혼의 통장에 적힌 잔고가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 자주 점검하며 살아갈 일입니다. | |
나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김기현신부-
장영희 교수님의 ‘위대한 순간은 온다.’ 라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야학에서 가르치던 용호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성적이 안 되어서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속초로 내려가 자동차 정비를 배우게 되었답니다. 그 학생이 내려가기 전에 교수님은 책 한 권을 주며, 그 앞 장에 ‘이 세상에 기쁨과 행복 주는 사람이 되거라!’ 라고 써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용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에이, 선생님. 제가 어떻게 이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줘요. 저는 신부님이 돼서 위대한 일을 많이 하고,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주려고 했어요. 그랬는데...” 자동차 정비공이 어떻게 이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주겠냐는 말인데, 그 말을 들으며 교수님은 예전에 유학 중에 알게 된 토니가 생각났다고 합니다. 나이가 예순 정도로 기숙사 경비였는데, 전직이 콜택시 기사였다고 합니다. 언제가 그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 당번이었던 그는 시내 어떤 주소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도어벨을 누르니 한참 있다가 문이 열렸고, 거기에는 마치 40년대 영화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복장에 모자까지 단정히 쓴 아주 나이 든 할머니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방에는 가구가 다 흰색 천으로 덮여 있었다. 차에 타자 할머니는 주소를 주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돌아서 가는 건데요, 할머니.” “괜찮아요. 난 시간이 아주 많아.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거든. 식구도 없고, 의사 선생님 말씀이 이젠 갈때가 얼마 안 남았대.” 어둠 속에서 할머니 눈에 이슬이 반짝였다. 토니는 미터기를 껐다.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 토니와 할머니는 함께 조용한 크리스마스 새벽 거리를 드라이브했다. 그녀가 젊은 시절 엘리베이터 걸로 일하던 빌딩, 처음으로 댄스 파티를 갔던 무도회장, 신혼 때 살던 동네 등을 천천히 지났다. 때로는 어떤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그냥 오랬동안 어둠 속을 쳐다보기도 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자 할머니는 “이제 피곤해. 그만 갑시다.” 라고 말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토니는 몸을 굽혀 할머니를 안아 작별인사를 했다. “자네는 늙은이에게 마지막 행복을 줬어. 아주 행복했다우.” 나중에 토니는 이런 말을 했다. “난 그날 밤 한참 동안 할머니를 생각하며 돌아다녔지. 그 때 내가 그냥 경적만 몇번 울리고 떠났다면?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당번이 걸려 심술 난 다른 기사가 가서 할머니에게 불친절했더라면... 돌이켜 보건대 나는 내 일생에 그렇게 위대한 일은 해본 적이 없어. 내가 대통령이었다 해도 아마 그렇게 중요한 일은 하지 못했을지 몰라.” 】 누구에게나 그 위대한 순간, 곧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과 행복이 되어줄 수 있는 순간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우리의 보물이 돈이나 명예나 인기나 좋은 학점이나 좋은 직장에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누군가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그 기회가 왔을 때, 바쁘다고 지나치고,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지나치고, 도움도 안 되고 실적도 안 되는 일이라며 외면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를 들 수 있을 겁니다. 성당에서 봉사를 할 때에, 어떤 사람은 ‘내가 시간을 내서 봉사한다고 돈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스펙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성당 일을 시간 낭비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의 보물이 하늘 나라의 가치들, 예를 들면 하느님을 경외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들을 사랑하는 일에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아깝지 않을 겁니다. 또 성당에서 봉사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대한 순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곧 나의 가르침으로 아이들과 학생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고, 나의 성가로 신자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줄 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고, 나의 기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 나의 보물은 무엇인지,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눈은 몸의 등불 -전삼용신부-
대학 다닐 때 관상에 관심이 있어서 책을 보며 공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얼굴에 그 사람의 성격이나 과거와 미래까지도 쓰여 있었고 재미로 관상을 보아주면 사람들이 놀라워하였습니다. 평균 70-80%는 맞았습니다. 마흔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이 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짓는 표정들이 나이가 들수록 얼굴에 새겨지게 됩니다. 너무 많이 찡그리거나 웃으면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 일단 한 번 새겨진 모습은 거의 바뀌지가 않습니다. 군대에 가서는 선임들이 자신들의 관상을 보아달라고 난리였습니다. 급기야는 여자 친구의 사진까지 들고 와서 자신과 잘 되겠느냐고 물어보았고 그게 내 알바가 아니기 때문에 다 잘 된다고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좋아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을 막 내어놓았습니다. ‘관상보고 돈 버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관상에 흥미가 없어진 이유는, 관상에선 복이란 것이, 건강하고 돈 많이 벌고 자손이 번성하는 등의 매우 현세적인 것이었고 그런 것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행복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눈은 외부를 볼 수 있는 동시에 외부에서 눈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과 같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대로 눈이 등불이라면 마음이 맑으면 온 몸도 환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떤 면에서는 관상적인 면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많은 경우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안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약을 한 사람들의 눈이 맑을 수 없고, 가끔 CCTV에 잡힌 도둑이나 강도의 모습을 보면 무서운 마귀의 모습이 저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겉모습을 치장합니다. 지나치게 겉모습을 치장한다는 것은 속에 있는 것을 더 감추고 싶어 하는 심리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숨기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은 허영심에 외모를 치장하기도 하지만, 물 위에 나타난 빙산을 포장하거나 깨어버린다고 해서 물 밑에 있는 거대한 얼음덩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속에 있는 것을 변화시켜야 겉모습까지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내 속이 원숭이인데 아무리 사람 흉내를 내며 살아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속을 변화시켜야 하고 본질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항상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예수님처럼 느끼며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속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음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은 세상 것이 아닌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보물을 바라는 사람은 걱정으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어두워지지만 하늘나라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평화로운 얼굴로 다른 사람까지 평화롭게 만듭니다.
