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의 시간 / 정문숙
들녘을 지나 샛길로 접어든다. 빛바랜 양철 지붕이 덜컹거리는 정미소를 지나 친정집에 다다른다. 돌담 아래 텃밭 옆에 주차하고 집 주위를 둘러보니 사철 먹을 푸성귀를 키워낸 텃밭이 빈 몸으로 겨울을 나고 있다. 계절 따라 피고 지는 흔한 잡초도 보이지 않는다. 언 땅이 풀리면 나무들도 품을 키우고 길가의 질경이도 깜냥껏 꽃대를 밀어 올릴 텐데 헐벗은 겨울 텃밭은 영 볼품없다.
입춘 지나 우수가 되면 얼음 강이 풀리고 겨우내 쌓인 눈은 녹아 땅속 깊이 스며든다. 꽁꽁 얼었던 땅은 뭉친 어깨를 풀고 뿌리 끝마다 봄물을 흘려보낸다. 경칩이 되면 잠자던 개구리도 튀어나와 얼굴을 내민다. 봄비 내리면 연둣빛 싹은 부지런히 발돋움하고 기운차게 꽃대를 밀어 올린다. 남새들 사이 손을 밀어 넣어 한두 포기만 남기고 솎아내면 풀들은 튼실한 대를 올려 봄을 꽃피운다.
봄빛이 사방에 퍼지면 오랜 세월 터 잡은 잡초도 기세를 몰아 고개 내민다. 처음부터 빈 땅의 주인이나 진배없으니 홀대하지 않는다. 남새가 자리 잡도록 잡초를 뽑아내어도 다음 해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걸 보니 애초에 비켜줄 마음이 없음이다. 잡초는 홀로 뽐낼 뿐이지 텃세를 부리거나 위협적이지 않다. 이처럼 텃밭은 다름을 배척하지 않고 아우르고 포용하는 넉넉한 품이 있다.
배추와 무, 상추 시금치는 텃밭의 터줏대감이다. 지나가던 이 오며 가며 한 주먹 솎아도 나무라지 않는다. 애초에 나누기로 작정하고 넉넉하게 씨앗을 뿌려둔 터이다. 바람 타고 날아든 민들레 홑씨, 강아지 똥에 묻어온 풀씨, 새가 떨어뜨린 열매도 내치지 않고 품어내는 아량이 있다. 비, 바람, 햇살로 정성껏 가꾼 결실이니 풍요롭다. 봄의 빈틈을 메우는 이름 모를 야생화까지 아우르는 경계 없는 텃밭을 보면 마음의 빗장마저 허물게 된다.
집안으로 들어선다. 마당 안 담벼락 아래에는 두 평 남짓 터앝이 있다. 우리 집 식구들의 식성과 어머니의 품성도 엿볼 수 있다. 어머니 터앝에는 성장이 더디거나 남의 손이 타지 않기를 바라는 것들로 채웠다. 부추, 도라지, 토란, 머위, 가지는 가족들을 위한 어머니의 마음이다. 매년 봄 처음 올라오는 부추는 아버지 밥상에 올랐다. 보랏빛 꽃불을 켜는 도라지도 몇 해 묵혀 도라지청을 만들었다.
터앝은 텃밭보다 손이 자주 간다. 까다로운 식구들 입맛을 맞추려니 잠시도 소홀할 수 없다. 이른 아침 눈뜨자마자 시든 잎에 물을 주고 잎을 파고드는 벌레도 잡아낸다. 서로 부대끼는 것들을 솎아내어 올곧이 뿌리내리게 한다. 곁가지가 벌면 가지를 쳐 숨 쉴 틈을 만든다. 며칠 손길 미치지 않은 사이에 생겨난 것들도 기세를 더하기 전에 손을 댄다. 무시로 솟구치는 삿된 생각을 떨쳐내듯 잡풀들이 자라는지 수시로 들여다본다.
어머니의 텃밭은 사철 무언가를 키워냈다. 자식들이 한창 자랄 때는 텃밭과 터앝에서 따온 푸성귀로도 부족했다. 머위와 부추, 깻잎과 방아, 늦가을 누런 호박, 겨울 배추의 뿌리까지 텃밭은 남김없이 주었다. 물기 많은 땅에 자라던 토란은 어머니 텃밭의 주인공이다. 토란대를 잘라 말려 나물을 무쳐냈고, 껍질 벗긴 토란에 들깨 갈아 넣은 국은 어머니의 맛이었고, 우리 집만의 멋이었다.
