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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Ⅱ부. 빨치산과 겪은 6‧25전쟁 <순 담>
1. 폭풍우의 전야
나는 1946년부터 빨치산들이 준동하는 곳에서 6‧25전쟁을 겪게 되었다. 해방 후 내가 본 초기의 빨치산들은 무장이 빈약했다. 상급지휘관 정도라야 러시아제 때때권총을 폼 나게 차고 나머지 대원들은 구구식, 삼팔식, 사사식 같은 단발식 소총 몇 정에 그나마 실탄이 귀해서 중요한 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대부분은 소총모양으로 깍은 목총에 단검을 꽂아 쓰고 긴 칼과 죽창이었는데 1948년 10월 19일 여수14연대가 반란군이 되어 국군에게 소탕되면서 일부가 빨치산으로 흡수되었다. 반란군들이 갖고 온 8연발-미제M1소총과 기관총, 박격포로 무장한 빨치산들을 반란군이라고 불렀다.
48년 유치면장과 지서장이 경찰관들과 탄 스리코터가 반란군의 습격을 받아 몰살당한 후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20연대의 2개 중대가 반란군을 잡기 위해 유치로 내려왔다. 학교근처에 천막을 치고 1개 중대씩 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남은 1개 중대는 학교운동에서 훈련을 했다. 무더운 여름철인데도 허리에 실탄8발들이 탄창이 붙은 탄띠에 대검을 차고 철모를 쓴 채 야전 삽과 반합이 붙은 배낭을 메고 M1소총을 앞에 들고 뛰고 엎드리고 기고 구르기를 매일같이 반복했다. 나는 국군아저씨들의 이런 저런 훈련을 지켜보는 재미에 푹 빠져 집에 돌아갈 생각을 깜빡 잊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M!소총을 오른 쪽 왼 쪽 어께위에 바꾸어 언 졌다 내렸다 하면서 36방으로까지 흩어졌다가 다시모이는 절도 있는 제식훈련이 너무 보기 좋았다. 한참 하던 훈련을 마칠 때는 운동장 큰 벚꽃 나무아래에서 두 손을 허리춤에 언 고 좌우로 반동을 하면서 “남아 이십대 장군 남이장군이 남겨 논 그 말씀 가슴에 담고……”라는 군가를 부른 후에 네 명씩 총을 기대어 세우고 휴식을 했다. 군인아저씨들이 뿜어내는 담배연기와 땀에 저린 파란군복에서 배어나오는 이상한 냄새에 매력을 느끼면서 커서 군인이 되고 싶었다. 결국 그 꿈이 이루어져 4‧19를 마치고 바로 군에 입대하여 미8군 카투사로 복무하다가 광주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가 되어 68년 1‧21사태 때 전방5분대기소대장으로 69년에는 베트남전 중대장으로 실전에 임했다.
