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부터 1597(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때까지 2차례에 걸쳐 일본이 침범한 사건으로 7년간에 걸친 전쟁을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1592년 4월13일 오후 5시 왜군 20여 만 명이 풍신수길의 명에 따라 9개 부대로 나누어 조선 침략에 나서 부산을 거쳐 함안, 밀양, 영천 등을 지나 한양으로 진격 불과 20여 일만인 5월 2일 선조는 수도 한양을 적에게 내어 주고 6월에는 평양까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선조는 의주성 까지 피난을 하여야 했던 치욕적인 전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전라도 지역(전라좌수영)은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왜군이 들어 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 고장 낙안도 지금의 벌교 선수 장암포 고흥군 동부 해안까지 낙안군의 관할 구역으로서 왜적의 침입이 평소 빈번하였던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낙안에서의 임진왜란에 관한 전황이나 피해 상황 등 기타 상세한 기록들이 전하여 오는 게 없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이곳 저곳에 당시의 기록들을 옮겨 보았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은 사도진, 방답진(구, 돌산포)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 5개 진포(鎭浦)와 5관(官) 순천 도호부, 낙안군, 흥양현, 보성군, 광양 현으로 소위 5관 5포를 관내에 두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전 1591년 2월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 부임하였을 당시 주 전선인 판옥선은 23척이었고 돌격선으로 이용된 거북선이 두 척으로 그 가운데 본영 소속의 전선은 판옥선 4척과 거북선 1척뿐이었으며, 순천 수군이 보유한 판옥선 3척과 낙안 수군이 보유하고 있는 판옥선 2척, 방답진 판옥선 3척, 사도진 판옥선3척, 발포진 판옥선 2척, 방답진 판옥선 2척에 거북선 1척 보성군과 여도진 각각 판옥선 1척이었다.
병사 또한 여러 계층의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다.
이와 같은 병력으로 임란이 일어나 왜군과의 처음 접전한 옥포 해전에서 순천 대장 유섭이 이끈 군사들이 적선을 부수고 조선인 포로 1명을 구출하였으며 낙안 군수 신호(申浩)가 지휘하였던 군사들 역시 적선 1척을 부수고 적병 1명을 참살하였다. 또한 순천 대장 유섭과 낙안 군수 신호는 서로 협력하여 적선 1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2차 출전에서는 이순신 장군 휘하 군사들이 적선 72척을 부수고 적병 88명을 참획 하였고 3차 출전에서는 낙안 군수 휘하 수군들이 적선 1척과 적병 7명을 참살하는 전과를 올리었으나 낙안 선 사부인 사노 필동(筆同)이 전사하였으며, 낙안의 포작인 업동(業同), 세천(世千), 이담(李啖), 손망룡(孫望龍), 사부 김봉수(金鳳壽), 포작 화리동(禾里同) 장군(將軍) 박여산(朴如山) 사노 난손(難孫)등이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4차 출전 때는 송여종(宋汝宗)이 적진 깊숙이 들어가 죽기로 싸워 적의 목을 베는 등 몇 차례의 전투에서 가장 용맹을 떨쳐 아군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으며 이순신 장군도 선조에게 직접 그의 공을 알릴 만큼 낙안 수군들의 활약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당시 낙안군 의 출전 병사는 349명에 낙안 군수는 중초관(中哨官)을 맡아 임하였으며, 낙안 군수의 깃발은 가운데는 누르고 가는 푸르며 띠는 붉은 색으로 표식을 하였다 한다.
또한 낙안은 해상 수비는 물론 육상 수비까지 겸하여야 하였으며 전라좌수영 병참기지로서 군량미와 각종 전쟁물자 징발은 물론 명(明)나라 군사들의 뒷바라지까지 맡아야 하였으며 각종 잡부담까지 겹쳐 전란 직후 군민들의 어려움이 많았다 한다.
한편 고을 수령과 병사들이 관청을 비우고 해전에 참전하자 주민들이 인근 순천, 광양, 보성 주민들과 합세하여 소동을 일으켜 노비 문서를 찾아 불태우는 등 실제 전쟁을 하는 지역보다 더욱 심각한 사태를 빗기도 하였으며 주민들이 전쟁을 피하여 피난하는 바람에 관청이나 민가가 모두 텅 비어 있었다고 전한다.
