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시학(2).hwp
현(玄)의 시학(2) 작품분석과 감상
3. 작품분석과 감상-김현승 ․ 김지하 ․ 릴케의 시
3.1. 검은 빛 外 / 김현승
노래하지 않고,
노래할 것을 더 생각하는 빛.
눈을 뜨지 않고
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 빛.
꽃들의 이름을 일일이 묻지 않고
꽃마다 품안에 받아들이는 빛.
사랑하기보다 사랑을 간직하며, 허물을 묻지 않고
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
모든 빛과 빛들이 반짝이다 지치면,
숨기어 편히 쉬게 하는 빛.
그러나 붉음보다도 더 붉고
아픔보다도 더 아픈,
빛을 넘어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
- 「검은 빛」 전문
▣ 분석과 감상
玄은 말그대로‘검은 빛’이다. 이 경우‘검다’와‘빛’은 상호 모순 관계이다. 그러나‘검다’와‘빛’의 사이 영역을 이해하는 것이 이 시의 관건이다. 그런 점에서“시는 심연을 응시하는 결정적인 시선”을 의미한다. 1연에서 검은 빛의 특징은‘생각하는 빛’에 있다. 그 빛은 감정을“노래하지 않고,/노래할 것을 더 생각하는 빛”이다. 그런 노래(의 빛이)야말로 현존재에 다름아니다. 즉 노래를 통해 존재는 개방되고 존재가 이미 곁에 와 있는 것이 된다. 이때 존재의 빛은 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니라,“고요히 감고 있는”것이다. 이렇듯 고요히 눈을 감고 침묵을 유지하며 그 빛의 소리를 들을 때, 玄의 세계는 더욱 잘 드러나게 마련이다. 존재의 소리를 듣는 이가 시인이라면, 그는 2연에서“꽃들의 이름을 일일이 묻지 않고”명명 이전 어둠의 빛을“꽃마다 품안”으로 받아들이며, 꽃의 소리를 듣기에 부심한다. 이 경우‘받아들인다’는 것은 간직하고 보존한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작품을 보존한다는 것은 작품을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에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그것은 더욱 유의미한 것으로 작용한다. 하여 3연에서 시인은 인간과 우주의 비밀인“사랑을 간직하”는 자로 거듭나며, 구태여 허물을 묻거나 말하지 않고,“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의 그늘을 되레 자처하고 나선다. 이렇듯 玄은 세계의 비밀을 깊이 간직하고 은폐하는 특징이 있다. 4연에서“모든 빛과 빛들이 반짝이다 지”칠 때, 이를 다시 숨기어 편히 쉬게 하는 빛”, 즉“온전한 사라짐에 의한 온전한 드러남” 의 특장이 곧 玄의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검은 빛은“모든 빛에 지”쳐 스러져 분산되면서도 모든 것을 통일하는 빛이라는 사실.(“모든 빛깔에 지친/너의 검은빛―통일의 빛”-김현승.「재」) 이상의 각연은 마지막에 와서 그 본질과 속성이 집약되어 있다. 말하자면 빛과 어둠 사이에 위치한 현은 단순한 수사(修辭)나 포즈가 아니라,“붉음보다도 더 붉고/아픔보다도 더 아픈”고통의 실재(實在)라는 점이다. 문제는 그 고통의 어두운 빛이야말로“빛을 넘어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이라는 사실. 이는 생의 환희이자 황홀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현의 이미지와 사유의 깊이는“존재의 배후에 깊은 표현 정지의 無를 보는 일(이며), 형상을 깊이 포착하는 일”이다.
