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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제천4경 청풍문화재단지.정자의 진수‘한벽루’...........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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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제천4경 청풍문화재단지.정자의 진수‘한벽루’...........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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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사를 위해 살아간다. 오늘이 지나면 바로 과거가 되고 과거가 지나면 금세 역사가 된다. 그렇다 보니 우
리는 항상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역사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본시 남한
강 상류에 위치한 제천은 선사시대부터 문화의 중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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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는 물론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 이르기까지 문화의 중심지였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
다. 특히 남한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구석기시대의 점말동굴유적지 외에 제천의 10경중 제1경인 의림지를 비롯
해서 박달재, 탁사정, 금수산, 팔영루, 한벽루, 등등. 이뿐만이 아니다. 이러한 역사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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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문화재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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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하늘로 승천하기 위한 몸부림 치는것 같은 형상의 충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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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랑자가 제천의 역사를 더듬어 보기위해 청풍문화재단지를 찾았다. 제천을 대표하는 여행지는 단연 청
풍호다. 1978년 당시 댐 건설로 인해 청풍면 후산리, 황석리, 수산면 지곡리, 단양군 등등........ 제천지역의 60퍼
센트 이상이 수몰될 상황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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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철거민들은 대부분 신 단양으로 이주했고, 구단양은 단성면으로 개칭되었다. 이때 충주댐을 건설하면서 조
성한 인공 호수인 청풍호는 오늘날 충주시 와, 제천시, 단양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충주댐은 1978년 공사
를 착수한 이래 8년 6개월만인 1986년 10월에 완공되었는데 연간 8억4천4백만KWh의 전력을 생산하며 국가경
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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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詠樓[팔영루]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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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詠樓[팔영루]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1976년 12월 21일 지정)
조선시대 팔영루는 청풍 부를 출입하는 관문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 300년은 넘게 제 자리를
지켰었다. 고종(재위 1863∼1907) 때의 부사 민치상이 청풍 8경을 노래한 팔영시로 인하여 팔영루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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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댐 건설로 1983년 지금 위치로 옮겨서 복원했다. 청풍은 지금은 제천시 청풍면으로, 제천의 일부가 되었지만
말했듯이 옛 터전은 대부분 수몰되었다. 지금은 충주호반의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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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댐의 높이는 97m, 제방길이는 460여m, 총 가용저수량은 27억 5천만 톤이라고 한다. 33억 8000만 톤의 각종
용수를 수도권에 공급하고 또한 홍수조절 역할도 한다. 특히 제천시 청풍면과 구단양의 경우 소재지를 포함한 대
부분의 지역이 수몰되어 이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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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충청북도 도청에서는 1983년부터 3년간 수몰 지역의 각종 문화재들을 청풍호가 한눈
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원형 그대로 이전, 복원해 단지를 조성했던 게 오늘날‘청풍문화재단지’이다. 이단지에는
향교, 관아, 민가, 석물군 등 43점의 문화재를 옮겨 놓았는데 민가 4채 안에는 생활 유품 1,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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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청풍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과거에는 淸風府[청풍부]로서, 제천과 쌍벽을 이루는 대단한 고장이었다.
