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궁극적인 목표 ‘효(孝)’
‘효’는 모든 윤리의 기본이며 토대
1. 불교에서 효는 수행의 실천원리이자 궁극적인 목표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과 깨달음의 실천이다. 깨달음의 실천은 자비의 실천이며, 그 대상은 모든 생명이다. ‘자신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깨달음을 이뤄 고(苦)에서 벗어나는 것, 참다운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최상의 가치이다. 불교에서 윤리는 따로 떼어내 말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윤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는 ‘불교윤리’라는 분야의 논의가 활발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말법(末法) 시대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근기를 감안하면 보다 구체적으로 ‘불교윤리’를 논할 필요가 있다. ‘불교윤리’는 이제 사회를 이끌어가는 가치관으로서 공동체가 나아가야 하는 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잠재적인 가치를 발현해서 최상의 결과를 구현해내기 위한 실천원리로서의 ‘불교윤리’가 적극적으로 논의돼야 한다. 경전에서는 ‘불교윤리’가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 설해져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효’는 모든 윤리의 기본이며,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수행의 실천원리이자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에 비견되는 최상의 가치이다.
최상의 행복에 관해 설하고 있는 〈망갈라경〉 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를 잘 섬기고, 배우자와 자녀들을 잘 보살피며, 번뇌에 구속되지 않는 평온한 일을 하는, 이 네 가지가 최상의 행복이다.
공경할 만한 이들을 공경하고, 스스로 겸손하며, 만족할 줄 알며, 은혜를 잘 갚을 줄 알고, 마땅한 때에 법문을 듣는 이 다섯 가지를 갖추는 것, 그것이 최상의 행복이다…번뇌를 끊는 가르침을 실천하고, 몸과 마음을 닦으며, 사성제(四聖諦)와 열반을 이루는 일이 참된 행복이다.”
〈망갈라경〉에는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기반으로 한 최상의 행복을 이루는 수행들이 낱낱이 설해져 있다. 그 가운데 ‘효’가 있다. 최상의 행복,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수행의 하나로 ‘효’가 제시돼 있는 것이다. 사성제를 깨닫고 열반을 성취하는 수행의 과정과 동일선상에 ‘효’를 제시함으로써 ‘효’가 단순히 개인적인 윤리로 국한되지 않고, 최상의 수행, 최상의 실천원리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결국 ‘효’는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근본윤리이며, 결과로서의 가치인 동시에 최상의 행복을 구현하는 수행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열반을 이루는 최상의 행복과 동일한 가치로 지고의 목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잡보장경(雜寶藏經)〉 2권에서도 열반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이자 목표로 제시돼 있다.
“어떤 두 가지 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과 천상에 빨리 가서 열반의 즐거움에 이르게 하는가.”라는 제자들의 물음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첫째는 부모를 공양하는 것이요, 둘째는 성현을 공양하는 것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는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세 가지 복 가운데 첫 번째로 열 가지 선한 업을 닦는 수행과 함께 ‘효’가 제시돼 있다.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세 가지 복 가운데 첫째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 잘 공경하며, 자비심을 내어 열 가지 좋은 업을 닦아야 한다. 두 번째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며, 계를 받아 지녀 어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세 번째는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내어 인과를 굳게 믿고 경전을 독송해야 한다.”
‘칠불통게(七佛通偈)’에서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선한 업을 구족하라”고 했던 것임을 돌이켜 보면 〈관무량수경〉에서 효를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세 가지 복 가운데 으뜸으로 설하고 있는 것은, 결국 효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통하고, ‘효’는 다시 수행의 실천 원리이자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부처님께서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선생경(善生經)〉, 〈본사경(本事經)〉, 〈화엄경(華嚴經)〉, 〈불모출생경(佛母出生經)〉 등 수없이 많은 경전에서 ‘효’를 최고의 수행 윤리이자, 수행을 통해 구현할 최상의 목적으로 설하셨다.
2. 불교윤리와 효의 실천
불교에서 효는 수행 실천 원리이자 궁극적인 목표이며, 최상의 가치이다.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이룬 직후 처음 제도한 대상이 바로 생모(生母) 마야부인이었다. 그 내용은 〈불승도리천위모설법경(佛昇利天爲母設法經)〉에 상세히 설해져 있다. 마야 부인은 세상을 떠난 후 도리천에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룬 직후 도리천에 올라가 3개월 동안 생모를 위해 법을 설하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불자라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계율을 총체적으로 설해 놓은 〈범망경(梵網經)〉에서 수행자가 지켜야 하는 계율의 강령(綱領)으로 효를 설하셨다.
“그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 앉아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시고, 처음 계율을 설하시되 부모와 스승과 삼보에 효순(孝順)하며, 지극한 법(보살의 심지법문(心地法門:보살의 근본 마음에 관한 법문)에 효순할 것이니, 효를 계라 이름 하고, 계를 제지(制止;악한 일을 저절로 그치고 착한 마음을 내도록 하는 법)라 이름 한다 하셨다.”
계율은 모든 생명의 해탈을 위한 수행 생활의 규범이자, 실천 윤리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계의 근본으로 ‘효’를 설하신 것이다. 단순히 사람으로서의 도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살펴 본대로 수행 실천 윤리이자 최상의 가치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이루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지극하게 ‘효’에 관해 설하신 까닭은 무엇일까.