장흥군 유치면에 주둔하고 있는 광주20연대는 국방경비대 최정예부대였다. 최신식 미군장비로 무장하고 강력하고 철저하게 전투훈련을 하면서 치밀하게 소탕작전을 전개하는 바람에 빨치산들이 겁을 먹고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아무데도 나타나지 못했다. 48년 가을 추수가 시작 될 무렵 어디서인지 후생사업을 하는 군인트럭들이 장작을 실러 보림사 쪽으로 들어갔다가 빨치산들의 기습을 받아 빈 트럭으로 사상자만 실고 빠져나왔다. 이 사건으로 경계가 심해진 가운데 면 전체의 축제인 가을 운동회가 한참이었다. 장가를 들어 애 아빠가 되고 멀대 같이 힘이 센 장정들이 5,6학년에 있어서 홍 청팀으로 나누어 릴레이를 하고 기마전을 연습할 때부터 전쟁을 하는 분위였다. 나는 용감한 군인들과 기마전의 불꽃 튀기는 접전을 보고 달리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군대시절은 물론 지금도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운동회가 끝나고 서리가 많이 내리는 늦가을 어느 날 광주연대본부에서 높은 사람이 내려와 활동사진을 보여준다고 학교로 다모이라고 했다. 나는 일본에서 무사영화를 봤는데 이곳사람들은 진기한 활동사진을 난생처음으로 볼 수 있는 기회라 어른아이들 할 것 없이 각 동네마다 저녁을 일찍 해먹고 몰려나왔다. 엄하게 차려입은 대대장이라는 분이 주민들에게 “여러분을 위하여 반란군을 소탕하러 와 있는 군인들에게 적극 협조하는 뜻으로 반란군이 나타나면 즉시 신고를 해야 합니다. 만일 반란군에 협조한 자는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 입니다”라는 연설을 마치고 영화를 돌렸다. 흑백화면에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영부인이 손을 흔들며 꽃전차에 오르는 장면이 나오고 다음 장면에서 펑하면서 영사기가 고장 나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군인들 덕에 생활이 안정되면서 면에 다니시는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동생인 김형권이 아버지와 지서순경들과 은어를 잡으러 가셨다. 7.8월이면 어린애 팔뚝만큼 자란 은어들이 큰 돌이 듬성듬성 있는 용소 위 송들 앞 여울물에서 떼를 짓고 있다. 총을 든 순경이 총구를 아래로 한 채 금방 쏘려고 손가락을 방아쇠에 대고 있다가 격발이 되어 뒤에 있던 김명덕씨가 쓸어졌다. 실탄이 오른쪽 무릎 바로위로 관통해 나가 급히 광주로 옮겨가 수술을 받고 결국 그 무릎 위를 절단하고 양쪽으로 목발을 짚어야 걷게 되었다.
고요한 폭풍우의 전야 같은 49년이 저물어 가는데 지서에 방벽을 더 튼튼하게 쌓는 부역이 시작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전투경찰이 증강되면서 군인들이 안보이지 않아 친구를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 무렵 나는 책보자기를 매고 다니고 싶어서 집에서 준 두 번째의 가방도 아이들이 우체부라고 건드릴 때 기회다 싶어 벗어 던져버리고 왔다. 어머니가 야단을 치면서 여기는 일본이아니라고 하시면서 내 손을 잡고 가방을 버린 지점으로 달려가 봤으나 가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처음으로 매를 드시고 섭섭해 하시면서 결국 책보자기를 구해주어서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교과서는 가방을 버릴 때 없어졌고 새로 공책과 연필을 사서 필통에 넣고 몽땅 책보에 싸서 왼쪽어깨위에서 오른쪽 어깨 아래로 질끈 동여맸다. 또래들도 우체부라 놀리지 않고 연필이 필통 안에 딸랑거리는 게 기분 좋았다.
겨울에는 부산면 구룡리 큰 외가 집에 제사가 몇 번 있었다. 이번에도 어머니를 따라 외가 집에 제사를 지내려가 외종형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밤에 마당건너 헛간에 있는 칙간에 가는 게 재미있었다. 부엌 옆 외할머니가 거쳐하시는 방 건너에 있는 칙간은 위에서 변을 보면 아래서는 여러 마리의 돼지들이 꿀꿀대고 나와 변을 서로 먹겠다고 밀고 받고 하는 게 볼만했다. 구룡리 앞들은 장흥군내에서 제일 크고 넓은데 김대중 대통령 때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했던 김태정씨가 태어난 곳이다. 유치면에서 문중전답을 관리하시는 둘째 외숙께서는 은어낚시와 사냥의 도사셨는데 대식이 외종형과 나를 읍내를 지나서 바다를 끼고 있는 용산면 이모님 집에 가서 사냥개를 데려오라는 심부름을 보냈다. 한나절이 걸려 이모 집에 가 누런 진돗개와 온몸에 검은 줄무늬가 칙칙하게 난 사냥개를 개 주인을 동행하여 데려왔다. 바위틈새에 굴을 깊게 파고 동면을 하는 오소리 굴을 사냥개가 찾아내자 생솔가지와 마른 고추대를 굴속으로 태워 독한 연기 때문에 밖으로 튀어나오는 오소리를 먼저 몽둥이로 타격해서 사냥개가 두 마리가 달려가 잡게 했다.