옛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왁자지껄한 청풍 거리로 들어섰듯이 유랑자 또한 이 문을 지나 과거 청풍의 과거 속으
로 들어간다. 팔영루를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위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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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살스럽게 입을 '헤~' 벌리고 있는 호랑이 한 마리가 청풍에 들고 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민화풍의 이 호
랑이가 있던 과거 청풍부의 느낌을 잘 살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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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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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문화재 단지는 입구부터가 문화재다. 날아갈 듯 한 자태로 입구를 지키는 팔영루를 넘어서면 여행객들은 시
간을 거슬러 오른 듯 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 외에도 유물 전시관, 수몰 역사관 등 전시시설이 있어 제천의 문화
재들을 한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어 아주 편리함까지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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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관아의 연회 장소로 건축된 청풍 한벽루[보물 제 528호]와 물태리 석조여래입상[보물 546호], 조선시대
청풍부 아문인 금남루, 응청각 등의 옛 건물과 선정비, 열녀문 등이 줄지어 유랑자를 맞는다. 발품 팔아 망월 산성
위 망월 루까지 오르면 청풍호반 일대가 한눈에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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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 황석리 고가(黃石里 古家)/충청북도 유형문화재 84호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황석리 164번지에 있었던 민가이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
이다. 집의 구조는 단출한 4칸의 기와집 한 채만으로 안채와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반듯한 일자형의 집으로, 정
남향을 하고 있어 집 전체가 태양을 완벽하게 받고 서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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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겹머리 기와집이며, 조산말기의 건축물로 좌측(서쪽)으로부터 부엌, 안방, 윗
방을 나란히 하고 끝에 사랑방을 두었다. 아방과 윗방 앞에는 길게 툇마루를 두고, 사랑방 퇴는 부엌으로 구성하
였다. 툇마루와 사랑부엌 사이의 퇴주(각주) 이름이 특이하다.
재산도 많지 않고, 위세도 크지 않지만 양반의 자부심은 끝까지 놓치려 하지 않는 시골 양반의 모습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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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3번째 방문이다. 아침 일찍 이어서 일까 청풍호의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팔영루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유랑자뿐만 아니라 부지런한 사람들은 벌써 웅성웅성 모이기 시작하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
자 드디어 팔영루 문이 활짝 열린다. 유랑자도 표를 끊고 입장을 하여 해 왔던 것처럼 우측부터 둘러보게 된다. 오
른쪽으로는 과거 청풍 곳곳에 있었던 4채의 옛 집들을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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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민속촌이나 드라마 세트장처럼 잘 정돈되어 있지만 그 면면의 역사와 이야기를 더듬다 보면 어쩐지 애달프
고도 서글픈 생각이 밀려온다. 이 주택들은 원래의 자리는 여기가 아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쓰던 그릇까지 고스
란히 가져와 차려 놓은 이 옛집들은 문화재적 가치와는 별도로 엉뚱한 곳에 덩그러니 있으니 조금은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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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리 고가(桃花里 古家)/충청북도 유형문화재 83호
이 집은 본래 청풍면 도화 리에 있었던 민가였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 말기에 지어진 ㄷ자형의 우진각 기와집이다. 중앙에는 3칸 크기의 대청을 이루고, 좌측 간살은 방, 부엌, 광
으로, 우측 간살은 방2칸과 2칸 크기의 부엌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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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통나무 굴뚝과 부엌 살자창 옆의 관솔을 피워 어둠을 밝히는 시설은 태백산맥 일대의 산간지대 민가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 본래 이전하기전의 흔적으로 보아 앞쪽에는 바깥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튼 ㅁ자
형의 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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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댐 건설로 인해 제천외 3개시군, 7천여 가구 4만여 명이 물속에 고향을 두고 실향민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약간의 보상금을 받고 떠난 사람도 있었지만 고향을 떠나기 싫은 사람들은 주변으로 이주해 새로운 마을을 형성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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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호는 충주댐에서 제천, 구단 양까지 약 65Km가 넘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모두 물속에 잠긴 것이다. 65Km
면 170리가 훨씬 넘는 거리다. 그 170리가 넘는 남한강변 마을들이 모두 저런 식으로 물속에 잠겨버린 것이다. 특
히 구단양은 읍내 전체가 모두 물에 잠기고 일부만 남아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은 건물만 옮겨 와 예
전의 모습과 자연환경을 찾을 수 없다는 설명문이 마음에 안타깝게 다가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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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민초들 아니 지역적인 한계를 지닌 수몰민들의 힘은 약힐수 밖에 없었다. 왜? 그 서슬이 시퍼런 제5 공화국
