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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시"는 불교, 도교, 유교의 종합체이다...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의 시에 나타난 하이쿠적 요소
윤 영 순
1. 들어가는 말
하이쿠는 원래 일본에서 생겨난 시 장르지만 이제는 세계인의 관심을 끄는 장르가 되어 미국의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하이쿠 수업을 듣고 직접 지을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오히려 일본의 이웃인 우리나라보다 서양에 더 알려진 느낌이 든다. 그것은 일본의 식민통치 이후 극도로 고조된 반일감정과 수 십 년 동안 국가 차원으로 이루어진 한?일 간의 문화 장벽 유지로 인해 우리가 하이쿠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문화적 사대주의나 국수주의 모두 경계해야 할 사고다. 이 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나마 혹시 우리의 편견으로 인해 놓치고 있을 지도 모를 하이쿠의 미학적 요소를 한 멕시코 시인의 작품을 통하여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는 하이쿠에 대한 소개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단계에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우선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형식인 하이쿠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2. 하이쿠의 성립과 동양사상
일본에는 원래 전통적 시 형식으로 ‘와카’(또는 단카)라는 것이 있었는데, 5/7/5/7/7 의 5행으로 되어있는 짧은 형태였다. 와카는 자연의 섬세함이나 세속적 감정을 노래하는 상류층의 문학이었다. 와카는 한 사람이 5행을 전부 읊기도 하지만, 한 사람이 앞 3행(5/7/5)을 읊고 나면 다른 사람(청자)이 뒤 2행(7/7)으로 화답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후자의 방식에서 앞 부분 5/7/5의 3행만 독립해 나온 것이 하이쿠가 된 것이다. 따라서 하이쿠는 와까의 뒤 2행을 말하지 않고 침묵함으로써 언젠가 누군가의 화답을 기다리는 시 형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이쿠가 불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쿠의 침묵은 ‘의도적 미완성’인 것이다.
하이쿠는 어떤 주장이나 설명, 결론 따위는 뒤의 두 행에 맡겨버린다. 다음 말을 붙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하이쿠는 암시성을 띠게 되고 청자나 독자는 자유를 누리면서 하이쿠의 완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쿠라는 시 장르는 열려있는 것이다. 3행의 시에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는 원래부터 부적절하다. 어쨌든 하이쿠는 짧은 형식으로 인해 독자는 동양화의 여백과도 같은 하이쿠의 침묵을 상상속에서 채워야하는 운명을 갖게 된다.
R. H. 블리스(R. H. Blyth)는 하이쿠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 복잡한 문화관계를 도표로 단순화시켜서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하이쿠는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도교, 유교, 한시가 일본의 토속 신앙과 어우러져 빚어진 결과물로 설명하고 있다.
선불교
대승불교는 본 고장 인도보다 오히려 중국에서 꽃을 피웠다. 그것은 중국의 노장사상이 인간정신의 완전한 해방 또는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나와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에 대한 추구도 대승불교의 우주적 관점과 일치한다. 이 두 사상은 중국에서 선불교라고 하는 합작품을 탄생시켰다. 한편 유교는 극동인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하이쿠에서 정확하게 이것이 유교의 영향이라고 지적하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자연에 대한 긍정, 일상적 삶에 대한 예찬, 검소한 생활 등은 유교적 요소이기도 하면서 딱히 그 영향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문제다. 하이쿠에서 자연을 찬미하는 경향이 보이는데 신도에서도 산과 수목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애니미즘이 아주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 그리고 한자와 함께 일본에 소개된 한시는 그 형식 뿐만 아니라 내용도 변화를 겪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시가 개인의 삶을 역사나 우주적 테마와 연결시키는 거시적 관점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일본시는 개인의 일상적 삶이나 자연의 일부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처럼 보인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작은 사물이나 사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대상을 통해 커다란 세계에 도달하려는 미니멀리즘 성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작은 축소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정원이나 분재, 꽃꽂이 등은 제한된 작은 공간에서 자연과 그것을 조화롭게 하는 음양의 원리를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나타난다.
