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성구씨(綾城具氏) 대구광역시 북구(北區) 동변동(東邊洞, 무태) 마을
엑스코대구가 있는 북구 소재 유통단지 서쪽 출입구쪽을 통과하여 산격대교 지나 금호강을 건너서 바로 만나는 마을이 동변동(東邊洞)과 서변동(西邊洞)의 무태(無怠)이다. 무태 일대가 도시화 개발되기 이전 동화천(桐華川)을 가운데 두고 동쪽이 동변동이고 서쪽을 서변동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이 일대가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해있지만 70-80년대만 해도 대구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넓은 들판이었다. 그 때 동변동에는 주로 능성구씨(綾城具氏)가, 서변동에는 인천이씨(仁川李氏)들이 살았다.
무태는 행정동명이 아니라 자연취락 이름인데, 예부터 지금의 동변동, 서변동, 연경동, 지묘 3동 등을 포함한 지역의 이름으로 쓰이던 것이지만 지묘 3동이 동구로 되고 연경동이 동구이다가 북구이다가 들쭉날쭉하는 사이에 요사이 보편적으로 동서변동 지역을 아우르는 이름으로 쓰인다. 무태라는 마을 이름은 왕건(王建)이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無怠警戒)”라고 하였다는 데에서 나왔다는 설과 이곳을 지날 때 지역 주민들이 부지런함을 보고 태만한 자가 없는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능성구씨(綾城具氏)는 고려 벽상공신(壁上功臣) 상중대광(三重大匡)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 구존유(具存裕)를 시조로 한다. 신안주씨(新安朱氏) 시조인 주잠(朱潛)의 사위이며, 주잠은 송(宋) 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1224년(고려 고종11)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고려로 망명한 8학사 중 한 사람이다. 주잠이 능성(전남 화순 능주면)에 정착함에 구존유 또한 따라서 능성에 정착함으로써 관향을 삼게 되었다고 한다. 3대를 내려와 구예(具藝)는 중대광(重大匡) 판전의사(判典醫司)로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이고, 다시 2대를 지나 구위(具褘)는 중현대부(中顯大夫) 소부윤(少府尹)으로 면성부원군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문정공의 아들 구홍(具鴻)은 호가 송은(松隱)으로 벼슬이 삼중대광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망국의 신하로 절의를 굳게 지켰다. 태조(太祖)가 좌정승(左政丞)을 제수(除授)하여 3번이나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고 죽은 뒤에도 명정(銘旌)에 조선이 내린 관직은 쓰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 후 서세(逝世)에 좌정승이라 썼더니 회오리바람이 불어 3차례나 찢어졌는데, 고쳐서 고려 문하시중이라 썼더니 다시는 변고가 없었다고 한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며 두문동 72현 중 한 분으로 대구의 표절사(表節祠)와 개성의 두문동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실기(實記)가 전한다.
대략 고려 말기에 9계파로 갈렸는데, 그 중에서 도원수파(都元帥派), 판안동파(判安東派), 좌정승파(左政丞派) 등이 가장 현달하였다. 이 3파가 오늘날 구씨 전체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는데, 도원수파만도 40%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 성씨에서 조선 세조 때 구치관(具致寬)이 영의정, 구인후(具仁垕)가 좌의정을 지낸 것을 비롯 상신 2명, 공신 9명을 배출하였고, 무과 출신으로 장신급(將臣級)만 9명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 훈련대장 등을 지낸 구굉(具宏), 어영대장 구인후, 총융사 구인기(具仁墍)가 특히 유명하였는데, 인조반정에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무태 능성구씨 입향조는 계암(溪巖) 구회신(具懷愼. 1564-1634)이다. 문절공의 손자 송계(松溪) 구익령(具益齡)이 학행으로 천거되어 태종조(太宗朝)에 의성군사(義城郡事)로 내려왔다가 가음면(佳音面) 순호리(蓴湖里, 술무산)에 정착 세거하였다. 무태 구씨 입향조 계암공은 부친 종사랑(從仕郞) 구대성(具大成)과 옥천황씨(옥천황씨) 사이에서 1564년(명종19)에 의성 순호리에서 태어났다. 장성하면서 경사(經史)를 통독하는 한편으로 말타기와 활쏘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정을 이끌고 군위(軍威) 의흥(義興)을 거쳐 팔공산에 있던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의 의병진에 참여하였다가 권응수(權應銖) 의병장이 지휘하는 영천성, 경주성 수복 전투에 참전했다.정유재란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군관으로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하여 벌인 울산 서생포(西生浦) 전투에도 참가했다.
이후 전란이 그치자 일체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태에 정착했다. 1599년(선조32) 임란의 공훈으로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이 되었다. 그러나 조정이 당파에 휩싸이면서 나라가 어지러워짐을 보고서 관직을 버리고 조용히 돌아와 독서로 소일했다.
1606년(선조39) 관찰사 유영순(柳永詢) 판관 김현(金俔)이 금호 아래 선사재(仙査齋)에서 강학을 하였는데, 이 때 서사원, 손처눌(孫處訥), 곽재겸(郭再謙) 등과 함께 참가했다. 1634년(인조12) 별세하였으니 향년이 71세이고, 사후 무태 표절사에 배향되었다. 계암은 당대 낙재 서사원 등 지역의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였을 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선비로서의 삶에 모범을 보였으며 이른바 ‘구씨8학사’ 중 한 사람이었다.