얼굴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더 아름다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옳은 일이고 예수님, 성모님의 외모도 아름다웠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 사람들이 성형하고 꾸미는 아름다움이 아닌 하느님나라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품고 사시기에 저절로 우러나는 아름다움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예쁜 연예인들끼리 결혼해도 이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예쁜 사람끼리는 하느님나라의 사랑으로 서로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늘 여행 -김찬선신부-
어제는 한우리 카페의 400번째 회원이신 이 종원 형제님이 지으신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분은 여행 작가이신데 당신이 지금까지 가 본 곳에 대한 소개와 여행하면서 느낀 소회들을 이 책들에 엮어 놓으셨습니다. 어제 하루 종일 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틈틈이 읽었는데 그래서인지 오늘 복음이 자연스럽게 여행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이 있다는 말씀.
우리는 가끔 근심 걱정을 털어내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원인은 그대로 놔 둔 채 근심 걱정만 털어내려고 합니다. 근심 걱정의 원인인 재물은 계속 쌓으면서 근심 걱정은 털어내려는 것이지요.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씀은 한자어로 얘기하면 慾心이 있다는 말이 되는데, 욕심이 있는 곳에 애착이 있고 애착이 있으면 재물에 매이게 되고 그것을 떠나 어디를 갈 수 없게 됩니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어디를 떠나는 것이기도 하지요. 가는 것이란 어디를 가는 것이요 떠나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그저 산다고 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고, 삶을 하나의 “가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는 존재들입니까? 하늘 여행을 하는 존재들입니까? 하늘 여행을 하자면 이 세상에 재물을 쌓지 말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굳이 이 세상에서 쌓는다면 善業, 德을 쌓으라 하십니다
요즘 기름 값이 장난 아니게 오르다보니 자전거 타시는 분들을 길에서 쉽게 뵐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는 분들을 보면 주로 쫄바지와 헬멧 그리고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바로 이 모습이 저의 자전거 탄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저 역시도 민망하게 보이는 쫄바지 그리고 마치 선수처럼 보이는 헬멧과 장갑을 끼고서 자전거를 타거든요.
이렇게 복장을 갖추고 자전거를 타다가 길에서 서로 만나면 “수고 하십시오. 안녕하세요?” 등의 인사를 한답니다. 또한 잠시 쉬다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기면 금방 친해지지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자전거를 상대방도 타고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친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와 함께 자전거를 타시는 신부님께서는 처음에 쫄바지를 도저히 입기가 민망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또 선수도 아닌데 굳이 헬멧과 장갑을 써야 하냐고 반문도 했지요. 그런데 함께 자전거를 타는데, 저한테는 다들 인사를 하는데 반해 자신한테는 인사도 하지 않는다고 그날 곧바로 모든 복장을 구매했답니다. 왜냐하면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자기만 쏙 빠지니까 왠지 소외된 느낌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지만, 단지 자전거를 좋아하고 복장을 갖춰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도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즉, 저 사람과 나는 다르다는 생각이 아니라, 서로간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사랑의 인사를 쉽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늘 차이점만을 부각시키려 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과 내가 다르다고, 저 사람과 나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는 말들로써 주님의 사랑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를 당연하다는 듯이 합리화 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사실 우리의 손이 가까이 닿는 것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가까이 가 있느냐에 따라 우리 마음이 이 세상에도 있을 수 있고, 또 하늘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마음은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요? 아니면 하늘에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내 마음도 하늘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하느님의 원칙인 사랑을 실천하기 보다는, 이 세상의 편리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원칙만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의 이웃과의 관계가 차이점을 찾는 것이 아닌 공통점을 찾아내는 관계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안에 주님의 사랑이 움터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때 내 마음은 이 세상이 아닌, 하늘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찾는데 노력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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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를 가서 많이 하는 장난이 있습니다. 안경을 쓴 친구들의 안경에 붉은색 잉크를 칠해 놓고 그 친구를 깨우면서 ‘불이야’라고 외치면 잠에서 깬 친구는 순간적으로 붉은 세상을 보고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어떤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서 같은 사람과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늘 밝고, 맑고, 희망적인 것, 투명한 것을 즐겨 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온몸이 밝아져갑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늘 어둡고 탁하고 현실적인 것, 속임수가 가득한 것만 바라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의 몸이 점점 더 어두워져갑니다. 그렇다면 ‘세상’이라는 안경을 쓴 사람과 ‘하늘’이라는 안경을 쓴 사람의 태도는 어떨까요? 역시 매우 다릅니다. 우리가 ‘하늘’이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볼 때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방향이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안경을 쓰고서 세상과 하늘을 바라볼 때에는 ‘허무함과 무의미함’을 느끼기 쉽습니다. 우리는 매일 나의 안경에 ‘하늘’이라는 단어를 새겨 넣어야겠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반성이며 성찰입니다. 그것만이 나를 맑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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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리나라에 재테크 열풍이 불었다. 책도 재테크 책이라야 팔렸고 너도 나도 주식투자를 하고 펀드에 가입했다. 나 역시 이왕 저축할 거라면 적금보다는 펀드가 나을 거라는 추세에 편승했다. 그런데 가입하자마자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수익률이 팍팍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해를 입은 채 그만둘 수도 없고, 붙들고 있자니 손실만 커지고…. 많지도 않은 돈을 쪼개 저축했더니 도리어 손해만 보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그동안 영혼이 누리던 기쁨과 평온함도 사라져 버렸다. 오래전 내 소유의 집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집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곁을 떠났다. 경제적 문제로 차압당한 것이다. ‘나의 집’이라는 소유권은 하나의 허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집’을 잃는 대신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이 땅 위에 나의 것은 없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깨달았고, 물질적인 욕심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맡겨진 재물이 좀 생기는 듯하자, 또다시 그것이 나의 것인 양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욕심과 함께 내 마음에 넘치던 평화와 자유로움에도 어느덧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얼마 전 몇십 년 만에 젊은 날의 아름다운 기억을 함께했던 친지를 만났다. 그런데 그의 눈가에는 세월의 골이 깊게 패이고 머리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일장춘몽의 인생을 깨달은 조신(신라의 승려)이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것처럼…. 무상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덧없이 흘러간다. 좀먹고 녹슬고 도둑맞고…. 이 땅에서는 그 어떤 것도 최후까지 보장받을 수 없다. 그렇게 좋다던 펀드도 반 년이 안 되어 주저앉고 말았다. 젊음은 더욱 허무하게 사라진다. 우리의 감정과 욕망조차 쉬 타오르고 꺼진다.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영혼은 어두워지고 진정한 자신을 잃는다. 소유하면 잃을까 두렵고, 갖지 못하면 헛된 욕망에 빠진다. 아프리카의 피그미족은 자신이 소유한 것은 모두 짊어지고 다녀야 한단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렇게 쓸데없는 짐을 지고 살아가려는 것일까? 왜 인간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고 누리는 행복을 등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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欲을 許하지 말지니 -김찬선신부-
작년 마라톤 후유증 때문인지 빛이 눈을 힘들게 해 어떤 때는 방안에서도 색안경을 끼면 조금 눈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습관이 안 되어서인지 모르지만 색안경이 그렇게 마음을 어둡게 하고 우울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안경 하나가 이렇게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니 아예 눈이 멀면 전 존재가 어두워지고 흔들릴 것입니다.