축소된 자연과 대자연의 일치에 대한 사고는 하이쿠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하이쿠를 짓는 ‘하이진’은 풀 한 포기, 나뭇잎 한 장, 나비 한 마리에서도 온 우주를 발견한다. 대승불교의 제일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인 화엄경은 바로 ‘하나가 전체’라는 사고를 보여준다. 이 경전은 우주만물의 동등한 자격과 아울러 모든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교리가 나중에 선불교로 발전하게 된다. 선불교에서는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원리에서 다양한 사물이 나오고 다양한 사물들은 다시 하나의 사물을 이루는 원리 속에서 합쳐지기 때문에 삼라만상은 연결되어 있으며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그물코에 달린 진주가 자신을 포함한 그물 전체를 비추고 있다는 제석천도 이러한 불교의 우주관을 상징한다. 게다가 업에 따른 윤회의 사고는 가이아의 유기체적인 우주를 뛰어넘어 시간까지도 끌어안는다. 그러나 이러한 화엄의 가르침은 절대적 경지에 이르게 되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접어들게 된다. 스즈키(Daisettz T. Suzuki)는 이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여함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나인 것도 아니며 여럿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인 것도 아니다 … 이 상태는 인간의 사고가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다. 그래서 그것을 일컬을 가장 적절한 말은 여여함일 것이다.
특히 선불교에서 이 깨달음의 순간을 오(悟, 사토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도전통 불교의 기본 이론과는 일치하지 않는 개념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바쇼의 하이쿠를 번역한 『오쿠의 오솔길』의 서문에서 이러한 선불교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하이쿠가 우리에게 깨달음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고 있다고 말한다.
선은 기존의 불교 형식이나 경전 뿐만 아니라 석가와 수많은 대가들의 가르침조차도 불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바로 지금 사토리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선은 단박의 깨침, 즉 돈오를 설파한다. 해탈은 이 세상을 벗어난 곳이나 죽음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이 모든 순간이며 우주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현현의 순간,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이 순간은 시간을 부정하고 우리를 진실과 대면하게 하며 마침내는 우리의 가면을 걷고 발가벗긴다.
3. 멕시코의 하이쿠 수용
스페인어권 문학에 본격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전기 모데르니스모 시기다. 데카당스와 상징주의 작가들이 동양철학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졌듯이 중남미 모데르니스타들도 이국적 정취를 자아내기 위해서 동양적 대상물이나 테마를 채택했다.
그들은 불교와 노자, 선, 신지학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것들이 그들에게 실재에 다가가고 개인적 경험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해 주었으며, 이러한 형이상학적 주제는 당 시대의 예술적 이상에 빛을 던져줄 수 있는 아주 암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극도의 암시성을 띤 하나의 문구를 통하여 일상적 경험 저 너머의 현실을 자신의 시 속으로 불러오고 싶어 했고 독자를 그 세계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게다가 시에서 그 현실의 본질을 찾는다고 말한다. 일부 시인, 특히 아마도 네르보(Amado Nervo), 엔리케 곤살레스 마르티네스(Enrique González Martínez)를 비롯한 몇몇은 “사물의 영혼”이 시의 테마가 되기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들어온 일본의 하이쿠는 동양미학의 정수로 여겨졌다. 멕시코에 하이쿠가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 에프렌 레보예도(Efrén Rebolledo)와 호세 후안 타블라다(Jos? Juan Tablada)에 의해서다. 파스는 「하이쿠 전통」이라는 글에서 이 두 시인을 비교하면서 레보예도보다 타블라다가 더 멕시코의 하이쿠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시사한다.
레보예도가 타블라다에 비해 일본을 더 잘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의 시는 모데르니스모적 수사학에 머무르는 수준이었다. 그가 일본문화를 바라볼 때는 세기 말 프랑스 시인들처럼 언제나 정형화된 이미지로서 바라보았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있어 일본은 라틴아메리카인의 눈에 비친 일본이 아니라 프랑스 파리인들의 이국취향적 시각 속의 일본이었다. 타블라다도 처음 시작은 레보예도와 다를 바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일본시에서 언어사용의 절제, 유머, 회화체, 정확하고 기발한 이미지 취향 등 몇몇 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요소들은 타블라다에게 모데르니스모를 벗어나 새로운 표현방식을 모색하게 하였다.
