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요무형문화재 제82-나호 나라만신 김금화.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열두 살 나이부터 심한 무병을 앓다 열일곱 살에 외할머니의 내림굿을 받고 강신무(降神巫)가 되었다.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의 기능보유자인 그녀는 백두산 천지에서의 대동굿, 독일 베를린에서의 윤이상 진혼굿, 사도세자 진혼굿, 백남준 추모굿 등을 선보이며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만신으로 자리잡았다. 한 평생을 신의 제자로 살아가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지난날의 삶과 우리가 알지 못했던 무속 문화의 아름다움에 대해 들어보자. 김금화 인터뷰 영상 김금화 선생에게 무당수업은 시집살이보다 혹독했다. 굿을 하고 벗어놓은 선배 무당의 무복을 갤 땐 세워서 개야했고, 대본 하나 없는 긴 무가도 귀동냥으로 외워야 했다. 세숫물 준비하고 이부자리를 깔아주고 개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큰 만신이 뒷간에 가는 기척이 들리면 얼른 따라 나가 지푸라기를 손에 불이 나도록 부벼 밑씻개로 넣어주는 것도 어린 무당의 일이었다. 30대 후반의 김금화 선생. 제 고향은 황해도 연백이예요. 하늘에서 장군 칼 한 쌍이 떨어져 어머니의 치마폭에 안기고 뇌성벽력이 치는 중에 청룡과 황룡이 구름을 뚫고 하늘로 승천하는 장엄하고 화려한 태몽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아들을 고대하던 집에선 절대 환영 받지 못할 5남매 중 둘째딸이었어요. 태어나자마자 포대기에 둘둘 말려 방 한쪽으로 밀쳐졌다가 극적으로 어머니의 젖을 물어 살 수 있었죠. 아들이 귀한 집안이었으니 남자동생을 본다는 뜻에서 처음에는 ‘넘새’라는 이름으로 불렸어요. ‘넘새’라는 건 ‘남동생이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뜻이었어요. 그러다 열세 살 때 사촌 형부가 계집애 이름이 그게 뭐냐며 ‘비단 금’에 ‘꽃 화’자를 붙여 ‘금화’라 새롭게 이름을 지어줬죠. 그때부터 금화라고 불렸어요. 당시 저희 집은 산골짜기 자갈밭을 일구어 겨우 끼니를 이어갈 만큼 지독히도 가난했어요. 그래서 어린 시절 제 소원은 밥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것이었죠. 예닐곱 살 때부터 도깨비와 같이 놀고 예지능력을 보였어요. ‘무끼’가 충만했던 거죠. 어려서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았고,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요. 부엌에서 군불을 때다가도 저도 모르는 사이 춤을 추고 싶어져 솥뚜껑을 맞부딪치며 훌쩍훌쩍 뛰어올랐어요. 열 살 무렵에는 아이들과 놀면서 시퍼런 낫을 맨발로 타고 올라가 춤을 추기도 했죠. 또, 어느 집에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는지, 임신한 사람을 보면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맞힐 정도였어요. 김금화 선생에게 어머니는 늘 애틋한 존재였다. 외국 순회공연을 하고 돌아와 어머니를 업어 드렸을 때 뼈와 가죽만 남아 가벼웠던 어머니를 잊지 못한다. 1980년대 초반, 석관동 자택에서 어머니 이음전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 그럼요. 열일곱 살 정월 보름이었어요. 몸이 아파 집에 누워 있는데, 이모할머니께서 저한테 달맞이를 갔다오라는 거예요. 제 고향인 황해도에서는 길다란 조짚을 추려서 자기 나이에 맞춰 매듭을 만들어 달맞이대를 만들거든요. 거기에 불을 붙인 뒤 달을 보면서 내 나이만큼 절을 하는데 ‘제발 아픈 몸을 낫게 해 달라”고 빌었죠. 다 탄 달맞이대를 내려놓고 그 위를 건너뛰는데 갑자기 제 몸이 이상한 거예요. 갑자기 하늘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나서 쳐다봤더니 별 같은 게 마구 쏟아지고, 머릿속에서는 다닥다닥 돌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라고요. 