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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고한 사람(2)
누가 나를 건져내라
로마서 7:15-25 / 김경년 목사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타락하고 부패한 기독교를 새롭게 개혁하기 위해‘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 사람도 혼자서 로마 교황청의 카톨릭 세력들과 싸우다가 깊은 절망에 사로잡힌 일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낙망하고 있는 것을 그의 아내가 지켜보다가 어느날 사람이 죽을 때 입는 상복을 입고 남편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루터가 깜짝 놀라면서 “도대체 누가 죽었는데 상복을 입었느냐”고 묻자 루터의 아내가 대답하기를 “여보, 하나님이 죽었어요, 하나님이 죽었어요”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때 루터는 말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죽었다니 말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때 루터의 아내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당신이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으니 하나님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 아내의 말을 듣고 마틴 루터는 다시 용기를 얻어 종교 개혁의 깃발을 더 높이 들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도 흔들리기 쉬운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사도 바울 선생님도 인간의 연약함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여기서 사도 바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고 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양심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누구든지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착하게 살고 싶다고 해서 착하게 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는 착하게 살고 싶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범죄한 이후 태어날 때부터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태속에 두 민족이 다투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후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민족과 민족의 전쟁뿐만 아니라 개인도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생과 사의 문제입니다. 이기면 살고 지면 죽습니다. 그래서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지만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지금도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은 전세계의 관심사입니다. 한쪽에서는 절대로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또다른 한쪽에서는 악의 축을 제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편에 서야 합니까? 우리는 미국편도 이라크편도 아닌 하나님편에 서기를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사람이 병들면 ‘투병’한다고 말합니다. 즉 질병과 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질병과 싸워서 이기면 건강하게 되고, 지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병과 싸워서 승리하시므로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명을 얻으려면 전쟁에서 이겨야 하고, 건강하게 살려면 질병과 싸워 이겨야 하듯이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면 죄악의 법을 이겨야 하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은 하나님의 법보다 죄악의 법을 더 좋아하고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개그맨 중에 공부를 제일 많이 하고 책을 가장 많이 읽기로 소문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전유성씨입니다. 그분이 쓴 책의 제목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
이 말을 바꾸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먹지 말라는 것은 다 맛있다”“보지 말라는 것은 다 매력이 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왜 더 재미있습니까?”그것은 이미 우리 속에는 죄의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보지 말라 그러면 더 보고 싶고, 가지 말라 그러면 더 가고 싶고, 하지 말라 그러면 더 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의 말씀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공동번역에 보면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대한 사도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신격화하여 사람 이상으로 보고 따르는데 정작 자신은 이렇게 비참한 인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함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을 어떤 존재로 보고 있습니까? 이만하면 잘 믿는 신자라고 자부하십니까?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하고 교회 봉사하고 구제하면 괜찮은 존재라고 보십니까?
만약 우리가 자신을 아직도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보고 있다면 신앙의 깊이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실 사도 바울보다 더 타락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욕심에 사로잡혀 육신의 정욕을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그런대로 희망이 있는 것처럼 자신을 평가합니다. 이것 자체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헨리 맥스웰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날 이런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갑시다” 그런데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어떤 실직자가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그 실직자에게 짜증을 내면서 돌려보냈습니다. 다가온 주일에 준비된 설교를 멋지게 하고 예배를 마치려는 순간에 목사님이 돌려보냈던 그 실직자가 예배당에 들어와서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죽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맥스웰 목사님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내가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옳았던가? 아니면 설교 준비를 두만 두고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옳았던가?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 자기의 목회 방향을 전환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셨다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그 후 맥스웰 목사님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하면서 목회를 하여 훌륭하게 목회를 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유명한 “In his steps"이라는 책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책으로 번역되어서 성경책 다음으로 많이 팔렸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믿는지 안믿는지 아무런 생각없이 살아가면 갈등도 없고, 문제도 크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상 살아가면서 “지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 시간 저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설교 하셨을까?”를 생각하고 이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말씀이 능력 있게 증거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은 “예수님이라면 어떤 자세와 태도로 예배를 참여하고 말씀을 들었을까?”를 생각하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데살로니가 시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보고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라고 말했다고 사도행전17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면서 사니까 세상이 변화되더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자신의 무능함을 발견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함과 비참한 모습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도저히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무능함을 보고 낙심하고 자포자기하고 주저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권능을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본문 25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오직 우리의 힘과 능력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나를 바라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몸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는 다짐하고 다짐하지만 결국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비참한 존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깨어지는 모습으로 하루하루 절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바라보니 이제는 다르게 보입니다. 완전히 바뀐 모습입니다. 이전의 나의 모습이 아니고 이젠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이젠 더 이상 내 눈으로 나를 보지 맙시다. 죄인의 눈으로 율법의 안경을 끼고 나를 보면 도무지 가능성이 없고 죽을 수밖에 없으며 절망할 수밖에 없는 나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안경으로 나를 보면 너무나도 가능성이 있는 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14:12)
그렇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지만 그래서 영원히 탄식하고 죽을 수 박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분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성전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 같이 오늘도 하나님이 종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은과 금이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하나님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마서 7:18-25 / 이삼규 목사
자신을 의지하는 인간의 뿌리 깊은 습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마지막 큰 장애물입니다. 심지어 바울 사도도 그러했습니다. 신약의 서신들에 실린 그의 고백에 따르면, 자신을 의지할수록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이 마지막 장애물을 극복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충족성에 깊이 잠길 수 있다고 바울은 분명히 밝힙니다.
자신을 의지하면 반드시 패배 한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우리는 여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려면 먼저 자신을 완전히 그리고 철저히 불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깊이 들여다보기로 마음먹은 다음부터 바울은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았고, 자신에 대해 가혹하리만큼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사람들 앞에 섰을 때 그는 달라보였습니다. 그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라고 거짓 없이 고백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님이라고 선포하는 일을 계속해나갈 때 바울은 끊임없는 영적 싸움에 휘말려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잘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해 환상을 갖지 않고 대신 온전히 하나님의 영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실 이런 고백을 한 사람은 사도 바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이룬 믿음의 위인들도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인간의 자아를 계속 의지하는 사람들은 영적 싸움에서 결코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간곡히 일러줄 것입니다.
모든 은혜와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단 한 가지 선한 생각도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자기 신뢰의 속삭임을 경계하라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힘을 완전히 불신해본 경험이 없으면서 바울의 교훈을 기록한 성경구절을 유창하게 인용할 줄 압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은 매우 간사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졌다고 믿는 순간에도 어느덧 다시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승리를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죄를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의 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이것을 모두 처리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랑하지 않게 되었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과정에서 스스로 겸손하게 되었고, 공개적으로 제단으로 나아가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제부터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이 우리가 겸손하게 된 이후에 오히려 더 강력하게 침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전보다 더 좋은 토양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더러운 귀신이 나갔습니다. 귀신이 나가서 여기 저기 돌아다녀보아도 쉴 곳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귀신이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 가리라하고 다시 그 사람에게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집이 비어 있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고 수리까지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혼자 살기는 아깝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들을 버리고 우리의 뜻을 포기하고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겸손해진 다음, 오히려 우리의 자기 신뢰는 재빨리 우리의 깊은 곳에서 아주 달콤한 위로의 말을 속삭입니다. 이런 속삭임을 들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이 속삭임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에 실상은 약한 것입니다.
우리의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이런 속삭임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할까요?
“너는 정말 먼 길을 달려왔다. 이제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앞섰다. 너는 죄를 버렸고 스스로 겸손하게 되었다. 너는 저 무기력한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이제는 강한 자이다. 많은 것들을 극복했고 나쁜 친구들을 끊었고 대가를 지불했음으로 이제 너는 자신을 믿어도 된다. 너는 지금 잘 나가고 있다. 이제는 승리를 얻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이다.”
이와 같이 등을 살살 긁어주며 아첨합니다. 이런 것은 부드럽게 위로하고 감싸주기 때문에 우리를 아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데, 우리의 자아가 언제 이 방법을 써야 할지를 정확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계하십시오. 이것은 자기 신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실상 평균적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거의 모든 기쁨은 자아가 아첨하면서 등을 살살 긁어주는 데서 오는 기쁨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자아가 당신에게 “너는 상당히 괜찮은 존재야!”라고 말하면서 등을 살살 긁어줄 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섰다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불신하도록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1)성령님의 거룩한 감동하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 교훈은 때때로 거룩한 감동을 통해 주어집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가장 쉽고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게 이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로렌스의 형제(파리의 깔멜파 평수사로서 식당일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는데, 그의 책 ‘하나님의 임재연습’이 유명하다)의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거룩한 길로 행하겠다고 결심하고 십자가를 졌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고난을 당하라고 요구 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주님은 내게 많은 고난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단지 주님은 내가 나의 자기 신뢰를 모두 버리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도록 하셨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이것은 주님이 내 안에, 내 주변에, 내 가까이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삶이다. 그리고 이것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다.”