존 페이지(John Page)의 연구에 따르면, 타블라다가 하이쿠에 대한 자극을 처음 받은 것은 일본인들에게서가 아니라 프랑스인들로부터라고 한다. 시작은 그랬지만 1900년에 『레비스타 모데르나 Revista Moderna』라고 하는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1년 가량 일본에 거주하기도 하면서 지속적으로 하이쿠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1919년에 『어느 하루… Un d?a…』라는 제목의 하이쿠 시집을 출간했고 이어서 3년 뒤에는 『꽃병 Un Jarro de flores』 이라는 하이쿠 시집을 하나 더 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타블라다는 선구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그의 하이쿠는 모방의 차원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지의 비약 같은 하이쿠의 전통적 수사법이나 일본 하이쿠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 곤충, 풍경 같은 동양적 자연물을 그대로 흉내 내어서 사용했다. 파스의 하이쿠는 타블라다보다 더 원형에 가깝다. 파스는 선불교적 내용에까지 관심을 기울였고 이미 이국취향에서 벗어나 하이쿠를 깊이 있게 이해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페이세르(Carlos Pellicer), 하비에르 비야우루티아(Xavier Villaurrutia), 호세 고로스티사(José Gorostiza) 등의 시인들도 타블라다를 신봉하여 하이쿠에 관심을 가졌지만 파스만큼 하이쿠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파스 이후에도 하이쿠를 연상시키는 단시를 조금이라도 실험해 보지 않은 시인이 없을 정도로 하이쿠는 늘 멕시코 시인들의 관심을 끌어온 시 장르다. 그렇지만 두드러진 대가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을 모두 정리해서 열거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현재 멕시코를 대표하는 현역 시인 중에서 하이쿠적 요소가 확연히 드러나는 단시를 많이 쓴 한 시인의 경우를 예로 들어 좀 더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4.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와 하이쿠적 요소
4.1. 자연물의 수용
그러면 여기서 현재 멕시코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으로 시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Francisco Hernández)의 시 중에서 비교적 짧고 기법이나 이미지 면에서 하이쿠와 가까운 시들을 대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마른 소나무
푸른 숲 속에
마른 소나무 한 그루,
... 불꽃.
은빛 물고기
물고기들 반짝이며
삐루나무에서 헤엄치는
달 밤.
위의 두 시는 하이쿠와는 달리 제목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4/7/4, 5/7/5의 음수율을 띠고 있어서 하이쿠의 길이에 아주 가깝다. 「마른 소나무」는 모든 초목이 녹색으로 물들어 있는 계절(여름이나 봄)에 마른 소나무 하나가 돌출되어 있는 풍경을 포착하여 세 줄에 옮겨놓은 것이다. 그냥 자연의 한 장면을 옮겨놓았을 뿐 아무 설명이 더 붙어있지 않다. 이 때문에 독자는 참여의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모든 식물이 푸르러야 하는 것이 당연한 신록의 계절에 유독 한 그루의 소나무만이 죽었거나 말라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녹색과 붉은 색의 강한 대조를 느낄 수 있다. 녹색이 생명의 색깔이라면, 붉은 색은 죽음의 색깔이거나 생명을 태우고 있는 색깔이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조를 넘어 다른 녹색의 소나무들도 결국은 마른 소나무와 같은 운명을 갖고 죽어 가야함을 암시한다. 이러한 대조는 하이쿠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주제 중의 하나다.
