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C와 함께 헬다이버(helldiver)나 큰 꼬리의 야수(Big tailde beast)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SBD 돈틀리스와 함께 태평양 전쟁에서 미 해군 항공모함기동부대의 주력 폭격기로 활약한 단발 복좌기이다. 저항력을 줄이기 위해 내부 폭탄창을 설치하고, 함재기 수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날개를 접히게 설계하였으며 폭장량도 돈틀리스보다 우수한 등 전체적인 카탈로그 성능은 돈틀리스보다 더 좋았다. 또한, 필요시 내부무장창을 변경하여 어뢰를 운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상보다도 실속 속도와 급강하 속도가 빨랐으며 비행 안정성이 떨어진다고 테스트 파일럿에게 악평도 들어야 했다. 심지어 41년 2월 9일 테스트 도중 원형기가 엔진이 멎으며 추락하는 사상 초유의 사고까지 발생했다.
그 사고 이후 채 1년도 지나기 전인 41년 12월 21일의 테스트 비행 당시엔 급강하 이후 수평비행으로 전환하다가 우측 주익과 꼬리날개가 박살났다.[
그런데 아직도 헬다이버의 사고는 끝난 게 아니어서 양산이 시작된 헬다이버의 1번기도 43년 1월 테스트기들과 비슷한 사고로 추락했고 이번에는 결국 파일럿도 사망했다. 사고와 헬다이버의 인연은 이후로도 질겨서 아쿠탄 제로 등으로 알려져있는, 알래스카에서 회수된 제로센을 사고로 박살내버린 기체도 헬다이버였다.
이런저런 사고를 겪으면서도 근성의 커티스사는 헬다이버를 끝끝내 손봐 무게를 테스트안보다 1톤 넘게 늘이는 등 거의 갈아엎다시피 하면서도 완성시켰고 운용테스트에 들어가게 되었지만889군데에서 항모 운용에서 부적합한 문제가 발견되면서 또다시 개수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럼에도 실전 배치 초기, 새로 진수되었던 요크타운(CV-5의 이름을 이어받은 에식스급 항공모함 2번함)의 시험항해 때 배치되었을 때는 접힌 날개를 고정시키는 장치가 말을 듣지 않아서 여러명의 인원이 모여 날개를 고정시키기 위해 씨름을 해야 했고, 착함 도중에는 테일후크가 빠지는 대참사를 일으켜 안전방책(세이프티 넷)에 골인을 하는 아찔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꼴을 지켜본 함장은 노발대발하며 저 비행기들을 배에서 치우라고 명령했고 요크타운은 노퍽 항에 들러서는 급강하폭격기 부대의 모든 기체를 SBD 돈틀리스로 바꿔버렸다(…).
덕분에 배치되기도 전부터 짐승(Beast)이라는 말을 들으며 조종사들한테 악평도 많이 들어야 했고, 결국 미 해군 조종사들은 형식번호를 빗대서 2류 XX새끼(Son of a Bitch 2(second) Class)라는 인상적인 별명을 붙여버렸다(…). 커티스는 열심히 문제점을 손봐 SB2C-3에서는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긴 했지만 저 별명은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5] 이래서 첫 인상이 중요한 거다. 어떻게 보면 2차대전에서 가장 낮은 임무 손실율을 기록했지만 초기형의 높은 사고율 때문에 과부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은 B-26와 비슷한 경우.
이처럼 조종사들에겐 환대받지 못했지만 미 해군의 높으신 분들에겐 단일 플랫폼으로 급강하 정밀 폭격, 내부 무장창을 활용한 통상폭격 및 뇌격이 모두 가능한 헬다이버의 능력이 매력적이었으므로, 태평양 전쟁 후반에 들어서면 기존의 뇌격기였던 TBF(M) 어벤저를 밀어내고 미 해군의 유일한 함재 공격/폭격기 전력 자리를 꿰어차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훗날 A-1 스카이레이더의 배치로 이어진다.
외형상으로는 돈틀리스와 마찬가지로 치즈 플랩을 채용한 주익, '큰 꼬리의 야수'다운 거대한 꼬리날개, 평소엔 밀폐 되어있는 후방 사수석이 특징이다.
후방사수석이 밀폐된 헬다이버와 열려있는 헬다이버의 비교. 꼬리 근처가 쑥 들어간 것이 보인다. 밀폐된 후방사수석은 적기가 나타났을 경우 좌우가 안쪽으로 접혀들어가며 열린다.
급강하폭격기인 만큼 미군 해병대의 F4U 콜세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근접 항공 지원을 맡아서 했고 일본 해군이 완전히 박살난 뒤에는 장거리 정찰기로도 활용되었다. 또한 A-24 밴쉬의 뒤를 이어 'A-25 슈라이크'라는 이름으로 육군에서 급강하폭격기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기 운용이 전략폭격 위주였던 만큼 딱히 유명세를 펼치진 못했다.
[헬다이버는 급강하폭격기인 만큼 미군 해병대의F4U 콜세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근접 항공 지원을 맡아서 했고 일본 해군이 완전히 박살난 뒤에는 장거리 정찰기로도 활용되었다. 또한A-24 밴쉬의 뒤를 이어 'A-25 슈라이크'라는 이름으로 육군에서 급강하폭격기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기 운용이 전략폭격 위주였던 만큼 딱히 유명세를 펼치진 못했다. 당시 미육군에는 B-17 플라잉포트리스 와 B-24 리버래이터 같은 걸출한 4발 중폭격기들이 있었으며 그외 2발 폭격이 역시 다수를 운용했다.]
유명한 실전으로는 야마토급 전함들과의 실전에서 TBF(M) 어벤저 뇌격기들과 헬다이버 급강하폭격기들이 어뢰와 폭탄을 무진장 떨어트려서 당대 최대의 전함이던 둘을 각각 무사시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야마토는 오키나와 특공 때 수장시켜 버린 전적이 있다.