한동안 도망치다가 개울에서 정신을 잃었어요. 제 몸에 신이 내린 거죠. 그 후로 집에 있다 갑자기 뛰쳐나가 온 동네를 들쑤시며 “쇠붙이 내놔라”, “성수 내놓으라”고 하고 다녔어요. 나중에 결국 큰 만신이셨던 외할머니께 내림굿을 받았죠. 무당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아는 외할머니는 제가 무당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내림굿을 해주셨어요. 제 외할머니는 황해 지방을 휘젓고 다니던 여무셨어요. 아들을 점지 받으려 기도를 다니다가 신이 내려 무당이 되신 거죠.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모진 구타와 장도칼 위협, 인두 지짐을 당하면서도 신기를 주체하지 못하셨다고 해요. 그만큼 모진 세월을 견딘 분이시죠. 무당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자신과 가족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익히 알고 계셨기에 신이 내린 손녀인 저에게 가장 가혹하셨어요. 제 신내림을 너무 싫어해 일부러 저에게 못되게 하셨어요. ‘만신이 뭐냐 무당이 뭐냐’면서 ‘나 하나로 고생하고 말지.’ 그 말씀을 수도 없이 하셨죠. 입에 담지 못할 욕도 하셨고, 홧김에 절 집 밖으로 내쫓기도 하셨어요. 당숙모 집에 피신해 있던 저를 어머니가 울면서 새벽에 데리러 오셨죠. 할머니께서 천식이 있었는데,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고 하셨어요. 어머니 손을 잡고 밤중에 집으로 뛰어갔는데 할머니가 제게 빌면서 ‘미련한 인간이 잘못했습니다. 신명님 감정 푸시고 몸 괴로운 것 낫게 해주세요, 용서해주세요’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병이 나은 할머니께서 ‘어차피 감추고 살지 못할 테니 나와 꼴 좀 보자’하시면서 저를 살피더니 ‘에휴, 할 수 없다. 난 이제 말리지 않을 거다. 신이 영검하시면 큰무당이 되든, 뭐가 되든 길을 열어주십시오’하더니 치마폭으로 눈물을 닦아내시더라고요. 체념 어린 허락이었죠. 그 후 할머니는 제 첫 신어머니가 되어 어디 가면 춤부터 추지 말고 ‘뵈러 왔소, 뵈러 왔소, 신의 신줄 따라 물줄 따라 신의 원당 뵈러 왔소’라고 하라며 가르쳐주시기도 했고, 실습도 많이 시켜주셨어요. 두 번 결혼했지만, 두 번 모두 실패로 끝을 맺었어요.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던 열네 살 때 결혼은 했지만 시어머니 구박에 못 이겨 시집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으로 끝을 맺었죠.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던 시어머니는 하루 종일 고된 농사일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구타까지 서슴지 않아서 결국 2년 만에 도망쳐 나왔죠. 무당으로 살던 스물다섯 살 때 시작한 결혼생활은 11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어요. 누구 소개로 남자를 만났는데, 너무 불쌍해서 먹을 것 주고, 돈 주고 그렇게 도와줬어요. 그 사람이 자꾸 ‘결혼하자’고 해서 이리저리 시간을 끌다가 할 수 없이 결혼을 했어요. 제가 취직시켜 주고, 나중엔 토목공사 사업한다고 돈도 대주고 했죠. 제가 굿으로 번 돈을 그 사람이 다 털어먹었어요. 그러면서도 ‘무당이랑 못 살겠다’고 자꾸 ‘이혼을 하자’고 해서 헤어졌죠. 남편의 품을 느끼며 사는 삶은 허락되지 않았나봐요. 김금화 선생은 옛날에는 굿이 마을 전체의 제사고 잔치였다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이 일편단심 마음을 모아 정성을 들였고, 하나의 연희처럼 웃고 떠들고 어우러지며 모두 거리감 없이 허심탄회하게 하나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열아홉 살 되던, 즉 6·25 직전 어느 날이었죠. 저는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뚝뚝 떨어지고 달구지가 피 묻은 옷가지를 싣고 가는 광경을 보게 됐어요. 물론 신의 계시였죠. 