인간의 전적 부패 또는 전적 타락을 믿습니까?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확실히 믿는 사람도 사탄처럼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부패를 믿는 사람도 자기 신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져 승리에 이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데로 자기 신뢰는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은폐의 구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들의 전적 연약함을 성령님을 통해서 일깨워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의지 할 것이고 로렌스 형제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기뻐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2)무서운 채찍과 단단한 음식으로
우리가 이 교훈을 하나님께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매서운 채찍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히 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히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때때로 주님은 우리를 징계하시고 훈육하시되 매섭게 채찍질하시기도 하십니다. 자식에게 설탕이 많이 들어간 과자만 계속해서 먹이는 부모가 있을까요? 그렇게 하면 아이들의 이는 모두 썩고 말 것입니다. 그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튼튼하려면 단단한 음식도 반드시 먹여야 합니다.
매서운 채찍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즉시 구약의 욥을 떠 올릴 것입니다. 물론 그는 경건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욥 29:2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욥 29:7 그 때에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마련하기도 하였느니라
요즘 말로 하면 당시 그는 막강한 유명 인사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았습니다.
욥 29:8 나를 보고 젊은이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욥이 나타나면 젊은이들은 숨고 노인들도 일어나서 섰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그에게 혹독한 시련이 닥쳐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대단한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도 시련이 찾아올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목도한 욥은 어떤 행동을 취하였습니까?
욥 40: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 40: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그때 하나님은 비로소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욥아, 이제 됐다. 이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은 자기를 비난하고 정죄하였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욥 42:10).
3)다양한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신뢰라는 우리의 약점을 처리하시는 세 번째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방법이 어떤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양한 시험을 통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에 맞서라고 요구하실 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낙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시험이 찾아올 때 오히려 영적으로 용기를 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결점을 폭로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다양한 시험을 통해 우리를 대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마음이 여리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며, 그분께 가까이 가려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은 자기 신뢰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때로는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주님의 제자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가 죽기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였지만 그는 시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이런 부인을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는 증거로 여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주님을 부인한 일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또한 그는 그 사건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께서 주신 아주 효과적인 교훈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고 의지하면 아주 형편없는 신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내시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익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사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상태를 폭로하셔야 한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우리의 상태가 성령님에 의해 드러나기까지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알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강하고 담대한 어부였기에 그가 “주님, 모두가 도망갈지라도 저는 주님 곁에 있겠습니다. 저를 믿으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는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의 힘과 자기신뢰로 서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얼만 연약한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모릅니다. 종종 우리는 이런 자신의 상태가 드러나면 그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우리의 좋은 습관이나 미덕을 의지하는 것 역시 매우 위험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신뢰에 빠지지 않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계속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아 우리 자아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감사하였습니까?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건짐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마서 7:18-25 / 조용기 목사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알콜중독자의 고백에 “아무리 술을 먹지 않으려고 마음으로 노력하고 결심해도 술의 엄창난 유혹과 무자비한 욕망을 이길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번엔 어느 마약 중독자의 절규를 들어 보십시오. “나는 마약의 악마적인 요구를 정신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내 인생은 마약의 노예이며 노리개입니다.” 이 고백들은 악마의 유혹에 사로잡힌 극단적인 예입니다. 우리나라 성인 5명의 1명은 알콜 중독자이고 마약중독자 수가 30만 이상이 추산되고 살인범 340명중 남자의 85%, 여자의 38%가 범행당시 술에 취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술과 마약은 처음엔 쾌감을 주나 그 후에는 양심을 마비 시키고 인격을 중독시키고 파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바울선생의 양심고백에 동의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7장 18절로 24절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처음으로 정신분석을 주장한 오스트리아의 의학자 프로이드(Freud) 박사는 근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데는 실패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의 심장박동이 불규칙한 것을 발견한 담당의사는 지나친 흡연을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잠시 중단했으나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턱뼈암으로 35번이나 수술을 받아야하는 고통을 당하다가 마침내 아래턱을 완전히 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도 담배의 유혹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후대에 날리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습니까? 그는 대단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담배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데는 그의 의지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의지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자기 힘으로는 죄악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바울의 통곡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1. ‘나’란 말의 복음
첫째로, 로마서 7장에 보면 ‘나’란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로마서 7장에 내가 율법과 죄의 멍에 아래 비참하게 무력함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뉴욕 전화회사의 조사에 의하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나’라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5천번 통화중에서 ‘나’란 말을 3,790번이나 사용했다고 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자아 중심적으로 삽니다만 실상 나라는 존재는 너무나 무력하고 무능력합니다. 나의 힘으로 죄와 마귀와 악한 세속적인 습관을 떨쳐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철저한 전인적인 타락이요, 회복 불가능한 부패를 가지고 왔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수행과 고행과 노력으로 원상복구가 불가능합니다. 죄책과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수련하거나 자신을 신격화 하거나 거짓 종교를 찾아 안식을 얻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됩니다.
로마서 3장 10절로 23절에 보면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이후 인간은 죄의 부패속에 태어나고 자연이 처음부터 범죄한 마귀의 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것입니다.
시편51편 3절과 5절에 보면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이라고 고백했으며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다 감추고 평상시에 없는 것같이 하지만 늘 양심속에 죄악의 중압감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추리작가 코난 도일은 의사이면서 소설을 쓰는데 그의 작품중 명탐정 샬록 홈즈는 아주 유명합니다. 그는 전쟁때 군의관으로 참여하여 공을 세워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코난 도일이 어느날 사회적으로 제법 높은 지위에 있는 런던에 약 100여명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 전보를 띄운 친구들 집으로 알아 보니까 아무도 없이 다 도망을 쳤습니다. 그가 보낸 전보내용은 “당신의 정체가 탄로가 났으니 빨리 피하시오.”그 전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는 조금도 죄짓고 사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정말 그런지 시험해 볼겸 장난 삼아 전보를 쳤는데 하나같이 다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위선의 너울을 쓰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아가 중심이 되어 있으면 죄와 마귀와 싸워 백전백패 합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죄와 마귀와 싸워서 이길힘이 없습니다. 이미 배속에서부터 죄중에 태어나고 이 세상에 항상 죄와 마귀의 포로가 되어서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1서 3장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는 소원하지만 우리 육에 속한 사람은 행할 힘이 없습니다. 마음에 결심과 각오를 해도 작심삼일입니다.
로마서 7장 18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나는 원하기는 원하지만 행할 힘은 내게 없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더욱 자기는 비참한 죄인 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금식도 해보고 고행도 하고 수련해도 겉은 깨끗한 모양을 갖추나 썩은 것을 가득담은 그릇이나 회칠한 무덤밖에 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회칠을 할 수는 있습니다만 속에 있는 썪은 것은 제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로 11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인간의 행위로써 의롭게 될 사람이 없는 것은 인간의 결심과 각오와 노력으로는 의롭게 행할 의지는 있어도 행할 힘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2. 예수님의 승리
둘째로,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담의 타락과 부패없이 태어난 분은 유일하게 예수님 밖에 안 계십니다. 아담의 씨를 받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된 인간은 역사 이후 예수님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장 20절로 23절에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여기에 온전한 하나님이 온전한 사람으로 오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죄와 마귀의 포로가 되지 아니하고 자유인으로써 태어나셨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와 마귀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1서 3장 5절에도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0주 40야를 금식하신 후에 시험을 받을때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신 분이 증거된 것입니다. 광야의 시험에서 마귀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아무리 식욕을 통해서 유혹해도 유혹받지 않았습니다. 명예욕을 가지고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해도 예수님은 그 유혹에 떨어지지 아니했습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라 해도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해방된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탐욕의 노예가 아니고 죄와 마귀의 종이 아니었으므로 탐욕과 죄악과 마귀의 종이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여 우리의 죄악을 청산할 수가 있었습니다. 빚을 진 사람은 다른 빚진 사람의 빚을 갚을수가 없습니다만 빚이 전혀 없는 사람은 다른 빚진 사람의 보증도 될 수도 있고 다른 빚진 사람의 빚을 갚을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악의 빚을 전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죄의 빚을 태어날 때부터 죽을때까지 일절 갚을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절로 6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여기에 바울선생은 우리의 삶을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우리가 죄와 마귀와 율법에 얽매여 사는 부인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영적으로 묶인 죄와 마귀와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청산되어 버렸으면 우리는 그 결혼의 관계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도 못박아 버리고 마귀의 정사와 권세도 해체해 버렸고 죄를 다 청산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된 자리에서 해방되었으므로 이제는 예수님에게 새롭게 시집을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시집가서 이제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쫓아 살므로 신령한 열매를 맺을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행위는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없는 분으로 마귀의 종이 되지 않고 율법에 사슬에 묶이지 아니한 자로서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율법도 못박아 버리고 마귀도 정사와 권세를 해체해 버리고 죄는 모두다 청산해 버리고 묶인 우리를 해방과 자유를 얻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들어오면 율법도 사슬도 끊어지고 죄악의 사슬도 끊어지고 마귀의 사슬도 끊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참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열매를 맺으며 신령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시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들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절로 11절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를 끌어 앉고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낸바 되고 함께 부활하여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생명으로 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놀랍게 이제는 옛사람을 청산해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새사람을 입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옛 아담의 육체의 삶은 지나갔습니다. 마귀의 종살이는 지나갔습니다. 죄의 노예 생활은 지나갔습니다. 율법에 포로된 생활은 지나갔습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다. 예수 안에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안에서 왕노릇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제는 우리가 마귀의 종의 멍에 벗어 버려야 됩니다. 죄악의 종의 멍에 벗어 버려야 됩니다. 