여담으로 헬다이버라는 저 이름은 커티스가 만든 다른 수많은 항공기들이 조류 이름을 딴 것이라는 점으로 보면 논병아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941년 11월에 미 해군이 형식번호 SB2C-1로 제식 채용한 뒤로 1942년 6월에 양산 제 1호기가 배치되었다. 이후 1943년 11월 라바울 전투를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미 해군 항공모함 전투단의 급강하폭격기로 활약했다. 1944년 봄에는 프로펠러의 날개 수를 3개에서 4개로 늘리고 엔진 출력과 무장을 강화한 SB2C-3이, 1945년에는 폭탄과 로켓탄을 탑재할 수 있도록 개량된 SB2C-4, 항속거리를 늘린 SB2C-5 등의 개량형이 생산되었다.
1944년 봄에는 프로펠러의 날개 수를 3개에서 4개로 늘리고 엔진 출력과 무장을 강화한 SB2C-3 의 모습
1945년에는 폭탄과 로켓탄을 탑재할 수 있도록 개량된 SB2C-4, 항속거리를 늘린 SB2C-5 등의 개량형 (아래) 가 등장했다]
또한 수상기 버전의 SB2C-2C도 있었다. 본래는 양산될 예정이었으나 호위항모가 늘어남에 따라 별로 수상기가 필요없다는 판단에 개발이 취소되게 된다.
SB2C-4는 1900마력의 라이트 R-2600-20 사이클론 14 레이디얼 피스톤엔진을 장비하였다. 무장은 양쪽 주날개 무장 장착대에 20㎜ 기관포를 각각 1문씩 탑재하고 조종석 뒤에는 7.62㎜ 기관총 2정, 동체 안 쪽의 폭탄창 에 최대 2000파운드의 폭탄이나 로켓을 탑재할 수 있었다. 모두 7000대 이상 생산된 SB2C 시리즈는 제2차 세계대전 뒤에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 해군과 태국 공군으로 넘겨졌다.
[SB2C-4는 1900마력의 라이트 R-2600-20 사이클론 14 레이디얼 피스톤엔진을 장비하였다. 무장은 양쪽 주날개 무장 장착대에 20㎜ 기관포를 각각 1문씩 탑재하고 조종석 뒤에는 7.62㎜ 기관총 2정, 동체 안 쪽의 폭탄창 에 최대 2000파운드의 폭탄이나 로켓을 탑재할 수 있었다.]
함대 컬렉션의 AL/MI작전에 등장한 심해서함 전용 함상폭격기중 신형 함상폭격기인 심해 지옥 함폭은 헬다이버를 모티브로 하였다. 생긴건 다른 신형 함재기들과 마찬가지로 둥근 구체에 왠지 급강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게 특징. 성능 역시 강력하여 플레이어 측 스이세이 12형을 능가하는 폭장을 가지고 있어 세트로 나오는 신형 함재기와 시너지를 일으켜 포격전에서 적항모들이 매서운 일격을 날리는게 하는 녀석.
더 퍼시픽 소설판에서도 당연하게도 나온다. 얼마나 취급이 안 좋은지 알고 싶다면 읽어보는걸 추천.
워 썬더 미 해군 항공대-급강하 폭격기/공격기 라인 2랭크와 3랭크에 배치되어 있는데 SB2C-1c 모델과 C-4 모델이 존재한다 C-1c 모델은 SBD-3 돈트레스에 비해 성능이 향상되었고 20mm AN M2 기관포 2문을 탑재하여서 아군 전투기의 화력을 지원해줄 수 있다 하지만 탑재 항공 폭탄은 적은편이다.
C-4 모델은 3랭크에 배치되어 있으며 C-1c 모델에 비해 더 성능이 향상되고 탑재 항공 폭탄이 많다 또한 8기의 HVAR 로켓을 장착할 수 있는데 대전차 용으로써도 탁월하다 20mm AN M2 기관포 2문을 탑재하였으며 SB2C 헬다이버의 모든 기종은 후방에 2연장 7.62mm M1919 브라우닝 기관총을 사용한다.
빙산작전 (Operation ICEBERG) 은 1945년 4월 1일 ~ 1945년 6월 22일 있었던 오키나와 전투를 말합니다.
일본어 : 沖縄戦(おきなわせん), 沖縄の戦い(おきなわのたたかい), アイスバーグ(氷山)作戦 오키나와어 : 沖縄戦(うちなーいくさ) 영어 : The Battle of Okinawa, Operation Iceberg
찰스 터너 조이 : 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일본군은 전쟁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구역에서는요. 체스터 니미츠 : '제정신이 아니다'는 말만 빼고 다 취소하도록.
- 오키나와 상륙 직후 터너 조이 제독과 니미츠 제독의 대화.
철의 폭풍(鉄の暴風)
이오지마(행정구역상 도쿄도 오가사와라 제도에 속해 있다)를 제외하면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유일하게 현재의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또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치른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지옥을 체험했던[10]미군은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상륙을 감행한다. 이후 6월 말에 함락될 때까지 약 2개월 간 오키나와는 생지옥이 되었다. 오키나와 점령 이후 류큐 독립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될 무렵, 유럽 전선에선 동부 독일을 제외한 전 독일 지역에 서부 연합군이 빠르게 쇄도하고 있었다. 독일의 '라인강 방어선'이 무너졌고 루르 지역에 갇힌 B집단군은 포위되어 수 주 후 항복을 하게된다. 라인강과 베를린 사이엔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할 지형적 이점은 거의 없었으며 그나마 막을 수 있었던 부대들은 그 간의 전투로 포위되어 소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