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써 50년 세월이 흘렀네.” 박물관 특별전에 전시된 자신의 챔피언 벨트를 마치 처음 보는 유물처럼 들여다보는 사람은 ‘4전 5기’ 신화의 주인공인 권투선수 홍수환이었다. 1977년 파나마 원정 경기에서 카라스키야에게 네 번 다운 되고 나서도 불꽃같은 투지로 KO승을 거뒀던 그는, 이보다 앞선 1974년 WBA 세계 챔피언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자신의 ‘보물’을 배경으로 연신 사진을 촬영했다.
5일 오후 개막한 ‘나의 보물, 우리의 현대사’ 특별전의 무대인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전시를 위해 유물을 기증한 명사들은 “내 물건이 이렇게 역사를 증언하는 유물이 될 줄은 몰랐다”며 입을 모았다.
드라마 작가 이환경씨는 전시장 한편에 자신이 쓴 ‘용의 눈물’ ‘야인시대’ 대본집이 있는 걸 보고 “밖에선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것들을 ‘진짜 보물’로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 옆 모니터에선 드라마 ‘용의 눈물’ 1회 동영상이 고화질로 상영되고 있었다. 방송인 ‘뽀빠이’ 이상용은 ‘우정의 무대’ 사회를 볼 때 입었던 군복을 보자마자 “징그럽다!”고 소리쳤다. “아휴, 저걸 10년 가까이 ‘줄창’ 입고 다녔으니.”
정진석 한국외대 교수는 스승 최준 교수가 쓴 ‘한국신문사’의 초안 앞에서 다른 관람객에게 그 학문적 의미를 설명해 주느라 바빴다.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반도체 코리아’의 서막을 열었던 자신의 보물 256메가D램이 전시된 걸 보고 감회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문정희 시인은 젊은 시절의 육필이 담긴 대학 노트를 보고 문학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함빡 웃었다. 배우인 손숙 전 환경부 장관은 1997년 연극 ‘담배 피우는 여자’의 포스터를 보고 “피울 줄도 모르는 담배를 공연 때문에 하루에 한 갑 반이나 소비했다”고 회고한 뒤 조금 목소리를 낮춰 “저땐 참~ 젊었었네”라고 중얼거렸다.
《양정모》
내년 2월 16일까지 계속되는 이 특별전은 본지 문화면에 지난해 4월부터 1년 반 동안 65회 연재된 기획기사 ‘나의 현대사 보물’을 바탕으로 한 것. 명사 60명의 실물 소장품과 독자 78명의 사진 자료를 통해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되짚어 보는 자리다.
전시 1부 ‘나의 인생, 역사를 쌓다’는 광복과 우리말, 민간 국제 교류, 전통과 역사의 재발견, 민주화와 표현의 자유, 이념 갈등과 화해라는 다섯 가지 주제를 통해 역사의 큰 흐름을 증언할 수 있도록 ‘보물’들을 배치했다.
광복 직후 태극기를 들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촬영한 이종찬 광복회장의 사진 옆으로 ‘그때는 한 반에서 한글을 네댓 명밖에 몰랐다’는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의 증언이 이어진다. 해방 후에야 우리말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국어사전 위에는 신달자 시인의 어머니가 20일 동안 한글을 외운 뒤 딸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에 찾아와 썼다는 ‘일생의 잇지(잊지) 못할 날일세, 엄마에 깁뿜(기쁨)이다’란 방명록 글씨가 걸려 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미국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찍힌 사진 옆에는 이길여 가천대 총장의 옛 청진기와 김장환 목사의 사연이 담긴 성조기가 전시됐다. 1980년대 이산가족 찾기를 배경으로 한 가수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 LP판 옆으로는 남북한이 단일 팀으로 참가한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주인공인 현정화 감독의 사진첩이 펼쳐졌다.
문화사(文化史)를 다루는 2부 ‘나의 인생 문화를 엮다’는 좀더 다채로운 전시 기법을 선보였다. 이기웅 열화당 대표의 소장품과 파주출판도시의 초기 설계 모형을 함께 전시했고, 성우 배한성이 더빙한 애니메이션 ‘형사 가제트’의 목소리는 관람객이 직접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