「은빛 물고기」는 밤에 달빛이 나뭇잎에 비칠 때의 반짝임을 묘사한 시다. 일반적인 하이쿠는 첫 행에 시간에 해당하는 이미지가 놓이고 다음엔 사물이나 자연에 대한 묘사 그리고 마지막엔 기레지라고 하여 비약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부분이 놓인다. 에르난데스의 앞 두 시는 언어구조상 순서는 다르더라도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만족시킨다. 먼저 시간을 살펴보면, 앞 시는 녹색의 계절인 여름임을 알 수 있고 뒤 것은 하늘에 달이 떠 있는 밤임을 알 수 있다. “cuando la luna” (‘달 떠 있을 때’ 라고 번역할 수 있음)는 ‘접속사 + 주어’로 불완전하게 끝을 맺고는 있지만 나머지 술어는 필요가 없는 문장이다. 여기서 시인의 과감한 생략을 엿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요소인 사물은 각각 소나무와 삐루나무다. 세 번째는 “llamarada”(불꽃)라는 표현과 “peces de plata nadan”(은빛 물고기들 헤엄치는)이라는 표현이다.
위의 세 가지가 하이쿠 시작의 구조상의 요건이라면, 내용상으로는 시간?장소?사물의 3요소가 있다. 이어령은 『하이쿠 문학의 연구』에서 이 3요소를 언급하면서 특히 이때의 시간은 ‘지금’을 나타내고 장소는 ‘여기’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지금과 여기의 공간에 사물이 놓여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쿠는 순간적 자연의 모습을 잘라내어 옮겨놓은 하나의 풍경화다. 그러나 이 풍경화에는 사진처럼 모든 사물을 담고 있지 않다. 불과 몇 개의 사물만 그려져 있다. 다음의 에르난데스의 시도 이러한 하이쿠의 그림에 어울리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새도 없는데
새도 없는데
나무가 혼자 노래 부른다.
이 시는 하나의 시간에 하나의 장소 하나의 사물로 이루어진 동양화를 그리고 있다. 에르난데스의 시에서 특별히 시간을 말하고 있는 단어는 없지만, “No hay un p?jaro”(새도 없는데) 라는 구절은 이 시의 시간이 우리에게 계절 중에는 겨울, 하루 중에는 오후 늦은 시간이나 밤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삼일치를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장소가 여럿 등장하는 하이쿠도 있고 시간이나 장소가 나타나 있지 않은 것도 있다. 사물만을 강조할 때는 장소 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없애고 사물을 클로즈업할 수도 있다. 다만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장소에 하나의 사물을 배치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여길 뿐이다.
이번에는 동양시의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인 정중동의 이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아래의 시에서 “SOL DE INVIERNO”는 추위로 얼어붙은 고요함을 의미한다.
해 뜬 겨울날
해 뜬 겨울날
안개에 흔들리는
목화송이
아무도 없는 추운 겨울 들판에서 추수되지 않은 하얀 목화송이가 울린다, 그것도 거의 무에 가까운 안개에 의해서. 여기서 목화송이가 ‘울린다’라고 표현한 것은 원 시에 ‘목화송이’ 대신 “목화 종”(campana de algodón)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안개가 목화송이를 어루만져서 흔들리는 움직임은 너무나 미세하고 연약한 것이다. 따라서 한 겨울의 고요를 깨기보다는 오히려 그 고요함을 강조하는 역설적 이미지를 주고 있다. 우리는 에르난데스의 이 시에서 기존의 하이쿠를 능가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꽃과 종의 교묘한 결합이다. 목화송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목화의 열매에 붙은 부드러운 섬유지만 그것이 주는 이미지는 화석화된 꽃이라 할 수 있다. 꽃과 종은 하이쿠에서 시인들이 자주 애용하는 소재들이다. 꽃은 삶의 기쁨이며 또한 사라져가는 슬픔이기도 하다. 특히 지는 꽃은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서로 뒤얽힌 모순을 자아낸다. 종소리도 마찬가지다. 소리란 생명의 세계에 속해 있다. 정적, 즉 소리가 없는 것은 죽음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소리는 모든 꽃과 마찬가지로 사라져버린다. 에르난데스는 이러한 꽃과 종에 대한 이미지를 꽃 중에서는 특이한 꽃인 목화를 등장시키면서 종과 결합을 시킨 것이다. 목화의 흔들림이 시각적인 반면에 종소리는 청각적이다. 시인은 공감각적 표현을 통해서 두 가지 상반된 요소를 시 속에서 일치시키고 있다.