전두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총으로 수많은 학살을 자행한 모습들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누가 감
히 머리에 띠를 두르고 광주 같은 행동들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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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 촌사람들은 머리에 빨강 띠를 두르고 시위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자그마한 보상을 받고 그냥 순순히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고 한다. 요즘 같았으면 보상이 왜 이것밖에 안 되냐? 도대체 어느 놈들이 부동산 감정 평가를 이따
위로 했냐? 감정 평가 요원들, 주택 줄입금지 등, 또는 출입 시 법적 조치하겠음, 이런 푯말들을 대문에 척 붙이고
문을 걸어 잠갔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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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리 고가(後山里 古家)/충청북도 유형문화재 85호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었던 민가였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 말기에 지어진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다.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하여 동남을 향하고 있다. 대청의
우측에 2칸 크기의 건너방과, 툇마루를 높이 하고 그 밑에 함실아궁이를 두고 있다. 대청은 좌측으로 윗방이 있고
윗방에서 동쪽으로 꺾어 대청의 좌측으로 후퇴를 하여 제사 방으로 꾸미고 있다. 전체적인 내부의 배치가 특이하
다. 이 집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이 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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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양을 지탱하고 있는 얇은 나무기둥이 힘겨워 보이지만 덕분에 차양 아래 공간은 더욱 넓어 보인다. 비가 와도,
눈 이와도, 여름 햇볕이 따가워도 모두 피할 수 있다. 이집 주인장은 차양 아래서 휴식이 더 많았을까? 일이 더 많
았을까? 이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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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리 고가(後山里 古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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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리 고가(後山里 古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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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지역 수몰민들은 작은 보상에 아무 반항도 하지 않고 정부 시책을 순순히 따랐다고 하니 수몰민들의
가슴에 얼마나 많은 한들이 쌓여 있을까를 생각하면 이 또한 가슴이 메어진다. 사람이 힘이 약해서 누구에겐가
얻어 맞으면 그것같이 억울한게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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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태어난 고장이요. 가족들의 삶과 추억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내 집에서 내 쫓기듯 쫓겨 난다면 이 유랑
자라 해도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도 남을 일이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환장하고 미칠 노릇이 아닌가, 이를테면 피
해는 이 수몰지역 [충주,제천,단양] 사람들이 다~보고 공은 5 공화국 전두환과 그 일당들이 가져갔으니 말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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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리 고가(後山里 古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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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리 고가(後山里 古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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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리 고가(後山里 古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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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그런 황당한 일을 당해 보지 안해서 잘 모르겠지만 상상만 하여도 기가 찰 노릇 아니던가, 이젠 고택들
을 둘러보고 나서 조금만 벗어나 이동을 하면 문화재단지 너머로도 여지없이 한마리의 용을 품고 있다는 물 맑
고 푸른 청풍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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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가 잘 모르는 진짜 청풍호에 얽힌 사연들은 저 아래 깊이 물속에 잠겨 있을 터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제는 제천의 대표 명소가 된 청풍호지만 이 물을 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수장 시키며 그 물들
을 채웠던 것일까, 잠시 다니러 온 관광객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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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곡리 고가(池谷里 古家)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89호
계속해서 지곡 리에 있던 옛 집이다. 이 집의 특징은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졌다는 것. 마당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초가집은 손님을 맞이하는 등 외부와의 소통을 위한 사랑채, 중문(中門, 중간 문)을 통해 더 깊이 들어가
야 하는 기와집은 가족만을 위한 공간인 안채다. 손님을 위한 집인 사랑채가 초가이고, 가족들을 위한 공간인 안
채가 기와집인 이유는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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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끼리의 알콩달콩한 삶이 더 중요하다는 걸까? 집 바깥에서는 소박하고 내세우지 않겠다는 걸까?