1597년 2월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의 장계에 의하면 왜군이 퇴각하기 시작하면서 장흥과 보성을 거처 낙안에 집결하고 오래 머무를 계획을 세우고 목책 등으로 방어선을 치고 막사를 지어 진지를 구축하고 순천 해룡면 신성포에 왜성을 축조 방어선을 구축하는 등 마지막 발악을 하였다.
한때 낙안성도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멸악산(지금의 오봉산) 아래서 이들과의 전투에서 많은 왜군이 죽어 갔으며, 이때 많은 민가가 불에 타고 주민들이 피난을 떠나 고을이 텅 비어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한다.
금전산 금둔사도 이때 소실되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임진왜란 중 낙안 출신들의 활동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낙안 군수 이필종(李必從)은 순천의 사노 안성(安城) 등에 맡겨 총포를 제작하였다.
배몽성(裵夢星) ― 본관은 성주로 진주성 싸움에서 의병장 김천일 장군과 함께 순절하였다.
방덕룡(方德龍) ― 1597(선조30) 정유재란 때 낙안 군수로 이순신 장군의 선봉 장군이 되어 왜적과 싸우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오경남(吳景男) ― 본관은 의령으로 당항포 해전에서 큰공을 세웠다.
전방삭(全方朔) ― 본관은 천안으로 이순신 막하에서 큰공을 세웠으나 보성군 안치재에서 전사하였다.
선정립(宣正立) ― 본관은 보성으로 훈련원 판관을 지냈으며,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큰공을 세우고, 1598년(선조31) 11월 19일 노량 해전에서 전사 그후 병조참의에 제수 되었다.
이관(李灌) ― 본관은 광산으로 선조 기묘사화 때 종묘의 침량으로 있었으며 온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 당시 왜구가 쳐들어오자 의병을 모아 큰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동학
낙안은 산간 요충지로서 고흥 보성 화순 순천 등지에서 동학군이 집결한 곳으로 그 피해도 많았다고 전한다. (동학혁명 기록 및 순천 승주 향토지 참조) 당시 낙안읍성 근처 민가 수 백호가 동학군에 의하여 불에 타서 그 참상은 말로 형언 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였으며 당시 낙안 군수는 동학군을 토벌하는데 있어 순천 흥양 광양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영 호(嶺湖)대소 주력부대가 광양을 거쳐 하동 방면으로 진출하자 (1894년)9월 15일 양하일(梁河一)이 이끄는 농민 연합부대 잔류 세력 1천 여명이 후방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고 평소 농민군에 비우호적이던 낙안의 관군이 뒤에서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먼저 낙안을 점령하기 위해 순천을 출발하여 선암사를 거쳐 오공재를 넘어 낙안읍성을 기습 공격하였다.
비교적 손쉽게 읍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리교청(吏校廳)에 들어가 그 동안 농민들을 수탈한 아전들을 징계하고 앞으로 필요한 군수물자를 성 내외에서 확보하였다. 낙안읍성도 많은 피해를 입고 이때 불에 탄 집이 1백 94호에 달하였으며 빼앗긴 농우는 55여 마리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낙안은 김개남의 선봉장으로 유명한 강사원, 안규복, 이수희의 출신지로 동학이 득세하였으며, 12월 15일 우선 농위영군이 통과한 후 낙안군 동면 이수희는 25일밤 남상면 쌍전에서 민군에 붙잡혀 효수 당하였다. 이수희는 태인 접주 유복만에 수종하던 사람으로 10월 이후 김인배의 좌수영 재점령 당시 중군으로 활약하였고 안규복(安圭福)은 호좌도 접주(湖左都接柱)로서 동학 농민군의 거두(巨頭)였다. 그는 본래 보성 사람인 듯 하다.
