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일제의 강점을 민족의지로 저항한 그 3·1절이 금년으로 80주년을 맞이하였다.
"조선독립만세"가 조선 땅 온누리에 메아리치던 그 3·1절 운동이야말로 모든 계층의 이해를 뛰어넘어 일제와 세계에 선언한 전 민족의 해방 함성이었다. 3·1운동이 있었기에 일제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일제억압속에서 숨이 막혔던 음악계도 민족 음악 부흥운동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그때 음악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까지 한번도 조명되지 않았던 그 시기에 음악인들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작품으로 투영되어 역사화시켰을까?
먼저, 주목해야 할 음악인들이 있다. 전국의 기생들이 그들이다. 통영의 예기 조합 기생들은 통영장날(4.2)에 6~7천명이 참가한 "대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1운동 직후 이들이 체포되어 6개월~1년형을 선고받고 부산 감옥에 유치된 바 있다. 이들은 민족대표 33인을 상징하려고 33명의 소복입은 낭자군을 앞장세워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어 통영 시내를 다니면서 목터져라 불렀던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또, 진주에서도 그러했다. 진주는 지금도 의기(義妓)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를 지내는 곳이다. 논개(論介)의 다른 이름이 의암(義巖)이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에도 진주목 관기였던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강낭콩보다 더 푸른 남강에 몸을 던져 민족적 충절을 세운 곳이 진주 아닌가. 그 진주에서 '기생 독립대'를 만들어 3·1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수원기생조합 일동들도 경찰서 앞에서 김향화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부른 운동이 일어났었다. 이들 기생들 모두는 일제하에서 인권유린과 성의 유린을 당하고 있었던 처지이다. 조선시대와 달리 1908년 일제 통감부의 통제속에서 경시청이 주도한 창기조합시대는 한일합방이후 1913년에 기생조합시대가 되었다. 다동 조합이나 광교조합이 그것이다.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일본식의 권번(券番, 칸반)을 개편시켜 전국적인 조직체를 구축한 바 있다. 일제의 기생정책은 음흉하기 그지 없었다. 역사적인 한국예술을 권번화시킴으로써 기생과 그 예술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게 했던 일제의 문화분리정책이 주효했었으니까. 국민들에게 자연스럽게 생긴 아프고도 슬픈 도식, 곧 '기생과 국악소리와 춤은 술과 성의 도구화에 다름 아니다'라는 식의 도식이 바로 일제의 문화분리정책의 결과였다. 기생조합이나 권번시대의 기생들은 요즈음 같으면 전천후 탤런트들이었다. 어느 한 분야의 탤런트가 아니고 민요, 가곡, 가사, 가야금, 양금, 장고, 정재, 민속춤 등 소리와 악기와 춤을 철저한 통합적 학습체제에서 익힌 종합예술가이자 재색까지 갖춘 만능 탤런트들. 그 재능과 감성을 지금도 따라갈 수 없었던 그들이 전국에서 3·1운동을 온몸으로 펼치고 있었다.
물론 3·1운동 현장에 기생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안기옥(安基玉), 박동실(朴東實), 김세형(金世炯) 등이 있다. 안기옥은 3·1운동 당시 반일 전단을 인쇄하고 시위대에 뛰어들어 그 전단을 뿌린 혐의로 6개월간 징역살이를 한 가야금 산조의 대가였다. 안기옥은 1894년 5월 29일 전남 나주군 남평면 대교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74년 향년 81세로 삶을 마감한 만능 예술가였다. 그의 부친 안영길은 신청(神廳)에서 풍물대 상쇄잡이와 장구와 피리 명수였다. 안기옥 역시 피를 못 속이는 만능 예술가이었다. 비록, '광대놈'소리를 고통스럽게 들으며 일제 강점하를 살아갔을지라도, 그 고통은 전통 음악인들 모두가 그러하듯 2중적인 고통이었다. 하나는 일제가 민족문화를 치졸하게 파괴시키는 시대속에 그 예술을 목숨처럼 지켜야하는 고통이요, 또 하나는 우리 사회가 이들을 여전히 '몹쓸 놈- 몹쓸 문화'로 천대시 했을지라도 '생명같은 예술'로 발전시켜야 했던 고통이 그것이었다. 