아무튼 여러 가지 질문이 계속 떠오르는 집이다. 전체 적으로 흙담장이 어색하지 않고, 집 자리는 옮겨왔을망정,
한옥 나무의 결과 세월의 흔적은 여전히 집의 격식을 높인다. 새로운 것은 까치발을 하면 흙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호수의 푸른빛이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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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명월 이름이야 좋지만 그 뜻은 淸風明月[청풍명월] 맑을 청(淸) 바람 풍(風) 밝을 명(日) 달 월(月), 이 사자성
어를 직역하면 맑은바람과 밝은 달, 을 뜻한다, 이를 다시 풀이하면 맑은 바람과 큰 달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사람
들이 많다는 忠淸道[충청도]를 가리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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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淸風明月[청풍명월]은 참~듣기만 해도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비록 청풍이 지금은 제천시의 일
부가 되었긴 하지만 본래 청풍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과거에는 淸風府[청풍부]로서, 제천과 쌍벽을 이루는 대단
한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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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곡리 고가(池谷里 古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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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곡리 고가(池谷里 古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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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곡리 고가(池谷里 古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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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순서를 바꿔 明月淸風[명월청풍]이라 해도 마찬가지인데 휘영청 밝은 달 아래 문객들이 한 자리에 모
여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를 읊는 장면들을 떠 올려보면 말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설령 酒宴[주연]자리라 해도 가무와 기생까지 곁들인 吟風弄月[음풍농월]과는 달리 품격이 느껴지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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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 뜻이 명확한 글자의 조합이라 고사가 따르지는 않더라도 清風明月[청풍명월]이 처음 사용된 곳은 唐[당]나
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술 좋아 했던 李白[이백]의 시구에서 次韻[차운]한 것이라 알려져 있다. 이백이 노래한
것 중 ‘襄陽歌[양양가]‘라는 시가있다. 그 중 성어는 후반부에 나오는구절인데 술과 벗하며 뉘우침 없이 살아가고
싶었던 酒仙[주선] 답게 술병과 술잔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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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태리 석조여래입상(勿台里 石造如來入像)/보물 546호
이 불상은 높이가 341cm나 되는 키 큰 불상이 꼿꼿이 서 있다. 전체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10
세기 경)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의 얼굴 모양은 풍만하고 자비로운 상으로 두툼한 양볼에 인중(코와 입술 사이
의 우묵한 곳)이 뚜렷하고 두 귀는 양어깨까지 드리워졌다. 목에는 삼도가 새겨져 있으며, 왼손은 땅을 가르키고
있다. 옷은 통견의 (양어깨를 덮은 법의)를 걸치고 안에 속내의를 받쳐 입고 있으며, 배에서 매듭을 지어 V자형으
로 겹겹이 대좌에까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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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태리 석조여래입상(勿台里 石造如來入像)/보물 546호
그래서 이 불상은 고려 초기보다 약간 앞서 신라 멸망 직전(10세기)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청풍문화재단지 내 유
일한 불교 문화재이다. 이처럼 불교 문화재가 적은 것을 보면 확실히 청풍은 양반고을 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충주댐건설로 수몰지인 청풍면읍리에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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淚亦不能爲之堕[누역불능위지타]~눈물 역시 양공을 위해 흘릴 수 없고/ 心亦不能爲之哀[심역불능위지애]~마음
역시 양공을 위해 슬퍼할 수 없다 ./清風明月[청풍명월]~맑은 바람 밝은 달을 사는 데는/ 不用一錢買[불용일전매]
~한 푼의 돈도 들지 않고/ 玉山自倒非人推[옥산자도비인추]~옥산이 저절로 무너지는 것은 사람이 밀어서가 아니
리라/ 舒州杓力士鐺[서주표역사당]~서주의 술국자, 장사가 겨우 들던 무거운 술그릇 때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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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白與爾同死生[이백여이동사생]~ 이백은 그대들과 생사를 함께 하리라/ 襄王雲雨今安在[양왕운우금안재]~ 양
왕이 함께 노닐던 운우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江水東流猿夜聲[강수동류원야성]~ 장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니 원
숭이가 밤중에 우는구나, 라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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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문에 나오는 양양은 중국 후베이 성 한수 연안에 있는 지명인데, 이백이 양양 땅을 지나면서 갖은 소회를 적
은 시이다. 주로 정치와 부귀공명이 허무한 것이며 호방하게 술을 마시며 자연을 즐기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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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風明月[청풍명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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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風明月[청풍명월] 맑을 청(淸) 바람 풍(風) 밝을 명(日) 달 월(月), 이 사자성어를 직역하면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을 뜻한다, 이를 다시 풀이하면 맑은 바람과 큰 달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사람들이 많다는 忠淸道[충청도]를 가
