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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7일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루카 14,15-24
마음이 없으면 방법이 없다
제가 아는 김 베드로란 선교사님은 세례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주일미사를 한 번도 빠져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세례 때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당신은 가지라는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으니 적어도 주일미사는 거르지 말아야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그분은 여행사 사장님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으신 분입니다.
성지순례를 위한 여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매번 주일마다 빠져나와서 성당을 찾아 미사를 해야 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노고가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러시아에 가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가톨릭교회를 찾는다는 것은 모래 속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차로 4시간 이상 되는 도시로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여행 온 분들 중에 냉담하던 한 자매도 함께 동반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말을 하지 못하기에 무조건 묵주에 달린 십자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10번 정도 묻고 나니 가톨릭교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냉담하던 자매를 말도 안 통하는데 무작정 고해성사를 보게 하였습니다.
불가능은 없었습니다.
그 자매는 여행 내내 눈물을 흘리며 큰 회개의 은총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여행한다고, 바쁘다고 주일미사에 빠지는 것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또 선교할 기회가 없어서 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그분은 술도 안 드시지만 술자리가 있으면 술집 사장님도 불러서 성당 다니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렇게 실제로 술집 사장님이 세례를 받고 술장사를 접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 앞에서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마음만 있다면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잘 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성당과 미사시간을 찾아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 때 주일미사를 빠졌다는 고해를 너무 자주 듣습니다.
미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혼인잔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혼인잔치 식탁에 앉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유태인들입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주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하느님은 아드님의 혼인잔치를 성대하게 치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고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미사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결혼했는데 집에 들어오는 것을 두 번째로 여기고 여기저기서 자고 다닌다면 집에서 기다리는 배우자의 마음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의 혼인잔치에도 참여할 마음이 없다면 저 세상의 혼인잔치에도 참여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그 자리를 다른 사람들로 채울 것입니다.
미사의 중요성에 대한 마음을 가집시다.
마음이 없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 말은 마음만 있다면 주님께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미사에 참여할 방법을 마련해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7일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루카 14,15-24
오늘 우리 교회의 서비스는 어떠합니까?
동네 칠순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초대받은 우리 식구들 숫자만 해도 10명 남짓입니다.
모든 잔치 비용을 아들딸들이 분담했을 텐데, 시골이라도 잔치 음식의 수준이 만만치 않습니다.
일인당 삼사 만원은 족히 될 텐데, 빈대도 낯짝이 있다고, 어떻게 그냥 맨입으로만 가겠습니까?
작은 선물도 하나 챙기고, 적은 금액이라 할지라도 봉투도 챙겨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잔치 중의 잔치, 천상 잔치는 전혀 선물이나 봉투가 필요 없는 무상의 잔치입니다.
그리고 그 잔치는 세상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VIP로 모시는 특별한 잔치입니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하늘나라 잔칫상 초대 비유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과분하게도 영원한 생명과 천상에서 누릴 충만한 기쁨의 축제가 죄인들을 포함해서 그 누구에게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는 것, 얼마나 감지덕지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늘나라 잔치 초대를 통해 구원의 보편성을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선포하셨는데, 안타깝게도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다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은혜로운 잔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불참의 이유를 드는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을 부려 보기 위해서! 남아도는 게 시간 뿐인데, 겨릿소 다섯 쌍,
내일 부려봐도 아무 문제 없는데, 그 작은 이유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은총을 자신의 발로 멀리 차 버렸습니다.
방금 장가를 들었다고! 지상에서의 혼인은 잠시지만, 천상에서 영원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이루어지는 혼인은 영원한 혼인인데...
요즘 어머니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가수의 미담이 세간에 희자되고 있습니다.
그 가수의 공연 티켓을 사주는 자녀들은 요즘 가장 효심이 지극한 사람들로 인정받는답니다.
그 가수께서 어르신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가 있더군요.
공연의 질도 질이지만, 그렇게 서비스가 좋답니다.
장시간 진행되는 콘서트 시간, 자리가 불편할까봐, 좌석 하나 하나에 방석을 깔아놓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선물로 준답니다.
방향 감각이 둔감해진 어르신들을 위해 지하철역부터 시작해서 공연장,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자원봉사 스텝들이 그렇게 친절히 안내를 한답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자녀들을 위한 쉼터까지 마련해놓는답니다.
공연 내내 빼어난 노래 실력에 어르신들에게 기쁨을 선물하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거듭 건넨답니다.
그 시간만큼은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시간이랍니다.
공연이 끝난 후 많은 어르신들이 그러신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는 교우들과 지역 주민들을 위해 어떤 서비스를 베풀고 있습니까?
그 서비스의 질은 어떻습니까?
만족도는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를 통해 사람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고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강론>
(2023. 11. 7. 화)(루카 14,15-24)
<혼인 잔치의 비유>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루카 14,16ㄴ-21ㄱ).”
여기서 “초대받았지만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구원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이 비유에서,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이스라엘 민족으로,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그런 해석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초대의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했는가?
거부했는가?”, 즉 “최종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했는가? 참석하지 않았는가?(구원을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 그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이고, ‘큰 잔치’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이고, ‘많은 사람’은, 뜻으로는 ‘모든 사람’입니다.
‘초대’는 구원과 생명을 받으라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잔치 시간’은 ‘종말의 날’입니다.
밭 때문에, 겨릿소 때문에, 방금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는 말은, 가기 싫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날이 닥친다면, 밭을 보러 갈 시간도,
겨릿소를 부려 볼 시간도 없을 것이고, 방금 장가를 들었다는 것도 소용없는 일이 되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날이 되면 무엇인가를 할 시간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느냐? 죽느냐? 구원이냐? 멸망이냐?”의 절박한 순간에도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 ‘헛된 일’에 정신을 팔고, 그 일만 걱정하고 신경 쓰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기서 양해해 달라는 말은 미안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고, 당연히 양해해 줄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하는 말인데, 실제 상황에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누가 감히 “지금 다른 일로 바쁘니까 종말과 심판을 며칠만 미루어 주십시오.
회개와 신앙생활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모두 마친 다음에 하겠습니다.”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지금 당장 모든 일을 중단하고 종말 준비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생업이든지 학업이든지 무슨 창작 활동이든지 간에, 선한 일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 종말을 기다리는 올바른 자세입니다(2테살 3,11-12).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4,21ㄴ-24).”
여기서 ‘노하여’는 뜻으로는 ‘안타까워하면서’입니다.
“고을의 한길과 골목”은 ‘모든 곳’이라는 뜻이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해서 어쩔 수 없이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넘어간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복음 선포에 응답하면 구원받는 것이고, 응답하기를 거부하면 구원을 못 받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을, 또는 유대인들을 너무 깎아내리기만 하는 것은 불공정한 일입니다.
성모님과 열두 사도와 초대 교회 신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 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복음 선포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민족들에게로 확산되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구원’도 유대인들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대되었습니다.>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라는 말은, 요한복음에 있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류 전체가 들어갈 수 있는 ‘넉넉한 나라’입니다.
자리가 모자라서 정원 제한을 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갈 자격을 갖추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입니다.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는 “한 사람도 빼놓지 말고 불러라.”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가득 채우는 것이 복음 선포의 목적이 아니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소외당하는 사람도 없고, 차별당하는 사람도 없고, 억울하게 탈락하는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24절의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은,
뜻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는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억지로 구원하는 일은 없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