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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완 금빛평생교육자원봉사단 강원지역단장(춘천 교동) | 어릴 적 오르내리던 봉의산 자락에는 키 작은 진달래들이 소나무 숲속에 촘촘히 숨어서 반긴다. 나 어릴 적 진달래 꽃을 함께 따먹던 옛 친구들이 그리워진다.나이 들어 봉의산과 삼악산, 대룡산 등을 오르면 내가 자란 생교골(향교골=교동)과 모교인 춘천국민학교, 춘천중학교(당시 6년제, 지금의 춘천고), 좋은 심성을 키워준 붉은 벽돌의 교회 등이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다가온다.아직도 새벽 등산길은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로 정강이를 서늘하게 하지만, 가쁜 날숨과 들숨 속에서 소년시절 소나무들의 향내는 여전한 듯하다. 삼악산 등산객들이 휴일이면 등산로를 메운다. 산불 예방과 깨끗한 산을 보호하자는 캠페인을 하며 등산로에서 그들을 반긴다.고향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말이다.고등학교시절 삼악산 상원사 오르는 길목에서 신영강을 내려다보며 목청껏 노래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신영강에 비친 삼악산, 그 아름다운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해방 후 가난했던 시절 대바지강(지금의 중도배터)에서 발가벗고 멱 감고 참외서리 했던 그 곳도 댐에 잠겨 버렸지만 그 때가 그리워진다. 그 때 참외밭 주인아저씨는 서리를 하는 우리들을 보고 ‘이녀석들!’하고 불호령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쫓아오지는 않으셨다.일제 말기와 해방 후 아주 가난을 겪었던 5년, 그리고 3년간의 6·25 전쟁. 비록 가난과 고생의 연속이었지만 꿈이 있고 희망이 있었다. 오랜만에 어릴 적 사진첩을 꺼내본다. 허옇게 바랜 몇 장 안 되는 어린 시절 그 때의 봄날을 그려본다. 할머니의 고쟁이 속옷 주머니에서 손수건에 싸온 잔칫집의 과질 쪼가리가 그립다. 옛날 언덕 아래 친구네 집 쌍둥이 은행나무가 가을이면 온 동네를 노랗게 물들여 놓았던 엄청나게 컸던 나무가 기억 속에 아롱거린다.그 곳을 떠난 지가 60여년이 훨씬 넘었는데 그때 코흘리개 친구를 만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고향은 마음으로만 담는 것이 아니다. 죽자 살자 하고 자치기 하던 낮아진 돌담아래서 왁자지껄 하던 생교골 녀석들의 소리가 걸린다. 그 골목 귀퉁이에서 키득거리던 바랜 세월에서 봄을 맞는다.누구나 어릴 적 동심이 스며드는 고향을 가지고 있으리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들과 가족들의 삶이 녹아 있는 고향을 지키고 있음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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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대 교동 일대 유일한 우물터(오른쪽 두번째가 필자) | 내가 6·25를 맞은 것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였다. 당시 38선이 지금의 춘천댐 물 속에 있다. 전쟁이 터진 다음날 춘천시내에 포탄이 터지고 피난민과 피 흘린 국군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포의 피난 생활이 시작되었다.그 긴 고행길 1차 피난, 2차 마석까지의 피난, 중공군의 남침으로 또 3차 피난, 그 고생을 어찌 다 피력하랴. 북한군의 탱크를 옥산포와 소양강에서 섬멸시킨 심훈 중위의 엄청난 무공과 군관민 학도병들의 투철한 방어를 기념하는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이 의암호 변에 있건만, 찾아보는 사람이 얼마 없음이 안타깝다.나는 6·25를 직접 체험했다. 하지만, 요즘의 어린 학생들 그리고 젊은이들이 6·25의 진상을 너무 모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평생교육정보관 교육사료관에서 봉사하며 6·25관에서 목소리 높여 전쟁의 참상과 비극, 아픈 역사를 힘줘 설명하고 있다. 