당시 북한에서는 무당을 반동분자로 취급했고, 저는 나라에 큰 난리가 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숨어 다녔어요. 그러다 자주 붙잡혀 온갖 고초를 겪기도 했죠.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인들이 찾아와 피란간 사람들의 명단을 대라며 윽박지르더군요. 반동으로 몰려서 마을 원두막에 앉아 혼자 인공기를 만들며 위기를 넘기기도 했어요. 하지만, 9·28수복 직후에는 남한 군인들이 와서 빨갱이 노릇한 사람의 명단을 대라고 하더군요. ‘너는 무당이니 다 알지 않느냐.’면서요. 목에 총을 들이대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죠. 신이 안 내렸으면 병으로 죽었어도 벌써 죽었을 거예요. 숱한 생사의 갈림길에 섰지만 신의 딸이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은 피란길 배를 탔다 태풍을 만나 배 안에서 구르던 순간이예요. 무작정 배를 탔는데 갑자기 끝도 없는 바다 중심에 배가 들어서니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하더라고요. ‘저기 바람이 온다, 태풍이 온다.’고요. 순식간에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물결이 들이닥치고 배가 요동쳤죠. 저는 그 순간, ‘천지신명님, 용왕님, 여기 있는 이 사람들 다 도와서 광풍 바람 재워주고, 명주처럼 잔잔하게 바닷바람 재워주십시오.’ 수없이 기도했죠. 서너 시간 쉬지 않고 불던 바람이 새벽부터 잦아지면서 날이 훤해 오는데 누군가 중국 바다 가까이 왔다고 소리치더군요. 그 소리에 맥이 풀렸죠. 그런데 다시 보니 인천 앞바다, 덕적도 방향이 아니겠어요? 우여곡절을 겪으며 난리 중에 인천으로 피란을 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됐지만, 그것도 순탄치만은 않았어요. 갖은 멸시와 천대는 일상사였고, 얕잡아보고 저를 속인 사람들도 적지 않았죠. 특히,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는 무당과 굿을 한낱 미신으로 몰아 이리저리 좇기는 신세가 됐어요. ‘꺼림칙하다’고 해 셋방을 얻기도 힘들었고, 굿 소리가 시끄럽다며 신고하는 이웃도 많았죠. 굿을 하다가 경찰이 들이닥쳐 끌려가거나 창문을 넘어 도주하는 일도 있었어요. 남동생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서 남동생 대신해서 키운 어린 조카들은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무당집 아이와는 놀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당시 사람들은 무속인을 전혀 사람 취급하지 않았어요. 이웃이 신고하면 경찰은 마치 제가 죄인이라도 되는 양 반말로 함부로 대했죠. 생각해보면, 참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어요. 끼니거리가 없어 조카들에게도 밀가루를 풀어 만든 멀건 콩나물죽을 주는 날이 잦았죠. 얼마 안 되는 양이라 단숨에 자기 앞의 그릇을 비우고 숟가락만 빨고 있는 아이들에게 제 그릇에 담긴 죽을 한 숟가락씩 퍼주다 보면 정작 저는 굶는 일이 많았어요. 가까운 벗이 혼인해도 식장은 들지도 못했어요. 부정 탄다는 속설은 왜 그리 철석같은지, 무당을 혹세무민 사기꾼으로 바라봤죠. 피죽 한 그릇, 누울 자리 마련도 눈치를 봤어요. 그래도 알음알음 연이 닿아 일이 들어오더군요. 없이 살아도 배 나려면 굿하는 게 당연하던 때였으니까요. 별비(別備·무당에게 주는 돈)야 주는 대로 받았죠. 어디 돈보고 굿 치르나요. 마음으로 하죠. 보리 한 되라도 정성만 지성이면 목포 군산도 내려갔어요. 또 한편으로는 굿을 잘못해서 자신이 곤경에 처했다는 군인이 저를 죽이려 들어서 종내는 산에 끌려가 총살을 당할 처지였는데 어머니가 울며불며 “죄라면 무당 딸을 낳은 내 죄밖에 없다”고 부둥켜안는 바람에 겨우 살아나기도 했지요. 어떤 때는 신 내림 받은 업보가 한스럽게 느껴졌어요. 소리내지 못하고 울 때도 많았죠. 정말 서글픈 시절이었지만 그런 고난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신령님이 제게 주신 공부라고 생각하죠. 절 키우기 위해 시련을 주신 거라고요. 