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세라티’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작년 이맘때였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평일 이른 아침이었고, 나는 콰트로포르테 S Q4를 몰며 한적한 지방 국도를 달리는 중이었다. 눈앞엔 가로수와 시골 풍경 사이로 완만한 코너와 쭉 뻗은 길이 연이어 다가왔다.
콰트로포르테 S Q4
콰트로포르테 S Q4
3리터 V6 엔진의 부드럽지만 맹렬한 회전 질감, 가감속에 맞춰 시프트 패들을 당기면 터지는 배기음, 굽잇길의 기울어짐과 요철을 우아하게 타고 넘는 하체의 조화가 잊을 수 없는 희열을 선사했다. 첨단 슈퍼카도, ‘뚜껑 열린’ 컨버터블도 아닌 5미터 넘는 대형 세단으로 느낀 행복이었다.
르반떼 GT 하이브리드
그 뒤로 마세라티는 기블리와 르반떼에 하이브리드 심장을 달아 출시했다. 감성 빼면 시체라는 마세라티가 감성 대신 이성을 쫓았다니 불안했다. 배기음만 몇 천만 원 한다는 마세라티에게 고작 2리터 4기통 엔진이 가당키나 할는지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마일드 하이브리드로 전동화를 논하기엔 어딘가 궁색해 보이기도 했다.
한편 ‘그래도 명색이 마세라티인데......’라고 믿고 싶었다. 일 년 전 콰트로포르테로 즐겼던 감성의 절반만 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이야기는 기블리 하이브리드를 타고 경북 안동까지 다녀온 소감이다. 걱정은 현실이 됐을까? 기우에 불과했을까?
어느덧 2013년 첫 공개 후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디자인은 여전히 멋들어진다. 정면을 노려보는 공격적인 인상과 커다랗게 벌린 라디에이터 그릴, 팽팽한 캐릭터 라인과 빵빵한 리어 펜더의 볼륨은 스포츠 세단의 정석이라 부를만하다. 창틀 없는 옆 창과 안으로 과감히 눌러 넣은 텀블홈(앞에서 봤을 때, 옆 창이 위로 갈수록 기울어져 들어간 정도)은 공간이나 실용성보다 멋과 낭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다분히 마세라티다운 흔적이다.
리어램프는 최근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내부 광원 그래픽을 고쳤다. 세기말을 장식했던 쿠페, 3200 GT에서 영감받은 부메랑 디자인이다. 프론트 펜더 장식은 파란색을 섞어 하이브리드 심장을 드러냈다. 22년형은 보닛 끝과 C필러의 삼지창 엠블럼도 달라졌더라.
22년형 기블리에 적용된 C필러 삼지창 엠블럼
22년형 기블리에 추가된 'GT' 레터링
실내도 소소한 변화가 눈에 띈다. 가장 큰 차이는 10.1인치 센터 디스플레이. 마세라티가 속한 스텔란티스 그룹의 최신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품었다. 넓어진 창과 높은 해상도, 세련된 그래픽, 빠른 반응이 반갑다. 업계 상위권은 못돼도 이제 중간은 가겠다.
스마트폰 무선 충전패드는 센터패시아 하단에 서랍처럼 숨겼다. 오래된 레이아웃에 추가하려고 얼마나 고민했을까? 낡은 바탕과 일부 차급에 못 미치는 버튼들은 하도 탓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슈트발 끝내주는 이탈리아 신사가 고무줄 늘어난 속옷을 입음 셈이다. 다행인 건, 얼마 전 공개한 신형 SUV 그레칼레의 완전히 새로워진 실내다. 다른 마세라티 라인업에도 확대 적용이 시급하다.
센터패시아 하단에 숨긴 스마트폰 무선충전 ‘서랍’
비상시에 누르기 힘든 비상등 버튼
아참, 지금 중요한 건 디자인이 아니지! 생김새는 그만 감상하고 빨리 달려봐야겠다. 시동을 거니 제법 방방대는 배기음을 토하며 깨어난다. 나처럼 삐딱한 시선으로 ‘마세라티다움’을 평가하려는 사람들에게 첫인상부터 움츠러들기 싫었나 보다.
가장 먼저 알아본 건 힘. 감성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 차가 잘 달릴 때 얘기니까. 일단 숫자를 보자. 최고출력 330마력에 최대토크 45.9kgm, 공차중량은 2,030kg이다. 대중적인 ‘흔차’들 보다야 분명 넉넉하지만, 그렇다고 감동적일 것도 없는 수준. 차 값이나 브랜드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해 보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