우리말에 돈에 눈이 먼다고 얘기가 있고 욕심에, 사랑에 눈이 먼다고도 합니다. 다 그 欲의 작용인데 欲하는 것이 무엇이든 欲하는 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어도 일단 그것을 欲하게 되면 그것이 나의 전부를 차지하고 다른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欲하는 거기에 마음이 전부 가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慾心이라 할 수 있지요. 돈에 대한 欲이 생기고 그래서 돈에 慾心을 내면 돈이 하느님과 하늘나라도 가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는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얼토당토않은 일을 얘기할 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라고 얘기하는데 사실 작은 손바닥으로도 충분히 나의 눈을 가리고 그래서 작은 손바닥으로 삼라만상을 볼 수 없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아예 欲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欲을 許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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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양승국신부-
<만족>
재물과 관련된 말씀을 하실 때마다 예수님께서 상당히 강한 어조로 권고하신다는 것을 복음서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때로 그 정도가 지나쳐서 예수님께서 부자들에 대해 지나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 정당한 방법으로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모은 사람들, 그리고 그 재산의 많은 부분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는 선한 부자들도 많은데, 이런 부자들이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신랄하게 부자들에게 겁을 주십니다.
그런데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예를 들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에서 지칭하는 부자)는 성실히 벌어서 아낌없이 나누는 선한 부자와 뚜렷이 구별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부자는 재물의 힘이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다고 믿는 부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재물의 힘만 믿는 사람입니다.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처럼 여기고 안하무인격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재물을 가장 높은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재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주 물질적인 결핍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허해하고 목말라하고 또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갖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쉽게 불의와 타협하고 비리와 손을 잡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재물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통 그쪽으로 쏠리게 하는 달콤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재물 그 위에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재물보다 훨씬 귀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건전한 가치관, 인간의 고귀함과 위대함을 일깨우는 영성, 고통 받는 이웃들을 향한 관대한 마음, 인간이 지닌 무한한 정신적 능력, 하느님, 이런 요소들이 사실 재물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을 기억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재물이 최고라고 여기고 재물에 집착할 때에도 우리만은 재물 그 위에 하느님이 계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가진 것이 없이 살아간다 하더라도 충분히 당당하고, 충분히 만족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구원에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만족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
아름다움은 마음의 눈으로 보인다. -정 호 신부-
하늘에 쌓는 재물 : 보이지도 않은 내 것도 아닌 재물에 대해 하늘에 쌓은 재물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설명하시는 우리에겐 감당하기 힘든 경제관이십니다. 어린 아이에게 들려주시듯 우리를 타이르시는 듯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우선 들어봅시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 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이 말은 참 듣기에 좋은 말입니다만 그 실제 내용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를 허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습니다.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어라는 말씀은 듣기에는 좋지만 현실적은 욕심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가지려 들지 말라는, 그리고 오히려 가진 것도 나누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리한다고 하늘에 우리가 가지고 싶어하는 금은 보화가 쌓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쌓이는 재물은 무엇입니까?
하늘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이가 없기에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순 없지만 우리가 여기서 포기한 재물과 같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서 포기한다면 현실에서 그 포기한 재물은 다른 이에게 분명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에서 그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현실의 논리에선 말도 안되는 100% 손해보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재물을 땅에 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좋은데 계산이 안나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하늘나라에서 재물이 쌓인다고 한들 그것이 우리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사랑한다는 하늘나라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파고 들면 들수록 무섭기만 합니다. 분명 하늘나라에선 누구도 거지일 수 없지만 왠지 손해보는 느낌은 지울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현실의 재물이 여전히 우리에겐 중요해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은 좋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말씀 때문에 흔들리는 우리의 맘에 예수님은 또 다시 알 수 없는 말을 건네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 하늘이건 땅이건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말씀입니다.