안규복이 낙안에 피신하여 오자 낙안 동학군들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였으며 안규복이 낙안 동학 농민군을 지휘한 것은 27일간이었다. 제폭 구민(除暴救民)의 기치를 내건 농민 혁명이였지만 민폐도 많았다고 한다. 22일 본 군의 수성군(守城軍)의 추적을 받고 외서면 돌이치(突伊峙)에서 체포되어 당일 효수 되었는데 두 사람은 김개남의 선봉장으로 청주 싸움에 참가했던 사람이다. 낙안의 수성군은 이들을 섬멸하는데 많은 전과를 세워 조정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한다. 이처럼 동학 농민군이 낙안읍성 에서 패한 원인은 1895년 1월 12일 낙안 군수 보고서에 의하면 일병(日兵) 50명이 1월 3일 흥양(고흥)으로부터 들어와 다음날 보성으로 출발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이 고장 동학군 토벌에 일본군이 많이 동원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당시 동학군을 가엾이 여겨 불려졌던 노래가 이 고장에서도 널리 퍼졌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당시 낙안 에서 활동했던 낙안의 동학군 접주(接主)등을 알아본다.
강사원(姜士元)
1895년(乙未正月初7日) 낙안군수 보고서에 의하면 낙안 동학접주 강사원은 호좌 접주(湖左接主) 안규복(安圭福) 이수희(李守喜) 등과 같이 동학 장령(東學長領) 김개남(金介南)이 청주(淸州)를 침공할 때 그 선봉 대원으로 참전하였다가 낙안에 돌아와 낙안 일대를 종횡무진으로 활약한바 있는데 민(民), 관(官), 군(軍) 합동으로 강사원을 체포 살해한 후로는 낙안 고을이 조용해 졌다고 적고 있다.
이수희(李守喜)
1894년 12월 29일 낙안군수 보고서에 의하면 12월 15일 동학군 선봉장이 낙안을 지나간 후엔 동학군의 난동이 수그려져 조용하더니 낙안 동면(東面) 이수희(李守喜) 동학 접주는 당초 유봉만(劉奉萬) 김인배(金仁培)의 권유로 동학군이 되었는데 순천으로부터 낙안으로 넘어와 동학군을 지휘하다가 낙안 읍민과 관군이 합동으로 추격하자 갑오년(甲午年) 12월 24일 여수 방면으로 가려고 피신하던 중 25일에 남상면(南上面) 쌍전리(雙田里) 앞길에서 체포되어 읍민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려 좌수영(左水營)으로 바치었다고 한다.
최환구(崔煥九)
1895년(乙未正月7日) 낙안군수 보고서에 의하면 1894년 12월 28일 別軍官이 寶城에서 출발하여 화곡면(火谷面) 대촌리(大村里)에 40리 길을 걸어와서 야영하고 있었다.
그때 낙안 남상면 칠동(七洞) 출신인 최환구는 많은 동학군을 인솔하고 10리 산곡(山谷) 사이 변화리(卞禾里)에 피신하고 있었다. 27일 밤에는 보성 민병단(民兵團)이 이곳을 포위하여 낙안에서 유명한 조보여(趙甫汝)등 2명을 잡았다 최환구는 보성 동학 수령 최덕화(崔德和)와 같이 이곳에 은신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별군관 부대는 20리 밖에서부터 포위 압축하였으나 어느새 도망가고 없어 체포하지 못하였다.
하는수 없이 최환구의 부친 최득수(崔得秀)를 심문하였으나 알 길이 없고 그는 80 노령으로 체포하지 못하고 최환구의 집을 수색 황우(黃牛) 두마리와 벼 11석을 압수하였다고 적고 있다.
안규복(安圭福)
안규복은 호좌도 접주(湖左都接柱)로서 동학군의 거두(巨頭)였다. 그는 본래 보성(寶城) 사람인 듯 하다. 안규복이 낙안에 피신 와서 있을 때 동학도의 기승은 중천 하였다. 안규복이 낙안 동학군을 지휘한 것은 27일간으로 제폭 구민(除暴救民)의 기치를 내건 농민 혁명 이였지만 결과적으로 민폐도 많이 가져온 결과를 초래하여 양민(良民)에 대한 행패로 변하였다.
낙안읍성과 수성군(守城軍)이 안규복을 추적하여 갑오년(甲午年) 12월 22일 외서면(外西面) 돌이치(突伊峙)에서 체포하여 읍민이 보는 앞에서 목을 짤라 좌수영(左水營)으로 보냈다고 적고 있다.
3. 1 독립운동
낙안은 원래 낙안군(樂安郡)으로서 경술 치국 이후 서기 1914년 일제 침략자에 의하여 소위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낙안군을 폐지하고 순천군(順天郡)에 편입된 곳으로 예로부터 문인향(文仁鄕)으로 널리 알려졌었다.