허공에 멈춰라
공중에 멈춘 벌새
날갯짓 하는
한 송이 꽃
위의 시에는 벌새가 등장한다. 하이쿠에 나오는 새는 주로 참새지 벌새가 아니다. 하지만 시인은 멕시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벌새를 소재로 사용한다. 이국적 소재가 아니라 자기 주변의 자연과 환경에서 한 장면을 골라내는 것이 하이쿠라면 「허공에 멈춰라 Tente en el aire」는 그 점을 충족시킨다. 벌새의 날갯짓과 꽃이 동격을 이루고 있는 이 시는 언제나 벌새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행위인 날기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다. 나비든 새든 날아다닐 때 가벼움을 유지할 때 그 존재가 빛나는 것이다. 날개를 접고 내려앉아 있는 모습은 무겁다. 그것은 울리지 않고 있는 종이다. 그래서 시인은 벌새의 비상을 찬양한다. 그 비상은 날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꽃에 가늘고 긴 부리를 꽂고 꿀을 빨고 있는 벌새의 날갯짓이 너무 빨라서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듯한 모습이 마치 허공에 활짝 피어있는 한 송이의 꽃처럼 느껴진다. 다만 결국에 가서는 그 날기가 멈추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슬플 뿐이다. 그래서 한 번 자연에게 명령조로 “허공에 멈춰라”라고 소리쳐보는 것이다. 물론 자연은 그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4.2. 선불교적 요소
현현 I
소년 어른 숲
묻는다
밀렵꾼이 무어냐고
한 방
두 방 세 방
두
번은
과녁에
명중했다
숲
이 시는 형태상으로는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공간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 때는 하나의 하이쿠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시인이 참지 못하고 앞에 약간의 배경 설명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그리 흠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고도 독자가 즐길 수 있는 부분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시각적 효과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밀렵꾼이 무어냐고”라는 질문은 가운데 줄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어른”이 하지만 그 내용은 “소년"이 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소년은 어른 속에 들어있는 분신이며, 따라서 이 시의 등장인물은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총성은 모두 세 방이 있었는데 그 중의 두 발만 과녁에 맞고 다른 한 방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세 번째 줄에 위치했던 “숲”이 자리를 옮겨 가운데 “어른” 줄의 밑에 와서 놓여있다.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소년”과 “어른”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숲”만 남았다. “어른”이 “숲”과 일치가 된 것이다. 세 번째 총알이 내는 총성은 하이쿠의 종소리처럼 긴 여운을 남기며 시인과 숲을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이쿠가 추구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자연합일?물아일체의 경지와 다르지 않다. 나와 자연이 이미지 속에서 하나가 되는 테마로 인해 하이쿠는 종종 선불교와 관련을 맺는다.
하이쿠는 순간적이며 심오하고 일시적이며 영원한 하나의 비젼을 담은 고상한 단가다. 하이쿠는 일종의 깨달음 상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깨달음은 선불교에서 공안 수행에서 경험하는 내용과 비슷하다. 게다가 하이쿠는 이 깨달음을 독자에게 전달하려 한다 -토시로 다나카
선은 마음을 공으로 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마음을 공백으로 한다는 것은 나와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의 주체까지도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이다. 즉 존재를 무화시키는 일이다. 그릇은 비어있기 때문에 물건을 넣을 수 있고 방도 비었기 때문에 사람이 들어가 살 수가 있다. 하이쿠는 마음을 비우고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하기를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말로 설명될 수 없다. 세상이란 발생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세상은 어떤 것인가가 아니고 단지 그 자체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하이쿠는 세상에 대한 설명이나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그 자체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기 위해서 한 순간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에르난데스의 하이쿠 풍의 시에서는 자주 작가의 관념이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말이 ‘그의 시가 좋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하이쿠와의 차이점을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하이쿠도 하나의 시이기에 작가가 있기 마련이고 그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시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하이쿠의 작가는 시 속에 숨어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드러나 있더라도 인위적으로 자연을 조작하지 않는다.
