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이 침탈되던 당대 소설책에 쓰인 낙서 가운데는 암울한 시대상황을 꼬집고 풍자하는 이른바 ‘시국 댓글’이 있었다. 낙서, 즉 당시 댓글의 주공격 대상은 매국노 이완용(1858~1926)과 송병준(1858~1925) 등 이었다. “이완용 놈아! 내 손에 죽으리라!” “이완용 놈아… 네 몸이 남지 못하리라”, “대역부도 이완용아, 네가 무슨 일로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이 나라 망하게 놓은 자는 누구냐 하면 이완용과 송병준이라 하니… 두 놈을 잡아내 장안에서 만민의 원수를 갚으세”, “천하에 몹쓸 놈 아무 때 죽어도 내 손에 죽으리라. 총리대신 이완용 개자식.”
대놓고 욕할 수 없었던 매국노를 향한 조선 민중의 울분을 대여점 소설책에 고스란히 풀어놓은 것이다.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름의 해결책까지 제시한 댓글도 제법 눈에 띈다. 어떤 댓글은 “심심하니까 이런 고담만 보겠지만, 이젠 고담을 보지 말고 학교에 가서 교사합시다”라고 당부한다. 소설에만 빠지지 말고 신식교육만이 살길이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가없는 항일의식을 표출한 댓글도 있다. “우리 대한국 이천만 동포들아! 언제나 자주독립하여… 대한 동포끼리 살아볼까. 이 책 보는 동포들은… 아무쪼록 정신을 차려서 일본을 다 죽이고 삽시다.”
요즘처럼 익명성에 기댄 지독한 욕설과 신상털기 등의 악플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이중에는 책대여값이 비싸다며 도서대여점 주인을 겨냥한 댓글도 줄을 잇는다. 개중에는 월남과 파란(폴란드)의 망국사까지 들먹이며 세책점 주인을 비판한 낙서가 눈길을 끈다. “월남과 파란의 망국사를 보지 못했는가. 이런 세계에 음담패설로 꾸민 언문 이야기책을 돈 받고 세를 놓을 게 뭐냐… 내 말을 그르다 말고 이후에는 책세를….”
이건 양반이다. 차마 눈과 입에 담을 수 없는 댓글을 남긴 이들도 있다. 이를테면 “책주인아, 예전같이 돈을 받으면 감옥소에 보내 종신징역하게 될 터이니 조심해…”라고 해놓고 “좌편에 있는 ○○와 ××는 너와 네 어미와 △하는 거야”라는 음란한 그림까지 그렸다. 그 외에도 남자의 성기 옆에 나체의 책 주인 어머니를 그려놓고는 “이 물건은 세책점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쓴다거나, “네 딸년을 나한테 보내라”든지 하는 쌍욕을 해댄 낙서도 있다.
당대 최고의 히트곡 ‘유산가’ 낙서한 사람을 욕한 댓글도 있다. 유치한 악플 릴레이라 할 수 있다. “이것 쓴 사람은 개자식”이라든지 “이 글씨 쓴 자식은 개자식의 자손”이라든지 “만약 이 낙서를 보고 욕하는 놈은 내 아들이다”라든지 하는 식이다. 이런 ‘악플’에 일침을 가하는 댓글도 있다. “무식하게 욕설을 기록하지 마시오. 그리고 지금 관민이 아사 지경인데 어찌 이야기책만 보시오”, “이 책에 욕설을 쓰거나 잡설을 쓰는 폐단이 있으면 벌금을 낼 것이니 이후로 깨끗이 보시고 보내주소.” 낙서나 댓글은 당대 사회현상을 반영하는 일종의 쌍방간 의사소통이다. 지독한 악플이 문제지만 그 역시 당대 사회의 민낯을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그 자체로 소중한 역사자료임이 틀림없다.
“잠자고 싶으면 한문책을 읽어라” 그걸 실천한 이가 다름 아닌 영조 임금이었다. 야사가 아니라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승정원일기>에 나와 있으니 엄연한 정사이다. 1758년(영조 34년) 12월 19일의 일인데, 도제조 김상로(1702~?)가 밤잠을 설치던 영조에게 “제가 읽어주는 언문(한글) 소설책을 들으시면서 잠자리에 드시라”고 권했다. 그러자 영조는 “언문이 아니라 한문소설을 읽어야 잠이 올 것”이라고 민간의 이야기를 전한다. “예전에 어떤 아낙이 아기가 울자 한문책으로 얼굴을 덮어주었다는 거야. 이웃집 사람이 ‘왜 하필 한문책이냐’고 물었더니 아낙은 말했네. ‘아이 아버지가 잠을 청할 때마다 한문책을 읽읍디다. 그래서 나도 이 애 애비처럼….” 영조는 그러면서 “이 말이 절묘하지 않은가. 한문책이야말로 사람을 잠들게 하는 거지”라며 크게 웃었다(大笑)고 한다.