하늘나라는 투자가 가능한 곳도 무엇을 가져다 놓았다고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곳입니다. 하늘에 쌓이는 재물은 우리가 여기서 포기한 재물이 아니라 그것이 나누어짐으로써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삶의 기쁨들이고 사랑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과 행복함들이 쌓이고 쌓여 그곳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것이 아닌 모두가 서로를 위해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에 그 재물은 사람을 벅차게 만들고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하늘에 재물을 쌓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 덕분에 하늘나라에 쌓이는 사랑과 함께 살 사람들이 많아짐을 기뻐해야 합니다. 나와 함께 살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하늘에 쌓이는 재물의 무시못할 가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답답합니다. 우리에게 하늘나라보다 현실이 더 가깝고, 그곳에서의 보이지 않는 삶보다 현실에서 재물이 우리를 더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의 빛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눈과 마음의 빛으로 우리를 돌아 볼 때입니다.
하늘에 재물을 쌓을 각오를 하실 만큼 여러분의 눈은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해 초탈할 만큼의 좋은 눈을 가지고 계십니까? 마음의 빛은 또 그렇게 빛나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고통스러우시다면 그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셨으면 합니다.
재물은 쌓일지 모르지만 점점 어두운 삶을 벗어나지 못하실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오늘 점심식사를 끝으로 4박 5일간의 인천교구 사제연수를 마칩니다. 사실 처음 사제연수에 들어올 때에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성당에서의 일이 많아서 성당을 비운다는 것이 너무나도 부담되었거든요. 또한 제 개인적인 일들도 꽤 많아서 이번 사제연수 기간 동안은 성당에 있으면서 일들을 해야지만 앞으로의 일정에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인천교구의 신부이기에 빠질 수 없어서 지난 월요일에 인천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신부님들을 만나고,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앞선 걱정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안감이 사라지고 하루하루 기분 좋은 날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 해야 할 것들을 모두 싸들고 연수에 들어왔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편안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었지요.
이제 다시 성당으로 돌아갈 시간이 바로 오늘로 다가왔습니다. 다시 바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싫습니다. 이곳에서 일주일 정도 더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분명히 신학교 들어오기 싫었는데, 이제는 신학교 나가기가 싫습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 지금 제 심정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제 마음이 상당히 간사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경우가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나 편한 대로만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취하려고 했던 행동 하나 하나가 바로 이러한 간사한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제 경험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관심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지요. 제 마음 상태에 따라 신학교 오는 것이 좋을 때도 있고 또 반대로 신학교를 떠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수가 있는 것처럼,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둘 수도 있고 하느님 나라에 마음을 둘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이 하늘나라에 있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 방법만이 우리들의 최종목표인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빠다킹신부 어떻게 지금 여기서 `하늘`을 발견할까? -엄재중-
오늘 예수께서는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의 명확한 대비를 통해 땅을 버리고 하늘을 선택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땅과 하늘이 말 그대로의 땅과 하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땅이란 ‘자신을 위한’ 어떤 의지와 행위 일체를 말하는 것이고, 하늘은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 안에서 하늘과 땅을 명확히 식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때로 땅을 위한 일을 하면서 그것이 마치 하늘을 위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처신하며 때로는 이를 타인 앞에서 내세우기까지 한다. 하늘에 보물을 쌓으려면 먼저 그 하늘이 어디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눈을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신다. 몸의 등불인 눈은 우리에게 하늘과 땅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눈은 많이 피곤하다. 세상사가 그리 명확하고 단순하지 않다. 현대 세계는 예전보다 엄청나게 복잡해지고 불투명해졌다. 이런 세상에서 하늘과 땅을 명확히 식별하기란 어렵다.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이 땅의 논리가 아닌 복음 정신으로 보도록 자신의 눈을 단련시켜야 한다. 복음 정신에 충만하지 않은 눈은 쉽사리 하늘과 땅을 혼동할 수 있고 그리로 가는 길을 자주 놓치기에 늘 경계심을 갖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예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보려면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3)고 하셨다. 이 대전환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박갑조 신부-
‘마음이 환하다’ 혹은 ‘밝다’라는 것은 마음이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상(想)에 하늘의 선물인 보물이 빛을 발산하기에 그렇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 선물은 무엇인가? 하면 하늘이 땅, 즉 마음에 내려앉음이요 땅이 하늘에 들어 올리려는, 곧 쌓는 행위가 바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선물은 하늘을 구성하는 속성들로서 하느님의 사랑이요 자비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하느님의 하나의 속성은 모든 속성과 연결된다’ 라고 말씀하셨듯이 인간의 생애 가운데 어느 한 켠의 어두운(마태 6, 23)곳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발산하는 빛을 발견하는 행위가,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마태 6,20)봉헌이며 기도인 것 입니다. 이러한 능동적 행위가 가능한 것은 먼저 하늘에서 주어진 선물 때문에 가능한 것 입니다. 이 선물을 발견하면 할수록 그의 눈은 이전 보다 더 건강하게 되고(마태 6,23)나아가 혜안(慧眼)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보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지혜의 능력으로서 그의 몸과 가족과 이웃을 밝게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 6,20).