정확히
연못 한 가운데
백조 한 마리
물에 비친
목 그림자에
질식하고 있다
백조의 목과 물음표의 연상은 모데르니스모의 냄새가 난다. 루벤 다리오는 『불경스런 글 Prosas profanas』에서 “커다란 흰 백조의 모가지가 내게 묻고 있다”(el cuello del gran cisne blanco que me interroga)라고 노래했다. 보통의 백조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질식하지 않는다. 이 백조는 곧 시인 자신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연못에 비친 백조 목의 반영은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본 모습을 보기를 갈망하며 자신의 허상에 절망해 하는 실존적 물음표다. 그래서 백조는 질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죽어가는 백조의 시선에서 더 나아가 이 전체 풍경을 또 하나의 그림자로 내려다보고 있을 다른 시선을 읽어낼 수 있다. 바로 라캉이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의 ‘나' 말이다.
대개 하이쿠에 작가의 목소리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독자의 다양한 해석 속에 살아있을 뿐이다. 바쇼의 유명한 하이쿠 “해묵은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런가!”에 나오는 연못에는 일상적으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장면, 즉 한 마리의 개구리가 연못에 뛰어드는 행위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쇼의 또 다른 하이쿠 “말 위에 타고 가는 내 그림자 심연 속에 흔들리네”에는 시인이 직접 등장한다. 에르난데스의 그림자나 바쇼의 그림자나 모두 허구적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바쇼는 그냥 말이 걸어감에 따라 자신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자연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 자신이 등장하는 하이쿠에 있어서 조차 시인의 목소리는 절제되어 있다. 에르난데스의 경우에는 ‘목 그림자에 숨이 막힌다’라는 표현 속에 자신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이입되어 있다.
4.3. 이미지와 유머
다음의 시를 읽어보면 그의 시의 출발이 하이쿠와 다름을 알게 된다. 에르난데스는 현실 또는 실재를 시로 옮기려는 시인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적확한 언어의 선택에 고뇌하는 시인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시 쓰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메타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말로
옮기려는 순간
단어들은
그의 눈을 뽑아버렸다
에필로그
시는
사건 현장에
살인자가 남기는 유일한 흔적
(백지는
완전범죄다)
하이쿠의 시인은 현실의 재현에 대해서 특별한 강박관념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에르난데스의 하이쿠에 관한 관심도 사실은 이런 재현 의식의 한 실험이다. 시인이면서 비평가이기도 한 비센테 키라르테(Vicente Quirarte)는 “현실을 단순화시키려는 노력이 그를 중국화의 투명성과 유사한 결론에 이르게 했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분석은 적절하다. 말이란 것은 기표가 기의를 담지 못하는 불완전한 도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인은 이러한 불완전한 도구를 가지고 우주의 비밀을 열려고 하고 있으니 두 번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더 큰 죄악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하얀 백지가 완전범죄라는 표현은 시인이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완전 범죄라는 말이다. 그러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그러지 못한다는데 시인의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눈 덮인 평원을 달리는 고삐 풀린 말처럼 백지 위에 흩어진 어지러운 말들에게 질서를 부여해줄 의무가 시인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질주
얼마나 많은 단어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
하얀 평원을 달리고 있는가?
그래서 에르난데스가 제일 먼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 이미지의 세계다. 에즈라 파운드에 따르면 이미지는 ‘한 순간의 지적이고 정서적인 복합체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갑작스런 해방감 또는 해탈 감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의 이런 이미지에 대한 생각은 선불교에서 각의 순간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다. 또한 ‘순간적 이미지 포착’은 하이쿠의 기본 특성이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지금’의 순간적 상황을 하나의 이미지로 제시해 주는 것이 하이쿠이기 때문이다. 에르난데스는 에즈라 파운드의 시 「지하철역에서 In a Station of the Metro」를 거의 정확한 스페인어 번역으로 옮겨놓는다. 한 번 영어로 된 원시와 에르난데스의 시를 비교해보자.