젊은 사람들이 무속을 무서워하고 멀리하려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하지만 김금화 선생은 이것이 우리 조상의 얼이고, 옛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생활 속에서 해오던 것인 만큼 편안하게 다가가면 좋겠다고 당부한다. 1967년 명창 박동진 선생(1916∼2003)의 주선으로 우연히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했어요. 이혼하고선 빈손이 돼서 서울로 사글세를 얻어 나왔어요. ‘내가 무당이면 도둑질을 하냐, 사기를 치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시던 순수한 우리 것인데, 내가 왜 이렇게 버림받고 짓밟혀야 되나’ 싶었어요. ‘그래, 내가 무당으로서 뭔가를 해내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고향 선배이고, 봉산탈춤 하던 양소운 언니가 ‘이런 대회 하는데 같이 나가보자. 야, 바닷가에서 하던 소리 같은 거 뭐 없네?’ 하더라고요. 그래서 대회에 나가 굿이랑 소리랑 섞어 공연을 했죠. 설움이나 풀어보려고 신명 나게 춤을 췄어요. 그런데 이게 웬걸. 천대는 어디 가고 예인(藝人)이라는 극찬이 쏟아지더군요. 특히 외국인들 반응은 뜨거웠어요. 그때를 계기로 서해안 배연신굿이랑 대동굿이 알려진 거예요. 에밀레박물관장 하신 조자용 선생이 해보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미국에 갔는데, 우리 영사관 사람들이 우리 옷차림을 보곤 ‘나라 망신 시킬 일 있느냐. 무슨 굿이냐. 당장 데리고 나가라’ 하며 무대엘 못 나가게 하는 거예요. 다른 공연 다 끝나고 카펫을 걷고 관객들이 하나 둘 나오고 있는데, 조자용 선생이 우리를 떠밀어서 무대에 올라갔어요. 눈 앞이 캄캄했죠. 관객들이 모두 나가려던 시점에 굿을 시작했어요. 죽기살기로 한두 거리 굿을 하고, 작두를 탔어요. ‘여기까지 와서 우리 무속문화를 제대로 선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성공해야 한다’는 일편단심뿐이었어요. 속에서 마력 같은 힘이 나왔고, 그 힘으로 관객을 다시 불러들였죠. 그랬더니 박수가 막 터지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고 아주 난리가 났어요. 공연 끝나고 조자용 선생이 ‘공연 끝났으니 이 사람들 데리고 한국 돌아가겠다’ 하니까 영사관 사람들이 ‘아이고, 무슨 말씀입니까’ 하면서 붙들더라고요. 그래서 하루 2회 공연까지 해서 미국에서 26일 동안 공연했어요. 그 무대를 계기로 스페인,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과 중국, 일본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신비한 우리 전통문화를 알리게 됐죠. 차츰 자신감을 얻게 되었어요. ‘무당도 무대에 올라 춤추고 소리할 수 있구나. 무당도 TV 방송에 나갈 수 있구나’ 싶었어요. ‘내가 무당으로서 긍지를 갖고, 옛날 어른들이 하던 것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고 인정을 받아야겠다’ 하는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요. 인터뷰할 때마다 울었죠. 참 감사하기도 하고 서럽던 기억도 떠오르고요. 김금화 선생은 서양인들에게 깃대점을 쳐줬다. 붉고 푸르고 노랗고 하얗고 파란 다섯 가지 방위의 상징인 오방기의 깃대 끝을 모아 잡고 두루마기에 갓을 쓴 상사원에게 내밀자 그가 깃대 하나를 잡았다. 그가 잡은 깃대를 천천히 뽑자 붉은 깃발이 빠져나왔다. 붉은색은 그 중 재수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휘두르라고 일렀다. 문자로 말하지 않아도 금방 서로를 이해했고 사람들은 함께 좋아했다. 일흔이 넘은 한국의 무당과 유럽인들의 새해맞이 굿. 외국 사람들은 한국인과 달리 아무런 선입견 없이 즐겁게 복을 나누어요. 그리고 춤도 정말 잘 춰요. 어깨춤을 추면서 고개를 꺼덕꺼덕해요. 유럽에 가면, 춤을 추다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어요. 쓰러져서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 뭐 기절하다시피 하는 사람, 별 사람들 다 있어요. 프랑스 파리에서는 표가 없어서 울며 되돌아간 사람 얘기도 들었어요. 