정조의 분서사건 이 일화는 조선 후기 소설 열풍을 소개할 때 양념으로 식탁에 올리는 메뉴라 할 수 있다. 영조와 그의 아들인 사도세자(1735 ~1762)는 두분 다 ‘소설마니아’였다. 영조는 중국소설은 물론이고,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 한글소설을 즐겨 읽었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불과 4일 전인 1762년(영조 38년) 윤5월 9일 <서유기>와 <수호지>, <삼국지> 등의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중국소설회모본>의 서문을 썼다.
반면 문체반정의 기치를 든 정조(재위 1776~1800)는 소설을 민간의 잡담을 꾸민 거짓투성이라며 배척했다. 그래서 연암 박지원(1737~1805)에게 “경박한 문체로 <열하일기>를 썼다”면서 반성문 제출을 요구했고, 성균관 유생 이옥(1760~1815)의 과거(대과) 응시를 막기도 했다. 또 예문관 숙직 중에 <평산냉연> 등 중국소설을 본 서학교수 이상황(1763~1841)과 이조참의 김조순(1765~1832)을 파직하고 이른바 불온서적을 불살라버렸다. 그들이 보았다는 <평산냉연>은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남녀의 결혼과정을 묘사한 청나라 통속소설이다.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가 분서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조선에 소설 열풍이 불었다. 당시 서울거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후유증을 딛고, 기상이변에 따른 전염병 창궐에서 겨우 벗어나 한숨을 돌렸다. 여기에 18세기 초 대동법의 확대시행으로 각 지방에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게 되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지방에서 거둬들인 쌀을 팔아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사서 쓰게 됐다. 그러다 보니 시장이 활발해졌고, 조정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받아 생산하는 민영 수공업이 활발해졌다.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된 서울에는 다양한 물화가 돌았고, 저잣거리 문화가 꽃피게 됐다.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이던 책은 중인과 평민의 벗이 됐고,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한글소설이 창작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반 백성이 책을 사보기에는 너무 비쌌죠. 그래서 중국에서 수입되는 책을 유통하는 책쾌(서적 중개인)와 책을 읽어주고 돈을 받는 전기수(傳奇?)와 같은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전기수는 청계천 주변을 하루씩 한달 단위로 돌며 책을 읽어주었다. 당시 전기수는 배우톤의 연기와 대사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조수삼(1762~1849)의 <추재집>에 흥미진진한 내용이 나온다. 전기수는 마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연기톤으로 책을 읽다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면 갑자기 대사를 멈추고 뜸을 잔뜩 들였다. 애가 단 청중이 돈을 던지면 그제야 대사를 이어갔다. 비극도 일어났다. 소설 <임경업전>에서 임경업 장군이 역적 김자점의 무고로 목숨을 잃는 장면을 읽고 있던 전기수가 구경꾼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이 실의에 빠지는 연기가 너무 실감 나서 벌어진 어이없는 살인사건이었다(이덕무의 <아정유고>, <일성록> 1790년 8월 16일자).
특히 부녀자들이 소설에 흠뻑 빠졌다. 책은 보고 싶은데, 빌릴 돈은 없으니 비녀나 팔찌를 맡기거나 팔아, 혹은 빚까지 내서 책을 대여하는 통에 가산을 탕진할 정도였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부녀자들이 투기와 음란한 내용이 대부분인 소설에 정신이 팔려 있다”면서 “부인들의 방탕함과 방자함이 여기서 비롯됐다”고 비판했다. 일본인 오카쿠라 요시자부로(岡倉由三郞·1865~1935)는 “조선에서는 냄비, 솥 등을 맡기고 책을 빌리며, 요금은 2~3일 기한에 권당 2~3리 정도”(<조선의 문학>)라고 했고,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1865~1935)은 “세책점은 10분의 1~2문에 빌려주는데, 돈이나 화로 혹은 솥을 담보로 요구한다”고 기록했다. 당대 서울의 세책점은 30곳이 넘었다. 육당 최남선(1890~1957)도 “골방에 갇혀 지내던 부인네들에게 달 밝고 별 깜박거리는 시원한 하늘을 보여주는 것이 실로 이 소설의 세계였다”고 소개했다.
그렇다면 당대의 베스트셀러는 무엇이었을까. <삼국지>나 <수호지> 등 중국소설의 번역물은 스테디셀러였다. 그러나 베스트셀러 한글창작소설들도 상당수 있었다. <윤하정삼문취록>(186책) 같은 100책 이상의 대하소설과 <옥루몽>(30책) 같은 20책 이상의 장편소설도 인기를 끌었다. 물론 <춘향전>, <홍길동전>, <소대성전>, <유충렬전>, <임경업전>, <숙영낭자전>, <심청전>, <여장군전> 등도 베스트셀러였다. 당대 꼬장꼬장한 사대부 남성들도 앞에서는 눈살을 찌푸리는 척하면서 뒤돌아서서는 이른바 통속소설을 탐독하며 웃고 울었다. 이광수(1892~1950)나 김동인(1900~1951) 같은 근대소설가가 쓴 소설보다 훨씬 더 많이 읽히고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