안기옥은 7살 되던 1900년에 마을에 들어온 광대패 공연에서 김창조를 만나 운명적인 자기 삶을 내다보았다. 김창조(金昌祖, 1856∼1929)는 한국 기악곡의 대명사인 가야금 산조를 창조한 음악인이었다. 가야금 산조는 김창조만 만든 것은 아니다. 한숙구(韓淑求)도 만들었고, 충청도의 박팔괘(朴八卦)도 각각 만들었다. 그러나 김창조가 만든 가야금 산조가 한국 근대 음악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산조는 안기옥을 비롯하여 최옥산·한성기·한수동·김죽파에게 전수되어 오늘에도 계속 '유파'가 태어나 산조시대를 열어간 산맥으로 만들어간 대부였다. 또, 김창조의 가야금 병창은 오수관과 이소향에게 이어졌고, 그의 피리는 이일선에게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열려진 가야금산조시대는 거문고 산조, 대금산조 등 모든 악기의 산조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안기옥 부친 안영길은 장남 기옥이가 음악가로 나아가려는 뜻을 처음엔 반대하였지만, 그 뜻이 너무 간절했으므로 김창조에게 소개하기에 이르른다. 김창조와 안영길은 서로 뜻을 통하는 사이였다. 그는 김창조로부터 가야금뿐만 아니라 가야금 병창과 판소리도 함께 학습했다. 그 당시 모든 음악인들은 성악과 기악 그리고 춤을 통합하는 '일가(一家)'교육체제 속에서 학습했다. 22살 되던 1915년에 김창조를 따라 광주로 이사온 안기옥은 광주 무등사에서 산조를 완벽하게 전수를 마쳐 홀로서기를 했다. 그는 백낙준(白樂俊)을 찾아 거문고를 학습했다. 백낙준은 거문고 산조를 창시한 이 분야 대부였다. 4년동안 그 공부를 마친 안기옥은 26살 되던 1919년에 광주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자전거를 타고 독립선언서 만 여장을 만세 시위대에 뿌렸던 것이다. 그 일로 6개월간 감금되었던 그가 석방되면서 그의 항일사상이 더욱 강렬해 졌다. 다른 한 편으로 권번을 꾸리기도 하고, 또 정남희·김종기·한홍도·한홍매 들에게 가야금과 거문고를 전수시켰다. 33살 되던 1926년에 광주시청에서 일본을 환영하는 행사출연을 요구 받았지만,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거절한 직후 일경에게 체포된 안기옥은 2년 유기형을 언도받았지만 그를 아끼던 유지들의 노력에 의해 3개 월만에 석방되었다. 그는 이후 37살 되던 1930년에 목포 협률사를 조직하고, 49살 되던 1942년에 이화중선·유대복·한성준 등과 함께 일본 방문 공연단을 조직하였을 적에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박동실은 1987년 9월 8일 전남 담양군 객사리에서 태어난 판소리 서편제의 대부이다. 9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판소리 공부를 시작한 그는 15살 되던 1911년에 원각사에 진출하였고, 1921년(25세)에 광주 협률사 재조직시 단원으로 활동하며 순회공연을 다녔다. 1928년 (32세)부터 오케 레코드사에서 녹음되어「흥보 치부가」음반이 발매될 정도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42살 되던 1938년부터 5년동안 그는 일대 전화기적 삶을 담양에서 보냈다. 그의 둘도 없는 후원자였던 대부호이자 동경제대 출신 박석기를 만나 창작 판소리 시대를 열어갔기 때문이다. 박석기 또한 음악실력이 만만치 않은 재사였다. 거문고 산조 창시자인 백낙준한테 거문고를 배우고 오늘날 국가로부터 무형문화재 제 16호로 지정받은 그 유명한 한갑득에게 거문고 산조를 전한 장본인이 바로 박석기였다. 한갑득(1919~1987, 광주 출생)이 박석기 문하에 입문한 것은 이보다 앞선 1934년이었다. 박석기는 또한 광주극장에서「춘향전」을 주관(1939년 여름)하여 성공했던 사람이기도하다. 한국음악은 한 시대의 상처를 다스려주었던 민족의 언어이자 영혼이었다. 1938년, 박동실과 함께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초당을 짓고, 박동실은 소리꾼들 지도선생으로 나섰다. 그는 여기에서 임소향, 김소희, 한승호, 박귀희, 김동준, 박후성, 한애순, 장월중선, 김녹주, 임춘앵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판소리와 여성 국극의 거목들을 가르쳤다. 이때 배운 사람이 무려 30여명이었다. 당시 그들은 판소리 지망생들이었다. 그는「춘향가」·「심청가」등 5마당만 가르친 것이 아니다. 박동실과 박석기는 이곳 지실마을에서 세상을 등지고 노래나 부르는 현실도피의 한량이 아니었다.