율법의 종의 멍에를 벗어 버려야 됩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는데 오직 믿음으로 주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서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는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셋째로,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종교인이요, 선생이요, 지위와 명예가 있는 존경받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오자 주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자아가 마음의 보좌에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중심에 자기가 딱 앉아 있어요. 자기가 왕노릇합니다. 태어날 때 부터 그 자기는 마귀와 죄의 종이 된 사람입니다. 마음과 육신의 뜻과 욕심으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로 3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기 전에는 내가 내 마음에 보좌에 앉아 있는 임금이요, 태어날 때 부터 그 나는 마귀와 죄의 종이 되어서 마음과 육신의 뜻을 따라서 욕심으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가 종교인이요, 선생이요, 지위와 명예가 있고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버림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 거듭난다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옛사람을 회개하고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1장 7절로 9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와 죄에서 마음의 육신의 탐욕에서 해방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면 우리는 죄와 마귀와 율법에서 해방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장사지내고 부활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 살게 되는 위대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초대교회에서 아주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목사가 되기전에 깡패 출신이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다음 사람들에게 자기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시장이 열리면 시장터에 와서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장날 사람들이 시장에 가기전에 시골에서는 나무에 울긋불긋 걸어놓는 성황당이라고 합니까? 거기에 가면 침을 뱉으면서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그렇게 하고 갔습니다. 그런 깡패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변화 받아서는 또 알만한 모든 사람에게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사람들은 진짜 죽은줄 알았어요. 사람들은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받고는 모두들 박수를 치고 기뻐했습니다. 평소에 얼마나 잔인하고 못된일을 저질렀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 사람들이 많은 시장 한복판에 죽었다는 김익두가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된 그의 손에는 성경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변화된 그를 시험해 보려고 지나가는 김익두 목사님에게 물을 한통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물을 툭툭 털고는 물을 끼얹은 사람을 쳐다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분명히 좋은 사람이야.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할 것은 당신이야. 내가 살았다면 당신 오늘 내손에 작살났어.”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난 후 마귀의 종되었던 옛사람을 청산하고 자아의 마음에 보좌에 예수님을 모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김익두가 되고 그는 온 한국 천지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신유의 능력으로 하늘나라를 크게 왕성케한 주의 귀한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의 마음의 보좌에 예수님을 앉쳐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임금이 되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이기지 못해요. 마귀를 이기지 못해요. 율법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어요. 나는 무력합니다. 나는 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라는 사람을 보좌에서 옮겨 놓고 이 보좌에 예수님을 안쳐야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한 무리의 무신론자들이 성경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사람이 창조에 관하여 말했습니다. “그래 상식이 있고 조금이라도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몇천년전에 하나님이 땅위에 허리를 굽혀 진흙 한 움큼을 집어 가져다가 거기에다 숨을 불어 넣어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수가 있단 말이오?”그때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그의 말을 듣고 일어나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창조에 관한 모든 질문에 다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 한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어느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 허리를 굽히시고 이 도시에 서있던 가장 더러운 진흙 한 덩어리를 집어서 그 흙에 그의 성령의 생기를 불어 넣으셨고 그리하여 노름하고 술마시고 도적질하고 음란하고 방탕하던 개망나니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로부터 23년 동안 나는 도박과 음주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과 음란과 방탕을 한번도 한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대적해서 싸구려 비판의 이론을 전개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 생애에서 일어났던 이처럼 놀라운 변화를 하나님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변화된 삶이야 말로 거듭남에 대한 최고의 증거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힘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변화는 오직 예수님을 마음 보좌에 모셔 들이므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왕으로 다스릴때에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외에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 영원한 미래를 변화시켜 줄자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고 탄식했습니다. 그는 그의 삶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소원과 육체안에 있는 죄의 법과에 끊임없는 싸움에서 항상 패배하는 자아를 부둥켜 앉고 상처투성이인 양심으로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르짖음의 해답은 곧장 왔습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때에 하나님의 대답은 곧장 오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의 삶의 승리는 자아의 투쟁으로는 오지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안돼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자아를 임금의 자리에 앉혀 놓고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지도 못해요. 죄를 이기지도 못해요. 마귀와 싸움해서 승리하지 못해요. 백전백패 합니다. 곤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귀를 멸하고 죄를 멸하시고 율법을 철폐하신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끌어 앉고 죽어서 옛사람을 장사지내 버리고 우리를 끌어 앉고 부활로 살아나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건강하게 하시고 축복받고 영생복락을 얻게 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하게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 나를 마음의 보좌에서 옮겨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보좌에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앉혀야 되는 것입니다. 자나 깨나 예수님 중심으로 살고, 자나 깨나 예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자나 깨나 예수님을 의자하고 살고 예수님께 구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집니까? 자아가 살아서 내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상처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주님이 우리의 짐을 다 짊어 지셨습니다. 주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중심에 계시면 나는 그리스도께 의지해서 오직 안식이 있고 승리가 있고 영광이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우리 주님!
우리는 항상 내가 살아 있어서 내가 내 마음에 보좌에 앉아
나의 힘으로 인생을 살고, 나의 힘으로 율법도 지키고,
의롭게 살고, 마귀도 이기려고 했습니다만 백전백패하고 상처 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울선생의 고백은 참말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천지만물을 보아서 건져 낼자가 없습니다만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건져 내어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나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의 중심을 점령하셔서 오늘날 승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며 부활의 생명으로 마귀를 짓밟아 버리고 죄악을 털어 버리고 그 누더기 옷을 벗어 던져 버리고 율법을 이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과 희락과 의를 가지고 살게됨을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을 예배하고 찬송합니다.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받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인간의 조건
로마서 7:18-25 / 임영수 목사
저는 이 시간 죄책감과 은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저는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정적인 한 예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들의 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측량할 길 없는 은혜를 경험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은혜의 빛을 경험한 후에 그들의 영혼이 한없이 정결해 짐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순종은 쉽고 즐거운 것이 되었고, 사랑하지 못하던 사람들까지 사랑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자신들은 유혹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들을 유혹하던 것들은 힘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옛 생활과 새로운 삶이 흑과 백처럼 뚜렷한 대비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에게 회색 그늘이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의 색조가 뒤 섞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전혀 낯선 유혹이 새롭게 찾아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순종은 노력해야만 하는 어려운 일이 되었고 이전보다 더 비통한 심정으로 근절시킬 수 없는 죄의 고질적 본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러한 경험 가운데서 어느날 히브리 서신을 읽는 중에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재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나니"(히6:4-6)라는 말씀을 읽고 자기 자신이 바로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단정지었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까지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를 지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 용서가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한편 다른 한 사람은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한 번 은혜의 빛에 쬐임을 받고 얼마동안 깊은 평안과 희열을 맛보고, 유혹과는 더 이상 상관 없는 것처럼 느끼다가, 완전히 역전된 상태로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깊은 절망과 낙심 가운데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한번 은혜의 빛을 쬐었을 지라도 얼마의 시간이 흐른후에 회색으로 되어가면서, 그전에 문제되지 않았던 새로운 유혹과 시험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비로서 그는 그의 온갖 절망과 연약함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죄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자각이 같이 병행해서 더욱더 향상되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죄책감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죄책감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문제는 죄책감을 억압하느냐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두가지 상반된 과정을 겪게 됩니다.
억압할 경우, 분노, 반항, 두려움과, 염려, 양심의 마비, 자신의 잘못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의 퇴화, 공격적인 성향이 지속적으로 우세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죄를 의식적으로 인정할 경우 회개, 하나님의 용서로 말미암는 평안과 안전함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양심은 점차 순화되고 공격적 충동은 계속해서 약화됩니다.
종교는 죄책감을 가중시킬수도 있고 제거할 수도 있습니다. 죄책감을 가중시키는 종교는 도덕주의적 종교로 그것은 금기의 개념으로 가득차 있고 하나님을 위협적인 존재로 그립니다. 그러한 것은 기형적인 종교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조장하며 완악함과 반역과 사악함의 불길한 매카니즘을 작동시킵니다. 그에반해 은혜의 종교는 이 악순환 속에 개입하여 죄인을 회개에 이르게 하고, 그리하여 죄책감에서 해방시킵니다.
교회 안에는 병적인 죄책감을 드러내며 도덕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는 반면,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용서하고 죄책감을 덜어주는 하나님의 사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성서에서 자신들의 지지하는 근거를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성서에는 은혜의 보장과 무서운 경고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묘하게도 교회안에서 자신의 죄책감을 억압하고 숨기며,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판단하면서 자기 의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확증하는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있고, 반면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정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은혜를 확증하는 말씀보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읽고 두려워 떠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말씀은 회심한 후에 다시 죄를 짓고 죄책감에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며, 바리새인들과 도덕주의자들, 자신이 의롭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들 배교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회심하고 죄책감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사건에서 예수님이 그 여인과, 그 여인을 정죄하던 사람들에게 서로 다르게 말씀하신 것을 발견하게됩니다. 여인을 끌고온 사람들에게는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고,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않는 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에서 간음한 여인을 끌고온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은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정죄하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여인은 죄책감에서 해방되지 않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여인을 끌고온 사람들은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죄가 있음을 깨우쳐 주셨고, 여인에게는 정죄에서 해방을 주셨습니다. 여인을 끌고온 사람들은 돌로 맞을 사람은 여인과 같은 사람이며 자기들은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여습니다. 예수님은 정죄 받을 사람들이 여인이 아니고 그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죄책감 자체를 형벌로 받아드리면 안됩니다. 죄책감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하는 통로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죄책감으로 인해 좌절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죄책감이 무엇으로부터 연유된 것인가를 분명히 파악해서 구체적인 회개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책감에는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이 있습니다. 참된 죄책감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질책받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거기서 우리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죄책감의 근원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거짓된 죄책감은 인간의 판단과 암시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회심하면 죄와 죄책감에서 완전히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위험한 착각이요, 자신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완전히 회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죄를 범하고 그 전보다 훨씬 심각한 형태의 죄책감을 또다시 경험하게 될 때 그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게 됩니다.