이 지혜로써 땅에 쌓는 것은 무슨 의미고 (마태 6,19) 하늘에 보물을 쌓으려는 의욕이 무슨 까닭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 6,20), 하여 이 보물은 더욱 더 풍요로워져 마침내 땅을 이루는 즉 과거에서부터 이어지는 인격 형성의 요소들의 실체를 알아 좀과 녹은 바로 나의 습성을 악용하고 남용하여 부추기는 도둑의 행위임을 아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또한 하늘에서 주어진 보물임을 아는 깨달음 자체가 되고 환희와 기쁨인 것입니다. 이 깨달음의 기쁨이 그 영혼의 상태에 따라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의 섭리를 더 밝게 비추는 등불(마태 6,22)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등불로서 좀이 쓸어있는 곳을 밝혀내고 씻어 내어 녹을 닦아내는 의지적 사랑의 실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적극성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마태6,20). 그러나 만약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잘 보여 보이는 자체가 진리요 근본이며 본질이라면, 그의 눈의 상태는 온전한 것이고 맑으며 환한 것입니다(마태 6,22). 그러나 만약 또다시 허약함에 빠지고 실수의 연속이라면 지금 아는바에 집착되지 않음이 주어진 보물에 초점을 맞추려는 수행인 것입니다. 해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1)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밝고 맑게 살고자 하는 원의가 곧 등잔이 입니다. 이 등에 끊임없이 불을 붙여 주시는 분께 다가 갈려는, 청하려는 성실함이 등불이 꺼지지 않고 전 존재의 구석 구석을 밝혀 하느님의 보물이 아닌 다른 것을 거두어 내고 정갈하게 되어 자신의 세포 하나 하나에 보물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성심성월에 걸맞은 예수님의 마음화(化)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땅을 딛고 살며 땅의 생태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이라는 세상의 원래 창조의미를 알게 된다면, 땅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신 그 분의 의도에 따라 땅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먼저 자신의 땅을 갈무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화의 방식이 바로 나의 상태인 마음을 밝혀 주는 선물이며, 또한 이것이 선물임을 깨닫는 인식이 보물임(마태 6,20.21)을 깨닫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 기쁨이 복된 눈이 머무는 ‘하늘’ 인 것입니다(마태 6,20). 이 하늘은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초발심인데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하늘의 선물로서 시작한다면 그곳에는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훔쳐갈 수도 없는 곳입니다(마태 6,20). 하여 하늘은 바로 나의 어두운 마음자리에 이미 선물로 와 계신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일을 주님께 봉헌하며 한다면 -기정만신부-
1999년에 신학생인 내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견문을 넓힐 기회가 주워졌습니다.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 갈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첫 1년을 보내고, 저는 역량 부족으로 2과목 시험을 방학 후에 치러야 했습니다. 유럽은 대개 10월에 학기가 시작되어 6월에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7월부터 9월까지 방학입니다. 9월 말부터 저는 2과목 시험 준비를 위하여 로마 근교에 있는 카스텔 간돌포라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동네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교황님의 별장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옆으로는 호수가 있고 저 멀리로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1주일. 아침이 되어 전날 무엇을 공부했나 되돌아보면 기억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내용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으므로 공부가 잘 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순간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시절에, 이 아름다운 곳에서 되지도 않는 공부를 하고 있는 제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갈팡질팡하며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가 성당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20여 분쯤 지났을까, 제 마음에 평화가 흘렀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이 이렇게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분께 필요하지 않을 수 있으나 최선을 다하는 이 모습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저는 방으로 돌아와 먼저 주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제가 하는 이 일이 보잘것없는 공부이지만 당신께 드리니 받아주세요.’ 그 이후 걱정하며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점수가 아주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나 점수에 얽매이지 않고 기쁘게 그리고 당당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주어진 일을 주님께 봉헌하며 한다면 주님께선 그 일을 하는 사람 마음에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기에 걱정과 근심이 아닌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우리는 해나갑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와 순간순간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물로 여긴다면 그때부터 우리 마음은 주님의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권순호신부-
제가 신학생 때나, 사제가 되고 나서, 죽음을 맞이 하는 적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중에 한 미국인 할머니를 잊을 수 없습니다. 병자 성사를 주기 위해 본당 신부님하고 그 할머니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이미 암 말기로 죽음을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놀라고 말았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야 할 할머니의 얼굴에는 어떤 어두운 구석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할머니께서 미소를 머금고 본당 신부님과 저를 웃기려고 노력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본당 신부님께서는 할머니의 모습에 놀란 저에게 그 할머니에 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할머니께서 평생 동안 성당에서 봉사의 삶을 사셨고,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의 증거가 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2주 후에 결국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장례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장례미사는 처음이었습니다. 슬프지만, 왠지 모를 기쁨이 함께 있는 장례식이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할머니의 평생의 바람이 이루졌음을 기뻐하였습니다.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장례미사 계획과 준비를 본인 직접 다하셨다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직접 선택한 그 날 복음인 루가 복음의 성모찬송은 하느님을 찬송하며 산 그 할머니의 삶을 그대로 나타내는 듯 했습니다.