우리 고장에서도 경술 치국 이후 라인영(라철), 이병채씨 등 애국지사들이 경술 조약에 반대하는 격문을 보내는 등 안규휴, 안호영, 안주환, 이병채, 안덕환, 안규인, 안규진, 이한역, 안계순, 서병기, 김기석씨 등은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일진회(一進會)의 반역 행위를 성토하기도 하였다.
그후 서울에 있던 이곡 출신 안호영 선생께서 기미 2월 말경 독립선언서와 각종 밀서를 내의 속에 은밀히 숨겨 향리인 낙안에 내려와 동지인 안덕환(신기)지사 등과 항일 독립 단체를 조직하고 박태문, 곽인석, 김선제, 안규삼씨 등이 규합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밀약 하였다.
또 한편 전평규(신기) 안용갑, 안응섭 등 뜻있는 분들이 만세 운동을 함께 할 것을 의논하고 33인이 서명(서울의 33인과 같은 맥락)하였다. 이들은 일본 헌병대의 강력한 방해에 대비하여 3월 2일 밤 도란사(桃瀾社)를 「중국 고대 한(漢)나라의 명장인 관우, 유비, 장비의 도원결의와 진(晋)나라 문사들이 난정(蘭亭)에서 모임을 갖던 옛일에서 두 글자를 빌려 도란사(桃瀾社)라 이름짓고」 3월 5일밤 김천근의 집에 모여 이팔사(2.8사社)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2. 8이란 2월 8일 일본에 있는 유학생들이 청년 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외친날 또는 이팔청춘의 기백으로 용감히 싸운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들은 오리를 잡아 피를 나누며 "오등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동일 동시에 죽기로 싸운다"고 천지신명께 맹세하고 도란사가 모체가 되어 2. 8사 및 혜지사(惠之社 투옥 인사 및 유족 돕기 후원회)를 조직하였다.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평규(田平奎)·안응섭(安應燮)·박영진(朴榮鎭)·안종귀(安鍾貴)·김창기(金昌基)·강정수(姜正秀)·오영태(吳永泰)·곽인석(郭仁錫)·안규삼(安圭三)·정전표(丁田杓)·안규진(安圭晋)·한철순(韓喆順)·한흥량(韓興良)·김만득(金萬得)·안백순(安伯淳)·안덕환(安德煥)·안담환(安潭換)·안일삼(安日三)·송이수(宋二洙)·오영연(吳永連)·김오현(金五鉉)·임재성(任在成)·안규정(安圭楨)·김천근(金千根)·신용석(申龍石)·전인채(全仁采)·오일준(五日俊)·한흥조(韓興祚)·안은규(安銀圭)·안상규(安商圭)·오병귀(吳炳貴)·안용갑(安龍甲)·윤점수(尹點洙)
또한 이들은 이러한 모임이 탈로 날까 봐 마을 단위로 주민이 상(喪)을 당하면 마을 사람이 나와 도와주는 계모임인 위친계(爲親契)로 위장하여 일개 대대가 무너지면, 2대대가, 또 무너지면 다음 대대가 분산 투쟁하기로 하고, 일차로 3월 9일 벌교 장날을 기해 1대대장인 안덕환(安德煥)을 선두로 강정수(姜正秀), 김만득(金萬得), 신용석(申龍石), 전인채(全仁采), 전평규(田平奎), 오영태(吳永泰), 윤점수(尹點洙), 안종귀(安鍾貴), 안담환(安潭換), 곽인석(郭仁錫), 안진영(安鎭榮), 안용갑(安龍甲), 한철순(韓喆順), 한흥량(韓興良) 등이 벌교 모 음식점에 모여 많은 주민들과 함께 장좌리 아랫 시장에 이르러 장꾼들과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니 감히 일본 헌병들도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그들의 간장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많은 부상자를 내고 체포되었다.
이날 당초 거사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던 신기리 신종태(申鍾泰), 안장내(安牆內) 등이 합세 선두에서 만세를 이끌어 갔다.
이때 체포되어 광주 지방법원 순천 지청으로부터 내려진 14명에게 대한 주문 형량은 다음과 같다.