3.2. 無等茶
가을은
술 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십일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 분석과 감상
무등차(無等茶)는 일종의‘무(無)’의 세계다. 그것은 물의 예지와 향기를 크게 닮아 있다. 이런 물빛과 물의 향기는 깊어가는 가을이 아무래도 제격이다. 하여 시인은 저혼자 차를 끓여 마신다. 그리고는 가을을 음미한다. 가을은 높고, 깊고,“상(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공존해 있다.(“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김현승,「가을의 향기」) 향기의 이름으로 주어진 가을은 이렇듯 영성(靈性)을 환기한다. 그 가을날의 향기가 주어진 것은 물론 처음부터는 아니다. 그것은“갈가마귀의 울음”과“씀바귀”, 그리고 무엇보다“남쪽 십일월의 긴긴 밤을”홀로 감내해야 가능한 선물이다. 그 無味의 味를 드러내는 한 잔의 차가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것은 이런 배경과 정서를 저변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갈가마귀’에서 예사소리‘ㄱ’은 된소리‘ㄲ’보다 어둡고 깊고 고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점이다. 그런가하면,“갈가마귀 울음에/산들 여위어 가고,/씀바귀 마른 잎에/바람이 지나는”의 구절에서 엿볼 수 있는 표현의 미학은“갈가마귀 울음”과“씀바귀 마른 잎”이 환기하는 일말의 우수(憂愁)와 어둠의 현상(학)에 있다. 하지만“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라는 대목은 그런 우수와 어둠을 일거에 걷어냄은 물론, 변화의 조짐과 형상의 방식이 독특하다. 이는 곧‘액체의 기화’를 말한다, 묘계현화(妙契玄化, 묘하게 서로 맞으며 깊고 오묘한 것으로 화하다)’란 게 이를 두고 일컫는 것인가? 다른 한편으로, 시인에게 기나긴 밤의 시간과 어둠을 홀로 견디는 지혜는‘유(有)’와‘탁한 술’이 아니라‘무(無)’와‘맑은 물’에 있다. 아니, 투명한 (슬픔의) 시선에 있다.“유현(幽玄)한 태도로 사물을 바라보는 게 적(寂)”이라면, 이 시에는 그런 유현한 취(趣)와 아름다움이 스며들어 있다.“갈가마귀 울음에/산들 여위어 가”는 소리를 전해 듣고,“씀바귀 마른 잎에/바람이 지나는”소리를 전해 들을 수 있는 게 또한 그러하다. 동양적 사유에서 無와 玄은 내적으로 연계된 셈이다. 무의 고독과 그 무화(無化)는 바로 이 시의 경계를 드러낸다.
3.3. 산까마귀 울음소리
아무리 아름답게 지저귀어도
아무리 구슬프게 울어 예어도
아침에서 저녁까지
모든 소리는 소리로만 끝나는데,
겨울 까마귀 찬 하늘에
너만은 말하며 울고 간다!
목에서 맺다
살에서 터지다
뼈에서 우려낸 말,
중에서도 재가 남은 말소리로
울고 간다.
저녁 하늘이 다 타버려도
내 사랑 하나 남김없이
너에게 고하지 못한
내 뼈속의 언어로 너는 울고 간다.
▣ 분석과 감상
이 시는 진정한 언어와‘말함(Sagen)’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소리와 친연성을 지닌다.‘산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바로 그것이다.“목에서 맺다/살에서 터지다” 마침내 뼈에서 우러낸 말소리, 그 중에서도저녁 하늘(마저) 다 타버리고 난 뒤 재의 말소리. 그‘재’야말로‘무(無)’이자‘전부’의 세계가 아니던가. 즉 언어의 언어다. 겨울, 찬 하늘의 산까마귀 울음은 하나의 사물이 빚어내는 단순한‘울음’이 아니라, 깊은‘울림’을 말한다. 울음이 지극하면‘울림’으로 화하는 법이다. 울음의 끝에는 기실 울림의 현이 있다. 玄의 세계는 이렇듯속의 언어이자소리의 언어이며,현의 언어이자 시인의마지막 언어이기도 하다. 그 마지막 언어가 위치하는 지점이 다름아닌 산까마귀 울음소리인 것이다. 하여 까마귀는까마귀의 까옥거림 이상의 것이 되며, 저녁 하늘 산까마귀의 울음소리는, 순간 밝은 어둠으로 化하게 된다. 다형의 시에는 유독‘까마귀’가 많이 출현한다. 그것은 무채색에다 거친 목소리의 새이긴 하지만, 심연으로서 현의 이미지와 정신 세계를 표상한다.“모든 소리는 소리로 끝나”지만, 겨울 하늘‘까마귀’만은“말하며 울고”간다. 이러한‘말함’의 존재와 내면의 깊은 울림은 절대자인 신(神)에게 고하듯 제의의 형식을 지니기도 한다. 문제는 산까마귀 울음소리가“고하지 못한/뼈속의 언어”라는 사실. 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고할 수 없는, 아니 고하지 못한 뼈의 말이야말로 광물질의 언어, 즉 보석이다. 이런 경계와 차이의 언어가 시적 언어이자 현(絃/玄)의 세계다.