역사 앞에 살아있었던 것이다.
바로,「유관순 열사가」,「안중근 열사가」등 '열사가'('역사가' 로도 알려졌다)를 만들어 이들에게 비전(秘傳)시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열사가는 일제에 항거하여 민족정기를 혼불처럼 일으킨 유관순·안중근·윤봉길·이준 등 네 열사와 김유신과 이순신 장군 등 민족영웅의 일대기를 노래한 창작판소리이다. 일제 강점 하에 암울하게 살아가는 민족에게 이들 열사와 영웅들을 소재로 창작판소리를 만들어 희망을 주려했던 그 뜻이야말로 거룩하지 않은가. 창작 판소리 역시 1908년 인산인해를 이루며 공연한「최병두타령」이후의 전통이 민족적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바로,「유관순 열사가」는 3·1운동의 상징 유관순의 일대기이다. "때는 1904년 국운이 불행하여 조정은 편벽되고 왜적이 침입하니"를 아니리로 시작하는「유관순 열사가」는 "때는 벌써 2월 그믐, 밤이 적적 깊었난디"를 자진모리로 몰아가면서 "날이 차차 밝아지니 음력 삼월 첫날이라. 아오내 장터 네거리에 십육세 어린 처녀가 …태극기 높이 들어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세 천지를 뒤덮는 듯"으로 이어지며 박진감 넘치는 구성과 극적 사실에 호흡하는 장단의 안배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그「유관순 열사가」를 박동실이 만들어 수많은 명창들에게 전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사실이야말로 역사적이랄 수 있다. 현재에도 3·1절이 되면 파고다 공원에서 그 열사가를 불러 그때의 감격을 되살리는 명창이 있다. 장월중선의 딸이자 현재 국립창극단 단원이고, 남도 예술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KBS국악 경연대회에서 판소리 분야 대상을 받은 명창 정순임이 그 이다. 그는 파고다 공원에서 이번 3·1절 때도 자원으로 열창을 할 것이다.
그렇다고, 3·1운동이 전통음악인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작곡가 김세형이 그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김세형은 1904년 태생이므로 현재 유일하게 95세로 생존한 음악가이다. 김세형은 일제 강점 하에 작곡 전공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서부대학에서 석사학위로 졸업한 국내 최초의 전문 작곡가이고, 1927년 '평양무오축구단' 주장으로 경평(경성·평양)축구대회를 이끈 스포츠맨이자 아주 독실한 기독교신자이다. 또, 29살 되던 1932년에 교향시 「오셀로」작곡, 31살 되던 1934년에 조국독립의 희망을 바라면서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다 주려고 민족 어법으로 작곡한 「뱃노래」를 내놓았다. 그는 또한 1935년에 조선독립운동단체이었던 흥사단(안창호 단장, 국내단체가 수양동우회)의 단가를 작곡하였기 때문에 귀국시부터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끊임없이 감시당했으며, 그 일로 해방 이후까지 악단의 검은 손 대부였던 현제명과 그 일단에게 고통을 받았던 인물 아니었던가. 그러면서도 신앙으로 초지일관 흐트러지지 않은 체, 오늘에 이르러 더욱 역사의 빛남을 지켜보며 추앙받는 그 음악가가 3.1운동때 무엇을 했단 말인가.
김세형의 민족적 뿌리는 바로 3·1운동에 있었다. 16살 되던 1919년에 그는 평양숭덕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안창호 선생이 지은「애국가」를 부르며 그는 시위대에 뛰어들었다. 김세형은 광성고보의 안익조(안익태의 형)·숭실중학의 김영제·숭덕고보의 이기철 등 4명이 모여 일주일 동안 제2차 독립시위계획을 모의하여 10월 10일 학생독립운동 주동자로 나섰던 것이다. 1년동안 일경을 피한 김세형은 이후 음악가로 자신의 삶을 불태워갔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일제강점하에 3·1운동을 체험한 세대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처럼 민족윤리성이 강한 음악가로 이후의 삶과 예술에 깊이 자욱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민족의 역사적 삶이 무엇인지 오늘 우리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통화기금(IMF)시대를 (극복하고) 또 다시 일어서는 민족이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