전인채(22 농업)·김만덕(29 농업)·한흥량(22 농업)·김규석(39 농업)·한철순(34 노동)·윤점수(22 농업)·곽인석(39 농업)·안진영(34 농업)·오기영(26 농업)·신종태(36 농업)·이상 징역 6월
안장내(18 고용인)·안덕환(22 농업) 이상 징역 4월
전평규(45 농업) 징역 10월
강정수(3 농업) 징역 8월
이어 3월 14일 안규삼(安圭三)이 대대장인 2대대는 오전 김천근 의 집에 안규진, 안상규, 안종원, 김창규, 안경섭, 오일준, 안은수, 안용갑, 안응섭 등이 모여 만세할 것을 제의하여 오후 3시 낙안 읍내로 나가 안상규(安商圭), 안규진(安圭晋), 안은수(安銀洙)등이 선두에 나서 낙안 읍내에서 만세 운동을 벌려 독립 만세 소리가 하늘에 진동하였으며, 안규삼은 포목 1척(一尺)에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그려 만세를 부르다 팔에 부상을 당한 체 체포되어 태극기를 안상규에게 던져 주자 안규진이 주워 들고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고, 또 안은수가 받아 만세를 불렀다. 태극기를 빼앗으려는 일본 헌병과 청년들 사이에 혈투 극이 벌어지고 일본 헌병들이 휘두른 총칼에 온통 시장 안이 혈흔이 낭자하고 이마가 터지고 이가 부러지는 등 모두가 피투성이가 된 체 체포되어 갔다.
이때 만세를 부른 사람중 당초에 2. 8사나 도란사에 가담하지 않았던 분은 전개표, 안종진, 안경섭 등이다. 이때 붙잡힌 사람들의 형량은 다음과 같다.
안상규(24 농업)·안은수(28 농업)·안규진(22 농업)·안용갑(29 농업) ― 이상 징역 8월
안응섭(34 농업) ―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어 3월 16일 제 3대대장인 김종주(金鍾胄)외 대원들이 유흥주(劉興柱)씨 집에 모여, 조선 독립(朝鮮獨立)과 대한 독립(大韓獨立)기를 만들어 다음날 3월 17일 기를 앞세우고 김종주(金鍾胄), 유흥주(劉興柱), 박태문(朴泰文), 배윤주(裵潤柱) 등, 150여명이 하송(下松)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낙안읍성 서문을 향하여 들어오다 일경(日警)과 대치 치열한 접전이 벌어져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칼에 김종주 의사가 복부와 손에 부상을 당하고 쓰러지자 그의 아들 김선재(金善齋=용기(龍基))가 일본 헌병에게 달려들어 싸우다 그 또한 부상을 당한 체 체포되었으며 읍내 일대는 만세 소리와 일경들이 휘두른 총칼 앞에 많은 사람들이 머리, 어깨, 가슴 등 온몸이 상처투성인 체로 체포되었으며, 체포되어 가면서도 만세를 끊이지 않고 계속 외쳤다고 전한다. 일본 헌병들도 혼 줄이 날 정도로 치열한 만세 투쟁이었다.
이때 체포된 분들의 형량은 다음과 같다.
유흥주(48 농업)·김종주(56 농업) ― 이상 징역 1년 6개월
박태문(29 농업)·배윤주(33 농업)·배형주(26 농업)·김선재(29 농업) ― 이상 징역 6개월
이렇듯 일본 헌병들의 잔인한 폭력에도 굽히지 않고 두려움이나 동요 없이 격렬한 만세 운동을 전개 전남 지방에서도 가장 격렬했던 만세 운동으로 항쟁한 3.1독립 만세 운동의 표본이 되었으며 끝까지 굽히지 않고 투쟁한 분들 중 24명은 짧게는 4개월에서 많게는 2년여의 형(形)을 받고 온갖 옥고에 시달리면서 병사 자결 또는 옥사하였다. 또한 안덕환 은 출옥하여 만주로 건너가 낙안 출신 독립 운동가인 이병채 선생의 소개로 홍범도 휘하에 들어가 1920년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분들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후손 만대에 기리고자 1955년 별량 출신인 이용욱(李容昱) 당시 낙안 초등 학교 교장 선생님과 전라남도지사 민병기(閔丙琪), 승주군수 김영권(金永權) 등이 발기하여 당시 낙안 초등학교 교정에 (객사앞) 각급 기관 단체 유지 등이 후원으로 1956년 6월 8일 높이 5.5척(尺), 넓이 2.5척(尺), 두께 1.3척(尺)의 탑을 제막하기에 이르렀으며, 비문은 기미독립운동 민족 대표 33인중의 한분 이신 이갑성(李甲成)옹의 휘호(揮毫)로 기미 독립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매년 3월 1일이면 면내 기관 단체 학생, 주민들이 참석 3.1절 기념 행사를 갖고 우리 고장 애국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우리 고장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고 보며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전국의 시위 횟수 15,433외, 시위 참가 인원 5,023,982명, 사상자 23,470명, 투옥자 46,948명이라고 하니 전국적으로 얼마나 만세 운동이 열렬하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1998년 3월 유족회 에서 순천시의 지원(6천만원)을 받아 낙안 독립 만세 운동 기념탑을 동문 밖으로 이전 건립하였다.