그 미국인 할머니처럼 죽음을 맞이 하는 사람들이 항상 아름다워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죽음 앞에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는 정말 제가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좋은 직장과 상당한 재산을 가지며 사회에서 떵떵거리고 사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기다리며 병원에 누워있는 할아버지 앞에서 친척과 자녀들이 그 재산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를 염려하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재산과 가족이 그렇게 많은 대도 그 할아버지는 정말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어떤 이들은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고, 어떤 이들은 고통스러운죽음을 맞이 할까요? 그 해답은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살아 있을 때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별차이가 없는 듯 합니다. 흔히 제 주위에도 신앙을 가지 않았지만, 신안을 가진 사람 못지 않게 가정과 직장에서 모범적으로 열심히 사시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이 다가 올 때 신앙을 가지고 재물을 하늘에 쌓은 사람과 재물을 땅에 쌓은 사람들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납니다. 재물을 땅에 쌓은 사람들은 죽음 앞에 절망을 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물을 두고 떠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함께 자신의 마음도 좀먹고, 녹이 슬고, 썩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을 통해 결국 자신의 하늘에 쌓았던 보물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은 사람에게는 죽음이 곧 새로운 시작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당신은 보물을 어디에 쌓고 있습니까?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것과 여러분은 운명을 같이 할 것입니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강영구신부-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 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그대에게
오늘은 돈과 재물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와 소나무와 장미꽃은 돈이 없어도 푸르고 늠름하고 여유 있고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하늘에 나는 새도, 갖가지 짐승들도 돈과 재물이 없어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보살펴주시고, 그것들은 자신들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맡기기 때문입니다. 유독 사람들만 돈에 집착하고 돈과 재물에서 행복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손길과 은총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로 행복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돈과 재물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행복은 저 느티나무와 장미꽃처럼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손길에 내어맡기는 곳에 있습니다. 무소유의 자유인이 되어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꽃을 피우는 수도자들은 느티나무처럼 푸르고 장미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보십시오. 어떤 사람의 손에서 돈과 재물은 자신을 죽이고 이웃과 형제들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어떤 사람의 손에 있는 돈은 자신의 목과 이웃과 형제들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됩니다. 돈과 재물을 쥐고 있는 손이 썩어문드러진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의 가슴마저 거름더미처럼 썩어서 고약한 냄새를 풍깁니다. 돈과 재물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몰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손에서 돈과 재물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됩니다. 어떤 사람의 손에서 돈과 재물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찬란한 빛을 내는 보석이 됩니다. 그들의 손에서 나온 돈과 재물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약이 되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이 되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는 옷이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당신의 가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살펴보십시오.(一明)
† 재물에 마음을 두는 자 : 영적 어두움 상태 † -박상대 신부- 마태오는 오늘 복음에서 재물과 눈의 상징어를 어록에서 비교적 충실히 옮겨 적습니다. 예수께서는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가르치시는데, 땅위에 쌓아둔 재물은 좀과 녹과 도둑의 대상이 되지만 하늘에 쌓아둔 재물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19-20절) 그러나 대부분의 부자들은 "나는 내 재산은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재물이 있는 곳에 생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있다는 것입니다.(21절) 재물에 마음을 두는 것은 곧 재물에 눈이 어두운 것과 같습니다. 눈이 몸의 등불이듯이 마음은 영혼의 등불입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지면 마음까지 어두워지는 것은 당연지사, 영혼을 밝혀야 할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23절)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가 부자다" 할 때는 부의 척도를 세 가지로 보고 있는데, 1) 값지고 정교한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 2) 곡간에 많은 곡식을 쌓아두고 있는 것, 3) 집안에 금은 보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세 가지를 하나 하나 들어,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늘에 두라고 하십니다.
즉, 첫째로 값지고 정교한 좋은 옷은 좀 먹게 되고 변질되어 못쓰게 되는 그런 것들을 소유하는 것은 영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녹이 쓴다는 말은 그들의 말에 "먹어버린다"라는 것을 의미했고 창고에 쌓아 둔 그러한 부도 녹슬거나, 벌레나 쥐가들어 먹어버리기에 영구히 소유할 수 없음을 지적하시면서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세째로 도둑이 많고 들어와 훔쳐간다는 말은 그들의 집이나 담은 대개가 진흙으로 만들었기에 도둑이 그 담의 흙만을 파내면 얼마든지 들어가서 집안에 숨겨둔 보물을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적의 손에 좌우되는 그런 보물을 지키기에 영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그렇게 귀하다는 이 모든 것이, 그 무엇도 자신이 끝내 지킬수는 없으며, 그것을 지키고 그것을 가지고, 그것을 모으고 하다보면, 마음이 재물과 보화로 사로잡혀 어두어 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노바즈 라는 사람은 흉년이 들었을 때, 그의 모든 재물 보화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대의 조상들은 재산을 모았고, 그들의 유산에 재산을 더 보태었는데, 이제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조상의 재산을 모조리 흩어 버렸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땅을 위하여 재산을 모았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보화를 모았습니다. 우리 조상은 사람의 손이 다스릴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아 두었으나, 나는 사람의 손이 통치할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아 놓았습니다. 나의 조상들은 이 세상에 보화를 모았고, 나는 장차 올 세상에 보화를 모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빛을 영혼에 비추며 사는 방법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왜 재물을 주시는지를 생각해 보면 될 일입니다. 재물은 "쌓아두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재물은 "쓰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만나" 이야기를 읽어 보면,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출애 16,4)고 분부하였지만, 모세의 당부를 어기고 내일 양식을 걱정한 "그들이 남겨 둔 것에서는 구더기가 끓고 썩는 냄새가 났다"(출애 16,20)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재물은 모아두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재물은 개인의 정당한 권리 속에 공동선을 위해 사용될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요즘은 개인의 소유만 지나치게 강조되고 공동선을 위한 사용은 약화됐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창고나 금고나 은행에 모아둔 재물에도 구더기가 끓고 썩는 냄새가 나고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마태6,19-23) - 유 광수신부-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그것을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흠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그것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모하며 흠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나 자신을 위하여 쌓아 둘 보물은 어떤 보물일까? 과연 나에게 보물이 있는가? 하늘에 쌓아둘 보물이란 어떤 보물인가? 내가 보물을 쌓아 두어야할 하늘이란 어디인가? 보물이란 가장 귀한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요, 가지고 있으면 넉넉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요,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말한다.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나 자신이 부유해진다. 즉 나를 부유하게 만든다. 과연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이 보물이란 어떤 것일까?" 에서부터 우리의 묵상을 시작하자.
