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
강 문 석
나라와 수도 이름이 같은 룩셈부르크는 지구촌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알려진 대로 이 나라의 국토면적이야 우리나라 부산의 3배 정도에다 인구도 대전과 비슷한 수준이니 나라치곤 소국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와 독일 벨기에 사이에 낀 나라 룩셈부르크가 어떻게 1인당 국민소득 세계1위인 부국이 될 수 있었을까. 국민소득은 놀랍게도 한국의 4배인 11만 7천 달러나 된다. 잘사는 나라에 대한 부러움보다 어떤 매력을 지녔기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나 하고 놀랐다.
관광대국 룩셈부르크를 조금이나마 생동감 있게 전하기 위해선 다소 무례를 해가면서라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관광객은 서양인들로 카메라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서 그나마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염천 한낮에 도심 노천카페에 둘러앉아 생맥주를 나누면서 담소하는 실버들의 여유로운 모습은 부러움 자체였다. 카메라를 들이미는 동양 이방인에게 손을 번쩍 치켜들며 보내오는 환한 미소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포즈가 아닐 수 없었다.
광장 한쪽에 자리 잡은 공원의 조형물에 걸터앉아 카메라맨이 요구하는 표정을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중년여인도 이 포스팅의 조력자가 아닐 수 없으리라. 반팔셔츠에 겨울에나 쓰는 털모자로 부조화를 드러낸 젊은이는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악기연주에 몰입하고 있었다. 금속으로 만든 악기는 흡사 취사용 도구 같았는데 펼쳐놓은 악기 케이스 바닥의 동전 몇 닢이 공허감을 더하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일본 사무라이 헤어스타일을 한 중년사내는 대성당 앞 광장에 모인 꼬마들에게 비눗방울놀이를 펼치고 있었다.
투명하면서도 번쩍번쩍 빛나는 물방울들이 수도 없이 여름하늘로 떠오르다 사라져갔고 꼬마들은 연신 탄성을 질러댔다. 이러한 비눗방울 쇼는 아이들이 성장하더라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룩셈부르크 인구의 9할에 가까운 가톨릭신자를 떠올리며 4백여 년 전 축성된 노트르담 성당을 들어섰다. 성당은 르네상스식 정문과 칸막이가 있는 네덜란드 후기 고딕 건축물이었다. 성전 안은 조명이 비교적 어두운 편이었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사진촬영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있었다.
부르고뉴 저택으로 알려진 룩셈부르크 정부청사도 성당 바로 옆에 붙었고 벽돌 계단 탑들은 고딕에서 르네상스 양식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룩셈부르크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이틀은 잡아야 할 것 같았지만 우린 하루로 끝내고 말았다. 그 아쉬움이 귀국 후까지 남았던 것은 수도 룩셈부르크를 빼고 다른 도시는 접근도 못한 터라 그랬다. 수도 룩셈부르크는 남부를 흐르는 모젤 강의 지류 알제트 강과 페트루세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였고 룩셈부르크 대공의 궁전과 의사당도 이곳이고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이곳은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해발고도 3백 미터의 절벽을 이루는 사암 구릉지에 위치하여 일찍이 천연요새로 인정받아 성채도시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유럽 최강의 요새가 될 수 있었을 터이다. 깊은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시가지의 경치가 아름다워 관광객들은 주로 이곳에 몰려 즐기고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예로부터 철도의 기점이었고 유럽철강업조합의 근거지기도 했다. 시가는 점차 두 강 유역의 하곡평야를 향해 뻗었고 공업이 활발한 신시가지는 알제트 강의 동쪽으로 발달했다.
중세의 귀중한 건축물은 대부분 외적의 습격으로 소실되었으나 옛 보루와 새로 건축된 교회당 박물관 공원과 전통적인 국가적 제례가 아직도 남아 있어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유럽재판소와 유럽의회 사무국 그리고 유럽투자은행이 있어 벨기에의 브뤼셀과 더불어 유럽연합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데다가 유럽연합은 1995년 룩셈부르크를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그런데 룩셈부르크를 실제로 잘사는 나라로 만든 원동력은 금융산업이었다.
흔히들 유럽의 금융중심지로 런던이나 프랑크푸르트를 떠올리지만 룩셈부르크야말로 프라이빗뱅킹과 외국펀드 해외채권 등 분야에서 세계1위의 시장을 보유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금융중심지다. 금융서비스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5퍼센트나 되는 나라가 룩셈부르크였다. 19세기까지만 해도 가난했던 나라가 20세기 초 철강산업을 일으켰고 석유파동 이후 철강산업이 부진의 늪에 빠지자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금융산업을 육성해 불과 30여년 만에 세계적인 금융강국으로 떠오른 것이다.
최근에는 금융과 IT산업을 결합한 ‘핀테크’의 중심지로도 각광받고 있다니 부러움이 앞선다. 룩셈부르크는 6.25사변 때 우리나라에 파병하여 피를 나눈 혈맹이 되었고 88서울올림픽에도 선수단이 참가한 전통적 우방국이다. 하지만 나라의 규모가 워낙 작아 현재 13명의 한국교민과 49명의 한국인 체류자가 룩셈부르크에 머물고 있을 정도다. 웹사이트를 검색다가 룩셈부르크 이민을 희망하는 이가 보였다. 그는 룩셈부르크에서 창업자금을 대출받는 절차와 조건을 묻고는 본인이 구상하고 있는 치킨점포에 대한 꿈도 밝혔다.
고용절벽에 낙담한 청장년들이 얼마나 앞이 캄캄했으면 아예 정든 고국을 떠나 낯선 이역만리에 삶의 둥지를 틀 생각을 했을까. 마음이 짠했다. 하지만 먼저 룩셈부르크를 체험한 이가 올린 댓글은 잘사는 나라 룩셈부르크도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선진국 꿈을 안고 산업화에 매달리던 80~90년대에 세계화까지 이루어져 살다가 어찌 이런 행운까지 다 만나나하고 들떴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허락한 운은 거기까지였고 어떻게 된 노릇인지 나라가 ‘헬조선’으로까지 전락하여 가슴이 답답하다.
어느 시인은 ‘지금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방석’이라고 읊었다. 선뜻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오늘의 청장년세대가 쉽게 절망하여 극단적인 선택까지 서슴지 않도록 나약하게 키운 책임은 부모세대에게도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무작정 잘사는 나라를 찾아간다고 눈앞의 좌절과 절망이 당장 해결되긴 어려울 것이다. 진부한 말로 들리겠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신념과 각오로 생활전선에 뛰어든다면 이루지 못할 꿈도 없을 거란 말을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