In a Station of the Metro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EZRA POUND EN UNA ESTACIÓN DEL METRO
La aparición de sus cambiantes rostros
en la multitud:
pétalos en una oscura, húmeda flama.
두 시의 차이점이라고는 에르난데스의 시 제목에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라는 이름이 덧붙은 것과 첫 행에 “cambiantes”라는 단어가 삽입되었고 마지막 행에 “bough" 대신 “flama”가 사용된 것이 다른 점이다. 제목 뿐만 아니라 원시의 저자도 밝혀놓았으니 우선 표절은 아니다. 이미지즘은 서양의 전통적 시작과 단절을 꾀한 동양풍의 새로운 시학이라는 차원에서 그 대표자인 에즈라 파운드가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일반 군중들보다 두드러져 보였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나 요소들이 다른 작품들 속에서 두드러져 보임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멕시코 시인의 단시가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그 이미지가 유머, 아이러니와 자주 결합한다는 사실이다. 서구에도 유머와 아이러니의 전통이 있으므로 이것이 반드시 하이쿠의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순간적 이미지 포착과 더불어 유머와 아이러니 또한 하이쿠에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닫힌 밤
양키 스타디움
개똥벌레
가득 찬 플라스크.
크리스토퍼 거리(그래피티)
아무도 운동하지 말아요.
장수할 위험이 있어요.
위의 두 시 모두 현대 미국인의 생활을 스케치해 놓은 듯 보인다. 그냥 단순한 스케치가 아니라 약간의 풍자도 곁들여서 말이다. 첫 번째 것은 야간 경기가 펼쳐지는 야구 경기장을 개똥벌레가 가득 담긴 유리 플라스크에 비유했다. 그 비유는 너무나 참신하고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온 세상이 깜깜한 한 밤중에 경기장만 환한 대낮처럼 닫힌 공간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와글거리고 있는 모습을 외계인이 보고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두 번째의 「크리스토퍼 거리(그래피티)」라는 시도 현대 미국인의 생활을 그려놓은 것이다. 그들은 아침에 거리를 달리거나 공원에서 운동을 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다. 물론 건강하고 오래살기 위해서다. 시인은 이러한 그들의 행위 속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욕망을 본다. 그리고 “장수할 위험이 있어요”라고 말함으로써 더 오래 사는 것이 과연 더 좋은 것이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보면 더 산다는 것은 더 많은 고통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시인의 생각까지도 엿보인다.
5. 맺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멕시코에서 하이쿠가 소개 발전된 과정과 멕시코의 시인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의 하이쿠 풍의 짧은 시들을 중심으로 하이쿠와 비교해 보았다. 사실 스페인어로 일본어의 음절수에 맞추어 5/7/5로 하이쿠를 짓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체로 한 두 음절이 하나의 뜻을 갖는 일본어와 같은 의미의 내용을 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음절이 필요하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일상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들(잠자리, 매미, 나비, 벚꽃, 국화, 연꽃, 매화 등)이 서구인들에게는 이국취향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스페인어 사용자들에게 좋은 하이쿠를 쓰기 위해 반드시 이국취향적 소재들을 사용해야 한다거나 5/7/5의 음수율을 맞추어야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에르난데스는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선배 시인들이 했던 하이쿠 형식과 소재에 대한 단순한 모방을 되풀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위에서 그가 자신의 시적 토양이라고 할 수 있는 모데르니스모, 이미지즘 같은 서구시의 전통에 하이쿠적 요소를 잘 접목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이쿠를 단순히 모방하는 차원을 넘어 자기 것으로 완전히 이해한 뒤 창조적으로 시를 쓰려고 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이따금 은유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아주 절제를 하고 있고 작가의 개입이나 설명도 시를 읽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을 시로 옮기려는 그의 욕망은 끝없는 도전을 의미한다. 일단, 하이쿠풍의 단시를 통한 현실로의 접근 시도는 그의 시 활동에 있어서 작은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