2. 방호산 부대
1950년이다. 나는 책가방을 고의로 거듭 잃어버리고 책보자기를 맨 대가로 왕따를 면하게 되어 우리말도 잘하게 되었다. 봄을 맞아 누나가 졸업을 하고 나는 3학년이 되면서 내 바로 다음 설자가 1학년이 되었는데 아직 말이 서툴고 큰 눈에 겁이 많아 염소를 무서워했다. 형 누나 때부터 계속 두 명씩 학교에 다니게 되어 서로 의지가 됐다. 나는 같은 또래들과 어울리면서 학교방과 후에는 장터 면사무소에 들려 아버지가 주시는 돈으로 ‘오다마’라는 큰 사탕을 사 입에 넣고 물가에서 놀다가 집에는 늦게 들어갔다.
우리 집은 외가 집에서 준 논 다섯 마지기와 밭 너마지기가 있었는데 ‘송들’ 논에는 멧돼지들 때문에 벼대 크고 이삭에 붉은 빛과 긴 수염이 달린 ‘다마금’을 심고 ‘엉골’ 논에는 수염이 없고 수확이 많은 금계옥을 심었다. 밭에는 목화와 콩을 많이 심고 찰옥수수와 단수수 팥 참깨를 심어 가꾸시는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일을 도왔다. 모내기를 끝내고 퇴비용 풀베기가 한창일 무렵 따발총과 긴 장총을 맨 인민군들이 면에 들어왔다가 떠나고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세포조직책이라며 북한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사람이 지역 빨치산들을 다그치면서 중학생들을 앞세워 인민소년단을 조직했다.
학교공부는 중단 된 채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으면서 장흥중학교에 다니는 초등학교 남녀 선배들이 우리에게 북한노래를 가르치고 빨치산을 장려하는 연극을 했다. 이런 와중에도 가을농사가 골고루 잘되고 송들에서는 멧돼지가 덧 채 사라져버려 그 후에도 멧돼지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어머니는 기름진 다마금 햅쌀로 밥을 지어 멸치 젖에 고춧가루와 참깨가루를 뿌려 무채를 만들고 앞 냇가에서 잡은 쏘가리와 모래무지에 덜 익은 호박을 썰어 넣어 조림을 맛있게 해주셨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전투경찰대가 잠시 들어왔다가 나간 후로 유치면 일대는 빨치산들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는 장흥군 인민위원회세포조직이 들어와 있고 우리 집 안방은 참모장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민위원회에서 우리 동네와 일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른이 신을 수 있는 짚신을 한 가정 당 열 켤레씩 삼아노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인민군○○부대가 이곳에서 저녁을 먹는다며 400명분 저녁을 준비하고 짚신도 다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공수평 정자나무 앞 빈 논에 여러 개의 솥을 걸어 밥을 짓고 소를 잡아 국을 끓이는 동안 장흥빨치산 기동대가 앞 뒤 산에 경계를 섰다. 짧은 초겨울해가 산 너머로 기울고 있을 때 어디선가 빨치산들과는 다른 복장과 무장을 한 인민군들이 말을 탄 지휘관을 앞세우고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지방빨치산간부들이 깍듯이 대하는 인민군들은 논바닥에 짚을 깔고 저녁을 먹으면서 주먹밥과 짚신을 챙겨 넣고 주변이 어두워지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낙동강전투에서 유엔군에 밀려 후퇴한 일명 방호산부대로 인민군6사단장이던 방호산과 그 부하들이였다. 그들은 실탄을 아끼면서 의복과 신발 보급을 받을 수 없어 짚신을 구해신고 지방 빨치산들이 제공하는 밥을 먹어가면서 북으로 돌아가려는 중이었다. 하지만 여의치 않아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후일 방호산은 유격활동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고 나머지도 지리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사람씩 최후를 맞이했다.