로마서 7-8장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운명을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7:1-24과 그리고 7:25절과 8장 전체 사이에는 매우 큰 대조가 존재합니다. 이 부분에서 논쟁의 흐름이 단절된 것처럼 보여서 성경 번역자들은 적잖은 당혹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7:19,24에서 사도 바울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죄책감과 절망을 묘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두 번째 부분에서 이 절망은 자취를 감추고 승리에 찬 노래가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7:25, 8:11)
이 대조가 너무나 극명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자기 인생의 개별적인 두 단계에서 경험한 인간 조건,즉 7장의 회심 전과 8장의 회심 이후를 연이어 묘사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해석은 경험과 전적으로 모순됩니다. 그러한 해석은 회심이 죄와 죄책을 피하게 해준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회심하고 나면 다시 죄를 짓지 않는 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종 후에도 여전히 죄책감을 경험하며, 어떤 경우 더 예민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7장의 묘사는 개종 유무와 상관 없이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전'과 '후'의 구별이 없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7장과 8장에서 묘사하는 인간 상황에 동시에 처할 수 있습니다. 7장에 나오는 죄에 대한 뼈저린 자각과 8장에 나오는 은혜에 대한 생생한 확신을 동시에 느낍니다. 이것은 역사가 입증합니다. 자신에 대해 가장 절망한 사람이 은혜에 대한 확신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 합니다. 그중 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죄책에 대한 의식과 용서에 대한 의식을 분리시킬 경우 필연적으로 인간에 대한 오해가 생깁니다. 인간은 누구도 죄책감을 피할 수 없으며, 동시에 용서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제거하는 대상은 죄책감이 아니라 정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아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한 죄사함의 조건은 통회와 죄책감에 대한 확실한 자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은 죄책감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죄된 가운데서 해방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시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인된 모습을 그대로를 받아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거나, 죄책감을 부인할 때 우리를 거절하십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탄식을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 희망이 없는 상태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탄식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심한 내적 갈등과 혹독한 시련을 통과할 때도 있고, 불안과 괴로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의심과 반항심, 주저함, 음울한 심연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우리는 믿음과 은혜에 대한 고요한 확신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생의 과정에서 침울함과 쾌할함,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열을 경험합니다. 약할 때도 있고 강할 때도 있으며, 숱한 일로 인해 죄책감으로 고통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확신하게도 됩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은 죄책감 없이 그것을 억압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로 살지 않고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9:13)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교회나 사회, 가정에는 자기 합리화와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한 비난을 통해 죄책감을 억압하거나, 반대로 자기 잘못에 병적으로 집착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자 다 잘못된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합리화나 병적인 죄책감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시인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자기 인식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실제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하는 반면 ,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참된 영성의 척도
로마서 7:21-25 / 이삼규 목사
아내 캐더린과 함께 구세군(救世軍)을 창설한 윌리엄 부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80대에 들어선 이 노(老)장군은 어느 날 의사의 진료를 받고 왔습니다. 그가 곧 눈이 멀게 된다는 얘기를 들려주는 일은 그의 아들 브램웰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 · · "그래, 내가 앞을 못 보게 된단 말이냐?"
· · · "네, 아버지. 아무래도 그 경우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 · · 브램웰은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다정하게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 · · 부스가 방금 들은 얘기를 두고 생각하는 사이 잠깐 침묵이 흘렀습니다. 이윽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 · · "네 얼굴을 다시는 못 보겠구나."
· · · "예, 이 세상에서는 못 보실 겁니다."
· · · 다음 순간 노병의 손이 침대 커버를 천천히 따라 올라가 아들의 손을 잡았습니다. 손을 꼭 쥔 채 그는 아주 평온하게 말했습니다.
· · · "하나님은 최선의 길을 아신다!"
· · ·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둔 뒤 말을 이었습니다.
· · · "브램웰, 지금까지 나는 이 두 눈을 갖고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왔다. 이제는 두 눈이 없는 채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 · · 이것이 진정한 영성(靈性)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영성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영성이란 영적 성품이나 영적 기질을 말합니다. 영성이 훌륭하다는 것은 영적 성품이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영성은 은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품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은사적인 혹은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셔서 쉬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배우는 것이 마음이 쉼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를 메고도 쉼을 누릴 수 있는 그 단계까지 올라가야 참다운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멍에의 무게에 눌려서 정신도 못 차리는 그 상태를 영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십자가의 무게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주님을 사랑해서 멘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 그 영력이라야 영성이 밑바탕 된 영력이 아니겠습니까?
영성의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마다 서로 다릅니다. 어떤 모임에서는 신앙에 대해서 끊임없이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또 어떤 모임에서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열심을 내면서 활기찬 모습이 영성의 특징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또 어떤 모임에서는 가장 먼저, 가장 길게, 가장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영적인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습니다.
물론 열렬한 간증, 빈번한 기도, 큰 찬양이 영성과 관계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 자체는 영성도 아니고, 영성의 참된 증거도 아닙니다.
참된 영성의 척도는 ‘우리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욕구들이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이런 욕구들은 언제나 우리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욕구들로, 우리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우리의 삶을 통제할 만큼 강력합니다. 이런 욕구들 몇 가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된 영성의 척도
1)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욕구
자신들이 남들보다 더 거룩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갈망’은 실상 그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충분한 증거인 것입니다. 정말로 신령한 사람은, 기쁜 일이 생겨도 교만하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부어주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존 웨슬리는 초기 감리교 단체들 중 한 단체의 구성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즐기기 위해 교회 오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망
이 세상에서 스스로의 고난과 수치를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한 후, 속으로 “제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이렇게 말을 덧붙일 것입니다. 그는 일종의 영적 ‘반사작용’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그는 모든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택합니다. 그는 선택할 때에 자기 자신과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그의 마음은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질식 상태에 놓인 사람이 공기를 갈망하듯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스스로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를 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역경과 환난을 받아들일 때 한숨을 쉬면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역경과 환난이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찾아온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가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환난을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과를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자발적으로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를 선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바로 신령한 사람 즉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4)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려는 욕구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듯이 그것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보시되, 그것들을 꿰뚫어 보십니다. 즉 하나님은 단지 표면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보십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기 때문에 겉모습에 따라 우쭐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보시듯이 깊이 있게 꿰뚫어보고, 그분이 판단하시듯이 판단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보기에 그의 명예가 손상되고 그의 무지가 드러나서 곤란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고집합니다.
5)의로운 삶에 대한 욕구
신령한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잘못사느니 차라리 옳게 죽는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의 확실한 특징은 생(生)에 대해서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몸에 집착하는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계속적으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면 점점 이 땅에서 얼마 동안 더 살 수 있는지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가치있게 사는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더 연장하려고 신앙적 가치를 희생시키고 타협의 대상으로 삼는 불신앙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의로운 삶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여생의 길이를 결정하시도록 맡기고 평안을 누립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고 죽을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이 옳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이런 지식이 그의 사고와 행동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줍니다.
6)기꺼이 희생하려는 마음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거꺼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은 주목받지 못해도 그들이 향상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시기심이 없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영예를 얻을 때 그는 기뻐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그도 역시 기뻐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는 자신의 낮아짐을 얼마든지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7)시간을 초월하는 마음
영적인 사람은 ‘시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신앙에 의해서 세상의 풍조와 시간의 유한성을 초월한 그는 마치 이미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 도달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법을 배웁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성원들과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에 이미 합류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유명한 사람보다는 유용한 사람이 되고,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혼자의 힘으로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유로우신 성령님만이 사람을 신령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무료교환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어떤 설교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renew)라는 구절을 ‘교환하다’(exchange)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새 힘을 얻으리니’를 “그의 힘을 교환할 것이다”로 바꾸어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많은 부분이 나쁜 것을 좀 더 좋은 것은 ‘교환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복되고 기쁜 거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요즘 무릎 수술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오랫동안 관절을 사용하여 다 달아졌기 때문에 그 무릎 관절을 빼내고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것입니다. 교환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기술이 발달하여 무릎 인공관절이 30년 이상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약간의 고통을 참고 교환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뿌리는 대속의 교리입니다. 대속은 죄인들의 죄가 구주에게 전가된 것을 의미합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진리는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놓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의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진리를 믿도록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런 시작 이후에 거의 모든 것은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교환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죄가 의로 바뀐(교환된) 다음에는 ‘진노’가 ‘받아들임’으로 교환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진도가 ‘죄를 지으면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 위에 머물지만,내일은 하나님의 미소가 그 사람 위에 머물 수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이것이 가능할까요? 그가 회개와 신앙을 통하여 ‘정죄의 자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교환하면 됩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교환은 죽음과 생명의 교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은 그들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인간은 구두를 더 좋아지게 하려면, 구둣방으로 가서 그것을 수선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품종개량을 통해서 좋은 송아지를 생산하고, 작업 공정의 합리화를 통해서 자동차와 비행기의 품질을 향상시킵니다. 다이어트와 비타민과 수술을 통해서 건강을 증진시키고, 접목법을 통해서 식물의 품질을 개량합니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성숙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이런 방법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분은 기존의 것을 꿰매어서 더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인간을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서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그분은 새 생명을 주시고, 옛 사람을 파괴하는 작업에 착수하십니다.
