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하프를 켜야 할 때
오늘 우리가 제 1 독서로 듣는 예레미야 예언서의 말씀은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흔히 비운의 예언자, 눈물의 예언자라고 불리지요. 그는 예언자로 불리었을 때, 다른 예언자들이 대개 모두 그랬듯이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지요. 한번 하느님께 붙잡힌 몸이 어딜 도망가겠습니까? 결국 유다 역사에서 가장 극심한 격동기에 40년 동안이나 지겹도록 예언자로서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는 요시야 왕 13년(627/626 B.C.)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아 586 B.C.년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 포위·함락된 뒤에도 끝까지 활동했으니까요.)
그가 남긴 예언들은 대부분이 당시의 상황 안에서 착한 목자가 아닌 도둑이며 이리떼인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과 그들의 행실의 결과로 일어나게 되는 바빌론 유배라는 엄청난 두려움에 대한 예언이지요. 그러나 그가 외치는 예언의 핵심에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느님이 유다 백성을 저버리신 것이 아니라 유배는 다만 회심을 촉구하는 일시적인 벌이며,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는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가 듣지요.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쫒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린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보라 그날이 온다!”(예레 23, 1-5)
조지 프레드릭 와츠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한 여인이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이 담긴 그림을 그렸지요. 그런데 유심히 이 그림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프의 줄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머리를 숙여 몸을 거의 하프에 대고 열심히 연주를 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줄이 모두 끊어지고 겨우 줄이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연주를 합니다. 화가는 이 그림에 ‘희망’이라는 제목을 붙였지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상황을 보면 예언자 예레미야 시대나 별로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정치 현실이 그렇고 돌아가는 국제적인 움직임들도 그렇습니다. 당시 유다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쪽과 동맹을 맺어야 유리할 것인가를 놓고 저울질을 하다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그만 하프 줄이 끊어지게 되지요. 지금 우리도 미국, 중국, 일본, 북한 등의 국제 관계 안에서 비슷한 상황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저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마음은 없고요. 희망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조국에 다가오는 어두운 미래를 예언하게 되어 결국 치드키야 왕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 상황에서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므엘이 찾아와서 형편이 어려우니 밭을 사달라고 청합니다. 곧 나라를 잃고 바빌론에 포로가 잡혀가게 될 것을 아는 예레미야에게 밭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레미야는 놀랍게도 그 밭을 삽니다.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봉인한 다음에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밭에 대한 값을 지불합니다. 밭을 사는 것은 미래에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상징하고 있지요. 그는 사촌의 사정을 보아주어서 인정으로 밭을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끊어진 하프로 연주를 하는 여인이나 곧 망할 나라에서 밭을 사는 행위는 범인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인이 지녀야 할 자세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찌그러지지 않는 의연함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희망은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바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이지요. 그분이 다시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고,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독서나 화답송, 복음 환호송 등의 모든 말씀들의 주제는 착한 목자입니다.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가 어떻게 행동하시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사람들에게 지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으로 가서 쉬시려고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떠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와서 기다립니다. 배로 건너가면 20리 길이지만 육로로 걸아가면 30-40리 길입니다. 그 먼 길을 달려온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얼마나 깊은 영혼의 목마름을 지녔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새 번역 ‘성경’은 우리말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로 옮겼고, 공동 번역은 ‘불쌍한 마음이 드셨다.’로 옮겼는데 둘 다 좀 약한 번역입니다. 사실 희랍어 원문을 보면, 훨씬 강한 표현이거든요. 영어본 성경은 대개 deep compassion (깊은 연민)이라고 옮기지요. 원문은 희랍어 스프라크니조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명사형 스프라크난에서 옵니다. 스프라크난은 바로 창자, 내장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말에 애간장이 끓는다는 말이 있지요. 아시다시피 애간장에서 애는 창자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이 사람들을 바라보시던 마음을 우리말로 직역을 한다면 ‘애간장이 끓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애간장이 끓는, 정말 깊은 연민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래서 쉬시려는 계획을 접으시고 다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착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 안에서도 희망을 지녀야 하는 것은 바로 이분 때문입니다. 비록 하프 줄이 다 끊어지고 하나 뿐이 남아 있지 않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애간장이 끓는 마음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고 힘을 얻으리라는 희망으로 다시 몸을 숙여 하프를 켜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주일 아침에 보는 말씀안에서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양떼인 저희들에게 희망의 끈 놓치지 않고 절망중에서도 기쁘게 살아가라고 애간장이 끓게 말씀하시는 목자의 사랑을 느껴봅니다 ... 감사 드립니다,신부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