예수님은 5장을 시작하시면서 참된 행복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이들! 그들이 위로를 받으리니, 행복하여라, 온유한 이들! 그들이 땅을 차지하리니.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그들이 흡족해지리니.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이들! 그들이 자비를 입으리니.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이들! 그들이 하느님을 뵈오리니.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이들!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니.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이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더 할 수 없는 값진 보물들이다. 가장 귀한 가르침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보물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 그것도 일시적으로가 아닌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보물은 이 세상에 있는 금, 은 다이몬드가 아닌 바로 진복팔단이다. 여덟가지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 하나 모두 진주보다 더 갚진 보물이다. 따라서 이 보물들은 우리가 보고 그냥 지나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야할 보물들이다. 그럼 보물을 쌓아야 할 하늘이란 어디인가? 하늘이란 우리 마음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보물인 참된 행복은 땅이 아닌 우리 마음 속에 쌓아야 한다. "쌓다."라는 말은 그 보물이 내 안에 들어와서 자리 잡도록 노력하라는 말이다. 참된 행복의 가르침은 분명히 값진 보물이다. 그러나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도 내 손에 직접 쥐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듯이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그냥 흘려 버린다면 내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냥 땅에 버려져있는 보물과 같다.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하나 하나 실천하는 것이 곧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다. 내가 가난한 마음이라는 보물을 내 마음 속에 간직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살아가면 가난이라는 등불에서 비추어져 나가는 빛이 내 눈에서 발산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 가난이라는 보물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 내 마음속에 자비라는 보물을 쌓아두고 있다면 내 눈에서 자비라는 등불이 켜질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 눈을 보고 자비의 눈이 어떤 눈인가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내 마음속에 평화라는 보물을 품고 있다면 내 눈에서 평화의 등불이 켜질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평화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의로움이라는 보물을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실천하고 있다면 내 눈에서 의로움의 등불이 켜질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통해서 의로움의 빛을 받고 의로워지려고 할 것이다. 내 마음에 온유의 보물을 쌓아두고 있다면 내 눈에서 온유함의 등불이 켜질 것이다. 그러면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온유해 질 것이다. 과연 나는 내 마음속에 어떤 보물을 쌓아두고 있는가? 내 눈에는 어떤 등불이 켜져 있는가? 우리가 마음에 보물을 쌓기 위해서 먼저 해야하는 것은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하는 그 귀한 보물이 바로 진복팔단이라는 것을 알아 보는 것이다. 즉 무엇이 보물인지를 알아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참된 행복이야 말로 가장 귀중한 보물이라고 알아 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다이몬드나 진주도 아니고 명예나 권력도 아닌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발견한 이 보물을 마음에 쌓아야 한다. 아무리 값진 보물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내 손에 들어오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듯이 우리가 발견한 이 보물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쌓아야 한다. 내 마음에 쌓는다는 것은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즉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또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진복팔단의 보물이 내 마음 안에 가득 쌓일 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보물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보물이면서도 알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불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 보물을 쌓지 않고 좀과 녹이 쓰는 땅의 보물들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땅에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진복팔단이 진정한 보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기에 마음을 두고 살아간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한 보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땅에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즉 예수님이 "너희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말씀하신 대로 완덕을 추구하는 삶이다.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진복팔단의 보물이 눈에 보이고 그 보물의 진가를 알아 본다.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이 보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보물을 마음에 쌓는 사람은 더욱 행복한 사람이다. 더 나아가서 그 보물의 빛을 발산하는 사람은 성인이다. 온 몸이 행복의 빛으로 환해질 것이다. 하루 하루 그냥 살아가는 삶이 아니다. 하느님이 주신 하루 하루는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주신 시간이요,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의 모습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여정이어야 한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그리스도인의 재물관 †
오늘복음은 산설교에서편에서 그리스도인의 재산관리와 두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두가지 주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고 하셨으며 그리고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혜로운 자녀답게 누구보다도 부지런하므로 일하여 재물을 모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모은 재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자기 일신의 호화나 사치를 위해 사용하지 말고, 부지런히 하느님의 나라에 쌓아 두는 일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보물을 간수해야 할 곳을 잘 알고 '항상 가난한 마음으로 나눔의 생활'을 하는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하늘의 놀라운 상과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두 주제를 기본으로 하여 오늘복음을 묵상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재산 관리(마태 6,19-21)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생애에 어떤 것이 중요한가에 대한 가치 판단을 잘못함으로 인하여 인생의 결정적인 실패를 초래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아보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던 한 청년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재물이 많은 부자이므로 인해 그 재물 때문에 천국의 문턱에서 지옥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밭에 소출이 많아 주체를 못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도,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었지만 그 날 밤, 하느님이 그의 영혼을 부르실 때에(죽을 때) 그 쌓아 둔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주님은 물어보셨습니다.
(1) 그리스도인과 물질관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제 생활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어느 것 하나 경제 생활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경제 생활이란 간단히 표현해서 재화, 즉 돈이 필요한 생활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잘못하면 돈을 천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생활 태도인 줄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돈의 가치나 그 활용 면에서 무시하거나 배격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면 이 땅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재물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성서의 교훈입니다. 잠언 22,4에서는 "사람이 겸손하여 야훼를 경외하면 재산과 영예와 건강을 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나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돈을 저축하는 일에 대하여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게으른 자를 향하여 개미의 부지런함을 배우라고 하신 말씀은 장래를 위한 저축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바오로는 고린토2서 12,14에서 "내가 구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지 여러분의 재물은 결코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돈을 모아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법입니다"고 말하는 애용으로 보아도, 재물을 모으는 일을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서 3,13에서 "사람은 모름지기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낼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선물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i) 재물을 땅에 쌓아 두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재물이 자신의 욕정적인 삶의 도구로 사용되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인색한 사람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가지고 먼저 하느님를 영광스럽게 하는 방법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부유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유해지셔야 합니다. 사람이 재물을 쌓아 두는 일은 그 재물이 나중에(영혼이 거두어지는 날)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같은 목적을 이루려면 그 재물을 제대로 쌓아 두는 장소를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땅에 쌓아 두는 재물은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기 때문에 불안정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여기서 "쌓다"라는 말은 헬라어 데사우리조( )로 저장한다, 남겨 둔다의 뜻입니다. 우리의 재물은 이 세상일에만 쓰지 말고 하늘에 남겨 두어야 하며 이 세상에만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저장해 두어야 합니다.