3.4. 절대 고독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 준다.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내고 만다.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와 함께
▣ 분석과 감상
두루 아는 바와 같이, 다형의 시에는‘고독’이란 말이 빈번하게 제시되어 있다.「절대 고독」을 비롯해「견고한 고독」,「고독과 시」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고독은 본질적으로 고독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에서 분리되어 내면적 생활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상태 를 말한다. 그랬을 때, 시인은 더 이상 神을 상정하지 않고 인간적인 고뇌와 관련해 고독과 시를 접목시킨다. 그의 시에서 고독은심미적 체험의 순간이면서 동시에 심미적 대상이다. 그것은신적인 것에 대항하는 가장인간적인 것이며심미적인 것이다. 인용시에서 보면, 시인이 생각하는 고독이란“영원의 먼 끝”에 속한다. 이 경우 영원은 시간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 손끝의 시간을 말한다. 하여 그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빛을 잃기도 하지만, 따뜻한 체온을 느끼기도 한다. 그 손끝의 사라짐과 나타남, 시간과 영원의 사이에 玄이 자리한다. 그리고 그‘사이 공간’으로서 고독은 언어와의 결별을 통해 가능하며,(“내 언어의 날개들을/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내고 만다.”) 이는 다시“주름 잡힌 손”으로 모아진다. 손의 접힘과 펼침으로서 주름은 시간과 영원의 미학이다. 그리고 그 주름은 현의 다른 이름이다. 현은 무수한 주름과 주름들로 이루어져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하여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손끝에서 인간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손끝’은 물리적인 극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극이기도 하다. 손끝에서 감지되는 자연과 우주의 미세한 움직임은 그야말로 언어로 규정되기 어렵다. 이런 미적 경험의 사유와 세계야말로 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지점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절대는 고독의 은유적 표현이며, 무한과 무시간성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고독 역시 시적 순간과 장소를 의미한다.
3.5. 해창에서 / 김지하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 서 있다 옛날엔 번창했던 포구 고천암 막아 이제는 폐항 돼버린 해창 통운 창고 앞에 아득하게 서 있다 한 사람은 취해 한 사람은 깨어 개마저 짖질 않고 국밥집 터엔 바람만 불고 다가서는 나를 꼼짝 않고 노려본다 멀리서 물오리들 떼지어 헤엄치고 삭은 똑딱배 물결에 흔들리고 구름 낮게 드리운 날 거기 그 자리 내가 서 있다 반쯤은 취해 반쯤은 깨어 둘로 찢겨진 채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사그라드는 노을 함께 아득하게 사라진다 짐차 떠나는 소리 차 모습마저 고개 너머 자취 없고 두 사람도 사라진다.
▣ 분석과 감상
해창(海倉)은 폐항이다. 한 때는 번창했던 포구, 한때는 백합과 고둥, 민챙이와 막둥어, 달랑게와 바지락, 갯지렁이 등이 지천에 널린 갯벌, 그러나 지금은 고천암을 막아 방조제를 만들고, 폐항이 된 것이다. 문명의 거대한 힘이 자연을 순식간 무너뜨린 것이다. 그런가하면, 바다가 육지가 만나는 연안지역을 의미하는‘해창’은 전라도 사투리로,‘일종의 경계(역)’를 말한다. 그 생명과 죽음의 땅끝에서 지금 두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아니, 아득하게 서 있다. 玄은 그런 아득하고 아슬아슬한 사이와 경계를 일컫는다. 더러는 취해 있고 더러는 깨어 있는‘해창(海窓)’은 바다가 열리는 場이자 窓이다. 이런 玄의 순간은 그 흔한“개마저 짖지 않”는다. 그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바람만”불 따름이다. 그 바람 부는“국밥집 터”는 부재의 현존으로서 하나의 심연을 말한다. 심연은 모든 것을 간직하고 인지한다. 하여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망각할 수는 있어도, 실재(實在)로서‘(빈)터’는 온전히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터-있음’이 현존재(Dasein)라면, 인간은 장소인 셈이다. 그런 자신의 실존과 대면하는 無의 장소로서 (국밥집) 빈 터는 침묵의 개가 여전히 나를 노려본다. 순간, 저“멀리 물오리들(이) 떼지어 헤엄치고/삭은 똑딱배(는) 물결에 흔들”린다. 다시 인간이 장소라면, 거기 그 자리에 서 있는‘나’는 누구인가?“둘로 찢겨진”나는“반쯤은 취해 반쯤은 깨어”있는 상태다. 이 혼돈의 시간, 노을은 스러지고 나는 아득하게 사라진다. 서 있던 익명의 두 사람도 사라지고 없다.‘서 있다’는 말이 어떤 중심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젠 그 중심마저 사라져‘허공’이라는 또다른 중심으로 화(化)해 천지간 미만해 있는 상태다. 이렇듯 현의 시학은 문명과는 거리가 있으며, 전체의 이미지와 부합한다.
