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72
■ 1부 황하의 영웅 (72)
제2권 내일을 향해 달려라
제 11장 떠나가는 배 (3)
세자 급(急)은 어머니 이강(夷姜)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였다.
그 자신 세상 살기가 싫어졌다.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한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는 혼자 후원을 거닐며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아아, 어쩌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이런 비탄의 소리가 그의 입에서 자주 흘러나왔다.
예전부터 그의 주변에는 공자 삭(朔)의 심복들이 맴돌고 있었다.
후원을 거닐며 내뱉은 이 탄식소리는 즉각 공자 삭(朔)에게 보고되었다.
"세자가 매일 후원 으슥한 곳을 거닌단 말이지?“그의 두 눈에서 강렬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위나라 궁중 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 세자 급(急)이 이강(夷姜)의 죽음에 앙심을 품고 비밀리 사람을 모으고 있다.
세자의 성품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며 일축하였으나,
위선공(衛宣公)과 선강(宣姜)만은 눈꼬리를 날카롭게 치켜떴다.
"세자가 딴짓을 저지르기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매일 밤 선강(宣姜)은 위선공(衛宣公)을 졸랐다.위선공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 삭(朔)은 세자 급(急)을 제거할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때마침 제희공이 선대부터의 원수국인 기(紀)나라를 치려고 위나라에 원군을 요청해왔다.
위선공과 선강(宣姜)과 공자 삭(朔)은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위나라가 군대를 파견하되, 그 규모와 일시를 의논한다는 명목으로 먼저 세자 급(急)을
제나라로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우리나라에서 제나라로 가려면 반드시 뱃길로 신야(莘野)라는
곳까지 가서 그곳에서 다시 육로 길을 가야합니다.
따라서 사신으로 떠나는 세자의 뱃머리에 백모기를 꽂아 표시했다가,
세자의 배가 신야 나루터에 닿는 순간 자객을 시켜 해치우면 아무도 우리가 세자를 죽인 줄을
모를 것입니다.“공자 삭(朔)은 어머니 선강(宣姜)에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좋은 방법이다.“
선강도 찬성했다. 그런데 이 암살계획을 공자 삭(朔)의 친형인 공자 수(壽)가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심성이 바르고 어진 공자 수였다.
그는 어머니와 동생이 세자 급(急)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내궁으로 달려가 어머니 선강(宣姜)을 만류했다.
"세자 형님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객들을 물리치십시오.“
그러나 선강은 오히려 공자 수(壽)를 야단치듯 설득하려 들었다."이는 모두 네 아버지의 뜻이다.
세자가 후일 우리 모자에게 복수할 뜻이 있음을 알고 미리 후환을 없애려 하는 것이니,
너는 아무소리 말고 가만히 있거라.절대로 남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
세자 급(急)이 죽으면 위나라 강토는 모두 네 것이 될 것이다."
공자 수(壽)는 아무리 간해보아야 소용없음을 알았다.그는 우울한 마음으로 내궁에서 나왔다.
이복형인 세자 급(急)이 불쌍하고 가련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정신없이 걷다보니 그의 발길은 어느새 세자궁의 뜰 앞에 와 있었다.
"네가 여기 웬일이냐?“세자 급(急)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그 순간, 공자 수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간절하게 말했다."형님께서 이번에 제나라로 가시려면 신야(莘野) 들판을
지나가야 하는데,아무래도 그 곳에서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차라리 형님께서는 이번 기회에 멀리 다른 나라로 도망가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내궁에서 엿들은 위선공과 선강과 공자 삭(朔)이 꾸민 음모를 소상히 들려주었다.
그런데 이상했다.공자 수(壽)의 말을 들은 세자 급(急)은 놀라거나 두려워 하기는 커녕
오히려 초연한 표정으로 공자 수(壽)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분부를 따르지 않는 것은 불효요, 군주의 명을 쫓지 않는 것은 불충이다.
불효와 불충으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일을 불의(不義)라고 한다.
내가 어찌 이 한 목숨을 살리려고 불의한 일을 행할 것인가. 아우는 나를 위해 너무 근심하지 마라."
어머니 이강(夷姜)의 죽음 이후 이미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세자 급(急)이었다.
진흙탕 같은 세상살이, 특히 공실의 권력다툼과 금수보다도 못한 불륜 행위 등에 환멸과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죽여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자 수(壽)로부터,- 아버지와 서모가 형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세자 급(急)은 오히려 마음이 호수처럼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 뒤, 세자 급(急)은 위선공의 부름을 받고 궁정으로 들어갔다.
위선공은 그에게 백모를 내주며 명을 내렸다."제나라로 가서 언제 어느 때 군대를 보내면
되겠느냐고 알아보고 오라. 이 백모 깃발은 네가 위나라 사신임을 표시하는 깃발이니
반드시 뱃머리에 꽂아두라.""소자, 아버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세자 급(急)은 이렇게 대답하고 배를 타기 위해 그 길로 강가로 나왔다.
그때 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자 수(壽)가 그의 뒤를 따라와 울면서 권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형님께서는 어서 도망가십시오.“
그런 공자 수(壽)를 향해 세자 급(急)이 처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사랑하는 동생아, 나는 괜찮으니 더 이상 따라오지 말고 어서 돌아가거라."
떠밀다시피 저지하는 바람에 공자 수(壽)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떠나는 세자 급(急)의 그 의연하면서 처연한 모습이 못내 눈앞에서
지워지질 않았다.'아아, 세자 형님은 진실로 의(義)와 인(仁)을 아시는 분이다.
그런 분을 그냥 덧없이 죽게 할 수는 없다.더욱이 형님이 돌아가시고 아버님께서
나를 세자로 봉하시면 나는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할 것인가.‘
공자 수(壽)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형님은 아비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지만, 형님없는 동생 또한 어디 있겠는가.
가자, 내가 가자. 내가 형님 대신 신야(莘野)들판으로 가자.만일 내가 자객들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아버님이 듣게 되면 반드시 느끼고 깨달으시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효(孝)의 길이다.또한 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길이다.'
마침내 공자 수(壽)는 결심했다.그러자 한시가 급했다. 그는 서둘러 술상을 준비하여 강변으로 달려갔다.
그가 강가에 도착했을 때는 세자 급(急)의 배가 돛을 올리고 막 출발하려 할 때였다.
7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