이 마을의 문화재로는 표절사(表節祠)와 화수정(花樹亭)이 있고, 경내에 무태입향4백주년기념비(無怠入鄕四百周年紀念碑)와 능성구씨무태세거지비(綾城具氏無怠世居地碑)가 있다. 그 중 화수정은 구한말의 항일독립지사(抗日獨立志士)인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공의 족적(足跡)이 머물렀던 것 등으로 이름이 난 누정(樓亭)이었다. 이 화수정에 걸린 시액(詩額)에 대하여 해당 문중의 학자 구본욱(具本旭)씨가 쓴 글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화수정에는 여러 명사들의 시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특히 항일 독립지사인 심석재 송병순 선생과 시암 이직현 선생의 시가 있다. 그리고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都正) 경도재(景陶齋) 우성규(禹成圭) 선생은 화수정으로 명명된 연유에 대하여 기문을 지었다.
이 당시에 구씨(具氏) 문중의 이름난 선비로는 금우(琴愚) 구연우(具然雨.1843∼1914)와 근와(謹窩) 구연간(具然侃) 공이 있었다. 금우는 오랫동안 한양에 머물러 있었던 관계로 화수정에는 족제(族弟)인 근와가 후학을 지도하며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근와는 ‘화수정원운(花樹亭原韻)’을 짓게 되었다.
“선조들 께옵서 문 안에 이 강당(講堂) 지었는데/팔공산이 첩첩 두른데 금호강물은 비단같이 맑도다. 한 뿌리 화수가 일천세에 이어가니/원하옵건데 여러 종친들! 이름, 뜻 돌아보세(自先牖後鱣堂成, 公岳重重錦水淸. 一根花樹於千世, 願使諸宗義顧名)”
근와는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하였는데 관찰사 김명진의 물음에 대하여 진정책(賑政策)을 올리는 등 당시에 학식과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이 시를 보면 근와는 정자의 이름처럼 종친들이 화합하여 문중이 화수에서 꽃이 피는 것과 같이 번성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금우의 ‘화수정차운(花樹亭次韻)’은 다음과 같다.
“선대의 공으로 이 정자를 지었는데/후손들의 문풍이 화목하고 빼어났네. 한 뿌리의 화수에서 천 가지가 나오니 종친들이여 친밀할 지니라/ 아! 화수정 좋은 이름을 얻었도다.(棟成其日世功成, 牖後文風穆與淸. 根一枝千親密義, 聊將花樹擬軒名)”
금우는 낙육재(樂育齋) 재생(齋生)의 시험에 장원을 하였는데 관찰사 이호준이 매양 ‘세상에 쓰일 인재(需世之才)’라고 칭하였다. 그가 한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성균관에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문목(問目)을 강론하였는데 교남(嶠南, 영남)의 대유(大儒)라는 칭송을 받았다. 만년에 그의 학문과 영덕(令德)이 조정에 알려져 통정대부 홍문관시학 겸 승정원좌승지(通政大夫弘文館侍學兼承政院左承旨)에 제수되었다. 금우의 이 시 역시 근와가 당부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아니한데 종친들의 화목과 번성을 강조하고 있다.
심석재 선생은 충청도 대전 석촌리 사람인데 역시 이 정자에 올라 시를 짓게 된다. 심석재의 ‘근차화수정운(謹次花樹亭韻)’은 다음과 같다.
“위씨가의 법을 구씨가에서 이루니/화수정을 둘러싼 만발한 꽃이 금호강의 맑은 물에 비치도다. 아! 일가(一家)를 화목하게 하는 이 무궁한 곳에/ 정자와 서로 부합하여 좋은 이름을 얻었도다.(韋氏家模具氏成, 繞亭花發映江淸. 聊知敦族無窮地, 兩美相符得好名.)”
위의 시는 중국 당나라 때 망족(望族)이던 위씨(韋氏)들이 섬서성 장안현 위곡(韋曲)에서 화수회(花樹會)를 결성하여 대대로 종인들이 화목하며 살았다는 위씨가(家)의 종회법(宗會法)을 구씨가(家)에서 잘 실천하고 있는 것을 칭송하고 있다. <화수위가종회법(花樹韋家宗會法)>은『근사록(近思錄)』권9의「치법(治法)」에도 언급하고 있다.
필자가 앞에서 연재 선생이 이 정자를 화수정으로 명명한 이유를 능성구씨 무태제족(無怠諸族)의 화합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심석재 선생의 이 차운(次韻)은 구씨가(家)가 화합을 잘 이루었다는 것을 찬미한 것이나, 그 깊은 의미는 능성구씨 무태 동서(東西) 제족(諸族)이 화합하여야 진정한 화수(花樹)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과제를 제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에 두 선생께서는 무태지역에 세거(世居)해 온 능성구씨의 동족(동변계)과 서족(서변계)간의 수 백 년에 걸친 종손권 논쟁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 선생은 양 집안이 한 뿌리의 자손으로서 서로 화합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당부하는 의미에서 화수정이라고 명명하고 시를 지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