(ii) 다음에 재물을 하느님과 동시에 두주인으로 섬기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두울류오( )란 헬라말로 종이 된다,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재물은 그 쓰는 사람이 주인이 되어야지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재물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재물을 섬겨 재물의 종이 되던가 하느님을 섬겨 하느님의 종이 되던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재물의 종이 된 상태에서 하느님을 섬긴다는 말은 웃기는 말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미워하십니다.
(iii) 사람이 돈을 사랑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서는 '돈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돈에 너무 집착하고 돈만을 좋아하는 행태를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하느님께 드릴 것을 마땅히 드리며 그 돈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투자한다면 그런 재물이야말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며,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열매가 될 것입니다.
(2) 하늘에 쌓아 두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i) 이 말씀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의 창고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것으로 규정한 십일조를 하느님께 드라는 삶이 바람직합니다. 약속된 십일조는 우리가 적어도 하느님의 것을 내 개인의 욕심으로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이 세상에 있는 물질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는 약속의 표시입니다. 이런 증거를 하느님께 보일 수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재물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로는 약속을 잘 합니다. 무엇을 만들어 주겠다느니, 무엇을 사서 주겠다느니...그런데 그들은 그 약속이 하느님에게 하는 약속이라 생각하지 않고, 특정한 사람에게 한 약속으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마음을 바꿉니다. 그런 행태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ii)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금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금에 대하여 정성을 다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헌금궤에 두 렙톤의 동전을 넣은 어느 가난한 과부에 대하여 이 과부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것으로 하느님께 헌금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생활 중에서 자기가 낼 수 있는 것,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사참례 때 봉헌금을 내는 모습을 보면 조금 성스럽지 못합니다. 주머니에서 꾸개진 돈을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일상의 지갑에서 한두장을 빼서 넣는 모습도 봅니다. 한편 어떤 분은 비록 작은 액수이지만 새돈으로 은행에서 바꾸어 성스럽게 봉헌하는 분도 있습니다. 봉헌금은 내는 봉투가 준비되지 못한 경우에는 성서에나 매일미사책에 가지런히 펴서 넣어두었다가 헌금을 하는 모습이 참 보기에 좋습니다.
2.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마태 6,22-24)
우리에게 있어서 돈의 위치가 얼마나 큰지를... 물질중심의 배금사조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돈이 자신의 주인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있는 모습도 종종 봅니다. 주인이란 종을 마음대로 부리며 지배하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입니다. 성서에는 인간이 섬겨야 할 주인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6,16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곧 자기가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전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섬겨야 할 주인이 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이시고, 다른 한 주인은 인간의 탐심을 지배하는 재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이 두 주인 중 어느 한 주인을 택하여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섬김으로 하느님의 종이 되느냐? 아니면 물질을 섬김으로 재물(돈)의 종이 되느냐? 자신이 섬길 주인을 명백히 선택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1) 눈은 몸의 등불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우리 몸에 있어 마치 등불과도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감을 때 우리의 온 몸은 거저 답답하고 캄캄할 뿐입니다. 여기서 눈이 성하지 못하다고 하신 말씀은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밝다는 말은 포티조( )로 비췬다, 조명한다의 뜻이고, 성하지 못하다, 즉 나쁘다는 말은 포네로스( )로 악한, 타락한, 허약한 상태를 말해 줍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눈은 우리의 마음을 비취는 눈, 즉 빛을 말합니다.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요한 1,4). 빛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 생명이 우리의 마음을 비췰 때 우리의 몸은 밝아서 생명의 빛 가운데로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의 인생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빛이 어두워 악한 상태, 타락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육신의 눈이 어두워도 캄캄하여 답답한 생애를 보내거늘 하물며 그 마음에 생명의 빛을 잃으면 그의 영혼과 그의 삶이 그 어두움 속에서 타락하지 않겠느냐'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여기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눈, 생명의 빛을 어둡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재물입니다. 하느님보다 돈을 중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은 어두움을 가져옵니다.
사람이 그 마음에 탐심을 품으면 그것이 자신의 영혼의 빛을 어둡게 하여 그의 인생을 캄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그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재물이 하늘에 싸였다면 그 곳으로부터 더욱 밝은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취어 우리의 생애는 더욱 밝은 빛 가운데 다닐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탐심이 없고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사람은 그 마음이 빛으로 언제나 밝게 비취임으로 청결한 마음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와 감사와 기쁨이 넘치며 하늘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주인이란 하느님과 재물을 가리킵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웨이버란 사람은 '돈은 군주의 군주'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10,19에서는 "사람은 즐거우려고 잔치를 벌인다. 술이 있어야 살맛이 있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주인은 돈이여서는 안 됩니다. 돈은 이차적인 존재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돈이 없이도 포도주를 가득 만들어서 잔치를 풀요롭게 해주신 주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제데로 섬기기만 하면 항상 원하는 잔치가 마련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향심하는 자세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마태 22,37)라는 말씀대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이는 "이번 일만 도와주시면 그 수입에서 얼마를 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재물로 조건을 걸고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사람들의 말은 듣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란 언제나 한곳에 집약, 칩착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를 사랑하면 하나는 미워하거나 무관심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보면 하느님을 너무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너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씀을 하실 때 아가파오( )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사랑이란 말은 하느님이 죄인을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신 절대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하느님이 아닌 재물에 바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묵상했듯이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에 있어서 어느 편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물질을 섬기던가 하느님을 섬기던가 하느님 앞에 거짓 없는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재물이 있던지, 없던지, 잘살던지, 못살던지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하느님만을 섬기는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에 심어주신 당신의 기쁨, 곡식이다, 포도주다, 풍년에 흥겨운 저들의 기쁨보다 크옵니다"(시편 4,7)라고 노래한 다윗의 이같은 기쁨을 마음에 간직하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기고 그에게만 전적으로 마음을 두고 의탁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