인민군들이 다녀간 후 경찰들이 대대적으로 들어와 공수평과 강동아래 마을까지를 지서에서 가까운 갈모리로 소개시켰다. 무슨 일이 벌려지려나 싶어 우리 집은 갈모리 입구 외딴집 문간방으로 옮겨갔다. 낮에는 전투경찰들이 보림사까지는 들어갔다 오는 모양인데 봉덕리 위쪽 죽동 산태몰 암천리 일대는 빨치산들의 해방구 그대로였다. 음력설을 지내고 난 어느 날 밤 때 아닌 징소리와 꽹과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횃불들이 앞 내가에서 번쩍이면서 함성이 울렸다. 지서에서 경찰들이 쏘아대는 총소리가 콩 볶듯 하는데 양쪽 고지에는 봉화가 오르고 경찰들을 조롱하는 욕설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빨치산들에게 동원된 산골주민들이 처대는 징과 꽹과리 소리가 더 커지고 횃불은 도깨비불처럼 요동을 치면서 지서를 향해 좁혀들고 있었다. 저들은 국군을 <누렁개> 경찰은 <검둥개>라 하는데, 극도의 공감에 빠져든 경찰들을 ‘검둥아 워리-검둥아 워리’ 하면서 힘 빼기 심리전을 펼치다 새벽녘에 일단 물러갔다. 경찰들은 자기들만 살겠다고 지서 외부 대나무울타리에 붙은 여래의 초소에 소개해온 주민들을 죽창만 들고 방패막이로 세웠다. 대나무울타리 안쪽은 대나무를 날카롭게 만들어 바닥에 촘촘히 박아둔 해자가 있고 그 다음에 돌로 두껍게 쌓은 토치카 안쪽에서 경찰들은 총구만 내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우리가 머무는 집 앞 논가에 남색치마로 덮인 바지게가 보여 가까이 가보니 피가 흥건하게 고여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난해 봄 갈모리 김아무개에게 시집간 새색시를 경찰들이 붙들어다가 죽여 버린 것이다. 사연인즉 갈모리에서 장흥중학에 다니는 김아무개와 공수평 장씨 집안의 규수가 결혼을 하고 신랑은 읍내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중에 6‧‧25가 났다. 그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예외 없이 공산당 선무활동에 이용되다가 대부분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었다. 이무렵 빨치산들이 군경가족을 끌러다 죽이고 경찰들은 빨치산들에게 가족을 처참하게 잃고 지서를 습격당하면서 악이 받쳐 빨치산에 대한 보복으로 장 여인을 살해한 것이다. 죽은 장여인은 공수평에서 우리고모 댁 사촌으로 마음씨와 품행이 고운 절세미인 이라 아는 이들은 모두가 애통해 하면서 경찰들을 증오했다.
빨치산들이 전선줄을 절단하고 도로와 빈재일대에 장애물을 설치해두고 매복해 있는 상태라 경찰병력을 실은 차량이 들어오지를 못한 채 날은 저물었다. 사방이 어두워지자 유치지서 경찰들은 무너진 대나무 울타리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돌격대들과 최후의 결전을 벌리게 되었다. 손에 도끼나 톱 낫을 들고 지서를 부시는 데 동원된 주민들은 마치 독한 고량주에 취한 상태로 징과 피리소리를 듣고 무작정 돌격하는 중공군들처럼 이었는지도 모른다. 빨간 불꼬리를 달고 날아가는 예광탄은 보기도 좋은데 휙휙 소리만 내고 스쳐가는 총알 때문에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서 밖을 보니 어제보다 더 많은 횃불이 냇가 주변에서 지서를 에워싸고 있었다. 빨치산들은 실탄이 바닥나 무방비 상태가 된 경찰들을 처치하고 무기와 의복을 수거한 후 식량과 기타 전리품은 민간인들에게 지우고 가면서 지서를 불태워버렸다.