그런 때는 '내가 무당이 잘 됐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해요. 국내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굿을 미신으로 치부해요. 굿을 보고 속으로 좋아하면서도 매스컴에 굿을 보는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까봐 걱정하죠. 그렇지만 외국 관객들은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화끈하게 굿을 받아들여요. 가톨릭 수녀들이 굿당에 찾아와 대화를 나누며 “복이 든 술잔을 돌리고 떡을 나누며 한을 풀어주는 과정이 ‘미사’의 형식과 비슷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해요. 이탈리아 로마대학에서는 ‘교황 진혼굿’까지 했어요. “굿을 해야 하는데, 이러저러한 굿들이 있다고 했더니 그 대학의 한 교수가 그러면 우리 교황님 좋은 데 가게 해 달라는 굿을 하라고 해요. 굿을 마치고 복잔을 돌렸더니, 성호를 그으며 그 술을 찍어서 사방에 뿌리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는 굿이라면 미신이라며 배척하고 천시했는데 자신들의 것과 전혀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그들의 모습에서 문화적인 넉넉함이 느껴졌어요. 외국인 중에는 굿을 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어요. 하와이와 유럽 사람 여섯 명이 찾아와서 굿을 하고 간 적이 있죠. 제 신딸 중에 ‘안드레아’라고 있어요. 걔가 데리고 왔죠. 독일인 ‘안드레아’처럼 독특한 신딸이 여러 명 있어요.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갔다 신병이 생겨 저에게 내림굿을 받고 신딸이 된 한국 사람도 있고요. 그런가 하면 어떤 딸은 신딸이 된 이후에 ‘한국 무속의 세계화’를 위해 앞장서겠다며 독일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있고요. 중요무형문화재 제82-나호로 서해안풍어제 배연신굿 및 대동굿 기·예능보유자인 만신 김금화 선생. 서해안 풍어제는 해주, 옹진, 연평도 등 서해안 지역의 어촌에 전승돼 온 제의로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대동굿과 선주들이 올리는 배연신굿으로 나뉜다. 풍어와 배의 안전을 기원하는 서해안풍어제 배연신굿을 진행하는 김금화 만신의 모습. 일단 어머니는 덩실덩실 춤을 추셨어요. 이젠 바라는 거 없다고. 맺힌 거 다 풀렸다고 말씀하셨죠. 저는 배운 가락대로 꿋꿋하니 버텼을 뿐이고, 그걸 민속이다 문화재다 연구하고 아껴주는 세상이 온 것이죠. ‘이제 떠나도 굿은 남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난 2005년 사비를 털어 굿 문화를 전수하고 알리기 위해 강화도에 무속체험장인 ‘금화당’을 열었어요. 남은 소망이 있다면 나라의 도움으로 금화당이 민속박물관으로 지정되는 거예요. 나라만신은 예부터 나랏일을 관장해 제사해 왔어요. 단군 할아버지도 제사장이었죠. 그리고 공주가 무당이기도 한 시절도 있었어요. 신 내린 공주를 임금이 땅을 파고 묻으라 했는데, 방울 소리가 나 다시 파보니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공주가 살아 있었다 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임금은 내치라는 명령을 내렸죠. 옛 노인네들은 나라만신 섰던 자리에 은금 보화가 솟아난다며 경외했죠. 그런데 왜놈들이 들어오면서 그런 말들이 다 사라지고 외래 종교가 밀려왔어요. 자료도 다 없어지고, 참 우리 문화로 봐서도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 의미에서 ‘금화당’이 민속박물관으로 지정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도 있고, 부처님도 있고, 만물에 신이 있지만 태양 아래, 바람 아래 인간은 하나니까 같이 공감하고 울 수 있는 거죠. 유럽에는 정신치료사가 굉장히 많아요. 제가 볼 때는 그 사람들이 다 무당이에요. 한국 사람들은 무병을 앓는다고 하면 겁부터 내고 피하고 정신병원 가고 거부하잖아요.