일을 끝내고 가끔 중앙시장 골목길을 지날 때면 구석진 자리에서 깨보숭이, 고춧가루를 팔고 계시는 할머니를 보면 코끝이 아려온다. 요선동 시장의 화재로 졸지에 모든 것을 잃었던 내 고교시절 이곳에서 장사하시던 한분 여인의 고귀한 사랑을 받고 이렇게 성장했다. 우리 나이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태어난 곳, 나를 지켜 준 춘천을 사랑한다. 막국수의 고장 닭갈비의 고장을 자랑한다. 외지에서 친지들이 왔을 때 값싸고 대접하기 아주 좋은 먹거리다. 춘천에는 막국수의 원조가 너무 많다. 내 기억으로는 6·25 수복 후 53년도쯤으로 기억된다. 당시의 춘천의 유일한 막국수 집은 지금의 유봉여고 정문 앞 봉의산 자락에 초가집 막국수 집이었다. 고교시절 어른들과 자주 갈 기회가 있었다. 어른들은 배고픈 나에게 항상 곱빼기를 시켜 주셨다. 시내의 아주 먼 곳에서까지 이곳을 찾아온 분들이 많았던 것을 기억하며 아마 80대 전후의 어른들은 그때를 기억하시리라 생각된다. 고등학교 전학년을 지금의 교육연구원 자리 천막교실에서 공부했다. 덥고 춥고의 불편함도 모르고 사변 후이니 그러려니 했다. 오후면 교련복 차림으로 대바지강에 전교생이 나가 학교를 지을 자갈을 주워 모았다. 졸업식을 겨우 뼈만 앙상한 신교사 옥상에서 치른 기억이 난다. 지난해 그 건물을 다 헐고 아주 멋진 최신식 모교가 탄생했다. 나의 후배들이 그곳에서 형설의 꿈을 이루리라.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어 교직에서 몸담았던 달란트로 우리의 후손들에게 춘천의 혼은 심어주련다. 2000년 2월말 인제교육장으로 퇴직과 동시에 지역사회교육협의회장, 금빛평생교육봉사단강원지역단장. 강원도청소년상담지원센터운영위원겸청소년상담봉사, 춘천시자원봉사센터운영위원, 법무부범죄예방청소년선도보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초등학교 폭력예방 도우미로, 노인대학 교육전문강사로, 시골 어린이들에게 마술을 접목한 품성교육까지 내 몸 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 하련다.크게 성장해가는 춘천, 민도가 높아지는 춘천, 전국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내 고향 춘천을 나는 사랑한다. 춘천의 역사와 현재와 미래를 우리 후손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주련다. 오늘도 아침 일찍 귀여운 아이들을 만나려고 서두른다. 옛날 맥국의 고도 삭주, 광해주, 춘주 그리고 춘천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6·25의 참혹했던 사실과 진실을, 폐허에서 우리의 부모님들이 이렇게 살기 좋은 춘천으로 부흥시켰다는 이야기도, 전국이 수해로 난리가 나도 물 피해 없는 축복받은 춘천을 자랑하련다.금년 안으로 경춘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내년이면, 복선전철이 개통될 것 이라고 한다.그래서 우리 어린것들의 행복한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며 이제 늙음에 고향을 지킨다는 생각이 스스로 대견스럽다는 칭찬을 해 보며 나도 더욱 행복하고자 할 수 있는 날까지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으리라고 다짐 해 본다. 오랜만에 현재명의 가곡 ‘고향생각’ 가운데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라는 구절을 흥얼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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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고 재학시절. 학교 건물을 짓기 위한 자갈을 강가에서 주웠다.(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 프로필△36년 춘천시 교동(향교골) 출생 △춘천초, 춘천고, 춘천농과대학 중등교원양성소 졸 △김화중, 양구중, 화천중 봉의여중 교사 △사북중, 원통중 교감 △평창교육청 장학사, 오대산학생야영장장 △서화중 화천실업고 교장, 춘천교육청 학무과장, 도교육청 장학관 △인제교육장(1997∼2000년) 교동(향교골)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