리키기도 한다. 일단 淸風明月[청풍명월]은 참~듣기만 해도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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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風明月[청풍명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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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 금남루 淸風 錦南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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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南樓 [금남루] 정면에 '都護府節制衙門[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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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 금남루 淸風 錦南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이곳은 청풍부의 아문으로 '都護府節制衙門[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순조25년(1825)에 청풍부사
조 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 고종7년(1870)에 부사 이 직현이, 동 37년(1900)에 부사 현 인복이 각각
중수하고 1956년에도 보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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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던 청풍초등학교 교문으로 사용되었다가 충주댐의 조성으로 인하여 1983년
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팔각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2층의 다락집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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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제천이 자랑하는 청풍명월 그 이름도 좋지만 그 이면에는 수몰지역 주민들의 아픈 기억들은 비록 이 청풍
만이 있는 게 아니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있다.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청풍호 때문에 옛 사람들의
왕래가 끊겼던 수몰지역 깊은 곳,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들이 이젠 물속 깊은 곳
으로 잠겨버린 지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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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하니 청풍 호를 보고 "참 아름답고도 환상적인 풍경이다"라고 감탄을 하기 전에 유랑자는 저 물속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그 물위를 흘러간 유행가가 흘러 나오고 뱃
고동을 울리며 유람선이 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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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남루 錦南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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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과거는 접어두고 청풍호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려면 청풍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거나 청풍호반 케이블카
를 이용하면 된다. 청풍나루에서 출발하는 충주호 크루즈는 옥순봉과 구담봉, 금수산, 옥순대교 등을 1시간 30분
간 왕복하는 코스로 요금은 1만 9000원이다. 시간대별로 하루 최대 8항차가 운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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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부터는 고인돌부터 이황 선생이 기생 두향과 함께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제천 청풍 응청각까지, 저마다 사연
과 이야기는 넘치는데 수몰되어 잃을 수밖에 없었던 원래의 자리가 아쉽기만 하다. 때문에 청풍문화재단지는 청
풍 호를 혹은 제천을 더 들여다보고 싶게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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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부터 다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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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루(寒碧樓)/보물 538호
고려 때 관아의 연회 장소로 건축된 청풍 한벽루는 청풍문화재단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음 보는
사람은 너나없이 우리나라 정자 중에 저렇게 멋있는 게 다 있었던가 하고 놀랄 정도로 구조가 아주 멋 스럽다. 우
리 정자문화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할 수 있는 대단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4년 (1317)에 청풍현이 군
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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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루(寒碧樓)/보물 538호
1972년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하였다. 이루는 석축토단의 자연석 주초석 위에 기둥
이 배가 부른 엔타시스 수법을 쓴 층 아래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다. 누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
배지붕으로 된 계단식 익랑 (대문간에 붙여 지은 방)을 달았다. 그 구성이 슬기롭고 건물의 높이와 넓이가 알맞아
간결하면서도 단아한 인상을 주며 누구든 거기에 올라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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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루(寒碧樓)/보물 5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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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루(寒碧樓)/보물 5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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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루(寒碧樓)/보물 5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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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청각(凝淸閣)/충청북도 유형문화재 90호