원론적으로 부모는 내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따라서 부모를 향한 효는 당연히 나의 근원, 생명의 근본에 순행(順行)하는 것이다. 불효는 결국 생명을 거스르는 악행이 되며, 생명을 해치는 중대한 악업(惡業)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던 근본 목적은 모든 생명의 해탈이자, 평화의 구현, 최상의 행복이었다. 그러니 불자로서 불효를 저지르는 그 순간, 그는 부처님께서 정한 불자로서 해서는 안 될 도리, 불자로서의 실천 윤리를 저버리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며. 당연히 깨달음에서는 더 멀어지게 된다. 가장 근본이 되는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며,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불자(佛子)라고 하겠는가. 그 업은 가장 지중(至重)함은 다른 무엇에도 비할 수가 없다. 사실 지금까지 불교에서도 효에 관해서는 당연히 지켜야 하는 도리 정도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출가 수행자든 재가 불자든 불교에서 가장 중하고 엄하게 지켜야 하는 십중대계(十重大戒)와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의 근본이 되는 계율이 효이며, 모든 계율을 다 지킨다고 하더라도 ‘효’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사상누각(砂上樓閣)임을 새겨야 하겠다.
3. 영원한 시대정신, 효
불교에서 ‘효’는 일관되게 최상의 가치로 제시돼 왔다. 부모란 어떤 존재일까. 내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또한 스승인 동시에 나를 낳아 준 육신의 부처님이다. 또한 우주의 근원인 범천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생생한 금구직설(金口直說)을 담고 있는 초기 경전 〈앙굿따라니까야〉 〈사브라마카경〉에서는 부모와 효에 대해 이렇게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아들들이 집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그런 가문은 범천과 함께하는 가문이다. 아들들이 집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그런 가문은 최초의 스승과 함께 사는 가문이다. 아들들이 집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그런 가문은 공양 받아 마땅한 자와 함께 사는 가문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범천이란 부모를 두고 한 말이다. 이전의 스승이란 부모를 두고 한 말이다. 공양물을 보시 받을만한 자란 부모를 두고 한 말이다.”
경전에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므로 어진 이들은 음식, 마실 것, 의복, 침상을 구비하고 문질러드리고 목욕시켜드리고 발을 씻어드려 그분들께 귀의하고 존경해야 한다.” - 〔〈앙굿따라니까야〉 1권 p.335 대림스님 역. 2006년. 초기불전연구원〕
불교에서는 이처럼 부모의 존재에 대해 단순한 혈육이나 천륜(天倫)의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나를 부처로 이끌어 주는 스승인 동시에 우주의 근원이다.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분, 즉 여래(如來)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불교를 받아들이기 이전부터 ‘효’를 시대정신으로 정립해 왔고, 이를 지켜왔다. 고구려 고국천왕 대의 유명한 재상 을파소(乙巴素)가 하늘, 단군의 뜻이 담긴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경전’이라는 뜻의 〈참천계경(參佺戒經)〉을 지었다고 전하는데, 이 경전에서 효는 이렇게 묘사돼 있다. “한 사람의 효도는 능히 한 나라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천하의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사람이 감동하면 곧 하늘 또한 감동한다.” 또한 단군이 효에 대해 설했다고 하는 단군십효(檀君十孝)는 그 끝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한울을 공경하듯이 어버이를 공경해야한다. 이것이 나라에 미치면 충성이요 효도이다. 또한 이 도리를 몸소 실천하면 한울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느니라.”
이렇게 ‘효’는 우리 민족의 처음부터 세상의 근본이치로 함께 해 왔다.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에도 ‘효’는 우리 민족을 지탱하는 근간이었다. ‘효’는 그 어떤 것에도 우선하는 지고한 도리였다. 단군부터 우리 민족의 뿌리와 역사, 정신을 담고 있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도 ‘효’가 별도의 장으로 수록돼 있을 정도이다. 일연선사는 ‘효선편(孝善篇)’을 따로 떼어 선현(先賢)들의 ‘효’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효선편’에는 노모의 권유로 출가를 하고 제자들 3천명에게 90일 동안 〈화엄대전(華嚴大典)〉을 강설함으로써 어머니를 극락왕생하도록 한 진정법사(眞定法師), 전생과 현생의 부모를 위해 인류 역사상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도량(道場) 석굴암과 불국사를 조성한 김대성(金大城), 흉년에 다리 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한 상득사지(向得舍知), 어머니를 봉양한 가난한 여인의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특히 노모의 봉양을 위해 아이를 포기하려다 석종(石鐘)을 얻고 큰 상을 받은 손순(孫順)과 운오(運烏) 부부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이 부부의 이야기는 오늘날 자녀들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바치면서도 부모의 곤궁한 사정은 쉽게 외면하는 이들을 향해 준엄한 질책을 하고 있다. ‘효’를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했던 우리 민족의 정신과 역사, 전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녀를 포기한다는 대목에서는 쉬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그만큼 우리 민족에게는 ‘효’가 지고지선의 가치이자 구현해야 할 이상(理想)과도 같은 것이었다. ‘효’가 흐려지고 실종된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효’의 복원과 계승이며, 최상의 가치인 동시에 수행의 궁극적 목표이다. 그리고 민족이 존속하는 한 영원히 함께 해야 하는 시대정신인 것이다.
도웅 스님 (춘천 삼운사 주지)
첫댓글 부모와 조상이 없으면 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보살님보다 먼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