3. 빨치산의 소멸
51년에 들어 지배하는 세력이 자주 바뀌었다. 지서가 무너진 후라 빨치산들에 의해 또 짐을 싸매고 살던 동네로 다시 들어가야 했는데 얼마 안 되어 경찰토벌대가 다시지서를 접수하고 지서를 복구하기위한 부역을 나오라 했다. 공수평 위쪽사람들과 우리강동사람들도 암천리 쪽 깊은 곳으로 피해버리고 우리집에서 형이 부역을 나다녔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더운밥을 지어 내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날도 나는 어머니가 싸주신 점심밥을 형한테 가져다주어 먹게 하고 빈 그릇보자기를 들고 집으로 오는데 길 양편으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내려오다 나를 잡아 세웠다. “야 꼬마야 너 지금 어디 갔다가 오냐”며 다그쳐서 나는 사실대로 “우리 형이 지서에서 일하는데 점심밥 가져주고 오는 데요”라고 대답했다.
나를 붙잡고 있던 군인이 “그러면 너의 집이 있는 동네가 어디냐”고 물어 손을 들어 동네를 가리키려는데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나는 “저기 연기 나는 데가 우리 동네 강동 인데요”라고 하자 군인은 급히 나를 데리고 뛰어가 중대장에게 사실을 보고했다. 이에 중대장은 즉시 이 아이가 사는 마을에는 불을 지르지 말고 불을 다 끄라고 했다. 나는 군인에게 손이 잡혀 금방 동네에 도착했는데 명령을 받고 군인들은 철모를 벗어 미쳐 물이 없는 데는 소변을 떠다가 불을 끄고 군인들도 모이고 동네사람들도 모였다. 중대장께서는 나를 세워놓고 “오늘 우리가 이 아이와 마나지 못했으면 이 동네는 불타버릴 뻔 했는데 천만다행입니다”라고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2월 하순경 우리 동네 주인이 또 빨치산으로 바뀌었다. 우리 집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빨치산 간부가 밤에는 형과 나를 불러 동구 밖에 경계를 서라고 했다. 그날도 경계를 서려나가려는데 마당가운데 모닥불이 펴있고 어디에서 반동으로 붙잡혀온 어린애를 포함한 일가족이 초죽음이 되어 쪼그리고 있었다. 어떻게 될 것인지 빤한 일이지만 그냥 못 본채 하고 밖으로 나와 외갓집 밭둑아래 앉아서 북두칠성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도란도란 사람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죽이고 살펴보니 아까 우리마당에 있던 사람들을 줄로 묶어 빨치산 두 놈이 앞뒤에 서서 ‘팥밭골’산기슭으로 갔다가 한참 후에 빨치산 두 놈만 내려와 마을로 들어갔다.