어머니가 편마비로 남의 도움 없이는 바깥 외출이 어려워지고 나서는 터앝도 달라졌다. 계절 따라 벽돌담을 넘어가는 장미 넝쿨, 자줏빛 목단 꽃송이, 연분홍 상사화가 텃밭을 밝힌다. 어머니는 누운 자리에서 꽃밭을 보며 하루를 보낸다. 자식들이 가져다 놓은 화분에서 피는 꽃을 보며 아이들 이름을 부른다.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놀리지 않고 찬거리가 될 만한 채소를 가꾸던 땅이 일곱 남매가 드나들며 가꾸는 꽃밭이 되었다.
담장 밖 빈 텃밭은 잡초들의 세상이 된 지 오래, 튀어나온 돌 틈 사이로 비집고 나온 봄물이 흙을 두드리면 웅크려 자던 개구리도 기지개를 켠다. 풀들은 하얀 눈꽃이 흩뿌려진 흙더미를 뚫고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을 테다.
이른 봄 텃밭의 개구쟁이는 돌나물이다. 번식력이 좋아 여기저기 나뒹굴어, 하나둘 보이다가 눈 깜짝할 사이 텃밭을 뒤덮는다. 너나없이 보릿고개 넘던 시절, 보리밥에 돌나물겉절이와 된장국을 넣어 비벼 먹으면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았다.
진눈깨비 그친 겨울 텃밭에 상추 배추 시금치 쑥갓이 자라는 상상을 한다. 저마다 이름대로 뽐을 내어 자라는 닮은 구석 없는 풀들이 텃밭에서는 남새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다. 겉모양과 부르는 이름만 다를 뿐 모두 우리를 키워낸 힘의 원천이 아닌가.
겨울은 텃밭의 시간이다. 겨울 텃밭은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 품어 키워낸 것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보내는 성찰의 시간, 여름 내내 뿌리를 품어내느라 등 굽은 땅은 허리를 곧게 펴고 눕는 시간이다. 힘껏 물을 길어 올리던 뿌리도 단잠에 들고 땅속 깊은 곳에서 우렁우렁 물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꿈에서도 뿌리를 아래로 뻗어 싹 틔울 준비를 한다.
어머니의 텃밭을 보며 나의 텃밭을 둘러본다. 나와 가족들,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과 일터에서 만나는 이들, 오랜 취미인 글쓰기와 글쓰기로 인연 맺어진 사람들. 나의 텃밭에는 내가 가꾸고 보살핀 소중한 것들이 자란다. 우연과 필연으로 맺어진 사람들과 모호한 관계로 얽힌 이들도 서로 부대끼며 더불어 살아간다. 적지 않은 나이에 이르고 보니 제각각 다름을 인정하고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치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뿌린 것들로 풍성한 나의 텃밭에 슬며시 끼어든 잡풀도 눈에 띄나 거슬리지 않는다. 한데 더불어 지나는 동안 우리의 시간은 어우렁더우렁 변주하며 무르익었다. 돌보지 않아도 깊어지는 인연이 있고 잠시 스치다 멀어지는 만남도 부지기수였다. 이제는 서로의 잘잘못 가리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 그들이 있어 나의 하루는 새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하고 뜻밖의 열매도 맺으니 말 없는 응원을 보낼 뿐이다.
언 땅이 녹고 땅속 깊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머지않아 도톰한 가지마다 스며든 봄물에 연둣빛 속살을 흔들며 풀잎은 반듯한 얼굴을 내밀 게다. 누구나 손 내밀어 따 가고 반쯤 열린 문을 밀고 들어와 한 움큼 솎아 가도 손사래 치지 않는다. 퍼내어도 마르지 않고 잡풀도 보듬을 줄 아는 품이 너른, 나와 남을 가르지 않는 나의 텃밭은 사철 잎이 무성할 거다.
첫댓글 텃밭의 시간이 삶의 시간을 은유하는 말이었네요.
선생님 덕분에 등단 하고 책도 내었으니
남은 시간 나의 텃밭도 잘 가꾸어 보렵니다.
새로 태어나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도 저도 텃밭을 열심히 가꾸어 열매를 얻었으니 앞으로도 쉼없이 나아가입시다.~~^^