이 단계에서, 앞에서 이사야의 본문에서 암시되었듯이, 그리스도인은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강하게 만드신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의 연약함에 비례하여 그만큼 강하게 됩니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회심을 통하여 그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단지 미미한 인간의 자원이 아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그는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한 것입니다. 물론 그 교환 후에도 그 ‘강함’은 그의 것이 아닙니다. 그 ‘강함’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흘러들어온 것일 뿐입니다.
성화(聖化)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문제들 중의 하나는 성화(聖化)의 문제입니다. 성화의 문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최고의 순수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의 해결방안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이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 7-8장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인간이 도덕적 삶을 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좀 더 높은 외적 도덕성의 단계로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결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성결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성결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심슨이라는 목사님은 은혜로운 찬송을 작곡하고 작사한 분입니다(135,302,430,441,472장).그가 성결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서 깨들은 후에 성경에서 참 성결의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설교 결론 부분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작곡한 찬송가에서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저는 주님을 저의 성결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은 제 영혼을 위한 흠 없는 천상(天上)의 옷입니다.
저는 주님을 저의 의(義)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주님이 저의 성결의 문제를 떠맡으신 것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성결하게 되려는 노력을 버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성결을 이루시도록 의지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틀림없이 그분이 떠맡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환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무지를 그분의 지식으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그분의 지혜로, 우리의 단점을 그분의 장점으로, 우리의 슬픈 죽음을 그분의 복된 영생으로 교환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고 믿는 신앙’으로 교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갈등 나의 갈등
로마서 7:24-25 /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갈등, 나의 갈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모순과 갈등의 연속이며 매일매일 모순과 갈등속에 괴로워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 체험은 평범한 성도의 생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탁월한 바울 사도조차 그 생활중에 느끼고 괴로워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리오.” 의롭게 살려고 하는데 죄가 있고,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데 세속의 유혹이 있고, 건강하게 살려고 하는데 병들고, 잘 살고자 하는데 가난과 실패가 있고,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데 미움이 있고, 천국 갈려고 하는데 지옥이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갈등속에 우리는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누가 이 고통에서 건져 주실수 있습니까? 오직 모순과 갈등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과 감사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심판과 용서의 갈등
첫째로, 율법의 심판과 자비의 용서는 하나님의 갈등이요, 우리의 갈등인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의 실천은 심판입니다. 죄를 지은 영혼은 죽으리라. 율법은 죄지은 사람에게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실천은 용서입니다. 자비는 죄를 지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용서해 주는 것이 자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성전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데 이른 아침에 수많은 사람이 웅성 거리고 모였는데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길을 비키자 많은 젊은이들이 한 여인을 끌고 예수님 앞에 와서 내동댕이 쳤습니다. 머리는 산발이 되고 눈은 충혈이 되고 옷은 흐트러지고 신발은 벗었습니다. 그 청년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혔으니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써 쳐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에 예수님서는 아무말도 안하시고 엎드려서 손으로 글을 적었습니다. 무얼 적었다고 말씀은 안하지만 주님이 분명히 십계명을 적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 계속해서 선생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기에 예수님이 일어나서 나이 많이 먹은 사람부터 젊은이까지 쫘~악 살펴 보시고 난 다음에 “너희들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런다음 엎드려서 주님이 손가락으로 또 기록하는데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그들의 죄가 백일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모든 사람의 위선과 감추인 죄가 예수님의 손가락끝에 다 드러나니까 큰자로부터 적은 자까지 손에 손에 쥐고 있던 돌맹이와 몽둥이를 다 버려놓고 슬며시 빠져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참만에 예수님이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 있는 돌맹이, 지팡이만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고 아무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자보고 말했습니다. “여자여 고개를 들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여자가 공포에 떨면서 좌우로 살펴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심판과 자비의 용서를 기묘하게 조화시켰습니다. 율법도 주님이 이루시고 자비도 주님이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용서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신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속죄제와 속건제는 바로 이런 것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으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러므로 심판도 받고 하나님이 용서도 주기 위해서는 짐승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속죄제물은 죄지은때 하나님께 나와서 죄지은 사람이 거기에 안수하고 그 보는 앞에서 그 짐승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니까. 그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비명을 부르짖고 버둥대며 죽는 것을 눈앞에 보고 그곳에서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그 흘린피가 또 용서와 자비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범죄한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속죄제의 대가로 희생제물을 반드시 드려야 됐습니다. 죽음이 있고 난 다음에 용서가 있었습니다. 속건제물은 하나님의 성물이나 이웃의 권리나 재산침해때 범과를 사함받기 위해서 제사와 아울러 손해배상을 더해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법이 있으면 법도 만족하고 자비를 통한 용서도 만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드려지고 재물이 죽어야 됩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율법의 심판과 하나님의 자비의 용서 이 모순되고 갈등된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히 조화되는 곳. 법을 세우자하니 자비가 울고, 자비를 세우자니 법이 웁니다. 이 모순과 갈등을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으로 해결했습니다. 법을 세우지 않으면 다 심판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자비가 없어집니다. 자비를 세우자니 법을 지킬수가 없습니다. 법이 웁니다. 이 갈등이 얼마나 심합니까? 법도 세워야 되고 자비의 긍휼도 베풀어야 되고 이 상극되고 모순된 갈등을 조화시킬수 있는 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면 살아 남을 사람이 한사람도 없어요. 그러므로 심판받을 우리들을 대신해서 주님이 심판을 받아 몸찢고 피흘려 처참하게 고난 당하여 죽고 그 죽으심을 통한 보혈을 통하여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범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받으시고 그 보혈로 자비와 용서를 들이시니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결코 살아 남을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갈등을 해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우리에게 심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비와 용서도 베풀어야 됩니다. 이 갈등을 보십시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내셔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무지무지한 심판을 받게 하시고 그 죽으심을 통하여 흘린피로 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의 율법의 심판에 대한 고민과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소원의 모순과 갈등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한 공의로운 임금이 있었습니다. 이 임금은 법에 따라 아주 공정하게 심판했기 때문에 온 국민들이 두려워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연로한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는 어머니를 끔찍이 사랑하는 효자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임금님의 어머니가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임금님은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재판날이 다가올수록 백성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임금이 죄지은 어머니에 대해서 어떻게 판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한패는 임금이 법대로 어머니를 심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정의로운 임금이라고 해서 자기 어머니를 예외 시키지는 아니할 것이다.” 또 한패는 “효자인 임금님이 사랑하는 어머니를 절대로 심판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재판날이 왔습니다. 임금님은 높은 보좌에 앉고 죄수인 어머니는 결박을 당한채 끌려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재판과정을 지켜 보았습니다. 드디어 임금의 입에서 단호한 판결이 내렸습니다. “저 죄인에게 굵은 몽둥이로 곤장 40대를 때려라.” 한쪽에서는 “와~”하는 함성이 들렸습니다. “역시 우리 임금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무리 공의롭다고 해도 자기 어머니를 곤장으로 치라고 할수 있느냐? 저 노인을 곤장 40대 때리면 죽지 않느냐?” 판결을 집행하기 전에 건장한 청년 둘이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섰습니다. 그들이 어머니를 치려는 순간 임금이 외쳤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라” 그는 그의 왕관과 왕복을 벗어 놓더니만 계단을 내려와서 어머니 등뒤에 감싸 안았습니다. 그리고 “처라. 40대를 처라” 어머니를 치자니까 임금님이 어머니 대신 40대를 얻어 맞아 온 몸이 상처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매는 어머니를 때렸으나 어머니를 감싸고 있는 아들 임금이 얻어 맞고 공의도 세우고 자비도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지만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므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받는 우리를 끌어 안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못박힌 것은 예수님이 못박히고 품에 안긴 우리는 공자로 의도 이루고 용서도 받게 된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용서의 모순을 십자가 상에서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의 조화를 기막히게 이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어떤 종교도 철학도 도덕도 수양도 공의를 세우고 용서를 세울수 있는 역사를 베풀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이 공의도 세우고 그리고 용서와 사랑도 세울수 있기 때문에 천하만국에 어떤 종교가 있어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은 없는 것입니다.