설명문에 보면 이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한벽루의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 초 이황 (1501~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응청각'이라 불렀다고 한다. 인조15년(1637)에 충청
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자고 갔다는 기록이 있다고 적혀 있다. 고종37년(1900)에 부사 현 인복이 중수
하였다. 아무튼 보기 힘든 옛 한옥이다. 계단을 통해 건물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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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아래에는 황토와 돌로 꽉꽉 채워놓은 게 아니다. 텅 비어 있는 공간이 창고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계
단을 타고 올라가면 (들어갈 수는 없지만) 여러 개의 방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충청감사의 기록대로 숙소
의 역할도 했고, 창고의 역할도 했던 기특한 건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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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청각(凝淸閣)/충청북도 유형문화재 90호
아무튼 이황 선생이 기생 두향과 함께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청풍 응청각은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
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까
지. 전형적인 지방 관아의 풍경이다. 이곳이 청풍도호부 관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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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원래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고려 때는 충주에 속했다가 조선왕조 들어 청풍 군이 되었고, 1660년 청풍에서
왕비를 배출하게 됨으로써 예우 차원에서 청풍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895년 지방제도 개편 때 다시 청풍
군이 되었으며, 1914년 일제강점기에 서너 개의 현이 하나의 군으로 통폐합될 때 제천군에 병합되어 청풍면이 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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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헌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34호)청풍부 관아(淸風府 官衙)
금병헌은 청풍부 관아의 동헌(東軒, 수령의 집무실) 건물이다. 1681년에 지었다니 벌써 343여 년의 나이를 갖고
있다. 청풍은 삼국시대에 사열이 현이었으나, 신라 경덕왕때 청풍 현이라 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지군사가 되고,
조선 세조 때 군이 되었다. 현종 초에 도호부로 되었으며, 고종32년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
에 따라 청풍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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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헌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34호)청풍부 관아 (淸風府 官衙)
.이 건물은 숙종7년(1681)에 부사 오 도일이 처음 지었다. 그 후 숙종 31년(1705)에 부사 이 희조가 중건하고, 영
조2년(1726)에 부사 박 필문이 중수하고, 권 돈인이 편액을 써서 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 인복이 전면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
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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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風館[청풍관]이라는 시원한 현판이 걸려있다.
일명 명월정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淸風館[청풍관]이라는 시원한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비록 옮겨는 왔다
지만 약간 열려 있는 문 너머로 보이는 호수의 푸른 빛을 보고 있자면 청풍관이라는 이름이 왠지 너무나도 어울
린다는 생각이 절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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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문화재단지 찾아가기
주소: 제천시 청풍면 청풍호로 2048
(지번)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 6-20
문의 전화: 043 641 55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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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메모
▶1:당일 여행 코스= 의림지→박달재→ 정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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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박 2일 여행 코스=의림지→박달재→청풍호자드락길 6코스 괴곡성벽길→(숙박)→정
방사→능강솟대문화공간→청풍호관광모노레일(비봉산)→청풍호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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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박 3일 여행 코스
★.해설사가 직접 동행하는 가스트로 투어.[제천미식이와 떠나는 셀프맛여행]★
►체험안내: 가스트로 A, B코스 (각 코스별 식당 5곳)~사전예약 필수
-A코스 : 관계의 미학 -덩실분식 찹쌀떡 -마당갈비 영양밥 -빨간오뎅 -샌드타임
-B코스 : 대장금식당 -상동막국수 -이연순사랑식 -제천 맥주 -빨간오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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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삼한의 초록길→의림지→역사박물관 →솔밭공원→비룡담 저수지(생태숲)→ (숙박)
2일차:가스트로 A.B →중앙시장→달빛정원 → 교동 민화마을 →관란정 → (숙박)
3일차:한방엑스포공원 →탁사정 →배론성지 →박달재 →목굴암 (박달과 금봉이사당)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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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찾아 가는길
▷*버스=서울-제천,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30분 간격(06:30~21:00) 운행, 약 2시간 소요.
▷*열차[Itx.]무궁화=청량이-제천역 청량리 역에서 2시간 견격, [KTX 는 1시간 간격 운행]
약 1시간 53분 소요.[KTX는 1시간 소요]
►철도고객센터는 1544-7788,1588-7788이다.
▷*자가정보= 경부(중부)고속도로→영동(중부내륙)고속도로→평택제천고속도로→중
앙고속도로 → 남(북)제천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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