소작 운동
일본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면서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만들어 모든 농지를 관리하면서 많은 농지가 일본인의 소유가 되고 또 특정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농지를 비싼 경작료를 받고 대리 경작(소작)을 하였으니 이렇게 남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 농가(小作農家)가 8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게 당시 우리 지방의 실정이었고 생활은 참으로 힘겹고 비참한 생활이었다. 당시 일본인을 배후에 업고 있거나 또는 특권층 지주(地主)들의 횡포는 말이 아니었다.
이를 견디다 못해 인간의 생존권과 기본권을 외치면서 지주들을 상대로 투쟁한 소작쟁의(小作爭議)가 1922년 12월 13일 순천군 서면(西面) 판교리 박병두(朴炳斗)씨에 의해 일어났다. 이것이 우리 나라 소작 농민운동의 첫 시발이었다.
소작운동은 다음과 같은 조항을 담고 있었다.
첫째, 소작료는 5할 이하로 한다.
둘째, 지세(地稅)는 지주가 부담한다.
셋째, 소작료 운반비의 절반은 지주가 부담한다.
넷째, 소작 농지 경작원은 무단 이동을 할수 없다.
다섯째, 소작료 수납시 두 량(斗量)을 정평(定平)으로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을 전제로 당시 순천군 서면 판교리를 선두로 소작인 1천 6백 여 명이 궐기에 나서자 그해 12월 28일 낙안면의 소작인 8백 여 명이 맨 처음으로 소작 상조회(小作相組會)란 모임을 결성하고 서내리에서 소작 대회를 개최하여 회장에 조용현(趙溶鉉), 부회장 이건(李建), 총무 김승재, 서기 유학주·주영호, 이사 배영주·김종주·유흥주, 회계 유성주 씨를 선발하였다. 뒤에 회장 조용현이 지주들 편에 서자 이를 해임하고 이건씨를 회장으로 추대하였으며 소작인들이 서로 도우며 지주들의 횡포를 막고자 결의하고 나섰다.
낙안에 이어서 3일 후인 31일에는 쌍암면 소작인 1천여명이 농민 대회를 가졌으며 별량면 소작인 정영하(丁永夏), 김학련(金學鍊)등 50여 명이 소작 대회 기성회를 조직하는 등 농민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나갔다. 또한 1923년 1월 4일 낙안, 보성군 별교면과 순천군 동초면 소작인들은 연합 소작인 상조회를 공동으로 창립하였다. 이어서 3월 5일 순천, 보성, 고흥 3개군 지주들이 모여 연합 지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순천 관내 지주로서 소작료 만석을 받는 사람이 4명, 천석 이상이 14명, 백석 이상이 52명에 달하였다.
이 운동은 다음해인 1923년 4월 14일 충북 영동 지방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무안군 자은면에서는 일본 경찰과 대치하였던 농민 4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첫 불상사가 나기도 하였으며 시위는 더욱 격렬하였다.
이러한 농민운동이 항일 운동으로 변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파급되었다. 그 당시 지주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각하였는가를 보여 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농민 소작 운동은 서면에서 처음으로 일어나 낙안, 쌍암 등 인근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음을 알수 있으며, 이를 처음 주도한 박병두 씨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결국 억울하게 옥사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