2. 반역과 화해의 갈등
둘째로, 괘씸죄와 화해의 모순과 갈등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돌아섰으니 하나님이 괘씸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하나님이 사랑하고 잘해주고 돌보아 주셨는데 하나님을 배반한 인생들. 아담, 하와만 그런 것 아닙니다. 여러분과 나도 하나님을 얼마나 수없이 배반하기 때문에 꽤씸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고 싶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하나님은 화해하기를 원하십니다. 갈등입니다. 괘씸죄와 화해의 모순과 갈등속에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는 달라요. 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외아들이 있었는데 가정에 아들과 아버지가 심히 다투었습니다. 아버지가 “이놈아! 아버지 말을 안들으려거든 집에서 나가라!” 아들이 서슴치 않고 나가지요. 보따리를 싸서 나가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나가라고 해도 속으로는 나가지 말라는 것과 한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나가라고 한다고 아들이 보따리 싸고 나가니 그 아버지의 상처가 말로 다할수 없습니다. 또 어머니의 상처도 말로 다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밤낮 울며 그 남편에게 사정을 해서 아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용서해서 집에 돌아와서 아들은 2층에 있고 부모는 아래층에 있는데 그러나 아버지와 화해는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옛날에는 밥상에 아들과 같이 다정하게 이야기 하면서 밥을 먹었는데 밥상에 아들을 청하지 않습니다. 그 어머니가 “여보, 아들 불러서 밥상에 같이 진지 잡수시지요.”“안먹어. 용서해서 집에는 돌아왔지만 나는 그놈하고 대화는 하고 싶지 않다.”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용서는 했는데도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교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밤낮으로 또 눈물을 흘리고 남편에게 간구해서 어느 하루 아들이 손을 잡고 내려와서 밥상에서 같이 밥을 먹는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도 화목제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용서는 받았으나 올바른 삶을 못살므로 괘씸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 안드리고 산으로 들로 놀러가면 하나님이 “괘씸한 놈!”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십일조 도둑질해서 포켓에 다 집어 넣는 “괘씸한 놈!” 괘씸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괘씸한 놈이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은 화목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 갈등속에 있습니다.
구약에도 화목제물이라고 있습니다. 괘씸한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됩니다. 벌을 받고 난 다음에야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하나님을 불순종해서 괴심죄를 지은 사람은 화목제물을 가져와야 됩니다. 화목제물을 드려서 그 짐승이 죽고 피를 흘려서 죄를 받고 그리고 난 다음 흘린 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위한 자원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었었습니다. 우리는 이 화목제물이 매일매일 필요합니다. 매일매일 괘씸죄 짓고 있어요. 여러분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하나님이 “이 괘씸한 놈, 네가 그럴수 있느냐?” 이런 하나님의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을때가 많습니다. 그러한데 우리가 어떻게 늘 하나님께 교통이 되고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고린도후서 5장 18절로 21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과 화목하라. 화목이 값없이 화목이 되는줄 알아요? 괘씸한 일 해놓고 난 다음 그냥 화목합시다. 안됩니다.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가를 지불해야 돼요. 공짜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 우리에게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이 괘씸죄가 거기에 다 심판을 내리시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화목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어떠한 잘못을 저질러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 보혈을 믿고 나가면 하나님과 화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하고 화목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지요? 하나님이 두려우나 또한 가까이 가고 싶은 우리의 심정이 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에게 괘씸죄를 짓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두렵잖아요. 그러나 역시 우리 중심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싶지 않아요? 그럴때 그것을 이루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에베소서 2장 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요한1서 2장 2절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1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항상 화목을 해야 돼요. 괘씸한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갚아서 벌을 받았습니다. 그 보혈을 통해 이젠 하나님과 늘 화목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화목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전에 한 은혜로운 간증을 들은적이 있는데요. 어떤 부형님이 사업차 뉴욕에 갔다가 그곳에서 자기집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이 상급생에게 얻어 맞아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을 서둘렀습니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 복수심이 이글이글 타서 이를 갈았습니다. “내가 가면 가만 둘까보냐? 사랑하는 내 아들을 상급생이 학교에서 때려서 죽이다니 내가 이놈에게 기어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리라.” 마음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학교 교장으로부터 시작해서 학교 당국자를 가만히 안두고 모조리 고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가 비행기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하는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면서 “네 죄로 말미암아 내가 대신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 죽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가 용서했지. 내가 십자가 안 짊어졌으면 너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죽어야 마땅하다. 내가 너 대신 십자가 짊어지고 죽어서 그 보혈로 너를 용서했으니 너도 이번에 십자가를 짊어져라. 너가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용서를 베풀어 주라.” 이런 주님의 음성이 자꾸 마음에 들려 옵니다. 이 부형님은 “예수님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내 아들의 원수를 용서하려고 해도 내가 안됩니다. 어떻게 할수 있습니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원수를 갚겠다는 복수심이 끌어 올랐습니다. 이렇게 비행기 안에서 15시간 동안 마음속에 수없이 원수를 죽었다가 살렸다가 죽였다가 살렸다가 그는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가 공항에 도착했을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리라는 결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작정했습니다. 이분이 집에 도착해보니 학교 관계자들이 얼굴을 들지 못하고 쩔쩔매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이미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리라고 굳게 결심한 그는 부드러운 말로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나도 처음엔 복수를 다짐했지만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마음을 강권해서 내가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검사에게 아들을 죽인 피의자를 관대하게 처분해 달라는 탄원서를 보냈습니다. 또 그리고 그는 3천여만원을 들여 아들의 학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번제물이 되었다는 깨달음이 그 부형님으로 하여금 미움과 사랑의 갈등을 해결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형님이 그 아들을 죽인 원수에 대한 어마어마한 미움과 그리고 또한 용서하고 사랑해야 된다는 의무감과 그 갈등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끌어 안음으로 해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속에 원수에 대한 심판도 있고 원수에 대한 용서도 있어서 조화가 이루어지고 갈등이 해결될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십자가 이외에는 괘씸죄와 화해를 가져올수가 없습니다.
3. 미움과 사랑의 갈등
셋째로, 미움과 사랑의 갈등과 모순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반역한 인간을 미워하시나 또한 사랑하십니다. 이런 갈등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반역한 인생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사랑하십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갈등, 얼마나 심합니까? 우리도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또한 사랑하고 싶습니다. 갈등입니다. 미워하나 사랑해야 하는 모순과 갈등은 심합니다. 여러분 르윈스키와 염문을 일으킨 클린턴과 힐러리의 자서전 읽어 보셨습니까? 전세계 이목을 집중시킨 힐러리 여사의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에서 그는 그 자서전을 적어서 미국에 일주만에 60만부의 베스트셀러로 팔려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스캔들때 “클린턴을 용서할 수 있느냐? 왜 이혼하지 않느냐?” 질문에 대해 그 당시에는 입을 딱 다물고 있었으나 그 자서전에는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법정에 나가기전에 클린턴이 아침에 와서 방안에서 싱글거리면서 “내가 르윈스키와 불미한 관계가 있었다.”고 힐러리에게 고백할 때 힐러리는 그 자리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분노가 차올라서 “이자식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남편이고 내 딸의 아버지고 대통령이고 사랑해야만 된다.” 그녀는 그 갈등에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고 했던 것입니다. 목을 틀어 버리고 싶은 그 마음에서 또한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무시무시한 갈등.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기 전에는 그 갈등의 문제가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번제가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매일같이 구약에는 번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 번제는 미움과 사랑의 갈등을 해결하는 제사인 것입니다. 매일같이 사람들이 미운 행동을 하니까 하나님이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야 돼요. 미움은 심판해야 되고 사랑은 베풀어야 되니까 번제의 제물을 드려서 온전히 각을 뜨고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므로 하나님의 미움이 그곳에서 다 소진되고 번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베풀어지는 제물이 바로 번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하나님의 친구라 했지만 아주 고약하고 미운 행동을 했습니다. 85세 되었을때 하나님이 분명히 그를 하늘에 별들을 헤아리라 하고 네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많으리라고 약속을 해주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아내 사라가 “여보 나는 나이 늙어 자식을 못 낳으니까 내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서 자식을 얻으시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단오하게 “무슨소리! 하나님이 약속을 했는데 당신 나이 75세요 내 나이 85세라도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지 무슨 그런 소리를 하나?” 그랬더라면 사라가 “와~ 우리 남편 넘버 원이다. 과연 우리 남편이다.” 그렇게 했을 것 아닙니까? 여자는 젊으나 늙으나 질투심은 다같이 있는 것입니다. 할수없이 아들을 못낳으니까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해서 남편에게 한번 마음을 떠보았는데 “내가 아들을 못낳으니까 당신 내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서 아들을 낳으시오.” 아브라함이 그 말을 넙죽 받아서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그때 이 사라의 마음에 얼마나 실망을 하겠습니까? 하나님도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내가 약속을 주었는데 약속을 믿어야지. 그래 사라가 꼬인다고 해서 그 권고를 받아 들일수가 있느냐?” 언제고 하나님이 미워한 그 행동을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낳아서 이삭이 19내지 20살이 되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아버지에게 귀엽게 놀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사랑하는 외아들 독자를 모리아산에 데려가서 번제로 드려라.”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번제는 제사장이 드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직접 각을 떠야 합니다. 자기 손으로 죽여서 각을 떠서 태워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올 것 왔구나. 내가 하나님께 미운 행동 했으니 반드시 이 미운 행동을 용서받기 위해서는 번제를 드려야 한다.” 