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즐기더라고요. 일반인들도 굿 가락에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해요. 굿을 하다가 그들에게 헝겊 조각을 하나 줘도 그걸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게 그 사람들이예요. 굿판이 끝나도 자리에서 안 일어나고 붙들고 우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내림굿을 받고 일년 후 차츰차츰 손님이 들고나면서 소문이 났어요. 열아홉 살 되니까 대동이 나더라고요. 마을에서 저한테 대동굿을 해달라고 한 거예요. 대동굿은 온 마을의 신을 모시는 거에요. 마을 전체의 안녕과 번영을 구하는 큰 축제죠. 그때까지 한 번도 대동굿을 본 적이 없는데 저한테 대동굿을 하라고 하니 덜컥 겁이 났어요. 외할머니께 “어떻게 하느냐”고 여쭈었더니 “걱정하지 마라. 만신들이 나타나면 다 하게 돼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진짜 저절로 하게 되더라고요. 그 전까지 목이 쉬어서 제대로 굿을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시작하니까 공수(신이 인간의 입을 빌어 의사를 전달하는 일)를 주는데 목도 툭 터지면서 저절로 잘하게 됐어요. 1998년엔 임진각에서 통일맞이 굿을 했어요. 1996년 베를린으로 굿 공연을 하러 갔다가 독일의 통일 현장을 보고 나서 직접 기획했어요. 저도 실향민이라서 이 굿을 준비하는 감회가 남달랐죠. 그 행사를 할 때 소설가 황석영 씨가 국회의원들을 초청하면서 제 굿을 알리는 데 많은 도움을 줬어요. 역대 대통령의 추모제도 기억에 남아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무녀라고 박해를 받긴 했지만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 뒤 제가 추모제를 해드렸죠.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도 그쪽 참모분에게서 추모제를 해달라는 연락이 왔는데 예정된 해외 공연이 있어 못해드렸어요. 국가적으로 큰일이 있을 때마다 자주 연락을 받곤 해요. 자꾸 따라 다니고 신 어머니가 하는 것을 보고 듣다 보면 저절로 이루게 돼요. 저도 무당이신 외할머니께 많이 배웠죠. 그런데 요즘 젊은 무속인들은 공수를 하는데 너무나 멋이 없어요. 마음 속에서 우러나면서도 깊이 있는 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애기처럼 그냥 “대대대대” 하면서 목에서만 나오는 소리로 가락도 없이 하거든요. 굿도 예술이고 우리 국악의 뿌리인데 아무런 성의도 없이 하면 앞으로 보존이 되겠어요? 요즘 제가 굿을 많이 안하고 밑에 있는 신딸, 신아들에게 기회를 자주 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예요. 자꾸 해보고 들어봐야 알죠. 우리 굿거리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도 저의 중요한 일이에요. “무속인은 욕심이나 목표를 정하면 안돼요. 아프지 않으면 한편으로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무조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굴복해야 하지요.” 김금화 선생은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에 무조건 감사하다며 사는 것,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라 말한다. 제관하며 들어서는 김금화 선생의 모습. 굿은 신명 나는 잔치이자 눈물겨운 한풀이예요. 모든 것을 정화하죠. 한이 맺혔던 것도 풀어주고, 화도 풀고, 굿을 통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마음을 신선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아픈 손자를 낫게 해 달라며 소복을 입고 맑은 물을 떠놓고 기도하는 할머니의 모습처럼 굿 역시 우리의 삶, 일상생활 속에 있어요.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보살피고 거둬주라고 비는데 방식이 다르다뿐이지 기독교나 불교 같은 종교와 다를 바 없는데 굿을 배척하고 무당을 왜 무서워하는지 모르겠어요. 