3.6. 가을 날 /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분석과 감상
하이데거에게 있어 가장 탁월한‘말함’의 방식은 시지음Dichten과 사유함Denken이다. 시작(詩作)은 존재의 진리와 사유가 피어오르는 피지스(physis)의 차원이자, 세계와 대지의 투쟁을 통한‘참말(die Sage)’이다. 언어에 대한‘숙고(nachdenken)’가‘진정한 말함’의 세계로 진입해 가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뒤를 따라 사유’하는 것이라면, 릴케의 시는 말그대로 숙고(熟考)를 요한다.모든 존재를 뚫고 하나의 공간이 뻗어 있다:/세계내면공간. 새들이 날기를 멈추고/우리를 뚫고 날아간다. 아, 자라고 싶은 나,/밖을 내다본다. 그러면 내 안에서는 나무가 자란다.(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에서 보듯이, 릴케의 시는 공간, 그것도‘세계내면공간(Weltinnenraum)’을 특징적으로 드러낸다.“모든 존재를 뚫고 뻗어있”는 내면세계공간은,“마음 가장 깊은 곳의 한가운데에서 현성하고 있는 진리의 장소”를 말한다. 이는 결국 존재의 생기(Ereignis)에서 발현되는순수한 연관이나열린 장과 의미가 통한다. 새들이 날개를 접었을 때 다시 펼칠 수 있듯이, 그건 주름의 고고학이다. 한편,「가을 날」이란 제하의 시는〈주여. 때가 왔다〉는 도입부에 시상이 집약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부름(Rufen)의 시다. 주를 향한“부름은 자기 안에서 나직하고 고요하게 부르며, 부재를 향해 부르고, 존재의 가까움 속으로 도래하도록 부른다. (내면의) 울림은 부름 속에 현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인은 때(時)를 아는 자이다. 이 경우‘때’는‘詩’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時=詩). 때는, 특히 계절의 변화는 묘오한 것이다. 하여 이 시에서 여름을 지나‘가을’이라는 때가 왔다는 사실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과일들을 익게 하여 완성을 도모하고, 음미(吟味)하게 하며, 신성한 포도주에 그 맛이 스며들게 하는 힘이 있다. 물론 여기엔 여름날의 작열(灼熱)하는 태양빛이 없이는 불가능하다.여름(이) 참으로 위대했다는 고백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고통의 시간에 이어 미완의 인간이 보다 완전한 그 무엇을 향해 추구하는 때가 가을인 것이다. 이는 완미(完美)한 주에 대한 부름과 호면(呼名)이 필요한 시점이다. 가을은 말과 사물이 친연성을 지니는 때이기도 하다. 사물이 곧 존재의 언어가 되는 순간은 참으로 깊고 오묘한 데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을은‘모험’의 계절이다. 딴은‘집’과‘고독’의 계절이다. 고독한 시간, 시인은 존재의 집인 언어를 찾기 위해“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매이며 고뇌한다. 모험이다. 시간과 언어는 무엇인가? 우리가 시인의 집에 居하는 한, 예의 모험은 피할 수 없다. 그런 사유와 모험으로서〈玄〉은 더이상“잠자지 않고, 읽고, 긴 편지를" 쓰는 이에게 마침내 발견된다.
4. 玄의 시학적 의미와 과제-결론을 대신하여
그림 액자 속 부엉새의 속울음인가
나뭇가지 위에 걸린 달은 유채꽃 빛이다
통유리 너머로 바라다보이는
작은 호수,
가고 오는 길인양 놓여 있다
그 너머
자두꽃복사꽃이 절정이다
텃밭에서 물위로, 물위에서 텃밭으로
길을 오가는 백로는
숫제 말이 없다
미완의 것은 말이 없는 법
지혜를 홀로 아시는 하느님도 그런 법
실내는 장사익의 노래「찔레꽃」이 한창이다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봄날 오후, 어머니는 가고 없다
와촌면 소월리에 하루해가 저문다
-김상환,「미완의 봄, 풍경」
〈 다음 주 강의 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