그것도 짐승이 아닌 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으니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두말하지 않고 아들을 데리고 사흘길을 걸어가서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재단을 쌓고 아들을 묶고 발로 머리를 밟고 경동맥을 칼로써 자르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 독자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네가 이렇게 순종하므로 비로소 내가 너가 나를 완전히 사랑한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거기에 염소 한 마리가 칡넝쿨에 걸려 있는지라 그를 잡아다가 대신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미운행동을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대가없이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잘못 행위에 대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불 못하니까 구약시대에는 번제를 드렸고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번제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하여 분노하시나 사랑하시는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번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미움을 다 소진시켜 버리고 그를 통하여 미움은 사라지고 사랑을 베풀어주는 조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이외에는 우리는 절대로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값싼 은혜란 없습니다. 대가를 주님이 대신 지불해 주었기 때문에 공짜이지 값싼 은혜는 없습니다. 비싼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우리를 대신해서 번제가 되어서 우리의 미운 행동을 다 매맞아 고통 당하므로 죽음으로 청산하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미운삶을 청산하고 순종과 사랑의 삶을 얻은 우리들은 정말 하나님께 감사해야 돼요. 미국의 문필가 마크 투웨이는 말하기를 “용서는 자기를 짓밟는 발꿈치를 향수로 발라주는 풀꽃의 향기와 같다.” 이렇게 용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용서는 가장 고귀한 신앙인격을 가지고 있어야만 충심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 줄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젊은 부부가 귀여운 첫딸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는데 갑자기 그 아이가 죽고 말았습니다. 어린 아이를 땅에 묻고 돌아온 부부는 슬픔에 벗어나지 못하고 자주 다투다가 미워하게 되고 네 탓이다 내 탓이다 그러다가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부는 서로 헤어졌지만 귀여웠던 어린 딸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짙어져서 가끔 묘지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어느날 부인은 부인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각각 눈물에 젖은 모습으로 그 사랑하는 딸의 무덤에 꽃을 가지고 찾았는데 부인이 무덤 가까이 갔을때 멀리 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니 바로 전 남편이었습니다. 돌아 갈까 하다가 기왕에 왔으므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한참 딸의 무덤에서 울고 꽃을 무덤에 얹어놓고 집에 가려고 돌아서 보니 얼마 떨어진 곳에 이전의 아내가 서있었습니다. 그때 남자가 다가가서 “내가 그저 잘못했어요. 성질이 못되어서 당신 마음을 상하게 했어요.” 그 여자도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남편이 “나를 용서해 주오.” 아내도 “여보. 당신이 나를 용서해 주오.” 딸의 그 무덤에서 남편은 아내를 용서하고 아내는 남편을 용서하고 용서의 터전에서 다시 사랑으로 재결합해서 그들은 부등켜 앉고 울며 말하기를 “우리는 이렇게 살지 말고 다시 사랑으로 화목하여 귀여운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하고 결합하여 그 전보다 더 밝은 생활을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없는 사랑은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 용서는 값없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돼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용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4. 고난과 감사의 갈등
넷째로, 고난과 괴로움을 주시면서 감사하라는 모순과 갈등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병들고 고통당하고 괴로움이 다가오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런 갈등이 어디 있습니까?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나와야 될것인데 그것도 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하니까 우리가 굉장히 갈등을 느낍니다. 내 생애속에 이런 고난과 괴로움이 있는데 왜 나에게 감사하라고 합니까?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에게 팔려서 종살이 10년에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 3년을 하는데 이러한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이 감사하라. 그런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성경에는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약에 있는 감사 제물이 있습니다. 감사제.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고통과 괴로움이 있을 때에도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셔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는 제사인 것입니다.
시편 107편 21절로 22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찌로다"했으며
시편 50편 14절로 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는 감사할 수 없을 때 감사하라 하니까 굉장한 마음에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감사 제삽니다.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온전한 감사 제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 생활에 고통과 원망이 있을때 감사할 수 있나요?
그러나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했었으며
로마서 5장 3절로 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날 위하여 고난 당하신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볼때 눈물을 흘리며 나를 이처럼 사랑해 주시니 주님께서 끝까지 버리지 않고 돌보아 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고난도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주시는 것을 믿게 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고난에 있으면서 감사 기도를 드릴수가 없습니다. 신앙이 매우 돈독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청년은 길을 가다가 인도로 뛰어 들은 자동차에 치여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몇차례 수술 끝에 다리를 절단하게 되자 그는 깊은 절망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청년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목사님과 성도들이 병문안을 다녀 갔습니다. 그들은 청년을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었습니다. 그 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청년은 그 말씀을 들을때 마음에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 다리는 걷고 뛸수 있는 성한 다리였는데 그러나 지금은 다리가 잘려서 불구자가 되었는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웃기는 소리 하네. 자기들은 다리가 성하니까 저런 말하지. 다리가 잘려져 병신되면 그런말 하겠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나를 이렇게 박대하실까?” 그는 굉장한 갈등을 느꼈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해야 되겠는데 자꾸 목사님은 와서 감사하라 하니까 그 마음에 갈등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고 “주님! 주님이 십자가에서 날 위하여 몸찢고 피흘려 죽으셨으므로 주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한 줄 압니다. 내 다리가 잘려진 것도 주님의 사랑 가운데 한가지 계획이 있는 것을 알고 나는 모르지만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신앙심이 좋은 사람이므로 기도하고 고난에 대한 원망과 반발심을 누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고난 당하신 십자가 예수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아멘하며 억지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청년은 얼마후 수술 경과가 좋아 퇴원을 하게 되었지만 고무다리를 달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결국 신학을 공부하며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로 자원하여 아프리카의 한 식인종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가 나타나자 식인종들이 좋은 먹이가 왔다고 “오늘은 흰고기 먹어 보겠다. 지금까지는 까만 고기만 먹었는데 이제는 흰고기 먹겠다.” 달라들어 가지고 잡았습니다. 잡아가지고서 축제를 열고 그를 요리해 먹으려고 할때 그가 다리를 고무 다리를 탁 떼가지고서 탁 던졌습니다. 식인종들이 보니까 다리를 떼면 피가 나와야 되겠는데 피가 한방울도 안나오거든. “야이~ 희안한 백인이다. 사람이 아닌가 보다. 다리를 떼었는데도 피가 안나온다.” 그리고 이 청년은 “내 다리를 한번 먹어 보시고 맛이 있거든 나를 잡아 먹으시오.” 그래서 달라 들어서 그 고무 다리를 씹어 보니까 질기고 맛도 없거든. 그래서 그들이 모여서 “아~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구나. 우리 동네에 신이 찾아 왔다. 다리를 잘라 내어도 피 한방울도 안나오고 그 다리는 사람의 다리가 아니라 먹어도 아주 맛도 없고 질기다. 이분에게 우리가 잘못했다가는 큰일나겠다.” 모조리다 엎드려서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매 이분이 그들을 선도하고 전도해서 모두다 예수를 믿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시는 사람 잡아먹지 않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고 말은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자기의 숙소에 들어와서 무릎을 꿇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자동차 사고를 내 다리를 잃은 것을 너무나 너무나 감사합니다. 내가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잃어 버리지 않았지만 오늘 백인축제에 고기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리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나도 살고 저 수많은 식인종들을 다 회개시키고 예수 믿고 구원받게 했으니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는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현실만 보지 먼 장래는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계획할 때 먼 장래를 보고 계획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손해되나 장차 이익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괴로우나 장차 즐거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한없는 고통과 괴로움이 있었으나 그 고통과 괴로움 저 건너편에 수많은 인류를 구원하고 그리스도가 마귀를 이기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보좌 우편에 앉을 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십자가는 이러한 갈등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결론>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갈등과 모순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과 감사를 통하여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속죄제물, 속건제물, 화목제물, 번제물, 감사제물이 되셔서 갈등과 모순에 꽉 들어찬 우리의 삶을 치료하시고 제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는 우리의 매일매일 다가오는 열풍같은 마음에 갈등을 이길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갈등, 우리의 갈등을 십자가에서 너무나 아름답고 조화롭게 주님께서는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이루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도 이루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가슴 활짝펴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서서 매일같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수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고 허물많은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려고 하는 그 갈등속에 우리는 소멸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 모든 갈등을 모두 해소하고 승리를 갖다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 이외에는 우리에게 도무지 구원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종교도 어떠한 수양과 도덕도 노력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질풍같은 이 갈등을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선과 악의 갈등이며 소망과 절망의 갈등이며 의와 죄의 갈등이며 더러움과 거룩함의 갈등이며
성공과 실패의 갈등이며 이런 갈등의 광풍이 우리의 가슴속에 휘몰아쳐오고 우리 가정과 생활에 휘몰아쳐 오는데 이 갈등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 주는 이가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우리의 잘못을 대신 받아 심판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또 그를 통하여 용서해 주시므로 우리는 용서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갈등이 해소되고 구원을 받게 됨을 감사합니다.