무당은 하늘의 뜻을 땅에 전하고 사람의 말을 하늘에 전하는 이죠. 그래서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 아니면서 귀신이어야 하는 게 무당이예요. 인간과 신이 친구처럼 어우러져 울고 웃으며 큰 잔치를 엮어내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거죠. 더러운 것, 힘든 것을 어루만져 주고 화합을 유도하며 가슴에 맺힌 것들이 한없이 풀어지도록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해요. 글쎄요. 김금화도 좋은 무당이 못 됐는데, 말할 자격이 있나 모르겠네요. 좋은 무당은 굿에서나 점에서나 늘 기도 드리는 마음을 가져야 해요. 만신들이야 기도 드려 남을 도와줄 수밖에 없잖아요. 김금화 선생은 오늘도 직접 굿판에 오른다. 매일 새벽 간단한 조깅과 규칙적인 생활이 그의 건강 비결. 무엇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며 남에게 베푸는 것을 잊지 않는 삶. 만신 김금화가 먼저 지켜야 하는 삶인 것이다. 명방아를 찧는 김금화 선생. 저는 매일 오전 4시면 일어나 손발을 깨끗이 한 후 신당에 정화수를 올리고 기도를 해요. 그리고 서울 이문동 집에서 가까운 경희대로 향하죠. 이곳에서 두 시간 동안 운동을 해요. 1982년부터 지금까지 거르지 않고 계속해온 일이에요. 먼저 가볍게 조깅을 하고, 이어서 엄지발가락만을 이용해 양쪽 발을 바꿔가며 외발로 제자리 뛰기를 해요. 그리고 손을 비벼서 얼굴과 목 부위에 고루 지압을 해주죠. 다음 순서는 보건체조에요. 여기까지는 가볍게 몸 푸는 과정이고, 바로 ‘본 운동’에 들어가죠. 운동 내용 중엔 엎드린 채로 한쪽 팔 휘두르기, 쪼그려 뛰기, 오리걸음으로 걷기, 닭쌈 동작 취하기 등이 있어요. 무리가 되더라도 운동을 하루라도 거르면 몸이 나른하고, 밥맛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해외 공연에 나가도 반드시 조깅이 가능한 호텔에 투숙을 하죠. 그게 제 건강비결이예요. 뭇사람이 참지 못하는 고통을 숱하게 참아내는 거죠. 제가 내림굿 받던 날 신어머니인 외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꼭 붙들고 이렇게 말했어요.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대신 짊어져야 하는 고통,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사가 되어야 하는 고통, 인간과 신들 사이를 매개하고 화해를 청하는 책임의 고통을 떠안고 사는 게 만신의 고통”이라고요. 돌아서서 남몰래 눈물을 흘린 적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거기서 얻는 보람에 모든 고통과 원망을 견뎌낼 수 있었다. 뭇사람들이 참지 못할 고통을 감내해야만 얻을 수 있는 보람, 그것이 신의 제자로 선택 받은 만신의 운명이었다. 금화신당에서 기도를 드리는 만신 김금화 선생. 도올 선생의 시로 대신하고 싶네요. ‘그대는 어쩌자고 무당이 되었나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그 냉가슴이 있었겠지/ 그대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흐느끼는 한민족의 혼들을 위로하네/ 누가 그대의 세계를 알리 영원한 동경의 세계’라고요. 무당은 모든 사람의 한과 눈물을 보듬어 안아야 하는 사람이죠. 평생토록 뼈가 빠지고 몸이 해지게 남의 일을 돌보고 다른 이의 복을 빌어주지만 변변히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무당의 운명이죠. 그래도 굿은 ‘나누는 것’이라 말하고 싶어요. 복을 나누고, 덕을 나누고, 먹을 것을 나누죠. 어떻게 보면 제가 인간사에 상처 받고 울어본 탓에 저를 찾아오는 절박한 이들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프고 힘겨운 인생도 그만큼 공부가 되고 덕이 되는 일이니 행복도 불행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 말하곤 하죠. 어려서 만신이 되어 우리의 뿌리와 맥을 가지고 무속 문화를 세계에 펼친 사람이라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