또 일주일 쯤 후에 빨치산 두목이 우리동네 사람들에게 100여명이 먹을 수 있도록 점심준비를 곧 하라는 지시를 불같이 내렸다. 시키는 대로 안하면 반동으로 몰릴 판이니 어쩔 수 없이 점심준비를 분주하게 하는데 멀찍 암치부터 가마니를 등에 진 맬방부대가 오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동구 밖 팽나무 아래서 무심코 냇물건너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동네 쪽으로 돌출된 곳에서 뭐가 움직이는 것 같아 더 자세히 보니 분명 무엇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우리 집에 있는 빨치산 두목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그가 하는 말은 “우리 빨치산 들이 이 주변에 널려있어서 걱정 없으니 점심이나 빨리 먹게 하라요”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나도 별수 없이 점심을 먹으려는데 기관총소리가 나면서 실탄이 동네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어제 밤 지서가 습격을 당한 보복으로 장흥전투경찰대가 은밀히 추격해와 기습을 가해 꼼짝없이 당하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동네는 물을 떠다먹는 뒤 골짜기로 각자 알아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나는 나대로 어머니는 막내를 엎고 아버지는 설자를 데리고 골짜기로 한참 뛰는데 기관총 실탄이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내 바로 앞에 얼음이 언 바위가 있어 못 넘고 망설이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인민군 복장을 한 사람이 막 바위를 넘으려 할 때 그 바지가랭이를 꽉 잡고 같이 뛰어 넘으려는 순간 총알이 내 머리위로 날아와 내 손에 잡힌 인민군 다리에 꽂혔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인민군이 내 위로 넘어졌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인민군이 보이지 않아 다른 쪽으로 골짜기를 올라 대삼이라는 마을로 내려갔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형을 만났는데 어떤 분이 “너희 아버지가 총에 맞아 쓸러지셨다”고 했다. 형과 나는 아버지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앞이 캄캄하고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경찰들은 해 떨러지기 전에 철수하기 때문에 어두워지자 우리는 산길을 넘어 동네를 향해 내려가는데 멀리 동네가 불타고 있었다. 가까이 이르러 보니 초가지붕들이 내려 앉아 옹기종기 모닥불처럼 인데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으로 위로를 하며 식구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리는 중에 아버지를 누가 부축해 왔다. 아버지는 설자를 엎고 뛰느라 미쳐 기총사격을 피하지 못해 총알이 오른 발등을 뚫고 발바닥으로 관통해버렸다. 다행히 뼈가 다치지 않아서 어머니는 익은 호박 속을 꺼내어 아버지의 발등환처에 부치고 무명천으로 싸맸다.
불타고 있는 집 마당에서 밤을 새우고 날이 밝자 동네사람들이 다 무사한지부터 알아 보기시작 했는데 먹는 개울물 위에 사는 임배네 어머니가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빨치산들은 자기네들끼리 뒤 수습을 다 한 후라 우리는 당장 잠을 잘 집부터 세워야 했다. 동네사람들을 따라 형과 나도 뒤 산에 올라가 적당한 나무들을 베다가 움막을 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앉아서 말씀으로 감독을 하시고 형과 나는 기둥을 세우고 칙으로 붙들어 맨 다음 얼기설기 작은 나무들은 역어 붙여 겨우 하늘을 가리고 누울 수 있게 만들어 마른 풀을 깔고 그 위에서 이불만 덮고 잠을 잤다.
봄나물이 나기 시작하면서 어머니와 누나는 불난 산에 돋아나는 고사리와 취나물을 채취하려 다녔다. 탐스럽게 자란 취와 고사리를 약간 삶아서 부산 구룡리 외가동네로 가 쌀과 바꾸어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외가 집들은 더 안전하게 지내려고 광주로 이사를 가고 없었다. 어머니와 누나가 무겁게 이고 간 고사리와 취나물을 겨우 쌀 한 되와 바꾸어 들고 한나절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와 쌀을 조금씩 넌 나물죽을 끓여 연명을 했다. 한편 호박 속으로 아버지의 환처가 많이 아물어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가 있게 되었다.
초겨울이 되면서 사방에서 빨치산들이 몰려들고 군경 합동으로 토벌 작전이 전개된다면서 호주전투기가 날아와 한 바퀴씩 돌고 사라졌다. 그리고 군경토벌대가 곧 들어온다고 더 깊은 곳으로 피난을 가기위해 모두들 마을 비우고 떠나게 되었다. 우리도 이불과 중요한 것을 넌 트렁크를 매고 ‘내삼’으로 들어가 트렁크를 대밭에 숨기고 이불만 지고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있었는데 총소리가 진동했다. 경찰 특공대들이 들어와 마을과 대밭에 불을 질러버려서 귀중품과 일본돈 증권 가족사진들이 트렁크 안에서 불타버렸다.
(2010년 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