아버지 우리는 평생을 예수님을 의지하고 평생을 예수님을 자랑으로 삼고
평생을 예수님만 모시고 살게 하여 주시옵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갈등은 다 조화되고
해결되고 오직 하나님의 의와 사랑으로 충만한 은혜를 받아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누가 나를 건져내라
로마서 7:24-25 / 변한규 목서
"나는 누구인가?" 물론 저마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한 사람 너무도 많습니다. 바울은 나는 누구인가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여기 '누가 나를 건져내랴' 메시지의 주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꿈을 꿨습니다. 이상한 괴물이 가면을 쓰고 자기가 가는 곳곳마다 그림자처럼, 도롱대처럼 따라 다니면서 자기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서재에 앉았을 때도 그 괴물이 괴롭히고, 백화점에 갈 때에도 그 괴물이 괴롭혔습니다. 식탁에 앉아도 잠자리에 누워도 그 괴물은 떠날지를 모릅니다. 너무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네가 누구냐 외치면서 그 괴물의 가면을 벗겨버렸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가면 속의 얼굴은 바로 자기의 얼굴이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괴물이 누구입니까? 바로 납니다. 그러니 도대체 나는 누구냐 묻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답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하나님의 형상인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성경의 시인들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시 139:13).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 94: 9).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다윗은 사람이 무엇이냐 묻고 스스로 답하고 있습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5). 그런데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내가 왜 이 모양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내 양심이 빗나갔습니다. 내가 곁길 가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텐데, 날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민이요, 설교자 변한규목사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저마다 양심이 어떠합니까? 무디어졌습니다. 때가 묻었습니다. 더러워졌습니다. 냄새나지 아니하는 양심 드뭅니다.
양심마다 화인 맞았습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인생이요, 울리는 꽹과리 인생이란 말입니다. 철학자 칸트의 말입니다. "밤하늘의 별은 오늘밤에도 반짝이건만 인간의 양심은 이미 빛을 잃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까? 어쩌면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제 본문을 보십시다. 바울의 발견한 나는 누구인가?
첫째 곤고한 사람인 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24). 여기 '오호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너무 슬플 때에 내는 절규입니다. '아하 슬프다' 뜻이요, '애달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나는 누구냐' 묻고 스스로 답하기를 '나는 슬픈 존재다, 나는 애달픈 존재다.'
고 절규했다는 말입니다. 본문은 바울의 오호라 고백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구로자기 목사는 본문을 주석 하면서 절망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가슴을 찢는 부르짖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곤고한 사람이 무엇입니까? 비참한 사람을 뜻하고 너무 불쌍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를 태평한 사람, 혹은 대단한 사람으로 평가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경고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1995년 1월 17일 화요일 아침 5시 46분 일본 고베시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5,502명의 인명이 피해를 입었고 79조 2천억원의 재산이 손실되었다고 보도한바 있습니다. 불과 20초동안의 지진으로 고베시는 쑥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시에 거지가 됐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곤고한 사람들이 됐습니다. 현대인들은 과학을 오늘의 복음이라고 예찬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최첨단의 과학으로도 그 지진의 피해를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곤고한 사람은 이런 뜻은 아닙니다. 여기 곤고한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많은 간고를 겪고 고난 당한 나를 뜻합니다. 바울의 고민이 어디에서입니까? 바로 곤고한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왜 바울이 고민했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두 개의 본성 때문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두 개의 나가 있습니다. 나가 있고, 나 아닌 나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내 속에는 속사람이 있고 겉사람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나가 있고 악을 행하고자 하는 나가 쌍둥이처럼 내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고 외친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십시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본래의 아담은 없고, 죄를 범하고서 떨고 있는 숲속의 아담만 있기에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너도 나도 모두 인생들이 분열되었습니다. 죄를 범하니까 죄인입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합니까? 인생은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또 죄의 싹은 사망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자문자답해보십시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까? 주님 때문에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감격해서 내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습니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까? 그래서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나 옆에 또다른 내 뜻대로 살고자하는 나가 소리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외치면서 그 짐을 예수님께로 가져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망의 몸인 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여기 사망의 몸이 무엇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모습을 뜻합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성도여,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이 법칙은 누가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어김없이 죽습니다. 확실히 죽습니다. 이 죽음은 과학으로도 변개시키지 못합니다. 철학으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죽음만은 내 몫입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저도 때가 있습니다. "낳을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느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양귀비 미인도 얼굴이 쪼그라졌고, 항우장사도 무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사 40:6)이니라.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허망하지 않습니까? 누구를 두고 주신 말씀입니까? 저를 두고 주신 말씀이요, 성도님들을 두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 까? 장례예배를 드리려고 때때로 병원 영안실을 찾아가곤 합니다. 한국 최첨단의 의료시설이 있고 고명한 의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놀랐습니다. 수십 개의 지하 영안실이 초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훈을 얻었습니다. 치료는 물론 의사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의사나 병원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영력과객이요, 유수인생이며, 운무인생입니다. 시인 괴테가 물었습니다. "인생아 네 나이 몇이냐" "사람의 산 나이는 사람의 나이고, 짐승으로 산 나이는 짐승의 나이다." 애굽왕 바로도 야곱을 향해서 물었습니다. "네 인생이 얼마뇨" 야곱이 답했습니다. "내 연세가 얼마 못되나이다." 우리도 조용히 자신을 향하여서 물어야 합니다. 네 연세가 얼마냐 인생이 무엇입니까? 사망의 몸입니다. 몸이란 마르는 풀이요, 죽음에 이르는 질병입니다. 병없는 몸을 보았습니까? 그래서 성경의 시인이 탄식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 90:10)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명을 한 정점, 잠간 자는 것, 티클, 풀이요, 꽃이라 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듭니다. 바울의 탄식이 무엇입니까? 오호라 탄식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누가 인생의 곤고에서 건져줍니까? 누가 인생의 사망에서 건져주십니까? 누가 내 눈물나는 고통에서 건져냅니까? 누가 내 문제에서 나를 건져내 줍니까? 시저가 아닙니다. 나폴레옹도 아닙니다. 공자도 아니요, 석가모니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뿐입니다. 그래서 죽음에도 역설은 있습니다.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 임종시에 성도들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 ♬ 온 세상 날 버려도 주예수 안 버려 ♬ 사랑하는 성도여, 지금도 우리 모두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구원받아야 할 나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꿈속에서라도 외칠 말이 있습니다. '건져내랴' 뜻이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루세타이란 단어인데 적군의 포로가 되어 있는 전우를 달려가서 구출하는 병사의 행동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원을 부르짖는 인생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누가 건져내랴'고 말한 것은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소개할 목적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냅니까?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초급 장교 한 사람이 나쁜 친구들의 꼬임에 빠져서 놀음을 했습니다. 빛을 많이 지고서 백지에 기록을 해보니 갚은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계산서 밑에 '누가 이 많은 빚을 갚아줄꼬'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자살을 하려고 권총에 탄환을 장전했습니다.
그리고 순간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알렉산더 장군이 밤중에 막사를 순찰하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서 권총은 회수하고 '누가 이 많은 빚을 갚아줄꼬' 끝에다가 '알렉산더'라고 사인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장교가 눈을 뜬 다음에 알렉산더의 사인을 보고 너무나도 감격했습니다. 다음날 알렉산더가 그 빚은 다 갚아주었기에 이제 그 장교는 죽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갚을 수 없는 1만 달란트 빚는 자들입니다. 여기 1만 달란트 빚이 무엇입니까? 죄의 삯입니다. 죄의 삯인 사망의 빚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빚을 다 갚아 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할 때에 어떻게 합니까? ♬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 그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이수 저수 별수 없다. 예수가 상수다" 예수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할 나들입니다. 대통령도, 억만장자도, 예수 믿지 아니하면 지옥 갑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자에게만 주시는 영원한 선물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공짜로 얻고(요 3:16) 구원을 선물로 줍니다(요 3:16)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인도에서 선교하는 선교사가 예수 믿기로 작정한 인도인에게 물었습니 다. "예수 믿는 소감이 어떠한지요?" 그때 초신자는 몸을 구부리고 땅바닥에 나뭇잎을 모아 동그라미를 만들더니 그 가운데 벌레 한 마리를 넣고 불을 부쳤습니다. 삽시간에 나뭇잎이 타고 벌레는 불구덩이 속에서 꿈들거리면서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일 때 그는 손으로 벌레를 잡아 건져내면서 "선교사님, 예수님은 저를 이렇게 구원해 주셨서요"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새성전 입당을 앞두고 숨가쁘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하면 네가 살고 내 믿음이 성장하고 전도하면 교회가 부흥하고 가정이 축복을 받습니다. 양이 젖을 짭니까? 목자가 젖을 짭니까? 목자는 양을 토실토실하게 기르기만 합니다. 젖은 양이 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전도하지 않아도 좋겠습니까? 누가 새성전의 넓은 좌석을 넘치도록 채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전도는 우리의 몫입니다. 지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이 언제 다하는지 모릅니다. ♬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나는 누구입니까? 알 수 없는 인생, 미지수의 인생입니다. 하룻 동안에 실패할는지, 도적을 만날는지, 가스사고 자동차사고를 만날는지, 수치를 당할는지, 눈물을 흘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여기에 해당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리니 바울처럼 외쳐야 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 기도하면서 찬송하면서 바울처럼 감사하리로다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은혜 받은 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그 은혜를 감사하는 또 감사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